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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못가더라도 법은 지키자 (시119:97-104)

본문

옛말에 '앞으로 가나 뒤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오늘 날의 우리의 가치관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 '서 울은 못가더라도 바로 가자'고 말씀하고 싶다. 왜 바로 가야 하는가. 우리는 이익 사회에 산다. 내 이익을 위해서는 신의도 버리고 약속도 어기고 법도 어기고 부 모님이나 스승, 위에 있는 사람에게 배신하거나 불순종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회가 지나치다. 해도 너무한다. 오는 17일이 제헌절인데 오늘의 이나라는 국회의원만 있고 국회는 없는 상태가 벌써 한달 이상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그러고도 언제 정상화될지 기약이 없다는 점이다. 나라 형편은 급 박한데 정치인들은 당리당략에 눈이 어두워 국회야 어찌 되든 오불관언이다. 국 회법대로라면 5월25일에 후반기 국회 의장단을 선출하고 원(院)구성을 마쳤어야 했다. 그러나 야당의 원내 과반의석이 무너지지 않자 여권은 64지방선거 이후 로 그것을 미뤘다. 그러고도 여의치 않자 이번엔 721재보선 뒤로 또다시 원구 성을 미루고 선거에 매달릴 모양이다. 국회부재상태가 두달째인 마당에 이를 제쳐두고 정치권이 선거판으로 달음질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우리는 지난주 국회 정상화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여야의 대승적 타협을 촉구한 바 있다. 그러나 후반기 국회 원구성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는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하고있다. 국회부 재의 불법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의무는 다하지 않고 무슨 낯으로 표를 구하는 선거운동에 나서겠다는 것인지 어이가 없다. 어느 청년이 목사님과 함께 차를 타고 여행을 갔다. 그 청년은 "목사님 저는 십 계명을 싫어합니다. 십계명에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많습니까"하면 서 십계명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했다. 목사님은 어떻게 대답할까 하고 생각하는 데 바로 앞에서 이정표가 나타났다.'동쪽은 00이고, 서쪽은 00이다'라는 이정표 를 보고 목사님은 자기들이 가야할 목적지와는 반대로 차를 꺾었다. 깜짝놀란 청 년은 목사님 그쪽이 아니고 이쪽이라고 소리쳤다. 목사님은 "이 사람아, 내 마음 대로 가면 되지 뭘 그래" 하며 암시적인 대답을 주었다. 자 빨간 신호, 파란 신 호가 귀찮게 느껴집니까 누구를 위한 신호입니까 법이 누구를 위해서 있느냐 말이다.
1. 법(法)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들의 사회적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제한하려는 인간 들간의 규약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법의 재제를 받게된다.
그러므로 법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수 없다. 법질서는 상 호간의 존중이며, 약속이기에 더욱 값진 일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서로 법을 무시하는 법질서의 상실로 오히려 서로가 고통 을 받게 된다. 법은 지켜져야만 한다. 특별히 제헌절을 맞이하며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영원한 새 법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제의 압박 속에 살던 한민족이 해방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법을 만들었지만 그 법은 결코 완전하지 못했으며 정치인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법 을 바꾸기도 하고, 폐지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국민들은 법 자체를 불신하게 되 었고, 법보다는 힘의 우위와 부정부패가 난무하였다.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이러 한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다. 법질서가 엄연히 존재하는 데 적당주의와 안일함으 로 편법적인 행태를 해왔기에 오늘날 준법투쟁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법은 지키기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해 법이 존재하는 것이다.(마가2:27)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참된 법의 나라 바로 그 나라가 참 터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공동체가 살기위해서 지키는 것이 법이다. 사실 법적인 질서 유지를 위하여 설정된 국가의 외적 강제력의 발동이 없다면 우리 인간들은 서로 무서운 생존경쟁의 생지옥 속에 떨어질 것이며 너도나도 못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법적 강제는 우리 인간들의 죄때문에 필요한 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빌라도 법정 앞에서서재판을 받으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죽기 3일전에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전혀 다른 두나라. 지상의 도시 와 하나님의 도성의 만남이었다. 교인들로부터(특히 젊은이들) 제일 많이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었습니까 하는 질문이다. 만들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선악과를 있게 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데 그것을 없게는 하실 수 없었나요 하는 질문이다. 저도 역시 하나님께 여쭤보고 싶은 심정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이 세상을 섭리 하시고 통치하신다. 때로는 심판하시고 또 구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세게에도 엄연한 법이 있다. 하나님의 세계의 법을 간 단히 한마디로 말한다면 율법과 은혜이다. 율법과 은혜의 질서, 그 신비로운 조 화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율법과 은혜는 극과 극의 관계로서 정반대의 성격인 것 같다. 즉, 율법이라고 하면 차갑고 매섭게 느껴지고, 은헤는 따뜻하고 안온하게 느 껴진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다. 율법과 은헤는 온전히 조화되고 또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우리도 때로 깊은 신앙 속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나타나고 한사건 속 에 계시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무서운 진노 속에서 계시되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율법과 은헤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을 인간들의 방법대로 분석해 본다면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자연법칙이다. 온 우주는 자연법이라고 하는 법칙에 의해서 다스려지며 그 속에 법과 질서가 있다. 또 하나는 보이지는 않으나 이 세상의 모든 생물 세계에 있는 본능의 법이다. 생존본능, 의식본능, 귀소 본능 등 생물 세계는 본능에 의한 질서와 법이 엄 연하고 그 속에 하나님의 법이 살아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로 인간은 그보다 좀더 높은 차원에서 인간대로 양심의 법을 지녔다. 