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새로운 시작이다! (시42:1-5)
본문
목마른 사람들 사람들을 외형적으로 보면 밥만 먹고 사는것 같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사람들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독특하게도 사람은 밥만 먹는 상태를 살아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그 외 의 무언가가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러는 아주 보잘것 없는 이유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것이 사람입니다. 애인이 변심을 했다고 목숨을 끊습니다. 혹은 사업이 실패를 했다 고, 성적이 떨어져서 1등 하던 아이가 2등을 했다고 목숨을 끊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동물의 세계를 보아도 암컷에게 퇴짜를 맞았다고 나 가서 죽는 동물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또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하여 동물들도 치열한 경쟁을 치루지만, 그것에서 지면 고분고 분 자기의 위치를 지키며 살지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스스로가 생각한 것을 이루려는 강한 의지에 이끌려서 생명을 거는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도 뉴스를 보니까 쟁쟁한 젊은이들이 민족의 이동경로를 자랑 스럽게 탐험하겠다는 열의로 블라디보스톡을 뗏목으로 떠나 일본 열도에 갔다가 부산항으로 귀항하려고 항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발해 뗏목 탐사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만 동해상의 독도 근처에서 폭풍을 만나고 말았 습니다. 지나던 일본 어선을 만나 견인을 부탁했다는 마지막교신이 22일 밤에 있었다고 했는데, 오늘은 3명의 시체가 일본의 섬에서 발견 되었고 1명은 실종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31일에 떠나 무려 20여일이 넘는 시간을 바다에서 바람에만 의지 하여 망망대해를 떠돌던 젊은이들이 목마름과 추위 속에서 바다에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학술탐사, 좋은 목적입니다만 저는 과연 사람의 목숨을 담아낼 진 정 합당한 그릇이었느냐에 대하여는 회의적인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함부로 목숨을 거는 모험을 자처하지만, 결코 세상에서 사람의 목숨을 걸어도 합당할만한 일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명을 거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살피면 서 외형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들마다 어떤 목마름이 있 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모든 것이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듯이 보이는 사람들에게조 차 이러한 절실한 목마름과 갈급함은 보통의 사람들과 똑같이 존재합니다. 아니, 오히려 밖으로 평온해 보이는 사람들이 더 깊은 갈증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살아있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식상한 일상이 아니라, 무언가 자기의 내면에 있는 자아를 일깨워줄 수 있는 자극을 원합니다. 한마디로 바꾸어 말하면 목숨 걸 수 있는 일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여
자는 남자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혹은 일에, 아니면 신념이나 이념이라도 자신을 송두리째 던질 수 있는 확신을 찾는 갈증이 사람들 안에는 누구나에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의 노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시편은고라자손의 노래입니다. 고라는 레위의 아들, 고핫의 손자로 대를 이어서 여호와의 장막과 성전에서 문지기로 수종드는 가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순번을 정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적으로 본다면 다른 어떤 지파보다 하나님 가까이에 서 살아온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늘 시편을 지어 노래하기를, 자신들의 영혼이 갈 급한데 광야에서 시냇물을 찾는 불쌍한 사슴만큼이나 목마르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갈급함의 원인을 보니까 크게 세 가지의 원인이 있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뵈옵지 못해서입니다. 본문 2절의 하반절에 보니까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 에 뵈올꼬'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늘상 성전의 문지기로 성전 가까이에서 살아왔지만, 이들은 의무 와 책임 때문에 문지기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성전에 갔지, 하나님을 뵈오려는 예배자로서 성전에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상 반복되는 예배와 제사 속에서 오히려 식상 함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도처에서 사람들의 눈물과 찬양이 있었 지만, 고라자손에게 그것은 그냥 반복되는 일상일뿐 어떤 느낌도, 감격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메마르고 갈급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에도 의무와 책임으로 인하여, 혹은 대대로 내려 오는 습관에 의하여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시간만큼만 봉사하면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감동이 없는 사람은 그 가 아무리 훌륭한 일꾼이었다 하더라도 예배자로서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뵈옵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만 성공한 것입니다. 횟수가 몇 번이든, 시간을 얼마나 드렸든, 찬양을 부르다 목이 쉬었든, 기도하다 눈물 이 나왔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났느냐가 중 요한 것입니다. 가슴에 번지는 감동이 우러나야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 순간에 들어올 때와는 다른 무언가를 가슴에 안고 나가야 합니다.
