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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그것이 주는 교훈 (시9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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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여러가지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보면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여겨 졌기 때문에, 순간적인 격한 감정에서 일을 저지르는 줄 압니다. 몇일전 신문에 보니, 어느 착실하게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분이 예측하지 못했던 불황으로 도무 지 감당할 길이 없어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요즘 착실하게 도리어 사업을 하던 사람들 중에 자금줄이 막혀서 부도를 내는 경우들이 많다고 합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감당할길 없어 자살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그 고통이 심각했으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누구나 다 자살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안다면 그야말로 인생을 바로 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더욱 신앙의 사람 들에게 이런 고난이 닥칠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고난은 신앙 생활에 서 여러 가지 교훈을 줍니다. 고난, 그 자체는 슬프고 쓰고 괴롭지만, 그 고난으로 단련(鍛鍊)된 신앙은 더 욱 튼튼한 생명력을 갖고 서 있는 나무와 같이 됩니다. 우리는 가끔 산 위에 낭 떠러지 바위 위에 서 있는 소나무를 봅니다. 비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쳐도, 그 자리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만물의 영 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저 말못하는 소나무보도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고난, 그것이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인가
1. 고난을 통하여 얻는 것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사고(思考)의 동물입니다. 생각이 깊어지고 진지해 지려면 고난 속에서라야 됩니다. 세상 적으로 말해 먹고 마시고 노는 향락 속에서는 깨 달음이 없습니다. 거저 방탕과 육체적 쾌락만 있을 뿐입니다. 가끔 신문지상에 나는 오렌지족이니, 야타족이니, 하는 그런 부류의 생활에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내면적 고민도 못느끼고, 그러기에 삶 자체가 순간적인 쾌락이요, 낭비요, 방 탕일뿐,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은 그런 것들 대신 불가항력(不可抗力)의 고통과 고난 속에서라야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게 되고 진리에 세게, 종교의 세계로 눈이 열 리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든 종교인이 된다는 것,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게 된다는 것은, 나름대로 자신의 무능을 경험했거나, 그 어떤 불가항력의 코 너에서 하늘을 보게 되었기 때문인줄 압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중에 서울구치소에서 형목으로 일하는 목사님의 말을 들어 보면, 사형수들이 이름을 불러 내면, 그날이 맞이막이 아닐까하여 조바심을 갖는데 막상 사형틀이 있는 방을 들어설때는 모두 서서 하늘을 쳐다 본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인간의 무능을 절감하기 때문인줄 압니다. 모두 하늘 아래 사는 인생들이었기에 그동안 하늘을 잊어버리고 살던 사람들도 죽음을 앞에 두고는 하늘을 쳐다 보게 되듯이, 인간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을 깨 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 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했습니다.(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모두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살수 있다고 그렇게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처럼 우둔하고 비극스러운 말은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 할줄 모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후에 세계를 모르고 사는것처럼 비극스러운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에게 이런 인 생의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줄 모르 고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에게 고난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 리고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이렇게 고난은 무지한 인생들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2.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고난은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1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닫게 합니다. 욥기36:8-9절에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 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 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성도들이 고난중에서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하면 먼저 자신를 살피게 됩니다. 내가 혹시 교만했던 것이 없는가 내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악하였는가 등등 먼저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성도들이라면 갑짜기 가정의 우환질고가 닥치든가, 아니 면 자녀들이 앞으거나, 사고를 당하면 믿는 부모들이라면 으례히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내가 하나님 앞에 지난번 잘못한 그 일이 생각나게 되는것, 바 로 그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되 고, 그래서 새벽기도회에 나와 통회하게 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2 하나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크심을 깨닫게 합니다. 시편34:19-20절에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 시는 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라 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믿는 성도들이 언제나 잘못했어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닌경우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인고로 도리어 선한 사람들이 박해를 당하고, 밀리우고, 모함을 당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어느 병원에서 새벽기도회에 나오다가 뺑소니차에 치어서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누워있던 사람이 깨어났어 자기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도 리어 자기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면서 신앙으로 극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경우에서 성도의 당하는 고난은 도리어 하나님 도우심을 깨닫게 합니다. 저도 미국에서 공부하던중 교통사고를 당하여 8주동안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있었을때 도리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뼈를 보호사힘이여' 한 말씀처럼,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라고한 것처럼 그렇게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지냅니다.
