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점, 중심, 질서 (시1:1-6)
본문
어떤 사람이 신앙인을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물고기 신앙인, 새 신앙인, 개 신앙인, 거북이 신앙인이 그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늘 말씀 안에 서 말씀으로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신앙인입니다. 새는 9일을 굶어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주일예배 드 리는 예배 참여 신앙인입니다. 한주간 동안은 말씀을 까맣게 잊 어 버리고 살다가 주일 예배 때 말씀을 처음 듣습니다. 개는 20 일을 굶어도 산다고 합니다. 한달에 한번 정도 교회 나오면 좋 다는 신앙인입니다. 거북이는 5백일을 굶어도 산답니다. 일년 에 한번 정도 교회 나오는 절기 교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의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물고기 신앙인입니다. 하루 동안 낮에 뿐 아니라 심지어 밤에도 묵상한다는 것이 지요. 잘 때에도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무의식 속에서도 말씀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한 시도 말씀을 떠 나서는 살 수 없는 신앙인입니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주님께 초점이 맞춰진 신앙입니다. 주님께 중심 을 둔 신앙인입니다. 주님의 질서가 잡힌 신앙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 은." 말하자면 행복한 사람에 대한 정의입니다. 산상 팔복음 처럼 행복한 사람에 대한 신앙적 규정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촛점/ 우선 그리스도에 대한 촛점이 분명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촛점이 분명하면 삶도 선명해 집니다. 하나님에게 촛점을 맞 추면 우리 삶도 분명해 집니다. 주일 예배의 촛점이 선명하면 한주간의 삶도 선명해 집니다. 마치 집광렌즈로 빛을 모을 때 촛점이 잘 맞아야 물건을 태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촛점 이 분명하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촛점이 흐려지면 삶의 목표가 흐려집니다. 주님에 대한 초점이 분명하면 우리 삶의 목 표도 선명해 집니다. 믿음의 촛점이 분명하면 삶도 선명해 집니다.
저희 교회 주보 예배 순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배는 우리 삶의 촛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한 주간의 중심입니다. 지난 주간의 삶의 때들을 씻고 죄책과 오류 를 용서 받습니다. 앞으로 한 주간 동안의 활력과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무엇보다 예배를 통해 보다 분명하게 하나님께 시선 을 맞춥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는 중요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보다 선명하게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맞추면 보다 선명하고 능 력있는 한 주간의 삶이 시작 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아뜰 딸들이 경험하고 증언하는 바입니다. 히브리어로 죄는 과녁이 맞지 않는 걸 뜻합니다. 과녁이 무엇입 니까. 촛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과녁이 맞지 않고 빗나가는 게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지 않으니 과녁이 빗나가 게 되어 있습니다. 과녁의 촛점이 맞지 않으면 악인의 꾀를 흉 내내게 됩니다. 죄인의 길을 열심히 달리게 됩니다. 오만한 자 의 자리가 앉아서 거들먹 거리게 됩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강자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사라지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중심/ 그 다음은 우리 삶에 그리스도의 중심이 선 사람이 행복합니다. 말씀으로 삶의 중심이 서 있지 않으면 혼란과 불안이 찾아 옵니다. 중심이 없으면 이리저리 휩쓸립니다. 믿음의 중심이 확고한 그리스도인은 세속의 가치와 하나님의 가치를 왕래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키를 확고히 잡고 가는 신앙인은 이 무게 중심으로 능력을 발휘합니다. 오뚜기를 잘 아시지요 오뚜기는 무게 중심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자세에서도 다시 일어 섭니다. 중심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다 중요해 보입니다. 중심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은 우선 순위가 없습니다. 오늘은 이게 중요하고 내일 은 저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일관성도 없고 자기 갈 길도 명확 치 않습니다. 시류와 평판에 기대어 삽니다. 포기를 잘 못합니다. 그래서 선택을 하지도 못합니다. 분명히 좋은 길인 것을 알 아도 선택을 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우선적인 투자가 되지 않아 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 봅니다.(눅9:62) 롯의 아내 처럼 소돔성을 탈출하다가도 뒤를 돌아 봅니다. (창 13장) 숨겨진 보물의 비유에 보면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했 습니다.(마13:44) 그렇습니다. 가치를 아는 사람은 선택을 잘 합니다. 투자를 할 때 집중성을 보입니다. 중심이 없이는 시간 과 관심과 여가와 미래를 투자할 수 없습니다. 저희 교회에 오면 성경공부를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쉬울 것 같은 데 처음에는 무척 어렵습니다. 중심 잡기 훈련입니다. 시 간과 관심과 여가와 미래를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에 투자하자는 것이지요. 중심이 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요즈음 세상 이 어떤 세상인데 허튼 곳에 시간과 관심을 투자합니까 중심이 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중심이 열매 를 맺게 합니다. 풍성하게 합니다. 푸르고 푸르게 합니다. 말씀의 사람은 중심이 분명합니다. 악인의 꾀를 쫓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그 길이 흥하는 길 같고 실제로 매 력이 넘치는 길이라도 말이지요. 믿음의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 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가 그럴 듯 하게 보이고 희열을 만끽할 수 있어도 말이지요. 그러나 악인은 어떻습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키 질을 할 때 나부끼는 겨를 아시지요 중심 없는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승리와 패배를, 고기압과 저기압을, 능력과 무기력을, 순종과 반역을 바람에 나부끼는 겨와 같이 한다는 말 입니다. 안정이 없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행복할 수 없지요. 중심은 무엇으로 잡을 것입니까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질서/ 세 번째는 말씀으로 질서가 부여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want to) 해야 하는 일(should ), 할 수 있는 일(can), 해도 되는 일 (may), 해서는 안될 일(must not ) 등이 그것입니다. 