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까지니이까 (시12:1-13:3)
본문
새벽에 나오셔서 기도로 교회를 지키고 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은혜의 삶을 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깨어 있지 아니하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무기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늘 기도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됩니다. 육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1. 세상에 시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는 무한한 생수를 얻고, 무한한 축복을 받는 가장 귀한 장비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성도, 기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가정은 절대로 마귀가 틈타지 못합니다. 기도하면 마귀가 두려워합니다. 마귀는 영이기 때문에 세상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천하에 없는 것도 쉽게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여 영적으로 강건해지면 마귀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는 마귀를 이길 정도로 열심히 해야 됩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경주자가 되어야 합니다. 찬송가 82장에도 “길도 없이 거친 넓은 들에서 갈 길 못 찾아 애쓰며 이리저리로 헤매는 내 모양 저 원수 조롱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적당하게 믿으면 마귀가 비웃습니다. 마귀는 어느 정도 상대가 되어야 달려듭니다. 우리 성도들은 마귀가 달려들 정도로 잘 믿어야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쓰임받습니다. 무엇이든지 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자격을 얻을 수 없듯이 마귀와의 싸움을 거치지 않은 성도는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마귀와의 싸움은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을 보여줍니다. 마귀와 싸워 승리하면 시험에 합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돌팔이 의사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지만, 시험을 거치지 않은 무자격 의사이기 때문에 돌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야든지 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자격이 없기 때문에 가짜입니다. 우리도 마귀의 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자격이 없기 때문에 가짜입니다. 우리도 마귀의 시험을 거치지 아니하면 힘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군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마귀의 시험을 거치셨습니다. “(막1:12) 성령님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막1:13)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령님 충만하면 되지 시험을 받을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면 되지 왜 마귀에게로 데려가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다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접근하기 때문에 마귀에게 넘어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도 쓰임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시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들도 마귀에게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귀에게 시험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해야 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뱀은 죽은 것은 아예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쥐든, 개구리든 꼭 살아 있는 것을 잡아먹습니다. 살려고 도망가는 것을 잡아먹지, 가만히 있는 것은 안 먹습니다. 우리가 살려고 달려갈 때 마귀는 공격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으므로 성령님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을 해야 됩니다. 마귀에게도 마귀의 은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마귀는 자기에게 속한 자를 악하게 하고 더럽게 합니다. 비웃고 원망하고 비판하는 것도, 불의한 것도, 폭력도 다 마귀의 은사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혼란을 주어서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동산을 파괴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역사할 때에 그 힘이 얼마나 무궁무한합니까 “(막5:4)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 하였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여러번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매이면 이미 자기 힘이 아닙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힘입니다. 교회에 나오려는 마음을 쇠사슬로 묶어서 못 나오게 합니다. 자기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힘이 아니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녀에게 좋은 은사를 주셔서 무장시키시는 줄 믿습니다.
2. 시험이 오면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시12: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시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점점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점점 죄악이 관영하고, 경건한 자는 끊어지며, 충성스러운 사람이 인생 중에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보면, 사람을 보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를 도와주소서. 하나님 앞에 경건한 자, 충실한 자, 충성하는 자가 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잘하는 것을 보면 나도 잘해야 되겠다. 죄짓는 사람을 보면 나는 죄짓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좋은 사람에게서는 좋은 것을 본받고, 잘못하는 사람에게서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눅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눅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더욱 기도에 힘써야 됩니다.
