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23:1-6)
본문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시인의 노래는 다윗 자신의 신앙고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며 고백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다양한 용어로 표현했습니다.예를들면 산성,방패,피난처,요새,피할 바위등 군사 용어도 있습니다.그런가하면 힘,능력,구원의 뿔,구원 등 영적인 용어도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는 “목자”라고 했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오는 은총과 축복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주관적 경험과 고백을 담은 시입니다.다시 말하면 내가 겪은 사건과 내가 받은 은혜를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그러기에 짤막한 6절 밖에 안되는 시 속에서 나라는 1인칭 표현이 13회나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시편 23편은 내 노래이며 나의 고백이며 나의 찬송인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찾아 보아야 합니다.
1.내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3절을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했습니다. 성형술의 발달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성형되고 있는가 하면 인조 미인이 양산체제에 들어 갔다고 합니다.돈만 있으면 최대한 신체의 약점을 성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감을 고를 때는 실물이나 최근의 사진보다는 돌 사진을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그것이 오리지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개나 고양이도 군살이나 주름을 빼고 지우는 성형수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형수술을 했다고 해서 인간의 육체가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영혼이 소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생(Revival)이란 낱말은 사역동사입니다.그 뜻은 살게하다,생명을 주다,회복시키다.구원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살려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육체는 유한하고 썩지만 영혼은 불멸이며 무한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라고 가르쳐 줍니다.영혼이 건강해야 육체도 건강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1920년대 후반 영국이 낳은 유명한 의사 가운데 에드워드 바크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그는 사람들이 앓고 있는 만성병을 재래식 방법이 아닌 새로운 치료법으로 고칠 수 있다는 이론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바크의 주장은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그는 개업의로 일하면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게게 똑같은 치료법을 적용하더라도 환자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결론은 환자의 부정적인 정신상태를 고쳐야 병도 고칠 수 있고 예방도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크는 그 사람의 병이 완전히 고쳐지려면 그 영혼이 고쳐져야 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바크는 사람들이 갖는 부정적인 감정을 일곱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습니다.그것은 공포,불확실성,현재에 대한 무관심,권세나 이념에 대한 지나친 집착,낙담과 절망,외로움,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과도한 관심 등입니다. 바크가 지적한 일곱가지의 부정적 감정들이 발전하면 영혼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바크의 이론과 영적 성장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공포심의 경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노라면서 겁내고 두려워하는 공포심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불신의 증거입니다. 주님은 풍랑 때문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왜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믿음이 있으면 공포심은 제거되는 것입니다.
둘째 불확실성 역시 영혼의 적입니다,앨빈 토플러는 다가올 미래 사회를 불확실성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 불확실성이란 없습니다. 도대체 뭐가 불확실합니까 죽을게 확실하고 죽은 후에 갈 곳도 확실합니다. 지상의 종말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날 것도 확실하고 내가 천국에 들어갈 것도 확실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지옥 갈 것도 확실합니다.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면 축복받고 성공할 것이 확실하고 거역하면 저주받고 실패할 것이 확실합니다. 이토록 명확한 확실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확실한 미로를 헤맨다면 이미 그 영혼은 믿음도 없고 병든 영혼인 것입니다.
셋째 현재에 대한 무관심도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래 지향적입니다.그래서 오늘 받은 복보다 훗날의 복이 더 크고 지금 행복보다 영원한 행복이 더 큽니다.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현세를 외면하고 삶을 등져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신다는 말씀을 믿노라며 무위도식하고,일하는 것을 죄악시하고,누군가가 거저 먹여주고 입혀주기를 바란다면,그것은 정상적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일수록 현실 삶에 철저해야 합니다. 남보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성실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정직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안 해도 되는 일을 우리는 해야되기 때문에 더 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민감한 역사 의식과 현실감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불신자보다 앞서가고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넷째 권세나 이념에 대한 지나친 집착도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 그리고 이념이나 사상에 목숨을 거는 것 등은 영혼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예수 믿는 것 말고는 지나치면 좋지 않습니다.음식도,운동도,여가도,오락도 지나치게 집착하고 정신을 뺏기면 안됩니다. 선진국일수록 주말병과 월요병이라는게 있습니다. 주말만 되면 모조리 걷어 치우고 여행을 떠나거나 자기 좋아하는 일을 즐기기 위해 안절부절 하는 것이 주말병입니다.월요병이란 주말을 실컷 즐기고난 후 피로에 지쳐 하품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주말과 월요일에 만든 제품은 불량품이 많다고 합니다. 지나친 집착이나 몰입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법입니다. 다섯째 낙담과 절망도 병원균이 됩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그것은 할 수 있다의 사람,할 수 없다의 사람,모르겠다의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고 미래지향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모르겠다든지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할 수 없다,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으면 장사도 안되고 교회도 안됩니다.