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찬송을 여호와께 (시100:1-5)
본문
사람은 인격적 존재이며 인격적 존재는 예의를 가지는 법입니다. 또한 이 예의는 은혜와 공로에 대하여 감사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감사는 말 뿐만의 것이 아니고 마음과 생활과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감사와 찬송을 여호와께 돌리자”는 제목으로 감사의 의미를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
1. 각국의 감사 인사 서양 사람들은 비교적 이 "감사"라는 표현(인사)를 잘 하는 편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 희극 배우였던 김희갑씨가 불란서를 방문했을 때 "멜시 뽀쿠"(Merci beaucoups),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듣고 한국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불란서에 가서<멸치 뽁쿰>을 배웠다"고 했답니다.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덴큐"(Thank you)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당케 쉰(Danke schon), 화란어로는 "당퀴 벧(Dank U wel), 일본어로는 "아리가도우 고자이마스", 중국말로는 "셰 셰", 이태리어로는 "그라지에"(Grazie), 스페인어로는 "무차스 그라시아스"(Mucharistia), 헬라어로는 "유카리스티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어로 "토다"라고 합니다.
2. 성경의 감사 히브리어의 "감사"란 말 "토다-"는 "감사한다"라는 야다에서 온 말로서 손을 펴는 것, 공언, 공경, 특별히 예배자들의 성가대, 신앙고백, 감사 등의 뜻을 가졌고, 동사 "야다"는 "손"이라는 말 야드에서 온 말로 "손을 쓰다, 던지다, 경배하다(손을 펴서), 찬양하다, 감사하다".등의 뜻이 있습니다. 역대상 16장 4절을 보면 "다윗 왕이 레위인 중에 어떤 사람을 택하여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게 했다"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솔로몬 왕이나(대하5:13,7:6), 히스기야왕에 의해(대하 31:2) 계속되었고 포로생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느 11:17,12:24,27,31,38,40).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감사를 제도화하여 이를 수행 하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더라도 늘 감사의 표현이 그의 생애속에 넘침니다. 양식을 얻고 감사했으며(요 6:11,23), 기도의 응답을 받고 감사했으며 (요11:41), 최후의 만찬때도 감사했습니다(눅 22:17,19). 바울선생도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축복에 감사를 아기지 아니했습니다.
(1) 신앙의 선언(롬 1:8,골 1:3,살전 1:2),
(2) 은혜 (고전 1:4,고후 1:11,4:15),
(3) 전파된 말씀을 받음(살전 2:13),
(4) 은혜의 장성(살후 1:3), 주어진 자유(고후 9:11),
(5) 계약에 대한 기쁨 (살전 3:9) 등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감사가 성경에 넘쳐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로 일생을 넘쳐 흐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3. 현대의 감사절의 유래 현대적 의미의 감사절의 유래를 생각해 보고저 합니다. 주후
1,620년의 일입니다. 영국의 종교 개혁자 위크마(Wycliffe)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Puritans)들은 형식종교인 영국국교의 박해를 만나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마치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만 믿고 애굽을 떠난 것 같이 배를 타고 그 나라를 떠났습니다. 처음에 도착한 곳은 화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도 마음껏 자유로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는 이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탄압하는 기세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자유를 찾아 배를 탔습니다. 때는
1,620년 9월 6일 그들은 처음 한 해 먹을 양식을 싣고 정처없이 망망한 바다에 메이 플라워호(May-flower)를 띄웠던 것입니다. 배에 오른 사람은 남자 78명, 여자 24명이었습니다.
그해 11월 19일 63일간의 죽음의 항해를 마치고 구사일생으로 도착한 땅이 지금의 미국 포트머츠(Porth mouth)였습니다. 그들은 감격하여 한 발은 배에 싣고, 한 발은 육지를 딛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상륙하여 산림을 채벌하여 먼저 토막교회를 짓고, 그 다음 학교를 짓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집을 세우니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추운 겨울을 지나는 사이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자라 병이 들어 그들 반수가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통하여 인디언들과도 가까이 지나게 되었고, 청교도라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토지를 개간하여 옥수수,원두,밀,보리씨. 등을 파종했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습니다. 예상 외의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기쁨에 넘친 그들은 처음 추수한 오곡백화 곡식을 앞에 놓고 하나님게 추수의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협력해 준 근처의 인디언들을 청하여 칠면조를 잡고 옥수수와 밀가루 빵과 원두로 케이크를 만들어 성찬으로 식탁을 나누며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때가 11월이었습니다. 그들은 그후 해마다 점점 풍성해지는 오곡백화를 거둘 때마다 추수감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1864년 미국에서는 링컨 대통령의 제의로 이 아름다운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여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여 지키게 하니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감사일은 각 나라의 형편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11월 중에 지키게 되었습니다.
