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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자이신 하나님 (시50:1-23)

본문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에 예배에 출석하고, 헌금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에 관하여 말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신앙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종교활동이라고 합니다. 종교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웹스터 사전(Webster's Dictionary)에서 신앙과 예배의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고, 종교란 초월 적인 존재에 대한 헌신, 충성, 깨달음 내지 확신이며, 그러한 요소들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공경, 사랑, 감사, 그리고 순종하고 봉사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활동을 하는 데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그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삶에 어떤 변화조차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종교활동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이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 가족들을 포함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고 종교적인 업무를 반복하는 것 이상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종교적인 활동, 교회 안에 여러 형식적인 행위들, 예를 들면 예배, 찬양, 봉사, 전도, 교제 등 아주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한편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적인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 가는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 하지만 하나님과의 기본적인 관계가 기초가 되지 않으면 종교활동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종교활동은 있어도 하나님과의 만남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시편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들이 단순한 종교적인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는 네 개 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연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1-6), 두 번째 연은 의식적인 면에서의 종교활 동을 지적하고(7-15), 세 번째로는 윤리적인 면에서의 종교활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16-21). 그리고 네 번째 연에서는 경고와 약속을 주심으로 올바른 종교생활을 선택할 것을 도전하고 있습니다(22-23).
1. 심판자이신 하나님(시50:1-6) 이 연에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법정에 앉으신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아삽의 시 "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아삽은 다윗 시대에 성막에서 노래하는 세 사람의 노래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다윗 은 예루살렘에 성막을 설치하고 아비나답의 집에 약 70년 이상이나 있었던 언약궤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 가운데 세 사람을 세워 노래하는 자로 삼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대상15:17, 19). 그리고 그는 영감된 시편을 많이 지었고, 후대에 히스기야 시대에 다윗의 시와 아삽의 시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였습니다(대상25:2; 대하29:30).
그런데 이 아삽은 이 시에서 먼저 하나님께서 재판관으로서 법정을 개정하는 형식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여기에 "부르다 "는 일반적인 부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정으로 호출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새국제성경(NIV)이나 새미국표준성경(NASB)은 법정적인 용어로 "호출하다,소환하다"(summon)는 뜻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절에서 "세상"을 불렀다고 되어 있는데, 세상이 아니고 히브리어 원문에는 "땅"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절은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있는 땅을 법정에 호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편을 읽을 때 하나님의 법정을 머리에 그리면 서 읽으십시오. 이 그림은 아삽이 특별한 시적인 영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세 율법에 나타나 있는 이미지를 가지고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모압 언약이 기록되어 있는 신명기 30:19-20을 보면 이러한 이미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 이시오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참고31:28-2 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명령을 순종하면 복을 주시고, 다른 신을 섬기거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면 저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언약을 맺으면서 증인으로 땅과 하늘을 세웠습니다. 지금 이 시의 저자 인 아삽이 땅을 증인으로 호출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배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2-3절에서 하나님께서 심판자로서 법정에 앉으시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 이 빛을 발하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이 절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맺는 의식을 설명하고 있는 출애굽기 19:16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는 말씀과 신명기 33:2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는 말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4절 에는 하나님이 강림하신 실제적인 목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하나님께서 땅을 증인으로 소환하시고 그 백성을 판단하시기 위하여 앉으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정에 재판을 받을 자기 백성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이 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의 성도 "라고 불렀고, "제사로 언약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 이미지는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는 출애굽기 24:4-8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 소유 (, my treasured possession)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그런데 이 약속을 누리는 조건으로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맺으시고난 후에 동물을 잡아 피를 양푼에 담고 그 반은 제단에, 그 반은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아삽이 이 시편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의 제사로 맺은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의 기초 위에서 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은 자기 백성을 법정에 세우고 그들의 행위문제를 재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머리에 그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재판장으로서 법정에 앉으셨을까요
2. 의식적인 면을 심문하심(시50:7-15) 이 연에서는 제사와 제물의 잘못된 사용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여기서 하나님은 제물을 갖고 오지 않아서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제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문제는 잘못된 방법으로 제물을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제물과 제사의 목적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사와 제물을 드리는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9-11절입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다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은 무엇이 필요하여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제물을 가져오는 문제 에 대하여 12-13절에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배고프시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하나님은 지금 제물을 가져오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동기와 태도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데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형식적이고 기계적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이러한 현상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찾아오고 헌금을 드리기도 합니다만 사람의 눈을 의식하여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교회에 적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가 자기의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구약시 대에 제물을 오용하는 사람과, 신약시대에 예배를 오용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태도로 나아가면 안됩니다. 요즘 외형적으로 크고 좋은 교회를 찾고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 쇼핑하러 다닌다는 유행어까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학적 지식도 없으면서 설교가 좋니 나쁘니 판단합니다. 결국 성경 해석학적 지식 없이 좋다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은 자기의 귀를 얼마나 즐겁게 해주느냐에 따라 판단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들인지요! 이러한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명한 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주관에 따라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중심이며,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인 주일날에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고, 교회의 여러 프로그램들 가운데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기보다는 자기의 취향에 따라 행동합니다. 이 시의 저자인 아삽 당시 에 성도들은 하나님이 무엇이 필요한 것처럼 제물을 적선해 준다는 생각을 가진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에 예배 드려주고, 교회에 봉사해 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의 법정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고소하고 있습니다 .