사람이 일평 생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은 무척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은 그 보다 훨씬 적을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적을 것이고 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해도 될 일이 있고, 해서는 안될 일이 또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꼭 자신이 할 일 은 굉장히 제한되 있습니다. 그러기에 문제는 우선순위입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바쁜 사람들은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해야할 일도 많고요. 할 수 있는 일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먼저하느냐 하는 우선순위는 혼란해져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흩어져서 정돈이 되 지 않는 사람의 일생은 분주하지만, 결산을 해 보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지요. 열심히 노력하기는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허 망합니다. 그러기에 삶의 질서는 대단히 소중한 것입니다. 삶이 무질서 했을 때의 혼란을 경험하신 적이 있지요. 방탕은 무질서를 뜻합니다. 희랍 사람들은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술이든 음악이든 예술은 질서가 부여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수많은 장단고저의 혼란한 음들 중에 어떤 음을 선 택해서 배열하고 질서를 주면 음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서를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주를 질서 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Chaos(혼돈)의 반대말이 Cosmos(우주) 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Cosmos 라는 말에는 우주라는 뜻도 있고 질서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따지고 보면 질서를 부여한 것 입니다. 흑암이 혼돈 중에 있었는 데 여기에 해,달,별,짐승,물 고기,육축,새,인간 등등의 질서를 부여 하신 것입니다. 선악과 도 질서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질서이지요.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질서는 혼돈이요 추한 것입니다. 질서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물은 나름으로의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뭇솔 리니도 질서가 있었고, 히틀러도 질서가 잘 발달했습니다. 독재 자의 질서를 엄격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완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로 보면 히틀러의 질서는 혼돈입니다. 하나님 질서의 파과가 극에 달한 때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확 보하려는 질서는 하나님의 질서, 즉 말씀 원칙에 따른 질서입니다. 말씀이 생활에 철칙 처럼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삶의 무질서와 혼란은 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믿음으 로 삶의 질서를 부여하면 음악 처럼 아름다운 생활이 울려 퍼집니다. 믿음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질서가 전 삶을 지배 합니다. 이것은 좋은 질서입니다. 선한 질서입니다. 참된 질서 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말씀 질서를 갖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고 그 율봅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이런 말씀 의 질서를 가집니다. 예수 촛점/Christ-Oriented의 질서를 갖습니다. JOY 라는 영어 단어를 아시지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단어를 이렇게 풀이 합니다.첫째 예수(Jesus first),둘째 이웃(Others second),셋째는 바로 나(You third), 우선 순위의 질서가 이렇게 될 때 기쁨이 넘친다는 것 입니다. 이런 삶의 질서가 말씀에 따라 확고할 때 우리에게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자, 그래서 악을 꾸미지 않고, 죄된 길에 다니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모습을 가지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1절의 말씀은 좀 순서가 바꿔서 이해하면 더 뜻이 분명해 질 수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 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는 데,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 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이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지요. 악인 이 아닌 사람이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즐거워 하는 자가 악한 길에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말씀 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이 선한자가 되는 것이지요. 순서가 그렇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말씀에 촛점이 잡히고, 말씀에 중심을 두고, 말씀의 질서가 가지런한 사람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의 길에 다니 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고 초점을 맞추고 중심을 잡고 질서 있게 살라 고 하니 뭔가 꽉 쪼이는 답답함을 느낍니까 아닙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순도 높은 신앙은 근본적으로 의무감의 빛깔이 아닙니다. 강제와 통제가 있는 강요된 회색 빛깔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근본적으로 풍성하고 윤기 나는 삶입니다. 본적으로 녹색입니다.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 다고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가을 수확의 황금들판입니다. 오 곡백과 풍성한 형형 색색 아름다운 빛깔입니다. 이런 푸르고 푸 른 계절을 생각하세요.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의 촛점 있는 삶입니다. 중심이 있는 삶입니다. 질서가 부 여된 삶입니다. 입사귀가 마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입사귀만 마르지 않겠습니 까 우리 삶의 모든 조건들이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푸르고 푸 른 계절이 믿음의 생활에 넘칠 것입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고 했습니다. 안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98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시간들 이런 한해가 되시기를 바라 겠습니다.