즉, 이성의 법이다. 사실 교도소나 경찰이 무서워서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가 하나의 마음의 법, 양심의 법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기 이름 석자를 못쓰는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에는 법이 있다. 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좀더 높은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의 법을 지니고 있고 성령님의 법을 지니고 있다. 즉, 사랑의 법, 말씀의 법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 이상의 법들을 다시 종합해서 둘로 나누면 하나는 자연론적 법(기계론적 법)이다. 이 법은 불가피성이요, 책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법은 인격적 인 법으로서 은혜와 율법이 조화된 법이다. 이 두가지 법(즉 모든 법)은 하나님 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에 근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법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런데 인격적인 법에서 문제가 있다. 다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하겠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으신 뜻, 즉 선악과를 우리에게 주신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임마누엘의 상징이다. 하나님이 우리 생활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 신다는 뜻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상징적으 로 보여 주시는 말씀의 계시다. 동시에 그것은 계약이다.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계약이다. "따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계약이다. 반대로 먹지 않으면 영원히 살리라. 약속이다. 이것은 인격과 인격 사이의 인격적인 약 속이다. 인격적 관계이기에 여기에 있고 선택이 있고 여기에 자기 나름의 존재 의식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계약을 어기고 따먹은 자는 꼭 변명을 한다. 왜 이것을 만들어 놓았으며 먹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느냐, 또는 만들지 않을 수는 없 었는가 하고 묻다. 마치 강아지 목에 사슬을 맨 것처럼 해서 못 따먹게 하든지, 아니면 철망을 쳐서 들어갈 수도 없게 만들지 않았느냐고 불평이다. 스스로 자기 존재를 강아지로 하락시키는 것밖에 안된다.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다르다. 못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안 하는 데 문제가 있다. 여기 이 자율적인 것에 인간다움이 있고 존재가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랑한다.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먹지 않는다. 갈 수도 있고 안 갈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간다. 그래서 인간이고 존재됨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범죄한 자나 타락한 자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한다. 그 순간에 벌써 비인간화되고 존재가 부정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불가피했다고 한다면 나의 존재는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서 우리 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갈 수도 있고 안 갈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가운데서 이 말씀의 계약을 지켜 주기를 원하고 계신다. 여기에 은혜 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라의 법을 놓고 보더라도, 법이 누구를 위해 지키는 것입니까 내 자유를 위해 지키는 것이다. 간혹 나라의 법이 잘못되어 어떤 특정인 몇 사람을 위해 있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진국의 경우이고, 선진국의 국민은 법이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 양심을 위하여, 내 자유를 위하여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인격자요, 그것이 바른 인간의 의식이다. 그래서 지혜 로운 사람은 법을 지켜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못된 사람은 법을 빠져 나가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 어떻게서든지 법 자체에 도전하려는 생각을 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전혀 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는 전혀 다르게 작용하는 법 아래 놓여 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경찰의 구속을 받지 않는 대신 집에서 부모의 회초리 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아이가 말을 잘 들을때는 아 버지가 미소를 짓지만, 반대로 제멋대로 행동할 때 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리고 매 를 드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존중하고 믿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어려운 듯이 보이나,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 에 순종하는 동안 마음 속에는 청결한 양심이 생기게 된다.
2. 하나님의 법 오늘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 까 어두워질까 두려워 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므로 영혼의 등불을 밝혀 나갑시다. 로마서 7장 전반에 걸쳐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율법의 문제를 신랄하게 논거 한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이 선한 것을 내가 안다는 말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죄인이어도 율법은 선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죄를 짓지 아 니한 사람이 하나도 없지만(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 것이다. 내가 죄인이 되더라도 율법 자체가 선한 것은 끝가지 선하다고 고백할 수 있 어야 한다. 로마서 7장 10절에 말한다. "생명에 이르게 할그 계명이 내게 대하 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 되었도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이 귀 중한 법이 결과적으로 내게 대하여는 (죄인에 대하여는) 부득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법이 되어 버렸다고 말씀하신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법 을 주셨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양심, 이성이다.
