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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 (시69:30-31)

본문

I.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귀한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보다 더 귀하고 보람있는 일은 없읍니다. 사람을 몇 등급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기 입장도 모르는 자 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그와 관계된 자들에게 다 피해 를 주고, 그들을 다 불행하게 만듭니다. 자기의 입장만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입장도 모르는 자 보다는 났습니다. 그러나 자 기의 입장만 알기 때문에 그와 같이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피곤하게 만들고, 서운하게 만듭니다. 남의 입장 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입장도 알 뿐만 아니라, 남의 입장도 이 해해 주는 사람입니다. 사회가 좋아지려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이런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바로 이런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기쁨 보다는 남을 기쁘 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에게 웃음을 주고, 남에게 소망을 주고, 남 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자들을 보고 훌 륭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가 생각 하기에는 네번째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네번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남을 기쁘게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아니 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독 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신 것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1:10)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좋게 하려고 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좋 게 하려고 살으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좋게 하려고 살아 야 합니다. (살전2:4)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종된 우리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고, 사람들을 기쁘게하는 자들이라 면 우리는 사람의 종이지 하나님의 종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 의 종이지, 절대로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고후5:9)에서는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즉 죽든지 살든 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 했읍니다. 기독교인들은 살든지 죽든지 오직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엡5:10)에서는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찾아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일을 찾는데 혈안 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찾아 내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골1:10)에서는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 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하여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 기 위하여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첫번 째 편지에서는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 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에 대하여 받았으니, 그 일에 더욱 힘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더욱 힘을 써야 합니다.
I. 본 론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기 쁘시게 하는 것을 아는 자가 바로 지혜 있는 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기쁘게 하는 법을 아는 자들입니다. 어리석운 자들은 남을 기쁘게 하는 법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기쁘게 할 줄 모르는 자들 은 어리석운 자들입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을 아는 자들 입니다. 사람을 기쁘게하는 법을 아는 자는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러나 사람만 기쁘게할 줄 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줄 모르는 자는 진정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영악한 자입니다.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을 아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우리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 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뿔과 굽이 있는 황소는 큰 황소를 말합니다)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하나님께 큰 황소를 제물로 드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릴 때 보다도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는 자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이며, 그것을 행하는 자는 참으로 복 있는 자입니다. 다윗 왕이 큰 황소를 드리는 것 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는 것" 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는 "감사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자" 입니다. 우리 흑석동 교회 성도님들은 감사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 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 감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은 어떤 찬송이기에 그 찬송이 그 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요 저는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 감사로 찬송을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 겠다고 하는 자가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겠다고 했는 지를 살펴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할까를 살펴보면 은 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1.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었습니다.(v.4) 오늘 본문에 시편 기자인 다윗 왕이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광대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은 당시 시편 기자가 괴로움과 고통으로 둘러 싸인 상황에서 그런 감사의 찬송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무고히" 그를 미워합니다. "무고"란 말은 "없는 일을 꾸며내어서 고소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꾸 며서 고소를 하는 것을 무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시편기자인 다윗 왕을 무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한다는 뜻입니다. 미워해도 보통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미워합니다.
그런데 미워하는 것이 시편기자가 잘못을 해서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기자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그가 잘 되는 것이 시기가 나서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를 미워하는 자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내 머리털 보다도 많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머리털 보다도 많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많은 수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10:30) 말씀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다 세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 지만, 그러나 우리의 머리털은 하나님 같으신 분이나 세실 수 있지, 우리 인간이 그 많은 머리털을 어떻게 셀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시편 기자를 미워해서 그 를 무고하는 자들이 이렇게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시편기자가 "도둑질"을 했다고 주장을 합니다. 교회 에 잘 다니는 신자요, 많은 성도들의 지도자요, 추앙을 받는 자인데, 그를 도둑놈이라고 무고를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이제 그가 정성을 다하여 쌓아 올린 신앙 의 탑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를 미워하는 자들이 이렇게 많고, 그들의 주장이 너 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이 시편기자는 하는 수 없이 취하지도 않은 것을 물 어주게 되었습니다. 취하지도 않은 것을 물어주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무고하는 죄를 하는 수 없이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많은 원수들의 강압에 못 이겨 자기가 짖지도 않은 죄를 졌다고 인정하게 되었읍니다. 그러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이 세상에는 이렇게 억울하게 강압적인 누명을 쓰는 경우가 많이 있읍니다. 