저희 교회 주보 예배 순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배는 우리 삶의 촛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한 주간의 중심입니다. 지난 주간의 삶의 때들을 씻고 죄책과 오류 를 용서 받습니다. 앞으로 한 주간 동안의 활력과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무엇보다 예배를 통해 보다 분명하게 하나님께 시선 을 맞춥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는 중요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보다 선명하게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맞추면 보다 선명하고 능 력있는 한 주간의 삶이 시작 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아뜰 딸들이 경험하고 증언하는 바입니다. 히브리어로 죄는 과녁이 맞지 않는 걸 뜻합니다. 과녁이 무엇입 니까. 촛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과녁이 맞지 않고 빗나가는 게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지 않으니 과녁이 빗나가 게 되어 있습니다. 과녁의 촛점이 맞지 않으면 악인의 꾀를 흉 내내게 됩니다. 죄인의 길을 열심히 달리게 됩니다. 오만한 자 의 자리가 앉아서 거들먹 거리게 됩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강자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사라지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중심/ 그 다음은 우리 삶에 그리스도의 중심이 선 사람이 행복합니다. 말씀으로 삶의 중심이 서 있지 않으면 혼란과 불안이 찾아 옵니다. 중심이 없으면 이리저리 휩쓸립니다. 믿음의 중심이 확고한 그리스도인은 세속의 가치와 하나님의 가치를 왕래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키를 확고히 잡고 가는 신앙인은 이 무게 중심으로 능력을 발휘합니다. 오뚜기를 잘 아시지요 오뚜기는 무게 중심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자세에서도 다시 일어 섭니다. 중심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다 중요해 보입니다. 중심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은 우선 순위가 없습니다. 오늘은 이게 중요하고 내일 은 저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일관성도 없고 자기 갈 길도 명확 치 않습니다. 시류와 평판에 기대어 삽니다. 포기를 잘 못합니다. 그래서 선택을 하지도 못합니다. 분명히 좋은 길인 것을 알 아도 선택을 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우선적인 투자가 되지 않아 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 봅니다.(눅9:62) 롯의 아내 처럼 소돔성을 탈출하다가도 뒤를 돌아 봅니다. (창 13장) 숨겨진 보물의 비유에 보면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했 습니다.(마13:44) 그렇습니다. 가치를 아는 사람은 선택을 잘 합니다. 투자를 할 때 집중성을 보입니다. 중심이 없이는 시간 과 관심과 여가와 미래를 투자할 수 없습니다. 저희 교회에 오면 성경공부를 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쉬울 것 같은 데 처음에는 무척 어렵습니다. 중심 잡기 훈련입니다. 시 간과 관심과 여가와 미래를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에 투자하자는 것이지요. 중심이 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요즈음 세상 이 어떤 세상인데 허튼 곳에 시간과 관심을 투자합니까 중심이 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중심이 열매 를 맺게 합니다. 풍성하게 합니다. 푸르고 푸르게 합니다. 말씀의 사람은 중심이 분명합니다. 악인의 꾀를 쫓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그 길이 흥하는 길 같고 실제로 매 력이 넘치는 길이라도 말이지요. 믿음의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 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가 그럴 듯 하게 보이고 희열을 만끽할 수 있어도 말이지요. 그러나 악인은 어떻습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키 질을 할 때 나부끼는 겨를 아시지요 중심 없는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승리와 패배를, 고기압과 저기압을, 능력과 무기력을, 순종과 반역을 바람에 나부끼는 겨와 같이 한다는 말 입니다. 안정이 없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행복할 수 없지요. 중심은 무엇으로 잡을 것입니까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질서/ 세 번째는 말씀으로 질서가 부여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want to) 해야 하는 일(should ), 할 수 있는 일(can), 해도 되는 일 (may), 해서는 안될 일(must not ) 등이 그것입니다. 사람이 일평 생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은 무척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은 그 보다 훨씬 적을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적을 것이고 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해도 될 일이 있고, 해서는 안될 일이 또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꼭 자신이 할 일 은 굉장히 제한되 있습니다. 그러기에 문제는 우선순위입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바쁜 사람들은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해야할 일도 많고요. 할 수 있는 일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먼저하느냐 하는 우선순위는 혼란해져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흩어져서 정돈이 되 지 않는 사람의 일생은 분주하지만, 결산을 해 보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지요. 