그러나 할 수 있다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으면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낙담이나 절망은 삶도 피폐하게 만들고 신앙도 오염시키는 병원균이 됩니다. 여섯째 외로움도 영혼의 병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로 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가 지은 죄 때문에 고독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아담과 하와의 고독이나 외로움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겐 그 고독을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세계에는 외로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이유는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는 언약을 믿는 한 외로움은 내것이 아닌 것입니다. 일곱째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과도한 관심도 신앙성장의 방해요인으로 작용합니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부정적 관심을 의미합니다. 1950년대나 60년대만해도 기차가 지나가고 자동차가 지나가면 동네 아이들은 주먹질을 해대고 돌팔매질을 했습니다.그것은 일종의 부정적 관심이며 저항심의 표출이었습니다.기차나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저항내지는 도전심리가 그런 행동을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땡볕에서 일하고 있는데 너는 차타고 흙먼지 일으키며 달리느냐,에라 돌팔매나 받아라는 식의 의식구조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박수를 보내고 꽃다발을 보내는 마음, 사촌이 땅을 사면 축전을 보내는 마음,그것이 귀한 마음인 것입니다. 어느날 저는 거울 앞에 서서 갖가지 표정을 지어 보았습니다. 제가 눈을 부릅뜨면 거울 속의 그 사람도 일초의 오차나 표정의 변화없이 눈을 부릅뜨는 것이었습니다. 입을 벌리면 그도 입을 벌리고,고양이 상을 지으면 그도 고양이 상을 짓고,히죽이 웃으면 그도 웃고,너털 웃음을 웃으면 그도 그랬습니다. 저는 거기서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콩 심은데 콩 난다는 자연법칙은 거울 속에서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인생만사가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킵니다.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믿고 고백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 영혼이 건강하고 늘 새로운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4절을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수 차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소년시절 양을 공격하려는 사자와 싸워 이긴 적이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맞서 그를 쓰러뜨린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차례 블레셋과 싸워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사울 왕이 죽이려고 추적했을 때나 압살롬이 모반하여 공격해 올때도 그는 위기를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그리고 그가 그 때마다 얻은 결론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 가면 하늘을 찌를 듯한 고전 건물의 탑들을 볼 수 있습니다.제정 러시아가 세계를 주무르고 있을 때 전쟁에 한 번 이기면 그 기념으로 탑을 하나씩 건축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수많은 탑을 세웠던 러시아의 영화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믿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던 다윗과 그의 왕국은 오늘도 우리들 가슴 속에 우리네 고백과 신앙으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사자굴과 풀무불 가마 속에서도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바울은 멜리네 섬에서 독사에 물렸으나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마귀가 나를 해하지 못합니다.원수들이 나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시편 23편 1절-6절을 함께 봉독합시다.아멘.
1.내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3절을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했습니다. 성형술의 발달로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성형되고 있는가 하면 인조 미인이 양산체제에 들어 갔다고 합니다.돈만 있으면 최대한 신체의 약점을 성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감을 고를 때는 실물이나 최근의 사진보다는 돌 사진을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그것이 오리지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개나 고양이도 군살이나 주름을 빼고 지우는 성형수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형수술을 했다고 해서 인간의 육체가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영혼이 소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생(Revival)이란 낱말은 사역동사입니다.그 뜻은 살게하다,생명을 주다,회복시키다.구원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살려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그리고 육체는 유한하고 썩지만 영혼은 불멸이며 무한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라고 가르쳐 줍니다.영혼이 건강해야 육체도 건강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1920년대 후반 영국이 낳은 유명한 의사 가운데 에드워드 바크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그는 사람들이 앓고 있는 만성병을 재래식 방법이 아닌 새로운 치료법으로 고칠 수 있다는 이론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바크의 주장은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그는 개업의로 일하면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게게 똑같은 치료법을 적용하더라도 환자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결론은 환자의 부정적인 정신상태를 고쳐야 병도 고칠 수 있고 예방도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크는 그 사람의 병이 완전히 고쳐지려면 그 영혼이 고쳐져야 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바크는 사람들이 갖는 부정적인 감정을 일곱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습니다.그것은 공포,불확실성,현재에 대한 무관심,권세나 이념에 대한 지나친 집착,낙담과 절망,외로움,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과도한 관심 등입니다. 바크가 지적한 일곱가지의 부정적 감정들이 발전하면 영혼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바크의 이론과 영적 성장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공포심의 경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노라면서 겁내고 두려워하는 공포심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불신의 증거입니다. 주님은 풍랑 때문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왜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믿음이 있으면 공포심은 제거되는 것입니다.