신앙생활을 잘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아 잘되는 것을 사람들이 시기하여 거짓을 꾸며내서 누명을 씌워 우리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당하면 화가나고, 답답해 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는 그러한 상황에서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 으로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있습니다. 억 울한 누명을 써서, 그로 인하여 평생 쌓아 올린 모든 명예와 재물을 다 잃 어 버렸는데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찬송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가다가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누명으로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머리털 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고난과 불행으로 사방이 둘러 싸인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할 때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심을 믿고, 원망 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런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을 당했는데, 그는 죽을 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vs.1-2) 시편기자가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데, 그의 몸은 병들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그 병이 점점 더 심해져서 이제는 거의 죽게 되었읍니다. 시편 기자는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 왔다"고 말씀하고 있읍니다. 여기에서 "영혼"이라고 하는 히브리어는 "목"이란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이제 물이 그의 목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사람이 설 곳이 없는 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의 운명이 깊은 바다에서 파선이 되어서 배에 물이 밀려들어와 배가 거 의 좌초되게 된 것과 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의 죽음이 거의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죽음이 몰려오는 것이 눈에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의 적들은 이 시편기자가 이런 죽을 병에 걸린 것이 바로 그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기자는 꼼짝없 이 죄인이 되었고, 그의 원수들은 크게 득의하게 되었습니다. 원수들로 부터 무고히 누명을 쓰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우리의 모든 것 을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시고 옳고 그른 것을 바르게 판단해 주셔야 하는데, 하나님은 옳은 자기의 편을 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원수들에게 유리하게 자기에게 죽을 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죽을 병에 걸려 죽게 하셔도 얼마든지 감사하겠는데, 왜 하필이면 이렇게 억울하게 누 명을 쓰고 있을때 그런 병에 걸리게 하신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지 않고, 세상을 저주하며 죽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로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인데도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습니다. 욥이 모든 재산과 자식과 건강까지 다 잃어 버렸을 때, 친구들은 찾아와 서 욥이 환난을 당한 것은 다 그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을 할 때, 욥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 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감사의 찬송을 드린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감사 찬송을 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평안할 때, 일이 잘 될 때 감사 찬송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기가막힌 억울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다가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쓸 때도 있고,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그 누명을 뒷받침해 주는 것과 같은 재앙이나 불행이 우리 에게 다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꼼짝없이 억울한 누명을 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세상이 저주스러운 것 보다는, 하나님이 더 욱더 저주스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들은 비록 그런 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이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입니다. 미국의 한 목사님이 코넷티컷(Connecticut)에 있는 한 교회 가셔서 예배 에 참석했다. 예배 중간에 성만찬을 하는데, 그 성만찬 의식 중에 회중이 다 무릎을 끓고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다. 그때 그 목사님 한 부인이 앉 아 있었다. 양손을 들고 찬송을 부르는데, 그녀의 팔과 손은 중한 불구 였다.
그런데 그녀 옆에는 한 쌍의 목발이 있었다. 그녀의 발도 심한 불구였다.
그런데고 기쁨이 충만하여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 무엇이 저 자매로 저렇게 기쁘게 할렐루야 찬송을 부 르게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녀의 찬양은 그녀의 깊은 곳에서 울려 나 오는 것 같았다. 이 모습이 오늘 본문의 저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흑석동 교회 성도들도 불행에 불행이 겹치는 것과 같은 때에도 찬 송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주 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가 당하는 불행은 그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 기는 모든 자들에게도 큰 악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저자는 당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중에도 대표적인 인물이였읍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세상의 궁궐보다도 더 사모했습니다. 세상의 궁궐에서 사는 것 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할 정도록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했읍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그의 마음을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다"(v.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뜨거운지 그 열심의 불이 자기 자신을 살라 버릴 정도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예배에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한 시간도 빼놓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준비해서 참석을 했습니다. 교회 일 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헌신적으로 봉사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 의 백성들의 모범이요, 대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당하는 불행은 그에게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그와 같 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악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제 그는 신용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못믿는 불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도적놈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는 이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었습니다. 성문에 앉아 있는 사람이 성문을 드나드는 자들에게 이 시편기자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소문은 금방 온 성에 다 퍼졌습니다. 사람들이 술만 취하면 이 시편기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술취 한 자들은 한 이야기 또 하고 한 이야기 또 하고 합니다. 전혀 생각없는 말들을 합니다. 이들은 시편기자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던 것들을 기억해 내고는 그 모든 것을 다 들추어가며 시편기자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곡하고 금식하며 자기 영혼을 경계하던 그 아름다운 신앙의 행동을 이야기 하면서 조롱을 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나라가 잘 못 되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께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대신 회개하기 위하여 베옷을 입었는데, 그것을 들추어 가며 조롱을 합니다. 하나님께 열심을 내던 자가 이렇게 되어서, 그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이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같이 신앙생활하던 많은 성도들이 핍박 을 받고 있습니다.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 치를 당케 마옵소서"(v.6)하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기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도 이 시편기자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어야 합니다. 만약 이 시편기자의 이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고, 그래서 그의 정의로움이 증명되지 않으면, 이 시편기자와 같이 신앙생활 하던 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시편기자의 누명은 벗겨지지 않고, 그의 정당함은 인정 받 을 길이 없습니다. 이 시편기자는 자기가 당하는 억울함과 고통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읍니다.