열심히 노력하기는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허 망합니다. 그러기에 삶의 질서는 대단히 소중한 것입니다. 삶이 무질서 했을 때의 혼란을 경험하신 적이 있지요. 방탕은 무질서를 뜻합니다. 희랍 사람들은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술이든 음악이든 예술은 질서가 부여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수많은 장단고저의 혼란한 음들 중에 어떤 음을 선 택해서 배열하고 질서를 주면 음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서를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주를 질서 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Chaos(혼돈)의 반대말이 Cosmos(우주) 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Cosmos 라는 말에는 우주라는 뜻도 있고 질서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따지고 보면 질서를 부여한 것 입니다. 흑암이 혼돈 중에 있었는 데 여기에 해,달,별,짐승,물 고기,육축,새,인간 등등의 질서를 부여 하신 것입니다. 선악과 도 질서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질서이지요.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질서는 혼돈이요 추한 것입니다. 질서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물은 나름으로의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뭇솔 리니도 질서가 있었고, 히틀러도 질서가 잘 발달했습니다. 독재 자의 질서를 엄격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완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로 보면 히틀러의 질서는 혼돈입니다. 하나님 질서의 파과가 극에 달한 때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확 보하려는 질서는 하나님의 질서, 즉 말씀 원칙에 따른 질서입니다. 말씀이 생활에 철칙 처럼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삶의 무질서와 혼란은 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믿음으 로 삶의 질서를 부여하면 음악 처럼 아름다운 생활이 울려 퍼집니다. 믿음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질서가 전 삶을 지배 합니다. 이것은 좋은 질서입니다. 선한 질서입니다. 참된 질서 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말씀 질서를 갖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고 그 율봅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이런 말씀 의 질서를 가집니다. 예수 촛점/Christ-Oriented의 질서를 갖습니다. JOY 라는 영어 단어를 아시지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단어를 이렇게 풀이 합니다.첫째 예수(Jesus first),둘째 이웃(Others second),셋째는 바로 나(You third), 우선 순위의 질서가 이렇게 될 때 기쁨이 넘친다는 것 입니다. 이런 삶의 질서가 말씀에 따라 확고할 때 우리에게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자, 그래서 악을 꾸미지 않고, 죄된 길에 다니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모습을 가지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1절의 말씀은 좀 순서가 바꿔서 이해하면 더 뜻이 분명해 질 수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 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는 데,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 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이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지요. 악인 이 아닌 사람이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즐거워 하는 자가 악한 길에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말씀 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이 선한자가 되는 것이지요. 순서가 그렇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말씀에 촛점이 잡히고, 말씀에 중심을 두고, 말씀의 질서가 가지런한 사람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의 길에 다니 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고 초점을 맞추고 중심을 잡고 질서 있게 살라 고 하니 뭔가 꽉 쪼이는 답답함을 느낍니까 아닙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순도 높은 신앙은 근본적으로 의무감의 빛깔이 아닙니다. 강제와 통제가 있는 강요된 회색 빛깔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근본적으로 풍성하고 윤기 나는 삶입니다. 본적으로 녹색입니다.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 다고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가을 수확의 황금들판입니다. 오 곡백과 풍성한 형형 색색 아름다운 빛깔입니다. 이런 푸르고 푸 른 계절을 생각하세요.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의 촛점 있는 삶입니다. 중심이 있는 삶입니다. 질서가 부 여된 삶입니다. 입사귀가 마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입사귀만 마르지 않겠습니 까 우리 삶의 모든 조건들이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푸르고 푸 른 계절이 믿음의 생활에 넘칠 것입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고 했습니다. 안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98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시간들 이런 한해가 되시기를 바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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