울렁거림이 있는 예배, 살아 계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만이 우리들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사람들의 반응 때문입니다. 본문의 3절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지기라는 것이 참 어중간한 직무였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성전 에서 난처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막아 몰아내 야 하고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는 달리 아마 힘들고 귀찮은 일은 도맡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수고와 헌신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늘상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문지기 주제에 뭘 안다고 거들어! 잠잠히 서서 문이나 지키고 있 으슈." 이 세상의 누구도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 이 되어서 그들은 종일 서서 영적인 목마름을 체험해야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고라자손의 목마름을 조금 이해합니다.
내가 전도사로서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내 직무를 행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제사가 되어야 하는데, 제가 덜 되어서 가끔은 그것을 의무 로 행할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기도회를 인도하고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해서 사람들이 은 혜를 받는데, 나는 그 가운데서 영적인 메마름을 여전히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참담한 일인지 모릅니다. 꼭 내 자신이 이중인격자인 것 같고, 실제로 내 안에서 자꾸만 '거짓말 하지 마라! 너도 은혜 못받으면서 남들한테 가장하지 마라!'는 목소리와 끝없이 싸워야 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고라 자손이 힘써 성전에서 봉사를 했지만, 아침과 저녁으 로 눈물이 음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침에 나서려면 내가 또 이 걸 해야하는걸까라는 마음의 번민을 가지고 집을 나서고, 저녁이 되어서 집에 들어오면 받은 은혜는 하나도 없이 오직 사람들이 서 운하게 했던 것들만이 생각나 눈물지며 사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사람들의 얼굴이 더욱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는 은혜가 있으면 사람들의 얼굴은 작아지고, 오히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얼굴만이 가득차게 됩니다. 아직도 사람들의 평판에, 반응에, 행동에 좌우되고 있습니까 아직 도 누가 어떻게 했기 때문에 밤새워 우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고라자손일지도 모릅니다. 세번째, 과거의 추억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은 그들이 과거에 얼마나 기쁨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는가를 회상하는 이야기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오히 려 지금은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모르면 슬프지 않습니다. 맛을 보지 않은 사람은 먹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기가 막힌 맛을 본 사람은 꼭 그것이 다시 생각나게 되어있고, 만 일 그것을 다시 먹을 수 없다면 그때는 슬퍼지는 것입니다.
과거에 은혜를 체험하지 않았으면 앞으로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은혜를 체험했는데, 지금 그 은혜에서 자신이 멀 어져 있다면 그때부터 사람은 고민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은 신앙의 선봉에 서서 사람들을 이끌었던 추억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확신에 차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성 전으로 인도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과거의 추억이 되고 현실 은 메마름에 신음하는 자들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병중에 하나가 '옛날에' 병입니다. 만일 간증을 하고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현실은 별로 없이 '옛날에'만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과연 자신이 신앙적으로 건강한지를 진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현실의 역사입니다, 믿습니까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도 신앙이지만, 살아있는 신앙은 지금 무슨 일인가를 이루어내는 역사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과거의 응답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응답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기도했는데 어떻게 응답을 받았고. 그런 이야기는 침체된 현실에서 일어나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한 도입으로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안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지금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 메마름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하여는 지금 그 하나님과 살아있는 신앙의 관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으며. 여러분 안에 어떤 목마름이 있습니까 목마름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다고 합니다.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목마름 속에서 자 신의 소변을 받아 마시면서까지 목숨을 버티어냅니다. 그러나 나 중에는 더이상 버틸 수가 없게되면, 그중의 어떤 사람은 바다에 고개를 쳐박고 그 물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물은 물이지만, 마실수록 더 목마른 물. 그래서 그는 죽어가는 것 입니다. 세상에 목숨을 걸만한 가치의 일이 과연 있습니까 그것이 혹시 여러분의 목을 더 목마르게 하는 바닷물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공부가, 출세가, 외모가, 인기가. 오히려 여러분의 영혼 을 죽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스런 목마름이 있습니다. 습관적인 신앙생활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버립니다. 은혜를 받 지 못한 우리들이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에 좌우될 때 에 우리는 목말라 집니다. 