그러면 어떻게 예배에 참석할까요 14-15절을 보십시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 말씀은 결정적으로 번역이 잘못 되었습니다 . 여기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는 말과, 서원을 "갚으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명령법입니다 . 이 명령법 다음에 접속사 와우가 나오면 "그러면"이라는 뜻이 됩니다. 영어 문법에서도 명령법 다음에 접속사 "그리고"(and)가 나오면 "그러면"이라고 번역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은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라. 그러면 네가 환란 날에 부르면 내가 너를 건지 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방법으로 나오지 말고,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모든 은혜들을 주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조셉 알렉산더(Joseph Alexander )는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는 말씀을 주석하면서 경건한 감정과 회개, 믿음 그리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였 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나아갈 때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때로 환난을 만나도 하나님을 찾고 부르면 그 상황에서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요즘 우리 시대에 감사가 실종되었습니다. 가끔 저희 교회에 여러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그들이 요구하는 돈을 다 주지는 못해도 얼마의 돈을 드립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감사함으로 받아 갑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적다고 불평하고 욕을 하면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은혜도 큰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생활, 예를 들면 건강을 주신 것, 자녀들을 주시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것,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불신자들처럼 모든 것을 우연이나 재수로 돌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나아가지 않을 때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한 것처럼 다 잃어버릴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성도들을 볼 때 정말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이 우리 위하여 십자가에 죽이시고 부활하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로 나오느냐에 따라 명암이 엇갈리게 될 것입니다.
3. 윤리적인 면을 심문하심(시50:16-21) 이 연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1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네 율례를 전하며 네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여기에 "악인"은 불신자들을 말할까요 아니면 신자들 을 말할까요 문맥적으로 당시에 성전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 신약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 의 행동이 얼마나 혐오스럽고 소름끼치게 하는지를 아십니까 이 표현을 잘 보십시오. "네가 어찌 네 율례를 전하며 네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그 이유를 17-20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중요한 율법을 가지고 있고 그 율법을 전파하는 네가 어떻게 그 법에 명시된 내용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멀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을 뒤로 던져 버립니다. 삶의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수단으로 악용된 뿐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며 도적들과 한 패가 되고, 간음을 행하는 자들과 같이 간음을 행합니다 . 혀로 온갖 거짓말을 지어내고, 악한 행동을 합니다. 교회의 성도들을 모략하는 일과 심지어 자기 어머니에게 난 형제들을 비방 하고 싫어하기도 합니다. 가난하다고 싫어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낮고 미천한 지위에 있으니 멀리하기도 합니다.
이 시편의 저자 아삽은 율법과 전혀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율법을 들고 있고, 전파한다니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 네 율례를 전하며 네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가 전파하는 메시지와 그 삶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증스럽게 보이고 위선적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21절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는도다. " 이 말씀에서 "내가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식적이고 기계적으로 제물을 바치며,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함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관계없이 자기 주관적으로 섬김으로 하나님도 그것을 받으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침묵하고 계시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우리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회개하고 돌아와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어리석게도 여전히 자기 백성대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일종의 종교활동일 뿐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행동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에 대하여 그 죄를 책망하고 그 앞에서 고발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는도다."
4. 경고와 약속(시50:22-23)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법정에서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언약의 백성들을 고소하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아삽이 이렇게 고소하는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아삽은 그 길을 22-23절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여기에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이 자기의 주관과 방식대로 믿다가 심판자이신 하나님에게 찢어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우리의 모든 행실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조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두 길 가운데 어느 길을 선택하든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책임을 여러분이 져야 합니다. 아삽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당시 자칭 성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죄를 고소하는 내용을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언약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서 말씀하신 대로 판결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언약의 말씀을 사랑하고 감사함으로 순종하면 복을 주실 것이고, 그 말씀을 버리고 자기 주관대로 행하고 악하게 행동하면 저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은 지금 현재에도 우리를 하나님의 법정에 세우시기도 하지만,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의 행위가 심판을 받을 날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법정을 늘 머리에 그리면서 사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을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이러한 그림을 그리며 사는 사람은 우리의 삶을 우리의 주관에 따라 아무렇게나 방치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듬어 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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