4. 우리 나라의 감사절의 유래 우리 민족, 즉 고대 한민족은 국가형태를 이루기 전 부족국가로서 부여, 고구려, 옥저, 예, 한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부터 가을마다 예배는 아니지만 추수감사제를 드린 기록이 있습니다. 대동강 유역의 낙낭군을 중심하고 북방 만주 벌판에 자리잡고 있던 부여에서는 영고라하여 12월에, 고구려에서는 동맹이라 하여 10월에, 강원도 동해 가장자리 산에 있던 예에서는 무천이라 하여 역시 10월에, 남방에 자리잡고 있던 한에서는 그 이름이 전해지는 바 없으나 10월에 각각 제를 드렸습니다. 이때는 모든 사람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감사했던 것입니다. 신라에서는 음력 8월 보름날을 "가위", 즉 추석을 감사제로 삼아 왔는데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3대 유리왕때 경주의 6부를 두 구역으로 나누어 왕녀 두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한 구역내에 사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패를 갈라 7월 15일 즉 중원일부터 궁중 정원에 모여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삼베를 짜기 시작하여 8월 보름에 그 성적의 우열을 따져 진편이 음식을 차려 놓고 이긴편에 사례를 하고 가무를 하며, 유쾌하게 놀았는데 이것을 가위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가위는 정월 초하루와 함께 신라 국민의 양대명절이 되었는데 "가위"라는 말은 이 가위의 유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날은 시절이 좋고, 달이 좋고, 또 배곡이 무르익어 놀기 좋은 시기라는 여건이 덧붙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이 날을 중추라 하여 명절로 삼고 즐기는 풍습이 있지만 우리 나라만큼 성대하지는 않습니다. 신라시대 이래 중요한 명절로 내려 오는 이날에는 국가적으로도 여러가지 행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가난한 집에 이르기까지 성찬을 베풀어 온 마음이 포식하며 즐거워 했다는 것입니다. "줄 다리기", "그네 뛰기",'닭잡는 놀이","씨름","소싸움","운동회", "노래자랑", 등의 풍속이 이 때 있었고 성묘, 제사, 우상숭배. 등 잘못된 풍속도 뒤 따른 것 같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알지 못햇던 백성이었던지라, 이 날에 조상숭배, 우상숭배, 음주, 도박 등 여러가지 죄악에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란 어떤 것인지 그럼 생객해 보고저 합니다.
5. 물질 추수의 감사 누가복음 12장 16절에서 21절까지를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결론으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부자가되고 하나님을 위하지 아니하는 자가 이와 같으니라"(21)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야비하고 천박한 감사의 태도를 말한 것입니다. 이 감사(정신)은 무 종교적이며 물질적이며 자기 중심의 태도인 것입니다. 능력과 노력으로 자신의 창고가 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물질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우상숭배입니다. 유대인의 우상숭배, 바알 예배는 하나님을 불신앙하며 모독하는 죄악이니 최대의 범죄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서도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으며, 이와 같은정신 태도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수입, 수확을 자기 능력, 혹은 자연의 결과로만 아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몰각하는 것이요, 이런 사람은 대개가 향락주의, 폭력주의,무신론주의 자들인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히브리인의 감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의 감사는 재물 얻을 능력을 내게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하나님 자신이 잘못하여 인간이나 동식물을 굶어 죽인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 입을 것이 없어서 죽은 예는 많이 있습니다. 한때 예루살렘 성이 멸망되던 때는 먹을 것이 없어서 여인들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서로 바꾸어 잡아 먹은 예가 있습니다. 왜 이것은 외부와의 연락이 적군의 포위 때문에 끊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값이었습니다. 인간 편에 잘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6. 영적 추수의 감사 시편 65편, 116편, 12절 등을 보면 "여호와 내게 주신 은사여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다윗 성도의 신앙적 감사의 태도입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의 자연 은총을 감사하고 있습니다(시65:9-13). 풍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권고하시는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땅 위에 죄악이 관영 할 때마다 흉년이 지는 일은 역사상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때는 인간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풍년이 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정한 시기 (죄악이 관영한 시기)가 이르기까지 베푸시는 자연은총의 덕입니다(마 5:45-48).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순경에나 역경에나 언제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경에서 뿐만 아니라 역경에서도 자신의 뜻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옛날 희남자의 인간훈에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방 변새에 한 노인이 살았는데 그가 기르던 말이 이웃 호나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 노인이 웃으며 하는 말이 "인생 백가지 일에 속단을 허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후에 그의 말이 한필의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이 여전히 웃으며 하는 말이 "인생 백가지 일에 속단을 허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노인의 아들이 말을 좋아하여 말을 타다가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이 노인이 슬포하며 여전히 말하기를 "인생 백가지 일에 속단을 허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새나라와 호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나라의 청년들이 모두 출전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노인의 아들은 불구자였기 때문에 홀로 살아 남았습니다. 이 노인 여전히 웃으며 하는 말이 "인생 백가지 일에 속단을 허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함부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한치 앞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살전 5:17-18의 말씀대로 범사에 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아니할 때 더욱 하나님의 뜻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의 감사, 몸에 한가닥 실오라기라도 감았거든 항상 베짜는 여인의 수고를 생각하고, 하루 세끼니의 밥을 먹거든 항상 농부의 노고를 생각하라(명심보감 성심편).
