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행복하려거든 (시1:1-6)
본문
1.오, 행복한 사람 사람은 모두 행복을 원한다. 아니 행복하기 위하여 산다. 돈은 가치있기 때문에 힘써 벌고, 건강은 필요해서 애써 지키고, 학문도 어차피 해야 하 므로 공부를 위해 머리를 싸매지만, 이러한 것들 자체가 인생을 사는 목적 이 될 수는 없다. 이것들은 그 이상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 기 때문에 수단적 가치(수단적 가치)라고 한다. 행복, 인생은 오직 그것만 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목적적 가치(목적적 가치)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힘에 벅찬 수단들에 의하여 추구되는 이 행복마저도 사람 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설사 이뤄진다 해도 영원하지 못하고 기약이 없 이 가버리는 상대적 행복에 불과하다. 참으로 영원한 행복, 변하지도 않고 시들지도 않는 그런 절대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을까 인간의 온갖 소원, 모든 감정, 만가지 요구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인 시편의
첫째장이 바로 그 대답이다. "오, 행복한 사람", 곧 히브리 시편의 첫 글귀인 "아쉬레하이쉬"는 실락원(실락원)의 행복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끝 없는 가시 밭 인생길을 걸어가는 인간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행복에 로의 초청이다. "오, 행복한 사람", 그것은 시편
첫째편의 주제일 뿐 아니라 인생의 주제 이며, 사람이 불행의 늪에서,절망의 숲에서, 그리고 죄악의 심연에서 애원 하는 행복은 시편의 구구 절절에서 마침내 그 대답을 찾고, 마지막 장인 150편 끝절은 영원한 행복을 다시 찾아 주신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인 히브리어의 "할렐루야"로 대 단원의 막을 내린다. 하다한 인생들이 수없이 시도한 행복의 시행 착오가 마침내 결정(결정)을 이룬 행복의 함성인 것이다.
2.불행으로 가지 않는 길 모든 목적지에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 있다. 행복에 이르는데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있고, 불행으로 가는데는 불행에 이르는 길이 있다. 여섯절로 이루어진 시편 1편의 전반부인 세 절에서 우리는 행복으로 가는 길을 쉽사리 찾게되고 불행으로 가는 길도 한눈에 알게 된다.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세상의 길은 많아도 인생에는 두 길 밖에 없다. 옳은 길과 그릇된 길, 곧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다. 행복의 길을 가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불행으로 가는 길을 거절해야 한다. 세 번이나 반복되어 거듭 거듭 강조된 히브리어의 "로(lo)", 곧 "아니하고", "아니 하고", "아니하고"는 쉽사리 불행으로 향하려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강력한 부정이다.
1)참으로 행복하려거든 불행으로 유인하는 처음의 죗된 생각(악인의 꾀) 을 거절하라.
2)참으로 행복하려거든 죗된 생각에 의하여 옮겨지는 발검음인 그릇된 행동에 길드는 것(죄인의 길)을 거절하라.
3)참으로 행복을 원하거든 그릇된 행동에 길들어 바꿀 수 없는 품성으로 자리가 잡히는 것(오만한 자의 자리)을 거절하라. 이리하여, 생각을 심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어 습관을 거두고, 습 관을 심어 품성을 거두고, 마침내 품성을 심어 운명을 거두는 피할 수 없는 인과(인과)의 법칙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단번에 구제가 불가능한 불행한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본능에 좌우되어 도덕의 기준이 없이 바람부는 대로 흐느적거리며 사는 줏대 없는 인간(히브리어의 "레솨임" 곧 악인)이 되고, 그 다음에는 대담해 져서 공공연히 악을 습관적으로 행하는 저숙한 인간("히타임" 곧 죄인)이 되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게 행동하는 참람된 인간 ("레침" 곧 오만한 자)이 되고 마는 것이다.
3.죄와 벌 사람의 행복이 어떻게 깨어졌던가 "가장 간교" 했던 뱀의 계교(계교), 곧 "악인의 꾀"를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인 처음 인간의 허술했던 마음의 문단속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릇된 생각으로 잘못 내디딘 발걸음 곧 최초의 실족(실족)이 "죄인의 길"을 시작한 것이다. 성경에서 "죄"로 불려지는 대표적인 말은 신약의 헬라어로 "하마르티아" 이고,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하타아트"이다. 두 말은 모두 "목표를 빗나갔 음"을 뜻한다. 특히 올림픽의 종주괜뮌강견 그리스에서는, 투창 경기에서 창이 궤도를 벗어나 과녁을 빗나갔을 때, "죄" 곧 "하마르티아"를 선언 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란,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인간의 도리인 하나님 의 계시 곧 말씀인 율법을 벗어나서, 그릇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감관(감 관)에 기초한 이성만을 신뢰하고 인생길을 독보(독보)하는 합리주의적 인간인 것이다. 하와가, 계시된 말씀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무시하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 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갈강봉 판단을 따름으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 의 계시에서 이탈되어 "빗나간 존재" 곧 헬라어의 "죄인"인 "하마르토로스 ", 히브리어의 "죄인"인 "하타아"가 된 것이다. 기차가 철로를 벗어나 탈선하면 전복되고, 자동차가 도로를 벗어나면 사 고가 나며, 비행기가 항로를 벗어나면 결국 추락하듯,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을 범함으로 사람의 길(도)을 벗어날 때 타락하게 된다. 그 곁 과는 불행과 고통과 고독과 죽음이다. 그것이 곧 죄와 벌의 논리이다.