그리고 과거의 신앙에만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현실의 충만한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오늘 고라자손과 같이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며 자신 의 영혼에 말해야만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심령속에 다 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는 넘치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주님은 요한복 은 4장에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분의 얼굴을 바라 고 기도하며 찬송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던 것, 나의 공부와 진로를 위하여 기도하던 것, 내 의무와 책임을 위하여 기도하던 것을 잠시 내려둡시다. 그 보다 먼저 구할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과같이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분을 만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내 심령의 갈망과 목마름을 주님의 능력의 손길로 치료받아야 합니다. 오늘 내 모습이 중요합니다. 어제는 지나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내 모습을 보십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도 뉴스를 보니까 쟁쟁한 젊은이들이 민족의 이동경로를 자랑 스럽게 탐험하겠다는 열의로 블라디보스톡을 뗏목으로 떠나 일본 열도에 갔다가 부산항으로 귀항하려고 항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발해 뗏목 탐사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만 동해상의 독도 근처에서 폭풍을 만나고 말았 습니다. 지나던 일본 어선을 만나 견인을 부탁했다는 마지막교신이 22일 밤에 있었다고 했는데, 오늘은 3명의 시체가 일본의 섬에서 발견 되었고 1명은 실종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31일에 떠나 무려 20여일이 넘는 시간을 바다에서 바람에만 의지 하여 망망대해를 떠돌던 젊은이들이 목마름과 추위 속에서 바다에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학술탐사, 좋은 목적입니다만 저는 과연 사람의 목숨을 담아낼 진 정 합당한 그릇이었느냐에 대하여는 회의적인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함부로 목숨을 거는 모험을 자처하지만, 결코 세상에서 사람의 목숨을 걸어도 합당할만한 일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명을 거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살피면 서 외형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사람들마다 어떤 목마름이 있 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모든 것이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듯이 보이는 사람들에게조 차 이러한 절실한 목마름과 갈급함은 보통의 사람들과 똑같이 존재합니다. 아니, 오히려 밖으로 평온해 보이는 사람들이 더 깊은 갈증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살아있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식상한 일상이 아니라, 무언가 자기의 내면에 있는 자아를 일깨워줄 수 있는 자극을 원합니다. 한마디로 바꾸어 말하면 목숨 걸 수 있는 일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여
자는 남자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혹은 일에, 아니면 신념이나 이념이라도 자신을 송두리째 던질 수 있는 확신을 찾는 갈증이 사람들 안에는 누구나에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의 노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시편은고라자손의 노래입니다. 고라는 레위의 아들, 고핫의 손자로 대를 이어서 여호와의 장막과 성전에서 문지기로 수종드는 가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순번을 정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적으로 본다면 다른 어떤 지파보다 하나님 가까이에 서 살아온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늘 시편을 지어 노래하기를, 자신들의 영혼이 갈 급한데 광야에서 시냇물을 찾는 불쌍한 사슴만큼이나 목마르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갈급함의 원인을 보니까 크게 세 가지의 원인이 있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뵈옵지 못해서입니다. 본문 2절의 하반절에 보니까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 에 뵈올꼬'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늘상 성전의 문지기로 성전 가까이에서 살아왔지만, 이들은 의무 와 책임 때문에 문지기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성전에 갔지, 하나님을 뵈오려는 예배자로서 성전에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상 반복되는 예배와 제사 속에서 오히려 식상 함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도처에서 사람들의 눈물과 찬양이 있었 지만, 고라자손에게 그것은 그냥 반복되는 일상일뿐 어떤 느낌도, 감격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메마르고 갈급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에도 의무와 책임으로 인하여, 혹은 대대로 내려 오는 습관에 의하여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시간만큼만 봉사하면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감동이 없는 사람은 그 가 아무리 훌륭한 일꾼이었다 하더라도 예배자로서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뵈옵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만 성공한 것입니다. 횟수가 몇 번이든, 시간을 얼마나 드렸든, 찬양을 부르다 목이 쉬었든, 기도하다 눈물 이 나왔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났느냐가 중 요한 것입니다. 가슴에 번지는 감동이 우러나야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 순간에 들어올 때와는 다른 무언가를 가슴에 안고 나가야 합니다.
울렁거림이 있는 예배, 살아 계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만이 우리들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사람들의 반응 때문입니다. 본문의 3절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지기라는 것이 참 어중간한 직무였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성전 에서 난처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막아 몰아내 야 하고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는 달리 아마 힘들고 귀찮은 일은 도맡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수고와 헌신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늘상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문지기 주제에 뭘 안다고 거들어! 잠잠히 서서 문이나 지키고 있 으슈." 이 세상의 누구도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 이 되어서 그들은 종일 서서 영적인 목마름을 체험해야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고라자손의 목마름을 조금 이해합니다.