그런데 이 법이 인간들의 타락과 함께 자꾸 희미해지고 깨진 그릇처럼 원형을 찾을 수 없게 변질 되어 버렸다. 이 때에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양심과 법을 바로 잡기 위하여 모세를 통해서 법조문화(성문화)해서 십계명을 주시고 율법을 주신 것이다. 십계명 이 주어지기 전에도 법은 있었다. 이제 십계명을 주셔서 그들의 마음에 있는 법 을 깨우치려 하시는 것이다. 법의 근본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자. 법의 원 정신은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다. 법의 근본은 사랑이다. 그렇게 주어지고 그렇게 받고 그렇게 믿고 나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종 교개혁자들은 특별히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마다 십 계명을 해석한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대표자인 마틴 루터는 카키즘이라고 하는 그의 책 가운데 십계명을 해석하고 그 해석한 바를 교인들에게 암송하게 하 고 그대로 살아가라고 훈계했다. 왜 십계명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깁니까 그 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십계명이 주어진 곳에 애굽이 아니고 광야이다. 애굽에 있는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며 이것을 지키면 산다. 복받는다가 아니고, 이미 애 굽에서 광야로 홍해를 건너 구원해 놓으시고 "내가 너를 구원한 하나님이다. 그런고로 이 계명을 지키라" 즉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로 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법을 지켜야 하되 특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적인 뜻에서 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 즉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하고, 믿음으로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 게도 죄인들은 법 자체를 나무라고 형벌의 의식에 매인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 때문에 있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한다. 세상의 법 은 민주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절대적이다. 예수님은 이 법을 지키셨다. 그리고 완성하셨다. 법의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사랑은 모든 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 하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로 법을 완성하셨다. 진실로 영원한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법은 어떠한 법인가 우리는 이 법을 기대하고 바라본다. 참된 법은 사랑의로 실천될 때 진정한 가치가 있어진다. 기독교인의 법은 이 웃사랑과 하나님 사랑하는 그것이다.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다.
3, 올바른 방법으로 나아가자. 기독교인은 천국의 시민인 동시에 이 세상 나라의 시민이다. 그는 천국의 율법 에 속한 사람이면서 이 세상 국가의 법률아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지상의 도시와 하나님의 도성! 이 두나라는 대립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내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과 은혜에 넘친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부활과 생명의 하나님의 이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변함 없는 충실한 애국자이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으나 기독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말과 같이 예수님과 바울의 제자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동포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철저한 민족 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 사랑하는 바른길이 질서있는 나라를 만드는 길이며 그 질서의
첫째는 법질서이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 이 곧 법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냐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어서 만일 법률과 경찰이 우리를 통제하고 강제하지 않으 면 그 악한 본능때문에 우리의 사회생활이 얼마나 위태롭게 될 것인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법과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나라의 모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어여 한다. 기독교는 순종의 교리를 가르친다.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위하여 마련된 법을 기 독자가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도덕과 법률이상의 복음을 믿는 사람이될 수는 없는 것이다. 법을 잘 지킬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자유의 가치를 바로 아는 사람이며 말로 애국의 지름길임을 명심하자. 오늘 본문에 다윗은 고백하고 있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 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나이다."(시119:99-100) 스승의 말씀을 따르는 것 보다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지혜롭고,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말씀을 따르고 보니 노인들보 다 더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따라 사는 영광 중에 지혜롭게도 되고 명철하게 되고, 자유롭게 되고, 그리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그는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의 법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 으면 한다. 많은 사가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함으로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성공은 '무엇을 얻고''무엇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는가'에 초점을 두신다.' 내가 돈을 얼마나벌었다 내가 지금 어떤 지위를 가졌 다' 보다는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잇는 사람이 주님 앞에 성공된 삶 을 살았다고 칭찬하실 것이다(요21:18). 다윗은 잘못된 방법을 깨닫고 잘못을 시 인하고 올바른 방법을 취하여 목적을 이루는 삶을 파오해 그의 인격을 다듬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삼하 6:15).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전혀 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는 전혀 다르게 작용하는 법 아래 놓여 있다. 신자들 중엔 '예수만 믿겠다'는 사람과 '성경대로 믿겠다'는 사람이 있다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다르다. 예수만 믿겠다는 사람은 희생은 하 지 않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갖겠다는 것이고, 성경대로 믿겠다는 사람은 어떤 것을 요구해도 하나님뜻대로 하겠다는 진실한 신앙의 사람이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법으로 살지 말고, 성령님의 법으로 살아야 한다. 낡은 세상의 법칙 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아야 한다. 희생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 안에서 참 자유만 누리지 말 고, 바른 생활을 함으로 능력있는 성도, 기쁨이충만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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