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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게 살고자하는 사람의 갈등 (시10:1-18)

본문

가.의인의 갈등(10:1,2)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하여서는 쉬운 해답이 없음이 오랜 시일을 통해서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악이란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은다고 말합니다(힌두교등). 또 반면에 선과 악은 대등한 능력을 가지고 무한정 존재한다고 주장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3세기의 마니교와 B.C. 6세기경의 조로아스터교). 심지어 어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악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즐긴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새디즘). 어떤 이보다 한술 더 떠서 하나님은 유한하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힘에 한계를 느끼시므로 악이 창일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원리는 인간들이 최선을 대해서 짜낸 선과 악에 대한 이론들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만족한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은 악이 존재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성경에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절)라고 절규하는, 악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에 대해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 상당한 능력을 가졌다든지 아니면 영원히 존재한다는 말은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입니다. 제한적인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에는 “어느 때까지이니이까, 언제까지 이런 악이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겠나이까, 답답해서 죽겠나이다”등의 한탄이 나올만도 합니다. 실제로 구약에는 그렇게 한탄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하박국이라 하겠습니다. 하박국은 정의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래서 악한 일을 계속하면서도 하나님의 따끔한 매를 맞거나 섬멸되지 않는 자기 백성이나 이웃 나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했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1:3,
4).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합1:2절상). 성경은 악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시인만 하지 않고, 그 악의 세력은 시작된 때가 있고(창3장 및 겔28:14-19), 멸망될 것이 확정되었고(마25:41, 46, 계20:11-15), 지금도 악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멸망되어 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악이 소멸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16:19,20).
그렇습니다1 우리가 하나님의 시안을 갖고 선과 악을 볼 때에, 악의 세력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원통함과 억울함과 한(恨)과 분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도 아마 그런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내가 어쩌면 이(악에 대한 해결)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하나님의 임재함을 느끼고 하나님의 시안으로 볼 때)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73:16,17). 하지만 현실을 보거나 악의 세력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 우리 속에는 깊은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지금 뚝 꺾어 버리시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그 악의 세력 때문에 연약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을 볼 때에는 우리의 의분을 감추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아마도 아담이 타락한 이후, 악의 세력이 이 세상에 들어온 이래, 의인 아벨이 악인 가인의 돌에 맞아 무참하게 죽어간 이래 악의 세력에 피해를 입은 한(恨)에 맺힌 소리가 무수히 하나님의 귓전을 울렸을 것이고,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억울한 소리를 못들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이를 허용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서는 감히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세력을 잡고 계속 그 세력을 온갖 방법을 통해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에 대하여서는 울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처럼 우리도 이렇게 토설하지 않는다면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2절). 한 사회에 마치 대기 오염의 한계치가 있듯이 한(恨)이 한계치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 물론 어느 사회이건 어느 정도의 한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의가 이루어지는 사회라 해도 각자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원한을 품게 될 여지는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타락한 세상에서 살 때에 이쯤은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악의 세력이 인간의 존엄성을 함부로 파괴해도 이에 대한 공정한 대책이 강구되지 못할 때는 문제가 다릅니다. 또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는 빈도가 잦을 때에, 비록 끝끝내는 공의가 실현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지금은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악인의 표면적 득세(10:3-11)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 높고 깊어서 악인은 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표면적인 득세가 실제적이고 영구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의기양양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악인의 태도와 행동은 두 가지 대상을 향해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 누구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한다면 감히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 사상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은 계셔도 종이호랑이로 게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필수 조건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누구든지 악을 마음대로 행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선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부인해 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공산주의가 그 표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영적인 존재들을 철저히 부인해 버렸습니다. 그들의 의식 구조에 있어서 “하나님은 죽었다.” 그 다음 그들은 함부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육백만 명이라는 유대인을 끔찍한 방법으로 죽일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상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가장 무서운 사상이며, 가장 위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3,4절).
2.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 주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 중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바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마18:6-10). 그러나 하나님을 그 사상 속에 지워 버린 사람은
첫째로,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잘못 생각합니다.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6절)고 장담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포학을 행합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7-10절).