그런데 자기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어려 움을 당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 시편기자는 지금 이런 억울한 상황속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편기자는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영 화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감사찬송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잘 될 때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의를 위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며, 핍받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찬송을 드리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가 나 자신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 니라, 나로 인하여 교회가 욕을 먹고, 교인들이 욕을 먹어 더이상 얼굴을 들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도 늘 하나님께 감사찬송을 드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 일로 인하여 다른 많은 사람들까지 피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찬송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4. 긴박한 상황인데도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고 있습니다.(vs.13-28) 이 시편기자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과 신실하심에 호소하면서 하나님께서 속히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지금 자기가 너무나 긴박하고 고통스런 상황속에 처해 있으 니, "속히" 자기를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이 기도는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을 위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도 좋으나, 이 남아 있는 성도들이 나의 일로 인하여 저들의 신앙을 다 버리게 되니, 속히 나를 구원해 주소서" 하 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 주시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시편기자는 이번에는 자기를 해하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과 그들의 경건하지 않는 생활과 불신행위들을 하나님께 상기시키고 있읍니다.(vs.19-21) 이렇게 나쁜 사람들이 나를 해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으니 나를 속해 구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자기가 당하는 억울함을 다시 한번 생각을 하고,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의 악을 생각하자 화가 나서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간구 하는 기도를 드리던 데서 그들을 저주하는데로 돌아 섰습니다. 시편기자는 원수들이 자기에게 행한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갚아 달라 고 구했습니다. (vs.22-28) 시편기자가 이렇게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즉시 응답하실 수 밖에 없게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의 응답의 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여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제 응답하신다는 징조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오늘 시편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찬양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드리는 감사의 찬양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찬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사방팔방으로 다 생각해보아도 내가 분명하게 옳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는데도 하나님의 응답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꼭 응답해 주셔야 하는데도 하나님의 응답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 같고, 하나님에 대하여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경우를 당한다고 하더라도 오늘 시편기자와 같이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 게 하는 것입니다.
I. 결론 그럼 이 시편기자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 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움을 예상했 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내 생각대로 되지는 않아도,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를 도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이런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감사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저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들만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을 당한다 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감사 찬송 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루푸스 존스(Rufus Jones)라는 사람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다. 그 아들은 그에게 이 세상 전부였다.
그러므로 그는 큰 실의에 빠졌다. 몇 년 후에 그는 그를 그 깊은 수렁에서 나오게 한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에 대하여 글을 썼습니다. 그는 그 글 결론에서 그가 어떻게 그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열게 되었는지를 명쾌한 비유로 설명을 했다. "나의 슬픔이 최고로 격렬할 때, 나는 어느 대도시의 큰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큰 대문이 열리며 어린 아이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가 문밖에 나오자 그 문이 저절로 닫아 졌다. 그리고는 그 문이 잠겨졌다. 어린 아이는 그 문뒤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고 싶었다. 그러나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작은 주먹으로 그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 소녀는 대문을 흔들며 덜커덩 덜커덩 소리가 나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헛수고였다. 그러자 그 어린 소녀는 갑자기 가슴이 터진듯이 울부짖었다. 그 부르짖음이 그녀의 어머니에게 들렸다. 어머니는 나와서 어린 딸을 들어 안았다. 그리고는 눈물이 흐르는 볼에 뽀뽀를 했다. 그러면서 어린 딸에게 "내가 올거라는 것을 몰랐냐 이제는 괜찮아"하고 말을 했다. 그때 갑자기 나는 제정신이 들면서 나의 닫혀진 문 뒤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닫혀 진 마음의 문 뒤에 있는 사랑, 여러분을 그 고통의 문을 통하여 집으로 인 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라. 고난과 불행으로 닫겨진 우리의 마음 문 뒤에 있는 하나님이 사랑을 발 견한 자들이 오늘 시편기자와 같이 불행과 고난 가운데서도 노래로 하나님 의 이름을 찬양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 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지자 하박국은 (합3:17-18)에서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 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고 하셨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그 어려움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 과 하나님의 도움심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하박국 선지는 이런 감사 의 찬양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일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셔서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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