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눈 (시139:1-6)
본문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고유한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비밀 속에는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교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비밀을 공개하기를 싫어합니다. 또한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가장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세 속에서 거짓과 어두움은 단절되지 않고 개인과 사회 속에 그 자리를 정당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비밀이 드러났을 때에는 사람들은 모두 다 합리화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존재를 감추어 버립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 있는 현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다릅니다. 자신의 과거와 비밀에 대하여 거짓되어 매달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 있게 드러내 놓습니다. 자신의 드러남에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와 용기와 기쁨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 계시며 가장 공평하게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 하나까지 가장 섬세하고 정확하게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자랑이며 우리 본재의 근거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여기에서 출발하며 삶의 모든 여정을 힘 있게 이끌어 갑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통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알려지지 않게 감출 수도 있고 더러는 자기 자신에게도 발견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생각을 통찰하십니다. 인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인간의 두꺼운 교만이 덮어져 있어도 우리의 하나님은 아십니다. 거짓과 편견으로 엉켜진 마음도 주님은 꿰뚫어 보십니다. 무의식 속에 심기어진 생각도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나다나엘을 보고서 마음의 간사함이 없음을 아실 정도로 모든 것을 가장 먼 관계일지라도 아십니다.
“(요1: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인간의 생각의 끝이 손에 닿을 수 없더라도 주님은 그 끝을 보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눈을 가리울 수 없습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감추는 자는 어두움과 죄악에 빠집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도 위선으로 자신의 자리를 합리화시켰을 때 우리 주님은 보고 계시었습니다. 그리고 나단을 통하여 죄에 빠진 다윗을 회개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의지를 꿰뚫어 보십니다. 그리고 바른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각을 통촉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멀리 계시기 때문에 내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든지 알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서근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생각 심지어 잠재의식까지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분 앞에서 무엇을 숨기려 하거나 악을 도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껍데기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보시며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이런 사실 앞에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욕심과 거짓으로 가리운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더욱이 모든 상황 속에서 불평으로 이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 더 진실하게 삶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아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오해와 편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잘 알고 계십니다. 순간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행동의 동기도 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본문은 우리의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익히 아신다는 말은 면밀하고 자세하게 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과 눕는 것을 아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낮의 활동 속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위를 아십니다. 빛과 어두움이 뒤섞인 삶의 자리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더욱 가장 어두워진 밤의 쉼터까지도 주님은 아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의 범위를 아십니다. 가장 지혜롭게 꾸미어진 행동도,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죄의 행동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빛의 성공의 행위도, 어두워진 밤의 역사도 주님은 가장 면밀하고 정확하게 아십니다. 하나님은 생각을 통축하실 뿐만 아니라 혀의 말들을 모두 아십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공중에서 산화되어 소멸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실 뿐 아니라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12: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순순한 동기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욕심과 편견으로 이루어졌는가 가장 정확하게 보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눈 앞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저자는 포위되어 있는 성읍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항상 둘러싸여 있어서 언제나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행위를 아시기에 우리는 가식 없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모든 범위에서 둘러싸고 계시며 우리를 보고 있음에 우리는 거짓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윗이 모든 대적하는 자들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환난 중에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호위해 주시는 안전하고 견고한 보장이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질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감찰하시고 익히 아시는 것은 그가 인간을 보고 계시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표현을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모의 몸을 통해 탄생시켰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창세 전부터 자신을 만드시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조성자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직 자신의 육체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조성되었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더욱 창조자이신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소유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굴러 다니는 돌맹이처럼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물건을 만들 때는 목적을 가지고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거룩하신 목적을 위해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구실을 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되 신묘막측하게 지으셨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형질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은혜를 신묘막측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언급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사회에서 소외되고 전혀 무가치하다고 생가하는 생명까지도 성도들은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당연히 인간을 지으시는 과정에서, 심지어 완성되지 않은 과정에서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의 책에 기록하였고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를 아시었고 그의 전능하심 속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모든 것을 가장 정확하게 아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아십니다. 인간의 이해와 역사의 자리와 도덕적 의식도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를 만드시고 예정하신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파괴된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에게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질을 만드시고 아셨기에 우리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가 가장 우리를 잘 아시기에 우리의 본질을 찾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혹은 우연히 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본분에 합당한 생활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룸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제보다 더 희망 있는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확신 있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장 깨끗한 마음으로 내일을 담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아주 오래 된 옛날의 우리가 아닌 창조의 그 모습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릇된 풍조에 말려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적인 모습이 아닌 내용 속에서 다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요,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을 인정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깨닫는 자만이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음이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 계시며 가장 공평하게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 하나까지 가장 섬세하고 정확하게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자랑이며 우리 본재의 근거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여기에서 출발하며 삶의 모든 여정을 힘 있게 이끌어 갑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통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알려지지 않게 감출 수도 있고 더러는 자기 자신에게도 발견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생각을 통찰하십니다. 인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인간의 두꺼운 교만이 덮어져 있어도 우리의 하나님은 아십니다. 거짓과 편견으로 엉켜진 마음도 주님은 꿰뚫어 보십니다. 무의식 속에 심기어진 생각도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나다나엘을 보고서 마음의 간사함이 없음을 아실 정도로 모든 것을 가장 먼 관계일지라도 아십니다.