어떤 부부가 말다툼하다가 남편이 부인을 죽이고 처형도 죽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마귀가 역사해서 악한 마음을 충동하면 누구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도 큰소리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주여, 내 마음을 주님께 바치옵니다. 내가 나를 주장하지도 말고, 마귀가 나를 주장하지도 말고, 오직 주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는 잘못하는 사람을 보고 낙심하면 안됩니다. 불의한 사람 때문에 낙심하면 안됩니다. 그를 통해 귀한 교훈을 얻어야 됩니다. 또 잘하는 사람은 가까이해서 은혜받고 배워야 합니다. 본문 “(시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라고 했습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곳에 가보니까 흙으로 모양을 빚어 여러 차례 가마에 넣었다꺼냈다 하면서 만들고 있었습니다.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여호와의 말씀은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금이나 은은 불속에 자꾸 넣어서 여러번 단련함으로써 순수하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일곱 번이라는 횟수는 완전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일짐 일획도 변함이 없고 버릴 것도 없습니다. 내 자신을 단련시키고 깨끗하게 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은 순결한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울을 보되 자기 얼굴의 생김새를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약1: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약1:24) 제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리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거울을 보면서 흠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문학 전집처럼 재미로 줄줄 읽어갑니다. 많이 읽는 것도 좋겠지만 깊이 묵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을 때 비로소 말씀이 나에게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니까, 혹시 잘못된 말씀은 아닐까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에서도 교훈을 얻어야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야곱도 이랬는데 나쯤이야, 아브라함도 별수없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게 아브라함이 지은 죄는 없을지라도 또 다른 수천 가지 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를 합리화시키면 안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연약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굳게 붙잡아야 됩니다. 물러서면 물러선 만큼 손해를 보고, 떠나면 떠난 만큼 우리가 해를 당하게 되므로 언제나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3. 시험 중에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습니다. 깨끗하고 순결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어야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본문 “(시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성도에게는 “내가 당하는 이 시험이 언제까지입니까 이 아픔을 언제까지 참아야 됩니까 ”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저도 이런 기도를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또 이러한 내용만을 찾아 성경을 읽은 적도 있습니다. “(벧전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고 했고, “(눅7: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때가 있습니다. 다윗도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며 어려움을 당할 때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생명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습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빨리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한 자에게는 응답받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갈 길이 너무너무 멉니다.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왜 나를 이대로 두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속히 이루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히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10: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고 했습니다. 또 “(히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하라 ”고 했습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의문은 의인들에게도 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고향을 떠나면서, 야곱도 20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면서 계속 “언제까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야곱아, 이제는 떠나라. 이제는 됐다”라고 응답이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이 오기 전에 미리 낙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므로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시13:2)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는 원수들이 큰소리칩니다. 세상이 비웃고 환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고 했듯이 우리는 눈을 밝히고 늘 깨어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1. 세상에 시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는 무한한 생수를 얻고, 무한한 축복을 받는 가장 귀한 장비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성도, 기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가정은 절대로 마귀가 틈타지 못합니다. 기도하면 마귀가 두려워합니다. 마귀는 영이기 때문에 세상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천하에 없는 것도 쉽게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여 영적으로 강건해지면 마귀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는 마귀를 이길 정도로 열심히 해야 됩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경주자가 되어야 합니다. 찬송가 82장에도 “길도 없이 거친 넓은 들에서 갈 길 못 찾아 애쓰며 이리저리로 헤매는 내 모양 저 원수 조롱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적당하게 믿으면 마귀가 비웃습니다. 마귀는 어느 정도 상대가 되어야 달려듭니다. 우리 성도들은 마귀가 달려들 정도로 잘 믿어야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쓰임받습니다. 무엇이든지 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자격을 얻을 수 없듯이 마귀와의 싸움을 거치지 않은 성도는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마귀와의 싸움은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을 보여줍니다. 마귀와 싸워 승리하면 시험에 합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돌팔이 의사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지만, 시험을 거치지 않은 무자격 의사이기 때문에 돌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야든지 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자격이 없기 때문에 가짜입니다. 우리도 마귀의 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자격이 없기 때문에 가짜입니다. 우리도 마귀의 시험을 거치지 아니하면 힘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군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마귀의 시험을 거치셨습니다. “(막1:12) 성령님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막1:13)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령님 충만하면 되지 시험을 받을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면 되지 왜 마귀에게로 데려가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다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접근하기 때문에 마귀에게 넘어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도 쓰임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시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들도 마귀에게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귀에게 시험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해야 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뱀은 죽은 것은 아예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쥐든, 개구리든 꼭 살아 있는 것을 잡아먹습니다. 살려고 도망가는 것을 잡아먹지, 가만히 있는 것은 안 먹습니다. 우리가 살려고 달려갈 때 마귀는 공격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으므로 성령님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을 해야 됩니다. 마귀에게도 마귀의 은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마귀는 자기에게 속한 자를 악하게 하고 더럽게 합니다. 비웃고 원망하고 비판하는 것도, 불의한 것도, 폭력도 다 마귀의 은사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혼란을 주어서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고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동산을 파괴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역사할 때에 그 힘이 얼마나 무궁무한합니까 “(막5:4)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 하였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여러번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매이면 이미 자기 힘이 아닙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힘입니다. 교회에 나오려는 마음을 쇠사슬로 묶어서 못 나오게 합니다. 자기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힘이 아니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녀에게 좋은 은사를 주셔서 무장시키시는 줄 믿습니다.
