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하소서 (시51:10-19)
본문
‘새롭게 하소서’라는 말은 부흥회 표제나 복음 성가의 제목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매우 귀에 익은 표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신자의 인구에 회자하는 유명한 표어 ‘새롭게 하소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말씀이겠습니까 본문 10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다윗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 속에서 ‘정직한 영’은 바로 ‘정한 마음’과 같은 것이고, 또 ‘새롭게 하소서’라는 말 역시 ‘창조하시고’라는 말과 같은 뜻에서 병행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본문 1절 앞의 괄호 안에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라고 이 시편의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책망받고, 그제야 회개하게 된 다윗은 자기 마음과 영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자기의 심령이 어느새 죄를 죄인 줄로 깨닫지 못하도록 둔감해져 있었으며, 지은 죄를 곧바로 하나님께 회개할 줄 아는 반사 신경이 사라져 버린 것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 자신의 정직한 영과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고, 즉 사라져 버렸다면 다시 생기게 해 주시고, 고장난 부분이 있다면 다시 회복시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이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란, 바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깨닫고 빨리 회개할 줄 아는 심령을 두고한 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회개하는 심령을 회복한 후에 맛보게 될 감격을 시편 51편의 본문에서 세 가지로 찬양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그러하면’이라는 말로 이하의 구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앞의 11절과 12절에는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에게 회개하는 심령이 돌아오고 그를 쫓아내지 아니하실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면, ‘그러하면’ 이러이러한 은총을 누릴 수 있겠다는 표현입니다. 다윗이 톡톡히 체험했던 것처럼 사람의 심령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할 줄 모를 때 최악의 비참함을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와 반면에 죄 용서받음을 체험하게 되면 그 심령은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을 통하여, 그 같은 정한 심령이 그 마음 속에서 새롭게 됨으로 인하여, 죄사함 얻은 성도가 누리게 되는 은혜들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I. 죄사함 받은 성도는 전도의 힘을 얻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자가 누리는 감격은 첫 번째로 다른 죄인을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라고 다윗은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 중에 빠져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을 주께로 인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속에 숨겨진 죄가 있는데 무슨 낯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자신이 일단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면 전혀 상황은 달라집니다. 죄 용서받은 자는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전도합니다. 그 감격을 남에게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충동으로 인하여 전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죄용서의 감격을 맛본 사람은 만나는 사람마다, 아니 찾아다니면서까지 전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자기가 직접 겪어 본 일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며, 또한 말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침을 맞고 병이 나아본 사람은 침을 전하고, 소금물만 가지고 효험을 본 사람은 소금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런 사람이 전하면 듣는 사람은 도리없이 전도를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고 사죄의 기쁨을 맛보아 아는 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의 도를 가르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씻음 받은 감격 때문에 그 복음 전할 것을 당연히 내 할 본분으로 삼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정한 마음을 새롭게 창조받고 죄용서 받은 성도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Ⅱ. 죄 용서함 받은 성도는 찬송의 기쁨을 체험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다윗은 죄를 회개한 성도가 누리는 또 하나의 은총은 찬송할 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히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원래 노래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목동 시절부터 수금을 타며 그 심령에 감동되는 영감으로 찬송을 부를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기 죄를 감추고 있는 기간 동안, 그는 옛날처럼 찬송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의 혀는 더 이상 주의 의를 높히는 가사를 내지 못했고, 그의 입술은 찬송을 위하여 열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다윗이 하루 아침에 음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의 악기를 다루는 재주나 노래부르는 목청이야 옛날과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심령이 죄 가운데 있으므로 말미암아 찬송의 제목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그는 예날처럼 찬송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의 가장 기쁜 찬송의 제목은 구원의 은총인데, 죄를 회개하지 않으므로써 이것을 상실했으니 찬송을 부를래야 부를 제목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구원의 즐거움을 그에게 회복시켜 주셨을 때, 이전처럼 주의 의를, 죄인을 정죄하시는 의가 아니라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실로 신기한 의를 높히 노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용서함을 받은 우리는 참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제목으로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201장을 작사, 작곡한 필립 블리스라는 성도도 바로 그와 같은 감격을 그 심령 속 깊이 체험한 성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찬송의 후렴은 ‘할렐루야 할렐루야’라는 가사로 시작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 정말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곧 이어 나오는 가사대로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같은 감격에 넘치는 마음을 도무지 한 번만 노래하고 끝낼 수가 없어서 도합 10번을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라고 부르도록 찬송을 지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한 심령을 회복하고 죄용서함을 받은 후의 성도가 아니고서는, 이 땅의 그 어떤 훌륭한 지휘자나 연주자나 성악가나 가수라 할지라도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찬송의 감격스러운 은혜입니다.