2) 다음으로 다윗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감사 했습니다.(시116: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참된 신앙의 감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특별 은총에 무엇을 보답할까 보답할 길이 없어 그 이름을 부르짖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이 구원의 특별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1장이나 요한일서 4장의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흑망의 권세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리라"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감사를 한층 더하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 문 앞에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소와 양의 제물에 대하여 그 머리에 손을 얹고 감개무량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피를 뿜고 가죽을 베끼울 제물에 대하여 그들은 눈물과 감사로 그 머리에 손을 얹었던 것입니다. 이 제물은 이사야 53장의 말씀과 같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감격에 사무처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시136편) 속죄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게 감사와 감격의 찬송을 드렸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사도들은 그들의 편지마다에서 구원을 주신 특별은총에 감사하는 머릿말을 썼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귀한 영적 은혜에 대하여 구구절절 감사를 드리었습니다.
감사절을 맞이한 우리는 이 감사절에 무엇을 이유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첫재는 물질적 추수에 대한 감사요, 둘째는 영적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 입니다. 감사는 형편과 처지를 초월하여 하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영국 트렌취 감독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벌써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만한 빛만 비치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자비로운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생이란 왜 이렇게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찌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궤딱지같은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느쪽 입니까 부디 모든 형편과 처지를 초월하여 주님께 감사와 찬송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1. 각국의 감사 인사 서양 사람들은 비교적 이 "감사"라는 표현(인사)를 잘 하는 편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 희극 배우였던 김희갑씨가 불란서를 방문했을 때 "멜시 뽀쿠"(Merci beaucoups),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듣고 한국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불란서에 가서<멸치 뽁쿰>을 배웠다"고 했답니다.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덴큐"(Thank you)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당케 쉰(Danke schon), 화란어로는 "당퀴 벧(Dank U wel), 일본어로는 "아리가도우 고자이마스", 중국말로는 "셰 셰", 이태리어로는 "그라지에"(Grazie), 스페인어로는 "무차스 그라시아스"(Mucharistia), 헬라어로는 "유카리스티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어로 "토다"라고 합니다.
2. 성경의 감사 히브리어의 "감사"란 말 "토다-"는 "감사한다"라는 야다에서 온 말로서 손을 펴는 것, 공언, 공경, 특별히 예배자들의 성가대, 신앙고백, 감사 등의 뜻을 가졌고, 동사 "야다"는 "손"이라는 말 야드에서 온 말로 "손을 쓰다, 던지다, 경배하다(손을 펴서), 찬양하다, 감사하다".등의 뜻이 있습니다. 역대상 16장 4절을 보면 "다윗 왕이 레위인 중에 어떤 사람을 택하여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게 했다"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솔로몬 왕이나(대하5:13,7:6), 히스기야왕에 의해(대하 31:2) 계속되었고 포로생활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느 11:17,12:24,27,31,38,40).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감사를 제도화하여 이를 수행 하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더라도 늘 감사의 표현이 그의 생애속에 넘침니다. 양식을 얻고 감사했으며(요 6:11,23), 기도의 응답을 받고 감사했으며 (요11:41), 최후의 만찬때도 감사했습니다(눅 22:17,19). 바울선생도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축복에 감사를 아기지 아니했습니다.