4.행복으로 가는 길 기차는 아무리 좁아도 철로 위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로울 수 있고, 비행 기는 하늘이 아무리 넓어도 항로를 다라 날 때 안전하고, 자동차는 도로위 를 달릴 때 목적지에 이르게 되듯,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할 때 비로소 인간의 길을 걷는 그윽한 기쁨, 다함이 없는 마음의 평화, 그리고 이성을 초월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율법" 곧 히브리어의 "토라"는 십계명이나 모세의 오경이나 구약 만을 의미갈강 것이 이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모두를 포함한다. 성경 말씀에서 죄로 상실했던 이성의 도(도)를 다시 찾게 될 때 경험하는 그 구도(구도)의 기쁨을 그 누가 이해 할 수 있으랴. 그 길이 곧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고 선언하신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 속에 서 발견하는 구원(구원)의 행복이다. 그것이 곧 시냇가에 심기운 유실수(유실수)가 누리는 전천후 행복이요, 뿌리 깊은 나무가 가뭄에 마르지 아니하는 용비어천가적인 그윽한 행복의 정취인 것이다. 그것이 푸른 잎사귀처럼 청청하고 주렁주렁 달린 갉견플 럼 풍요한 열매를 맺는 삶의 착실한 행복이다.
5.영원한 길림길 가을 날 타작 마당에서 집행되는 영원한 심판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가 알곡과 죽정이, 거두어지는 낟알과 바람에 불려가는 "겨"의 영원한 움명을 주시해 보았는가 그것이 곧 인긴이 자신의 꾀로 스스로 택한 인생길을 본 능의 바람이 부는대로 어지럽게 살아간 왕겨의 "껍데기 인생"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성의 도를 찾아 정로를 따라 가지런히 살아간 알곡의 "알찬 인 생"의 영원한 길림길의 운명이다. 여기에 그 판결문이 적혀 있다. (4절) 악인은 그렇제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절)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 안에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정처(정처)가 어디 있겠는가 우주처럼 막연한 공허가 그의 존재를 삼키는 날까지 길을 어지럽게 달 려갈 것인가 여기 예레미야 선지자의 도 다른 시편 1 편을 음미하며 자신의 길을 다시 확인 할 것이다. 인생의 석양이 지기전에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 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간조)한 곳, 건건 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아니하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갈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예레미야 17장 5절-8절)
첫째장이 바로 그 대답이다. "오, 행복한 사람", 곧 히브리 시편의 첫 글귀인 "아쉬레하이쉬"는 실락원(실락원)의 행복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끝 없는 가시 밭 인생길을 걸어가는 인간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행복에 로의 초청이다. "오, 행복한 사람", 그것은 시편
첫째편의 주제일 뿐 아니라 인생의 주제 이며, 사람이 불행의 늪에서,절망의 숲에서, 그리고 죄악의 심연에서 애원 하는 행복은 시편의 구구 절절에서 마침내 그 대답을 찾고, 마지막 장인 150편 끝절은 영원한 행복을 다시 찾아 주신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인 히브리어의 "할렐루야"로 대 단원의 막을 내린다. 하다한 인생들이 수없이 시도한 행복의 시행 착오가 마침내 결정(결정)을 이룬 행복의 함성인 것이다.
2.불행으로 가지 않는 길 모든 목적지에는 그곳으로 가는 길이 있다. 행복에 이르는데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있고, 불행으로 가는데는 불행에 이르는 길이 있다. 여섯절로 이루어진 시편 1편의 전반부인 세 절에서 우리는 행복으로 가는 길을 쉽사리 찾게되고 불행으로 가는 길도 한눈에 알게 된다.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세상의 길은 많아도 인생에는 두 길 밖에 없다. 옳은 길과 그릇된 길, 곧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다. 행복의 길을 가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불행으로 가는 길을 거절해야 한다. 세 번이나 반복되어 거듭 거듭 강조된 히브리어의 "로(lo)", 곧 "아니하고", "아니 하고", "아니하고"는 쉽사리 불행으로 향하려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강력한 부정이다.
1)참으로 행복하려거든 불행으로 유인하는 처음의 죗된 생각(악인의 꾀) 을 거절하라.
2)참으로 행복하려거든 죗된 생각에 의하여 옮겨지는 발검음인 그릇된 행동에 길드는 것(죄인의 길)을 거절하라.