셋째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악한 행동을 보지 못하고 계시다고 합리화시킵니다(11절). 오늘날도 선과 악의 문제에 관한 한 시편 기자가 살던 때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하여 함부로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은 바로 이런 세대에서 그렇게 되라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악이 없고 어두움이 없고 부패한 인간이 없고 모두가 빛과 소금이기 때문에 빛과 소금의 역활이 요구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문제가 다릅니다. 지금은 빛과 소금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약한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들의 어두운 면을 우리의 빛으로 비추어 몰아내고, 부패하는 것들을 우리가 소금처럼 녹아서 방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자 하니 인간이기에 종종 갈등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다. 의인이 취해야 할 적극적인 자세(10:12-18) 순간순간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아프고 따라서 하나님께 마구 호소할 대가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악인이 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악과 싸울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남미의 해방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목적은 좋았지만 방법이 나쁘므로 결과적으로 악인과 큰 차이가 없는 격이 됩니다.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 소위 왕국신학(Kingdom Theology)입니다. 아직 누가 중심 인물인지도 모르고 충분히 쓰여진 자료도 없으나,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는 새로운 악과의 대결 방법이 곧 왕국신학입니다. 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통치하시므로 우리가 기도 등을 통해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순전히 영적인 차원에서 다루려는 방법입니다. 이것도 건전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영적인 면만 아니라 물질적인 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적극적인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믿음 악에 대항해서 싸우는 의인은 믿음을 끝까지 가져야 합니다. 사도 요한도 핍박받는 상황 가운데서 의인이 세상의 악을 이기는 방법은 포력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5:4,5).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14절). 마치 악인이 그 마음에 이르기를 11절에서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고 한 말을 들으시고 얼토당토 않는 말이라고 논박이라도 하시듯이 아주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비록 악이 세력에 의해 마음대로 조종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의인들까지도 이를 보고 과연 하나님께서 알고 계실까 하는 의혹을 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낱낱이 보고 계십니다. 하나도 하나님 앞에 숨겨질 것이 없습니다. 이단의 지도자들이 좇는 무리를 속이기도 하고 세뇌도 시켜 판단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할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를 모두 보고 계십니다. 악덕 사업주가 세무소 직원의 눈은 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양심없는 정치가들이 국민의 눈은 속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지금도 불의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피동적으로 세상의 처사를 방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라고 주석가 프론이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공공연하게 속이고 의기양양해 하는 것을 보고 분통이 터질 것 같아 하는 의인들이여, 하나님을 더 깊이 믿으라, 하나님께서 그 악도 보았다는 사실을 믿으라. 그리고 그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드리라.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12절). 악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하라. “우리가 가는 길이 매우 어둡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나간 뒤를 돌이켜 보면 빛이 비취는 밝은 곳도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빛이 지금도 비취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께서는 보고만 계시지 않고 도우시기도 하십니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14절하). 우리가 호소할 때마다 매번 주께서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는”(14절하)것을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한편 생각하면 그렇게 기계적으로 호응하시는 것도 위험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짧은 안목을 가지고 어떤 악한 사람을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시다. 조그만 더 기다렸다면 그가 그의 악한 행위를 회개하고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었는데 우리가 참지 못해서 그가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보는 것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의 편견이었지 올바른 것이 아니었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청하는 대로 도와 주시는 것도 위험합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요청하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대로 도와주심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은 사실을 체험적으로 깨달았을 때, 이렇게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9롬8:31,32).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악이 창일한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인간인 이상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18세기 영국의 이성론자(Deists)들은 하나님께서는 시계의 태엽을 감아 놓듯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더이상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이에 대해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16절).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창1:1) 지금도 통치하시고(시103:19), 영원토록 계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요한 사도는 요한게시록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1:8). 우리는 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통치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악의 세력이 순간적으로 특세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악의 세력이 순간적으로 득세하고, 악이 선을 속인 것처럼 생각하고 우쭐댈 대에도, 어두움의 세력이 노도와 같이 휘몰아 칠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통치하고 게시고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계22:7)라는 약속이 곧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꺽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악은 3세기경에 나타난 마니교에서 주장하듯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악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였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이미 심판되었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도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으로 그 끝을 맺을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악한 영적 세력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패하였음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십자가로 권력들과 권세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개선 행렬에 따라오게 하여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골2:15표준신약전서). 물론 주께서 재림하시어 최종적으로 이들을 처벌하실 때까지는 아직도 악의 세력의 기세가 완전히 꺽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날이 올 것을 믿어야 합니다.
2.악과의 대결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미루어 버리고 살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악과 대항하여 싸우며 살아갑니다.
첫째로, 기도하는 일을 통해 악과 대항할 수 있습니다. 리스 하워드는 나치 당시 영국의 윌스 지방의 한 신학대학의 학장이었습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날들을 학생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나치 세력을 하나님께서 꺽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보냈습니다. 저 유명한 덕크릭 철수작전 때에도, 또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에도 이들은 하나님께 절규하면서 날을 지새웠습니다. 악의 세력이 이 세상을 뒤덮는 것을 적극적으로 기도로써 대항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악의 세력과 대항하여 기도로 골방에서 싸워야 합니다. 국가와 국가간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도, 정치적인 악에 대해서도, 정치적인 악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악에 대해서도,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시편 기자처럼 절규해야 합니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15절). 프론이라는 주석가는 이 구절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대개는 악에 대하여 용서해 달라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악인과 그 악의 세력이 이 세상에서 없어져서 누가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악인의 악을 꺽으소서”의 주어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고 없애시어 더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게 해 달라는 뜻이 됩니다. 악에 대한 이런 적극적인 자세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둘째로, 주께서 하시는 일에 참예함으로써 악과 대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선한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아무 일이나 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방법대로 악을 꺾고, 악에 대하여 거절하는 일은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비록 이익이 적게 남아도 나쁜 물건을 거절하고 좋은 물건을 파는 것으로 악을 대항할 수 있습니다. 사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피고용인들에게 적절한 임금과 그 복지를 향상시켜 줌으로써 악한 착취욕과 대항할 수 있습니다. 제조업자들은 나쁜 재료를 써서 이윤을 많이 남기려는 악한 마음을 버리고 인간에게 이로운 재료를 씀으로써 악과 대항할 수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으려는 악한 정권욕을 버림으로써 악과 싸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와 같이 조용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악과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이 각계각층에서 더 많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악의 세력은 그 위력을 잃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우리의 힘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주시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지 않고는 우리가 이를 능히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악의 물결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오지 않는다면, 악의 물결이 이 사회를 너무 거세게 휩쓸어 갈 것이고, 우리가 경제적인 부흥을 한다 해도 도덕적인 부패 때문에 우리 후손들이 마음놓고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최근 우리 주위에는 악의 세력이 너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별로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사는 의인들은 갈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적당히 살아가면 되지”라고 생각하든가, 아니면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는 이미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도 얻었고, 사업도 괜찮게 되는데 뭐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면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우리 사회 속에 날로 악의 세력이 더 팽창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계속 갈등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의인 노아가 하나님을 위해 세상의 조류을 억행했듯이, 의인 아벨이 악의 세력과 같이 되기를 거부하여 희생되었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악과 전적으로 대항하며 이렇게 기도하며 살아야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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