(1) 신앙의 선언(롬 1:8,골 1:3,살전 1:2),
(2) 은혜 (고전 1:4,고후 1:11,4:15),
(3) 전파된 말씀을 받음(살전 2:13),
(4) 은혜의 장성(살후 1:3), 주어진 자유(고후 9:11),
(5) 계약에 대한 기쁨 (살전 3:9) 등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감사가 성경에 넘쳐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로 일생을 넘쳐 흐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3. 현대의 감사절의 유래 현대적 의미의 감사절의 유래를 생각해 보고저 합니다. 주후
1,620년의 일입니다. 영국의 종교 개혁자 위크마(Wycliffe)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Puritans)들은 형식종교인 영국국교의 박해를 만나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마치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만 믿고 애굽을 떠난 것 같이 배를 타고 그 나라를 떠났습니다. 처음에 도착한 곳은 화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도 마음껏 자유로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는 이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탄압하는 기세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자유를 찾아 배를 탔습니다. 때는
1,620년 9월 6일 그들은 처음 한 해 먹을 양식을 싣고 정처없이 망망한 바다에 메이 플라워호(May-flower)를 띄웠던 것입니다. 배에 오른 사람은 남자 78명, 여자 24명이었습니다.
그해 11월 19일 63일간의 죽음의 항해를 마치고 구사일생으로 도착한 땅이 지금의 미국 포트머츠(Porth mouth)였습니다. 그들은 감격하여 한 발은 배에 싣고, 한 발은 육지를 딛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상륙하여 산림을 채벌하여 먼저 토막교회를 짓고, 그 다음 학교를 짓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집을 세우니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추운 겨울을 지나는 사이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자라 병이 들어 그들 반수가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통하여 인디언들과도 가까이 지나게 되었고, 청교도라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토지를 개간하여 옥수수,원두,밀,보리씨. 등을 파종했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습니다. 예상 외의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기쁨에 넘친 그들은 처음 추수한 오곡백화 곡식을 앞에 놓고 하나님게 추수의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협력해 준 근처의 인디언들을 청하여 칠면조를 잡고 옥수수와 밀가루 빵과 원두로 케이크를 만들어 성찬으로 식탁을 나누며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때가 11월이었습니다. 그들은 그후 해마다 점점 풍성해지는 오곡백화를 거둘 때마다 추수감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1864년 미국에서는 링컨 대통령의 제의로 이 아름다운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여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여 지키게 하니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감사일은 각 나라의 형편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11월 중에 지키게 되었습니다.
4. 우리 나라의 감사절의 유래 우리 민족, 즉 고대 한민족은 국가형태를 이루기 전 부족국가로서 부여, 고구려, 옥저, 예, 한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부터 가을마다 예배는 아니지만 추수감사제를 드린 기록이 있습니다. 대동강 유역의 낙낭군을 중심하고 북방 만주 벌판에 자리잡고 있던 부여에서는 영고라하여 12월에, 고구려에서는 동맹이라 하여 10월에, 강원도 동해 가장자리 산에 있던 예에서는 무천이라 하여 역시 10월에, 남방에 자리잡고 있던 한에서는 그 이름이 전해지는 바 없으나 10월에 각각 제를 드렸습니다. 이때는 모든 사람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감사했던 것입니다. 신라에서는 음력 8월 보름날을 "가위", 즉 추석을 감사제로 삼아 왔는데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3대 유리왕때 경주의 6부를 두 구역으로 나누어 왕녀 두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한 구역내에 사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패를 갈라 7월 15일 즉 중원일부터 궁중 정원에 모여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삼베를 짜기 시작하여 8월 보름에 그 성적의 우열을 따져 진편이 음식을 차려 놓고 이긴편에 사례를 하고 가무를 하며, 유쾌하게 놀았는데 이것을 가위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가위는 정월 초하루와 함께 신라 국민의 양대명절이 되었는데 "가위"라는 말은 이 가위의 유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날은 시절이 좋고, 달이 좋고, 또 배곡이 무르익어 놀기 좋은 시기라는 여건이 덧붙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도 이 날을 중추라 하여 명절로 삼고 즐기는 풍습이 있지만 우리 나라만큼 성대하지는 않습니다. 신라시대 이래 중요한 명절로 내려 오는 이날에는 국가적으로도 여러가지 행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가난한 집에 이르기까지 성찬을 베풀어 온 마음이 포식하며 즐거워 했다는 것입니다. "줄 다리기", "그네 뛰기",'닭잡는 놀이","씨름","소싸움","운동회", "노래자랑", 등의 풍속이 이 때 있었고 성묘, 제사, 우상숭배. 등 잘못된 풍속도 뒤 따른 것 같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알지 못햇던 백성이었던지라, 이 날에 조상숭배, 우상숭배, 음주, 도박 등 여러가지 죄악에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란 어떤 것인지 그럼 생객해 보고저 합니다.
