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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는 감격 (시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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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지상이나 방송에서 보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얘기가 부쩍 많아 졌습니다. 엊그제도 한강 대교에 어떤 사람이 올라가 자살 소동을 벌리는 바람에 많은 차량이 정체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난 몇주동안 자살 했다는 기사들이 연이어 보도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보십니까 어떤 사회학자는 문화가 발전된 사회일수록 원시적 사회에서 보다 자살 수치가 높아진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즈음 분명히 옛날에 비 하면 모든 것이 편리한 세상이 되었고, 살기 좋은 환경이 되었는데도 왜 사람들 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생명 경시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1. '살아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많은 지체(肢體)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록을 보니 몸 속에서
1 혈액(血液)은 하루에 1억 6천 800만 마일을 달리고,
2 심장은 10만 7백번 정도 뛰고,
3 하루에 뇌(腦)세포를 자그만치 700만개를 사용하고 있고 하루 동안에
4 숨을 2만 3천 40번을 쉬어야만 살아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루를 살려면 우리의 지체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말 못하는 몸의 지체들은 지금도 이렇게 열심히 뛰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 이 아닙니다.
그런데 몸의 지체들은 이렇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이처럼 제각 기 열심히 뛰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 그처럼 비겁한 일이 또 어디에 있 겠습니까 이렇게 생명은 내 자신이 느낄 수 없는 수고의 집합 속에서 이어져 나아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평소에 삶의 감격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걱정 근심이 생기면 살아 있다는 감격보다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게 됩니다. 그래서 폭음 을 하고, 마약을 투여하고, 허랑 방탕하면서 육체를 학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탈을 얻어 죽게 되었을 때에, 생명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부터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감격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하지만 가장 어리석은 것은 잃은 후에야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몇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건강을 잃은 후에 라야 건강 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되고, 사랑을 잃은후에라야 그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다는 말입니다. 건강한 동안에는 건강에 대하여 감격할 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랑에 대하여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일단 잃어버린 후에 라야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아쉬워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움 일임을 우리는 평소에 깨닫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 체가 감격스럽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갔다 온 사람이라야 아침이 되어 또 하루의 태양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요즈음 건강한 사람보다 도리어 병원의 입원 중에 있는 환자들에게서 더 반가 운 얼굴을 만나 보게 됩니다. 대수술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 온 사람들일 수록 목사의 방문을 더욱 더 반기는 것을 보면, 살아 있다는 감격은 누구나 갖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는 대부분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 있다는 감격을 갖지 못하고 원망, 시비, 짜증, 싸움, 가출,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2. '살아 있다'는 감격을 가지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중에 사람은 최대의 걸작(傑作)품 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 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 이관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 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영화와 존 귀로 관을 씌웠다 고 하였습니다 (You have crowned him with glory and honor). 더욱이 구원받 은 성도들은 천사들도 흠모(欽慕)할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찬송가에도 '천사도 흠 모하겠네' 라고 하지 않습니까. 천사들은 천국에서 심부름꾼이지만, 구원 얻은 우리들은 양자(養子)의 특권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기 때 문입니다. 이렇게 걸작품으로 만든 것이 사람인데 살아 있다는 감격을 갖지못하고 날마 다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冒瀆)입니다. 가 령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 앞에서 죽고 싶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마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런 소리를 듣고서도 "오냐, 죽고 싶으면 죽어라" 할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죄중에 제일 큰 죄는 철없는 자식들과 함께 동반 자살을 하는 부모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두 번 살인죄를 짓고 가는 인생들입니다.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인데, 마치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 습니다. 살아 있다는 감격이 있으면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탕자가 언제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했습니까 한참 흥청거리며 사는 동안에는 아버지도 무어고 다 잊어버린 채 살았습니다. 그러나 갖고 나온 돈 다 떨어지고, 그 땅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졌을 때에 남에 집에 목부로 들어가 돼 지치는 자리에서 굶어 죽게 되었을 때에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도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서 죽게 되었구나."라고 그 때에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현실로 받아 드렸을 때에 아버지를 생각 해 냈다는 말입니다. 사실 따져 보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사치입니다. 