둘째 불확실성 역시 영혼의 적입니다,앨빈 토플러는 다가올 미래 사회를 불확실성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 불확실성이란 없습니다. 도대체 뭐가 불확실합니까 죽을게 확실하고 죽은 후에 갈 곳도 확실합니다. 지상의 종말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날 것도 확실하고 내가 천국에 들어갈 것도 확실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지옥 갈 것도 확실합니다.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면 축복받고 성공할 것이 확실하고 거역하면 저주받고 실패할 것이 확실합니다. 이토록 명확한 확실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확실한 미로를 헤맨다면 이미 그 영혼은 믿음도 없고 병든 영혼인 것입니다.
셋째 현재에 대한 무관심도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래 지향적입니다.그래서 오늘 받은 복보다 훗날의 복이 더 크고 지금 행복보다 영원한 행복이 더 큽니다.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현세를 외면하고 삶을 등져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신다는 말씀을 믿노라며 무위도식하고,일하는 것을 죄악시하고,누군가가 거저 먹여주고 입혀주기를 바란다면,그것은 정상적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일수록 현실 삶에 철저해야 합니다. 남보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성실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정직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안 해도 되는 일을 우리는 해야되기 때문에 더 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민감한 역사 의식과 현실감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불신자보다 앞서가고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넷째 권세나 이념에 대한 지나친 집착도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 그리고 이념이나 사상에 목숨을 거는 것 등은 영혼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예수 믿는 것 말고는 지나치면 좋지 않습니다.음식도,운동도,여가도,오락도 지나치게 집착하고 정신을 뺏기면 안됩니다. 선진국일수록 주말병과 월요병이라는게 있습니다. 주말만 되면 모조리 걷어 치우고 여행을 떠나거나 자기 좋아하는 일을 즐기기 위해 안절부절 하는 것이 주말병입니다.월요병이란 주말을 실컷 즐기고난 후 피로에 지쳐 하품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주말과 월요일에 만든 제품은 불량품이 많다고 합니다. 지나친 집착이나 몰입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법입니다. 다섯째 낙담과 절망도 병원균이 됩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그것은 할 수 있다의 사람,할 수 없다의 사람,모르겠다의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고 미래지향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모르겠다든지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할 수 없다,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으면 장사도 안되고 교회도 안됩니다.그러나 할 수 있다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으면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낙담이나 절망은 삶도 피폐하게 만들고 신앙도 오염시키는 병원균이 됩니다. 여섯째 외로움도 영혼의 병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로 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가 지은 죄 때문에 고독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아담과 하와의 고독이나 외로움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겐 그 고독을 해결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세계에는 외로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이유는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는 언약을 믿는 한 외로움은 내것이 아닌 것입니다. 일곱째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과도한 관심도 신앙성장의 방해요인으로 작용합니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부정적 관심을 의미합니다. 1950년대나 60년대만해도 기차가 지나가고 자동차가 지나가면 동네 아이들은 주먹질을 해대고 돌팔매질을 했습니다.그것은 일종의 부정적 관심이며 저항심의 표출이었습니다.기차나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저항내지는 도전심리가 그런 행동을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땡볕에서 일하고 있는데 너는 차타고 흙먼지 일으키며 달리느냐,에라 돌팔매나 받아라는 식의 의식구조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박수를 보내고 꽃다발을 보내는 마음, 사촌이 땅을 사면 축전을 보내는 마음,그것이 귀한 마음인 것입니다. 어느날 저는 거울 앞에 서서 갖가지 표정을 지어 보았습니다. 제가 눈을 부릅뜨면 거울 속의 그 사람도 일초의 오차나 표정의 변화없이 눈을 부릅뜨는 것이었습니다. 입을 벌리면 그도 입을 벌리고,고양이 상을 지으면 그도 고양이 상을 짓고,히죽이 웃으면 그도 웃고,너털 웃음을 웃으면 그도 그랬습니다. 저는 거기서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콩 심은데 콩 난다는 자연법칙은 거울 속에서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인생만사가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킵니다.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믿고 고백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 영혼이 건강하고 늘 새로운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4절을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수 차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소년시절 양을 공격하려는 사자와 싸워 이긴 적이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맞서 그를 쓰러뜨린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차례 블레셋과 싸워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사울 왕이 죽이려고 추적했을 때나 압살롬이 모반하여 공격해 올때도 그는 위기를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그리고 그가 그 때마다 얻은 결론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 가면 하늘을 찌를 듯한 고전 건물의 탑들을 볼 수 있습니다.제정 러시아가 세계를 주무르고 있을 때 전쟁에 한 번 이기면 그 기념으로 탑을 하나씩 건축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수많은 탑을 세웠던 러시아의 영화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믿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던 다윗과 그의 왕국은 오늘도 우리들 가슴 속에 우리네 고백과 신앙으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사자굴과 풀무불 가마 속에서도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바울은 멜리네 섬에서 독사에 물렸으나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마귀가 나를 해하지 못합니다.원수들이 나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시편 23편 1절-6절을 함께 봉독합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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