5. 물질 추수의 감사 누가복음 12장 16절에서 21절까지를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결론으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부자가되고 하나님을 위하지 아니하는 자가 이와 같으니라"(21)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야비하고 천박한 감사의 태도를 말한 것입니다. 이 감사(정신)은 무 종교적이며 물질적이며 자기 중심의 태도인 것입니다. 능력과 노력으로 자신의 창고가 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물질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우상숭배입니다. 유대인의 우상숭배, 바알 예배는 하나님을 불신앙하며 모독하는 죄악이니 최대의 범죄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서도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으며, 이와 같은정신 태도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수입, 수확을 자기 능력, 혹은 자연의 결과로만 아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몰각하는 것이요, 이런 사람은 대개가 향락주의, 폭력주의,무신론주의 자들인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히브리인의 감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의 감사는 재물 얻을 능력을 내게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하나님 자신이 잘못하여 인간이나 동식물을 굶어 죽인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 입을 것이 없어서 죽은 예는 많이 있습니다. 한때 예루살렘 성이 멸망되던 때는 먹을 것이 없어서 여인들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서로 바꾸어 잡아 먹은 예가 있습니다. 왜 이것은 외부와의 연락이 적군의 포위 때문에 끊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값이었습니다. 인간 편에 잘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6. 영적 추수의 감사 시편 65편, 116편, 12절 등을 보면 "여호와 내게 주신 은사여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다윗 성도의 신앙적 감사의 태도입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의 자연 은총을 감사하고 있습니다(시65:9-13). 풍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권고하시는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땅 위에 죄악이 관영 할 때마다 흉년이 지는 일은 역사상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때는 인간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풍년이 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정한 시기 (죄악이 관영한 시기)가 이르기까지 베푸시는 자연은총의 덕입니다(마 5:45-48).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순경에나 역경에나 언제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경에서 뿐만 아니라 역경에서도 자신의 뜻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옛날 희남자의 인간훈에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방 변새에 한 노인이 살았는데 그가 기르던 말이 이웃 호나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 노인이 웃으며 하는 말이 "인생 백가지 일에 속단을 허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후에 그의 말이 한필의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이 여전히 웃으며 하는 말이 "인생 백가지 일에 속단을 허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노인의 아들이 말을 좋아하여 말을 타다가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이 노인이 슬포하며 여전히 말하기를 "인생 백가지 일에 속단을 허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새나라와 호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나라의 청년들이 모두 출전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노인의 아들은 불구자였기 때문에 홀로 살아 남았습니다. 이 노인 여전히 웃으며 하는 말이 "인생 백가지 일에 속단을 허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함부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한치 앞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살전 5:17-18의 말씀대로 범사에 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아니할 때 더욱 하나님의 뜻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의 감사, 몸에 한가닥 실오라기라도 감았거든 항상 베짜는 여인의 수고를 생각하고, 하루 세끼니의 밥을 먹거든 항상 농부의 노고를 생각하라(명심보감 성심편).
2) 다음으로 다윗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감사 했습니다.(시116: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참된 신앙의 감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특별 은총에 무엇을 보답할까 보답할 길이 없어 그 이름을 부르짖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이 구원의 특별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1장이나 요한일서 4장의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흑망의 권세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리라"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감사를 한층 더하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 문 앞에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소와 양의 제물에 대하여 그 머리에 손을 얹고 감개무량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피를 뿜고 가죽을 베끼울 제물에 대하여 그들은 눈물과 감사로 그 머리에 손을 얹었던 것입니다. 이 제물은 이사야 53장의 말씀과 같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감격에 사무처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시136편) 속죄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게 감사와 감격의 찬송을 드렸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사도들은 그들의 편지마다에서 구원을 주신 특별은총에 감사하는 머릿말을 썼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귀한 영적 은혜에 대하여 구구절절 감사를 드리었습니다.
감사절을 맞이한 우리는 이 감사절에 무엇을 이유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첫재는 물질적 추수에 대한 감사요, 둘째는 영적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 입니다. 감사는 형편과 처지를 초월하여 하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영국 트렌취 감독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벌써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만한 빛만 비치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자비로운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생이란 왜 이렇게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찌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궤딱지같은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느쪽 입니까 부디 모든 형편과 처지를 초월하여 주님께 감사와 찬송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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