아직도 죽 음 뒤에 오는 삶이 얼마나 더욱 중요한지를 모르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래서 죽습니다. 죽음은 철저한 책임이 따릅니다. '어떻게 살다 왔는가'라는 추궁이 반 드시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어차피 죽을 것 편히 죽어 버리겠다는 생각도 들것입니다. 그러나 '무덤 이 인생의 종착점이 아니라' 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 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 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무엇 을 말하는 것입니까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에서는 백년 남짓한 체류 기간이 주어지지만, 이 체류 기간 천국을 준비하도록 하 였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처럼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젊은이들이 사랑을 나누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의 사랑이 영원토록 이어지도록 하자고 합니다. '영원히'라는 말을 제일 자주 사용합니다. 영원토록 변치말자고 맹세를 합니다. 왜 영원을 말합니까 영원 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합니까 아닙니다. 영원은 있습니다. 영원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면서, 그날을 현실로 맞아 들이면 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살았다는 감격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 졌다는 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보면 믿는다고 하면서도 천국의 영주권을 못 얻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기 비자로 임시체류자들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들은 항상 불안해합니다. 언제 불법체류자로 붙잡힐지 몰라서 전 전긍긍합니다. 그래서 삶의 기쁨도 없습니다. 보람도 없습니다. 의미도 못 느끼면 서 살아갑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만일 우리 그리스도 인의 삶이라면 그처럼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살아 있다는 감격도 없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효인 동시에 반역입니다. 반기독교적인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들 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만일 기독교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만일 조 물주인 하나님이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 반항하는 길은 자살뿐이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살이야말로 신(神)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의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악의 말인지 저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살아 있다'는 감격을 가질 때에 비로소 삶이 평안(平安)하고 풍요(豊饒) 로워집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인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다 모든 시간과 정력을 투자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는 나름대로 성취 감을 얻고, 어떤 이는 좌절과 분노의 패배감으로 세상을 저주(詛呪)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평안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 고도 진정한 삶의 풍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항상 조급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절망 스러움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모든 승패를 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끝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서 모든 승패를 거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 어서 그 죽음 자체도 극복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항상 새롭고 감격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송이 나옵니다. "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라고 감격해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삽니다. 우리 주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였다.(요14:27) 이처럼 더 귀한 말씀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외면하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구원 얻은 성도들이라면 뼈속 깊이 실감하면서 살게 됩니다. 살아 있다는 감격!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꽃동네의 창시자 일수 있는 한 거지의 말이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감사하다" 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즈음 삶이 어려운 분들이 계십니까 '살아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금요일 KBS 텔레비젼에서 '아침 마당' 이라는 프로를 보는 중에 눈시울 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잃은 소년 소녀 가장들의 얘기들 을 들으면서 어른들의 무책임을 다시 한번 느껴 보았습니다. 한 초등 학교 3학년 짜리 여자아이는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데, 왜 부모를 잃 었는가 하니까, 기억을 더듬으면서 "아버지는 돈이 없다고 농약을 먹고 죽었어요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후 또 어디론가 나가 버렸어요" 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서 꼭 인생을 저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연민의 정을 느껴 보았습니다. 돈이 없으면 농약을 마셔야 하고, 남편이 죽으면 자식도 모른다고 버리고 나가 버려야 하는 것이 인생의 삶이란 말입니까 그러면서 그 얘들의 말이 뭐라는 지 아십니까 "부모가 원망스럽고 밉지 않느냐" 물으니 "원망은 했지만 미워하지는 않어요" 저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울어 버렸습니다. "벌써 저 애들이 어른이 다 되었구나, 아니 어른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는구 나" 라고. 어린아이들이지만, 이미 저들에게는 '살아 있다는 것' 그것만 가지고 도 원망과 미움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감격 속에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살아 있다는 그것만 가지고도 감사하면서 살아가듯이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생활은 환난 중에서도 인내하면서 살고, 그 인내는 연단을 낳게 하고, 그러한 연단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소망 중에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앞서간 성도들의 생활이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들의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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