2. 시험이 오면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시12: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시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점점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점점 죄악이 관영하고, 경건한 자는 끊어지며, 충성스러운 사람이 인생 중에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보면, 사람을 보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를 도와주소서. 하나님 앞에 경건한 자, 충실한 자, 충성하는 자가 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잘하는 것을 보면 나도 잘해야 되겠다. 죄짓는 사람을 보면 나는 죄짓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좋은 사람에게서는 좋은 것을 본받고, 잘못하는 사람에게서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눅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눅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더욱 기도에 힘써야 됩니다.
어떤 부부가 말다툼하다가 남편이 부인을 죽이고 처형도 죽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마귀가 역사해서 악한 마음을 충동하면 누구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도 큰소리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주여, 내 마음을 주님께 바치옵니다. 내가 나를 주장하지도 말고, 마귀가 나를 주장하지도 말고, 오직 주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는 잘못하는 사람을 보고 낙심하면 안됩니다. 불의한 사람 때문에 낙심하면 안됩니다. 그를 통해 귀한 교훈을 얻어야 됩니다. 또 잘하는 사람은 가까이해서 은혜받고 배워야 합니다. 본문 “(시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라고 했습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곳에 가보니까 흙으로 모양을 빚어 여러 차례 가마에 넣었다꺼냈다 하면서 만들고 있었습니다.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여호와의 말씀은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금이나 은은 불속에 자꾸 넣어서 여러번 단련함으로써 순수하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일곱 번이라는 횟수는 완전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일짐 일획도 변함이 없고 버릴 것도 없습니다. 내 자신을 단련시키고 깨끗하게 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은 순결한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울을 보되 자기 얼굴의 생김새를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약1: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약1:24) 제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리거니와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거울을 보면서 흠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문학 전집처럼 재미로 줄줄 읽어갑니다. 많이 읽는 것도 좋겠지만 깊이 묵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을 때 비로소 말씀이 나에게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니까, 혹시 잘못된 말씀은 아닐까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에서도 교훈을 얻어야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야곱도 이랬는데 나쯤이야, 아브라함도 별수없네”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게 아브라함이 지은 죄는 없을지라도 또 다른 수천 가지 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를 합리화시키면 안됩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연약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굳게 붙잡아야 됩니다. 물러서면 물러선 만큼 손해를 보고, 떠나면 떠난 만큼 우리가 해를 당하게 되므로 언제나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3. 시험 중에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습니다. 깨끗하고 순결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어야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본문 “(시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성도에게는 “내가 당하는 이 시험이 언제까지입니까 이 아픔을 언제까지 참아야 됩니까 ”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저도 이런 기도를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또 이러한 내용만을 찾아 성경을 읽은 적도 있습니다. “(벧전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고 했고, “(눅7: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때가 있습니다. 다윗도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며 어려움을 당할 때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생명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웠습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빨리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한 자에게는 응답받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갈 길이 너무너무 멉니다.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왜 나를 이대로 두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속히 이루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히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10: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고 했습니다. 또 “(히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12: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12: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하라 ”고 했습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의문은 의인들에게도 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고향을 떠나면서, 야곱도 20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면서 계속 “언제까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야곱아, 이제는 떠나라. 이제는 됐다”라고 응답이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이 오기 전에 미리 낙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므로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시13:2)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는 원수들이 큰소리칩니다. 세상이 비웃고 환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고 했듯이 우리는 눈을 밝히고 늘 깨어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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