Ⅲ. 속죄함을 입은 성도는 예배의 뜨거운 감격을 체험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심령이 새롭게 된 성도가 체험하는 마지막 은총은 주님 앞에 바른 제물을 놓고 예배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6절로 19절에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라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밧세바와 범죄한 이후에도 다윗은 여전히 예배에는 참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예배가 결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한 제사였던 것은 다윗 자신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제사에는 결정적인 제물이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상한 심령’ 즉 자기 죄를 통회 자복하는 심령의 제물이 빠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번제물이고 무엇이고 올려져도 그 제사에 이 제물이 결핍되어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와 제물을 즐겨 아니하시고 기뻐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하는 심령이 제물로 드려졌을 때에 모든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상한 심령을 결코 멸시치 아니하시고, 그 함께 드리는 수소의 번제까지 함께 기뻐하시면서 받으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한 심령을 기뻐하시는 제물로 받으신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한 심령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오히려 귀찮아 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신 말씀에 빗나간, 그 율례의 기준에 벗어난 죄를 지은 인생이 그 추한 모습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오히려 멸시해야 마땅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실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성품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처럼 더러운 죄를 내어 놓고 꼴사나운 모습으로 울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결코 멸시치 아니하시는 신비한 성품입니다. 그 성품을 누리는 감격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모여 예배드릴 때 나누게 되는 가장 큰 은혜인 것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제 잘난 모습을 겨루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멸시받던 창녀 같은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품으로 영접을 받고 죄용서함 받는 기쁨을 맛보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한 심령을 가지고 회개할 줄 아는 성도들이 예배의 시간마다 누리는 말할 수 없이 큰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혹시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 은폐하고 있는 죄는 없습니까 디모데전서 5장 24절과 25절은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심판에 먼저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고백하는 죄는 감추어 주시지만 사람이 은폐하려 하는 죄는 반드시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일단 우리가 우리 죄를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고, 우리가 더 이상 죄 짓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주님 앞으로만 나아오면, 그 용서는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숨기고 죄를 부풀리는 기간이 1년, 2년이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데 거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0’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든지 우리를 빨리 용서해 주고 싶어 못 견뎌 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그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까 탕자가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분깃을 미리 받아 그것으로 방탕하며 결국 모두 다 탕진했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겠다고 작정한 그는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무어라고 회개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미리 연습을 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18,19)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면 이 말로 회개하려고 줄줄 외우다시피 리허설을 하고 연습을 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을 때, 이 탕자는 자기가 준비했던 그 회개의 말을 한 마디도 틀림없이 외워 두었던 그대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여기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말했을 때 예수님 말씀에 보면 그 다음에 무어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는 말과 ‘하나’라는 말 사이에 원래 무슨 말이 더 있어야 되는지 기억하십니까 거기는 원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이 들어가게 되어 있던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야 그 탕자가 외웠던 회개의 대사를 원래대로 다 끝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탕자가 왜 원래 하려 했던 자기의 말을 다 끝낼 수 없었습니까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바로 거기까지 말했을 때, ‘하나’ 즉 그 아버지는 더 이상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 말을 도중에 막으면서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회개하러 나아올 때, 그 기도가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에게 달려와 입을 맞추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 기도를 하면서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한 마디 끝나면 그 다음의 말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란 말이 미처 나올 틈도 없이 당장 잔치를 베풀고 잃었다가 다시 얻게 된 아들이라고 기뻐해 주시는 그런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직 죄 회개한 성도만이 그 자비와 인애의 성품을 맛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함으로써 숨은 죄를 내어 놓고 회개하며, 죄용서함 받은 후에 받는 은총 가운데 전도하며, 찬양하며, 예배하는 축복을,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그날까지 다함께 날마다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신자의 인구에 회자하는 유명한 표어 ‘새롭게 하소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말씀이겠습니까 본문 10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다윗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 