내가 전도사로서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내 직무를 행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의 제사가 되어야 하는데, 제가 덜 되어서 가끔은 그것을 의무 로 행할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기도회를 인도하고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해서 사람들이 은 혜를 받는데, 나는 그 가운데서 영적인 메마름을 여전히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참담한 일인지 모릅니다. 꼭 내 자신이 이중인격자인 것 같고, 실제로 내 안에서 자꾸만 '거짓말 하지 마라! 너도 은혜 못받으면서 남들한테 가장하지 마라!'는 목소리와 끝없이 싸워야 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고라 자손이 힘써 성전에서 봉사를 했지만, 아침과 저녁으 로 눈물이 음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침에 나서려면 내가 또 이 걸 해야하는걸까라는 마음의 번민을 가지고 집을 나서고, 저녁이 되어서 집에 들어오면 받은 은혜는 하나도 없이 오직 사람들이 서 운하게 했던 것들만이 생각나 눈물지며 사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사람들의 얼굴이 더욱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는 은혜가 있으면 사람들의 얼굴은 작아지고, 오히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얼굴만이 가득차게 됩니다. 아직도 사람들의 평판에, 반응에, 행동에 좌우되고 있습니까 아직 도 누가 어떻게 했기 때문에 밤새워 우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고라자손일지도 모릅니다. 세번째, 과거의 추억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은 그들이 과거에 얼마나 기쁨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는가를 회상하는 이야기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오히 려 지금은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모르면 슬프지 않습니다. 맛을 보지 않은 사람은 먹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기가 막힌 맛을 본 사람은 꼭 그것이 다시 생각나게 되어있고, 만 일 그것을 다시 먹을 수 없다면 그때는 슬퍼지는 것입니다.
과거에 은혜를 체험하지 않았으면 앞으로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은혜를 체험했는데, 지금 그 은혜에서 자신이 멀 어져 있다면 그때부터 사람은 고민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은 신앙의 선봉에 서서 사람들을 이끌었던 추억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확신에 차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성 전으로 인도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과거의 추억이 되고 현실 은 메마름에 신음하는 자들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병중에 하나가 '옛날에' 병입니다. 만일 간증을 하고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현실은 별로 없이 '옛날에'만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과연 자신이 신앙적으로 건강한지를 진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현실의 역사입니다, 믿습니까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도 신앙이지만, 살아있는 신앙은 지금 무슨 일인가를 이루어내는 역사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과거의 응답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응답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기도했는데 어떻게 응답을 받았고. 그런 이야기는 침체된 현실에서 일어나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한 도입으로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안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지금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 메마름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하여는 지금 그 하나님과 살아있는 신앙의 관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으며. 여러분 안에 어떤 목마름이 있습니까 목마름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다고 합니다.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목마름 속에서 자 신의 소변을 받아 마시면서까지 목숨을 버티어냅니다. 그러나 나 중에는 더이상 버틸 수가 없게되면, 그중의 어떤 사람은 바다에 고개를 쳐박고 그 물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물은 물이지만, 마실수록 더 목마른 물. 그래서 그는 죽어가는 것 입니다. 세상에 목숨을 걸만한 가치의 일이 과연 있습니까 그것이 혹시 여러분의 목을 더 목마르게 하는 바닷물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공부가, 출세가, 외모가, 인기가. 오히려 여러분의 영혼 을 죽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고통스런 목마름이 있습니다. 습관적인 신앙생활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버립니다. 은혜를 받 지 못한 우리들이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에 좌우될 때 에 우리는 목말라 집니다. 그리고 과거의 신앙에만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현실의 충만한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오늘 고라자손과 같이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며 자신 의 영혼에 말해야만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심령속에 다 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는 넘치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주님은 요한복 은 4장에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분의 얼굴을 바라 고 기도하며 찬송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던 것, 나의 공부와 진로를 위하여 기도하던 것, 내 의무와 책임을 위하여 기도하던 것을 잠시 내려둡시다. 그 보다 먼저 구할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과같이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분을 만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내 심령의 갈망과 목마름을 주님의 능력의 손길로 치료받아야 합니다. 오늘 내 모습이 중요합니다. 어제는 지나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내 모습을 보십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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