“(요1: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인간의 생각의 끝이 손에 닿을 수 없더라도 주님은 그 끝을 보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눈을 가리울 수 없습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감추는 자는 어두움과 죄악에 빠집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도 위선으로 자신의 자리를 합리화시켰을 때 우리 주님은 보고 계시었습니다. 그리고 나단을 통하여 죄에 빠진 다윗을 회개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의지를 꿰뚫어 보십니다. 그리고 바른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각을 통촉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멀리 계시기 때문에 내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든지 알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서근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생각 심지어 잠재의식까지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분 앞에서 무엇을 숨기려 하거나 악을 도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껍데기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보시며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이런 사실 앞에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욕심과 거짓으로 가리운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더욱이 모든 상황 속에서 불평으로 이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 더 진실하게 삶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아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오해와 편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잘 알고 계십니다. 순간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행동의 동기도 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본문은 우리의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익히 아신다는 말은 면밀하고 자세하게 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과 눕는 것을 아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낮의 활동 속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위를 아십니다. 빛과 어두움이 뒤섞인 삶의 자리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더욱 가장 어두워진 밤의 쉼터까지도 주님은 아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의 범위를 아십니다. 가장 지혜롭게 꾸미어진 행동도,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죄의 행동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빛의 성공의 행위도, 어두워진 밤의 역사도 주님은 가장 면밀하고 정확하게 아십니다. 하나님은 생각을 통축하실 뿐만 아니라 혀의 말들을 모두 아십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공중에서 산화되어 소멸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실 뿐 아니라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마12: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순순한 동기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욕심과 편견으로 이루어졌는가 가장 정확하게 보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눈 앞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저자는 포위되어 있는 성읍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항상 둘러싸여 있어서 언제나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행위를 아시기에 우리는 가식 없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모든 범위에서 둘러싸고 계시며 우리를 보고 있음에 우리는 거짓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윗이 모든 대적하는 자들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환난 중에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호위해 주시는 안전하고 견고한 보장이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질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감찰하시고 익히 아시는 것은 그가 인간을 보고 계시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표현을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모의 몸을 통해 탄생시켰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창세 전부터 자신을 만드시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조성자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직 자신의 육체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조성되었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더욱 창조자이신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소유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굴러 다니는 돌맹이처럼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물건을 만들 때는 목적을 가지고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거룩하신 목적을 위해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구실을 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되 신묘막측하게 지으셨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형질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은혜를 신묘막측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언급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사회에서 소외되고 전혀 무가치하다고 생가하는 생명까지도 성도들은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당연히 인간을 지으시는 과정에서, 심지어 완성되지 않은 과정에서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의 책에 기록하였고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를 아시었고 그의 전능하심 속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모든 것을 가장 정확하게 아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아십니다. 인간의 이해와 역사의 자리와 도덕적 의식도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를 만드시고 예정하신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파괴된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에게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질을 만드시고 아셨기에 우리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가 가장 우리를 잘 아시기에 우리의 본질을 찾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혹은 우연히 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본분에 합당한 생활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룸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제보다 더 희망 있는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확신 있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장 깨끗한 마음으로 내일을 담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아주 오래 된 옛날의 우리가 아닌 창조의 그 모습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릇된 풍조에 말려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적인 모습이 아닌 내용 속에서 다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요,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을 인정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깨닫는 자만이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음이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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