속에서 ‘정직한 영’은 바로 ‘정한 마음’과 같은 것이고, 또 ‘새롭게 하소서’라는 말 역시 ‘창조하시고’라는 말과 같은 뜻에서 병행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본문 1절 앞의 괄호 안에 보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라고 이 시편의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자기의 죄를 책망받고, 그제야 회개하게 된 다윗은 자기 마음과 영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자기의 심령이 어느새 죄를 죄인 줄로 깨닫지 못하도록 둔감해져 있었으며, 지은 죄를 곧바로 하나님께 회개할 줄 아는 반사 신경이 사라져 버린 것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 자신의 정직한 영과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고, 즉 사라져 버렸다면 다시 생기게 해 주시고, 고장난 부분이 있다면 다시 회복시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이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란, 바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깨닫고 빨리 회개할 줄 아는 심령을 두고한 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회개하는 심령을 회복한 후에 맛보게 될 감격을 시편 51편의 본문에서 세 가지로 찬양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그러하면’이라는 말로 이하의 구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앞의 11절과 12절에는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에게 회개하는 심령이 돌아오고 그를 쫓아내지 아니하실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면, ‘그러하면’ 이러이러한 은총을 누릴 수 있겠다는 표현입니다. 다윗이 톡톡히 체험했던 것처럼 사람의 심령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할 줄 모를 때 최악의 비참함을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와 반면에 죄 용서받음을 체험하게 되면 그 심령은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을 통하여, 그 같은 정한 심령이 그 마음 속에서 새롭게 됨으로 인하여, 죄사함 얻은 성도가 누리게 되는 은혜들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I. 죄사함 받은 성도는 전도의 힘을 얻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자가 누리는 감격은 첫 번째로 다른 죄인을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라고 다윗은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 중에 빠져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을 주께로 인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속에 숨겨진 죄가 있는데 무슨 낯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자신이 일단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면 전혀 상황은 달라집니다. 죄 용서받은 자는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전도합니다. 그 감격을 남에게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충동으로 인하여 전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죄용서의 감격을 맛본 사람은 만나는 사람마다, 아니 찾아다니면서까지 전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자기가 직접 겪어 본 일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며, 또한 말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침을 맞고 병이 나아본 사람은 침을 전하고, 소금물만 가지고 효험을 본 사람은 소금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런 사람이 전하면 듣는 사람은 도리없이 전도를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고 사죄의 기쁨을 맛보아 아는 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의 도를 가르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씻음 받은 감격 때문에 그 복음 전할 것을 당연히 내 할 본분으로 삼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정한 마음을 새롭게 창조받고 죄용서 받은 성도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Ⅱ. 죄 용서함 받은 성도는 찬송의 기쁨을 체험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다윗은 죄를 회개한 성도가 누리는 또 하나의 은총은 찬송할 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히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원래 노래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목동 시절부터 수금을 타며 그 심령에 감동되는 영감으로 찬송을 부를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기 죄를 감추고 있는 기간 동안, 그는 옛날처럼 찬송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의 혀는 더 이상 주의 의를 높히는 가사를 내지 못했고, 그의 입술은 찬송을 위하여 열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다윗이 하루 아침에 음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의 악기를 다루는 재주나 노래부르는 목청이야 옛날과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심령이 죄 가운데 있으므로 말미암아 찬송의 제목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그는 예날처럼 찬송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의 가장 기쁜 찬송의 제목은 구원의 은총인데, 죄를 회개하지 않으므로써 이것을 상실했으니 찬송을 부를래야 부를 제목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구원의 즐거움을 그에게 회복시켜 주셨을 때, 이전처럼 주의 의를, 죄인을 정죄하시는 의가 아니라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실로 신기한 의를 높히 노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용서함을 받은 우리는 참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제목으로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201장을 작사, 작곡한 필립 블리스라는 성도도 바로 그와 같은 감격을 그 심령 속 깊이 체험한 성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찬송의 후렴은 ‘할렐루야 할렐루야’라는 가사로 시작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 정말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곧 이어 나오는 가사대로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같은 감격에 넘치는 마음을 도무지 한 번만 노래하고 끝낼 수가 없어서 도합 10번을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라고 부르도록 찬송을 지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한 심령을 회복하고 죄용서함을 받은 후의 성도가 아니고서는, 이 땅의 그 어떤 훌륭한 지휘자나 연주자나 성악가나 가수라 할지라도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찬송의 감격스러운 은혜입니다.