3)참으로 행복을 원하거든 그릇된 행동에 길들어 바꿀 수 없는 품성으로 자리가 잡히는 것(오만한 자의 자리)을 거절하라. 이리하여, 생각을 심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어 습관을 거두고, 습 관을 심어 품성을 거두고, 마침내 품성을 심어 운명을 거두는 피할 수 없는 인과(인과)의 법칙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단번에 구제가 불가능한 불행한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본능에 좌우되어 도덕의 기준이 없이 바람부는 대로 흐느적거리며 사는 줏대 없는 인간(히브리어의 "레솨임" 곧 악인)이 되고, 그 다음에는 대담해 져서 공공연히 악을 습관적으로 행하는 저숙한 인간("히타임" 곧 죄인)이 되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게 행동하는 참람된 인간 ("레침" 곧 오만한 자)이 되고 마는 것이다.
3.죄와 벌 사람의 행복이 어떻게 깨어졌던가 "가장 간교" 했던 뱀의 계교(계교), 곧 "악인의 꾀"를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인 처음 인간의 허술했던 마음의 문단속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릇된 생각으로 잘못 내디딘 발걸음 곧 최초의 실족(실족)이 "죄인의 길"을 시작한 것이다. 성경에서 "죄"로 불려지는 대표적인 말은 신약의 헬라어로 "하마르티아" 이고,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하타아트"이다. 두 말은 모두 "목표를 빗나갔 음"을 뜻한다. 특히 올림픽의 종주괜뮌강견 그리스에서는, 투창 경기에서 창이 궤도를 벗어나 과녁을 빗나갔을 때, "죄" 곧 "하마르티아"를 선언 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란,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인간의 도리인 하나님 의 계시 곧 말씀인 율법을 벗어나서, 그릇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감관(감 관)에 기초한 이성만을 신뢰하고 인생길을 독보(독보)하는 합리주의적 인간인 것이다. 하와가, 계시된 말씀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무시하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 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갈강봉 판단을 따름으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 의 계시에서 이탈되어 "빗나간 존재" 곧 헬라어의 "죄인"인 "하마르토로스 ", 히브리어의 "죄인"인 "하타아"가 된 것이다. 기차가 철로를 벗어나 탈선하면 전복되고, 자동차가 도로를 벗어나면 사 고가 나며, 비행기가 항로를 벗어나면 결국 추락하듯,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을 범함으로 사람의 길(도)을 벗어날 때 타락하게 된다. 그 곁 과는 불행과 고통과 고독과 죽음이다. 그것이 곧 죄와 벌의 논리이다.
4.행복으로 가는 길 기차는 아무리 좁아도 철로 위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로울 수 있고, 비행 기는 하늘이 아무리 넓어도 항로를 다라 날 때 안전하고, 자동차는 도로위 를 달릴 때 목적지에 이르게 되듯,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할 때 비로소 인간의 길을 걷는 그윽한 기쁨, 다함이 없는 마음의 평화, 그리고 이성을 초월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율법" 곧 히브리어의 "토라"는 십계명이나 모세의 오경이나 구약 만을 의미갈강 것이 이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모두를 포함한다. 성경 말씀에서 죄로 상실했던 이성의 도(도)를 다시 찾게 될 때 경험하는 그 구도(구도)의 기쁨을 그 누가 이해 할 수 있으랴. 그 길이 곧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고 선언하신 그리스도 자신을 말씀 속에 서 발견하는 구원(구원)의 행복이다. 그것이 곧 시냇가에 심기운 유실수(유실수)가 누리는 전천후 행복이요, 뿌리 깊은 나무가 가뭄에 마르지 아니하는 용비어천가적인 그윽한 행복의 정취인 것이다. 그것이 푸른 잎사귀처럼 청청하고 주렁주렁 달린 갉견플 럼 풍요한 열매를 맺는 삶의 착실한 행복이다.
5.영원한 길림길 가을 날 타작 마당에서 집행되는 영원한 심판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가 알곡과 죽정이, 거두어지는 낟알과 바람에 불려가는 "겨"의 영원한 움명을 주시해 보았는가 그것이 곧 인긴이 자신의 꾀로 스스로 택한 인생길을 본 능의 바람이 부는대로 어지럽게 살아간 왕겨의 "껍데기 인생"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성의 도를 찾아 정로를 따라 가지런히 살아간 알곡의 "알찬 인 생"의 영원한 길림길의 운명이다. 여기에 그 판결문이 적혀 있다. (4절) 악인은 그렇제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절)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 안에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정처(정처)가 어디 있겠는가 우주처럼 막연한 공허가 그의 존재를 삼키는 날까지 길을 어지럽게 달 려갈 것인가 여기 예레미야 선지자의 도 다른 시편 1 편을 음미하며 자신의 길을 다시 확인 할 것이다. 인생의 석양이 지기전에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 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간조)한 곳, 건건 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아니하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갈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예레미야 17장 5절-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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