3 고난 중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벧전1: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 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병을 앓기전에는 명예와 권세가 귀한것으로 알았지만 병고를 통하여 명예와 권세보다 더 귀한 것이 건강인것을 깨닫게 되듯이, 건강보다 더 귀한것은 영원 한 생명을 얻게 된 구원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있는 것들은 다 쇠해지고 낡아지고 없어지지만, 믿음의 세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구원 받은 것 이상 더 귀한것은 없습니다. 6. 25 직후 미국이라는 나라의 들 어갈 수 있는 비자 얻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얻은 사람들은 무슨 특권이나 얻은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얻은것 보다 더 귀한 것은 하늘 나라에 입국비자를 얻은 일입니다. 그것이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렇게 귀한줄 몰랐지만, 인생에게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후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구원의 문제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고난 중에 성도가 가져야 할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1 고난 중에 있을 때에 성도는 믿음의 담력을 가져야 합니다. 로마서8: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고난은 잠시뿐이요, 믿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현제의 고난은 유한적이지만, 장차 신앙인이 누릴 영광은 영원한 것을 알아 야 하겠습니다. "살기에 필요한 것들은 풍족히 가지고 있으나, 사는 목적을 못 가지고 사는 사람은 비극적 인생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중에서도 그 고난의 의미를 돼색이면서 믿음으로 산 결과에서 얻을 장 래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을 이겨낼수 있는 용기와 담력이 생깁니다.
2 고난 중에 있을 때에 성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 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나를 부르라'는 것은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걱정, 근심, 원망, 낙심, 절망하지 말고 고난중에 주님께 부르짖으란 말입니다. 지난번 제직 수련회때 강사 목사님이 한 말 답답하면 "주여! 주여! 주여!" 라고 부르짖기만이라도 하라고 그것이 성경 다니엘 9:19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라고. 급하면 주여! 만 불러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성도는 고난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시편55: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 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맡김입니다. 왜 맡기지를 못합니까 아직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위임이라고 했습니다. 위임이란 모든 것을 맡겨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인감 도장을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나의 짐을 맡기지 못하느냐 아직도 확신이 없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그 하나님이 정말 나를 기억해 주실것인지 아닌지 하나님이 있다면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등등 많은 회의 속에 서 아직도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위치한 스탠포드 대학은 미국의 대학총장과 학장들이 최고의 대학이라고 1983년도에 뽑은 학교입니다. 이 명문학교의 창설자 리랜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씨는 칼리포니아의 주지사를 역임하였을 뿐 아니라, 태평양 철도회사 사장과, 상원위원도 역임한 분입니다. 대단한 부자였던 스탠포 드씨에게는 금지옥엽(金枝玉葉)처럼 여기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스탠포드씨 부부는 이 아들에게 세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기 원했기 때문에 어린 아들을 일찌기 이태리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아들이 나쁜 병에 걸려서 9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스탠포드씨 부부에게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쓴 잔이었습니다. 가슴을 에이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부는 비통과 낙담으로 허랑방 탕하지 않았습니다. 비관하여 인생을 포기하거나 한숨만 쉬고 두문불출하는 페 인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내로 다시 캘리포니아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꿈과 희망은 다 먼지로 돌아갔다. 우리의 아들은 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부부는 캘리포 니아에 있는 모든 자녀들을 우리의 자식들처럼 여기며 그들을 위해 살겠다". 그리고서는 지금의 명문 대학 스탠포드를 설립했던 것입니다. 스탠포드씨가 세상을 떠날 때 당시의 액수로는 엄청난 2천2백만 달라를 이 학교를 위해 다 바쳤습니다. 이로 인하여 캘리포니아의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전 미국과 세계의 유용한 인재들이 이 학교를 통해서 배출될 수 있게 된 것이 었습니다. "참된 재산(財産)과 부(富)의 평가는 그 사람이 재산을 모두 잃어 버 렸을 때에도 얼마나 가치가 나가는 사람이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빈부귀천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스탠포드씨는 세상에서 더할 수 없는 비통 속에서 더욱 빛나는 위대한 일을 성취하여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비행기와 같은 것입니다. 가다가 멈추면 반드시 떨어지는 법입니다. 참된 크리스천의 생애는 번영(繁榮)에서도 타락하지 않고, 고난 중에서도 깨 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모두 어렵다는 이 한해동안에 도리어 고난을 통하여 깨닫는 은혜들을 받아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놓는 국민들이 되도록 성도들이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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