Ⅲ. 속죄함을 입은 성도는 예배의 뜨거운 감격을 체험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심령이 새롭게 된 성도가 체험하는 마지막 은총은 주님 앞에 바른 제물을 놓고 예배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6절로 19절에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라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밧세바와 범죄한 이후에도 다윗은 여전히 예배에는 참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예배가 결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한 제사였던 것은 다윗 자신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제사에는 결정적인 제물이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상한 심령’ 즉 자기 죄를 통회 자복하는 심령의 제물이 빠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번제물이고 무엇이고 올려져도 그 제사에 이 제물이 결핍되어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와 제물을 즐겨 아니하시고 기뻐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하는 심령이 제물로 드려졌을 때에 모든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상한 심령을 결코 멸시치 아니하시고, 그 함께 드리는 수소의 번제까지 함께 기뻐하시면서 받으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한 심령을 기뻐하시는 제물로 받으신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한 심령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오히려 귀찮아 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신 말씀에 빗나간, 그 율례의 기준에 벗어난 죄를 지은 인생이 그 추한 모습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오히려 멸시해야 마땅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실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성품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처럼 더러운 죄를 내어 놓고 꼴사나운 모습으로 울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결코 멸시치 아니하시는 신비한 성품입니다. 그 성품을 누리는 감격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모여 예배드릴 때 나누게 되는 가장 큰 은혜인 것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제 잘난 모습을 겨루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멸시받던 창녀 같은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품으로 영접을 받고 죄용서함 받는 기쁨을 맛보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한 심령을 가지고 회개할 줄 아는 성도들이 예배의 시간마다 누리는 말할 수 없이 큰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혹시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 은폐하고 있는 죄는 없습니까 디모데전서 5장 24절과 25절은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심판에 먼저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고백하는 죄는 감추어 주시지만 사람이 은폐하려 하는 죄는 반드시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일단 우리가 우리 죄를 더 이상 숨기려 하지 않고, 우리가 더 이상 죄 짓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주님 앞으로만 나아오면, 그 용서는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숨기고 죄를 부풀리는 기간이 1년, 2년이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데 거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0’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든지 우리를 빨리 용서해 주고 싶어 못 견뎌 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그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까 탕자가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분깃을 미리 받아 그것으로 방탕하며 결국 모두 다 탕진했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겠다고 작정한 그는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무어라고 회개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미리 연습을 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18,19)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면 이 말로 회개하려고 줄줄 외우다시피 리허설을 하고 연습을 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을 때, 이 탕자는 자기가 준비했던 그 회개의 말을 한 마디도 틀림없이 외워 두었던 그대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여기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말했을 때 예수님 말씀에 보면 그 다음에 무어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는 말과 ‘하나’라는 말 사이에 원래 무슨 말이 더 있어야 되는지 기억하십니까 거기는 원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이 들어가게 되어 있던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야 그 탕자가 외웠던 회개의 대사를 원래대로 다 끝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탕자가 왜 원래 하려 했던 자기의 말을 다 끝낼 수 없었습니까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바로 거기까지 말했을 때, ‘하나’ 즉 그 아버지는 더 이상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 말을 도중에 막으면서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회개하러 나아올 때, 그 기도가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에게 달려와 입을 맞추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 기도를 하면서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한 마디 끝나면 그 다음의 말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란 말이 미처 나올 틈도 없이 당장 잔치를 베풀고 잃었다가 다시 얻게 된 아들이라고 기뻐해 주시는 그런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직 죄 회개한 성도만이 그 자비와 인애의 성품을 맛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함으로써 숨은 죄를 내어 놓고 회개하며, 죄용서함 받은 후에 받는 은총 가운데 전도하며, 찬양하며, 예배하는 축복을,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그날까지 다함께 날마다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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