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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유, 참 해방 (시102:18-28)

본문

우리 나라가 해방된 지금년으로 50주년이 되었습니다. 광복절만 되면 생각 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크신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광복절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힘이 있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싸워서 얻은 것도 아니고 또 작전에 성공을 거두어서 이긴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힘도 없었고, 전쟁답게 싸워보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8.15를 생각하게 되면 본문 말씀이 생각납니다.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작정한 자를 해방하신다.” 하나님은 이 백성의 탄식을 들으셨습니다. 그때 우리 민족은 얼마나 탄식했습니까 앞 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라고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을 때입니다. 힘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고, 방법도 전무했던 그런 불행한 때였습니다. 그때 이 나라는 완전히 일본화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탄식을 하면서 기도를 했고, 절망하면서 한숨을 내쉬었습니까 이것이 그 당시 우리 나라의 암담하고 참담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한숨을 들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작정한 자를 해방하신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의 아픔을 아십니다. 친구가 몰라 줘도, 부모가 몰라 줘도, 형제가 몰라 줘도 하나님만은 고통당하는 자의 아픔을 아십니다. 아시는 것뿐이 아니고 그 해결책까지도 제시해 주십니다. 잠언 5:21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1을 보면 하나님은 제일 좋은 길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길을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도 길을 만드시고, 바다에도 길을 만드시며, 길 없는 곳에도 딜을 내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이 어느 곳을 보아도 꽉 막혀 길이 없어 보일 때, 그래서 찬식하고, 절망하고, 염려할 때도 하나님은 그 절망 속에서 길을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안전하게 걸어가게 하십니다. 이 같은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고 길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며 사형 선고 당한 자같이 탄식하는 자의 소리를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역사 철학자 헤겔은 “세계를 움직이는 정신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광복절만 되면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과연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이시구나하는 생각입니다. 광복절만 되면 하나님의 철두 철미한 보호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보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한국 사람들처러 수호신을 좋아하는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마을 어귀에 장승를 세워 놓았습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동네를 지켜 주고, 악귀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집에는 더줏대감이 있고, 바다에는 용왕신이 있고, 산에는 산신령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연초가 되면 그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한 해 동안의 수호를 기원했습니다. 이것은 연약한 인간의 의지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들이 인간의 안정된 삶과 안녕을 제공해줄 리가 없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렇다고 웃어 넘기고 있지만 사실 현대인들은 더 발전된 의지 시낭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대형 음식점마다 거의 예의 없이 부적들이 붙어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문간마다 부적이 붙어 있습니다. 방마다 부적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것들이 재해를 막아 주고, 액땜을 해준다고 믿습니다. 우리 민족이 압박을 당하고 눈물을 흘리며 짓눌려 유리 방황할 때 우리를 지켜 주시고 자유를 주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 민족은 알아야 합니다.
8.15해방의 기쁨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 민족은 알아야 합니다. 그 근거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시102:19)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내려다 보시고 굽어 살피사.” 왜 내려다 보시고 굽어 살피셨느냐 하면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지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민족은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시던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댐이나 만들고 첨단 과학 장치나 만들면 그것들이 천재 지변을 막아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의 해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가뭄을 과학 영농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해결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우리는 물론 댐을 만들어 수위를 조절하고 과학 영농을 개발해서 가뭄도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인간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새삼스럽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회고해 보면 과연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보호자이신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8.15만 되면 우리 조상들의 숭고한 정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막강하던 일본에 대항하면 죽을 것이 뻔한 줄 알면서도 맨주먹으로 항거했던 우리 조상들의 정신과 용기가 얼마나 숭고하고 위대합니까 나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옛날 사람들이 오늘의 현대인들보다 모든 면에서 앞섰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정신으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그리고 용기로 보나 오늘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세련되었다고 생각합닏. 그 옛날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활동했던 것을 보면 얼마나 순박한지, 그 용기가 중후하기까지 합니다. 총을 가진 사람들에게 맨주먹을 가지고 대항했습니다. 생사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항거했습니다. 압박하는 사람들에게 무저항의 정신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싸우면 분명 손해가 주어질 줄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들을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구한말 나라가 기울고 나라의 운명이 쇠잔하여 갈 때 도처에서 안재들일 분골 쇄신하여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때로 자결하는 사람도 나타났습니다. 너무 분해서 분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끝까지 정절을 지키면서 일편 단심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같은 민족을 외면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들의 눈물과 울부짖음을 하나님은 굽어 보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간 옛난 그 사람들의 모습에 비추어 오늘 현대인들의 의식 구조를 비교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변절을 밥 먹듯이 하고 조그만 이권만 있으면 공무원도, 교육자도, 정치인도 이성을 잃었습니다. 배반과 배신과 속임이 난무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붙잡아다가 사고 팔고 합니다. 여기에 무슨 정신이 있고 애국이 있고 민족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 옛날 맨주먹으로 압박자들을 향해서 항거하던 그들의 모습을 보면 숭고하리 만큼 순박한 정신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그래도 좀 유식했고 형편이 좋았던 사람들은 해외로 망명을 해서 나라 밖에서 싸웠습니다. 그들은 그래도 몸의 자유는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라 안에서 그래도 지조를 지키고, 살아가려고 숱한 고초를 감내해 가면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고난은 쉽게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이 나라에 소망을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8.15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숙연히 이 같은 이름 없는 초로들의 순전한 정신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네 번째로 8.15만 되면 우리는 자유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자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자유 없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제일 가는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시거나 박탈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강제로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피조물인 나는 그를 믿을 수 있는 자유도 있고, 불신할 자유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자유까지 우리 인간드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이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시는데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속박하고 학대하는 것을 어떻게 용납하시겠습니까 자유는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자유가 이렇게 소중한 것인데도 그 자유의 값을 모르는 사람이 그 자유에 대한 소중함을 알겠습니까 자유는 책상 머리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자유를 위해서 수고하고, 싸우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눈물을 흘린 사람만이 그 값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8.15 해방이 주어지던 날 온 나라가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어떤 역사가는 그날 “동네의 개들도 좋아서 뛰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뜻이 있는 일본인들조차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 공짜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마음 놓고 먹고 마시고 놀고 방종하는 것이 자유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해방 직후 이 나라는 온통 먹고 마시고 싸우느라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가 “해방 직후 이 나라는 무질서로 가득 차 있었다”고 했습니다. 자유가 뭔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진정 자유의 값을 알고 가치를 알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서 투쟁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자유를 위해서 투쟁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자유를 위해서 참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 귀중함과 값을 아는 사람과 그것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이라야 그 값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미술품 경매가 있었습니다. 값이 비싼 그림 한 점이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누구의 그림인지조차도 모르는 그런 그림입니다. 파장쯤 되어서 그 그림은 15달러의 헐값에 팔렸습니다. 얼마 후에 알고 보니까 그 그림은 옛날 희랍 사람이 그린 그림인데 “애굽으로 가는 거룩한 가족”이라는 그림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난 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17세기 이탈리아에서 도적맞은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경매장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그림에 대해서 알아 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그것을 발견한 사라이 5만 달러에 다시 사 갔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한시만 일입니까 5만 달러짜리 그림을 단돈 15달러에 팔아 먹은 사람도 한심하고, 그것을 또 5만달러에 사 간 사람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같은 사람드은 이렇게 값비싼 그림을 소유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무지하고 값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행복이 무엇입니까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가치를 깨달음에 있습니다. 번쩍인다고 다 금이 아닙니다 웃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 기쁨이 아닙니다. 가치는 돈으로 다 계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값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값을 아는 사람은 방탕하지 않습니다. 남용하지도 않습니다. 지질서를 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값을 알기 때문입니다 8.15 기념 주일을 맞이해서 이 자유가 어떻게 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졌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섯 번째로 8.15만 되면 하나님이 왜 우리 나라를 지켜 주셨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돈독한 신앙을 수호하는 나라로 살아 남게 하시기 위한 것 아니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볼 때 그래도 신앙적으로 소망이 있는 나라는 우리 나라뿐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복음이 처음 출발할 때 팔레스타인에서 구라파로 전해졌습니다. 복음은 다시 구라파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갔고, 그 곳의 선교사들이 아시아로 건너와서 이 땅에도 복음이 전파게되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팔레스타인은 고집스럽게도 유대교를 고수하고 기독교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또 구라파의 교회들은 이미 불이 꺼진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구미의 교회들도 잠이 들어 있는 형편입니다. 해마다 교임 수가 줄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세계 복음화의 사명은 우리 나라로 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아시아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인도가 7억 인구의 힌두교 국가입니다. 중국이 10억 인구에, 공산주의 정신에 물들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가 1억 인구에 회교 국가이고, 일본은 1억이 넘는 인구에 잡신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한국만은 100년 기독교 역사 동안 신구교를 합해서 천만으로, 전체 인구의 1/4이라는 수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거기다 우리 민족은 이미 혹독한 훈련을 다 마친 상태입니다 5천 년 역사 가운데 고난이라는 고난은 모두 겪은 모진 생명력과 의지력을 지닌 민족입니다. 청나라, 당나라, 몽고, 일본 등으로부터 압제란 압제는 모두 받아온 민족입니다. 거기다 6.25라는 비극을 통해서 200만 명이나 죽는 참상도 겪어 낸 민족입니다. 또 기근과 가난도 겪어 본 민족입니다 대원군 때는 일만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고, 일제 때와 6.25 때에도 수천 명의 순교자가 발생한 나라입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이력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무슨 섭리와 뜻이들어 있지 않느냐 하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을 혹독하게 훈련하실 때는 거기에 무슨 섭리가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맞아서 우리들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며 이 날을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부강한 나라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는 그것을 생각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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