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리석은 자 (잠1:20-33)
본문
여러분 여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그네 한 사람이 우연히 까마귀 부자가 하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야 이 녀석아, 풀밭에 쓰러져 있는 인간들 곁에 가까이 가면 안된다고 얼마나 내가 타일렀더냐. 원래 인간이란 교활해서 죽은 척 하고 있다가 우리가 안심하고 가까이 가면 순간적으로 붙들어 간다고 하지 않더냐, 오늘 네가 붙들려서 거의 죽게 된 것을 내가 그 사람에게 보물 있는 곳을 알려 주고서야 너의 생명을 건졌다. 오늘 일을 평생토록 명심하고 다시는 사람들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해라.” 아비 까마귀는 아들 까마귀를 교육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 까마귀는 아비 까마귀의 교육을 들은 체도 아니하고 딴전만 부리고 있었다.
이번 일을 통하여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아들이 언제 또 사람들에게 붙들려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아비 까마귀는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아들의 머리통을 심하게 쥐어 박았다.
그런데 급소를 맞았던지 아들 까마귀가 죽고 말았다. 그러자 아비 까마귀는 어디로 날아가더니 이상한 나뭇잎 하나를 물고 와서 아들 위에 얹었다. 그러자 죽은 까마귀가 거짓말 같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그네는 까마귀가 날아간 다음 그곳에 남아있는 신기한 그 나뭇잎을 주워서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까마귀 부자를 구경하느라고 허비한 시간을 보충할 양으로 부지런히 산길을 가다가 죽어 자빠진 사자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나그네는 자기가 지니고 있는 나뭇잎의 효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죽은 사자 위에 나뭇잎을 얹었다.
그런데 순간 거짓말 같이 되살아난 사자가 자기를 살려준 그 나그네를 잡아 먹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본 까마귀 부자는 “참 딱한 것이 인간이로군 그 풀잎을 얹으면 어떻게 될 것을 자기 눈으로 보았으면서 이런 불행을 자초하다니 역시 어리석은게 인간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우화이다. 도적질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전과자가 또 다시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유괴하거나 죽이면 어떤 결과가 올것인가를 모르고, 그 자신도 필경은 죽게된다는 사실을 모르는체 어리석은 짓을 하고, 부정한 짓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공직자가 뇌물을 받아 먹고 철창으로 들어가고, 마약을 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면서도 마약을 먹고 폐인이 되어 죽어 가고 하는 것을 보면, 어리석은 자들은 아무리 그 귀에 진리를 들려 줘도 깨닫지 못하나 보다. 만약 이런 사람들을 까마귀들이 보면 과연 무엇이라고 말을 할까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4:1)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부인하는무신론자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어리석은 사람은 무신론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이런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왜 이런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인가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겠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1.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교훈을 멸시한다. 무신론자는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 안에도 무신론자들이 있다. 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자는 누구일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훈을 멸시하는 사람이다. 교회는 출석하지만 하나님의 교훈대로 순종하며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책망을 우습게 여긴다.
첫째,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다. 가끔 우리는 ‘어떻게 믿는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하나님이 무섭지도 않나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어떻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부정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 어떻게 신자라는 사람이 사기를 칠 수 있는가 어떻게 집사가 남의 돈을 떼어먹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장로가 교회 재정을 유용할 수 있는가 어떻게 목사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착복할 수 있는가 모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집사라고 해도 장로나 목사라고 해도 이런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사람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아는 사람은 양심에 가책받는 짓을 할 수 없다. 사람의 이목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둘째,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 쉽게 낙심한다. 사람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 보아야 그 믿음을 알 수 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이고 퍽 믿음이 좋아 보이던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쉽게 좌절하고 낙심하는 경우를 본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가 개혁의 기치를 내세웠다가 교황청에서 너무 심하게 반발을 하니 크게 실의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이를 본 그의 아내는 하나님이 돌아가셨다고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능력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돕는 자 중에 계심을 믿는다면 왜 우리가 좌절하고 낙심하겠는가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왜 그렇게 좌절했는가 자신들을 이곳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다. 또 그 하나님이 이 위기에서도 보호하실 것을 믿었다.
그러므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2. 어리석은 사람은 오직 자기 만족을 위해 산다. 오늘날 교회밖에 있는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보라. 옛날에는 사상이나 이념을 위해 죽기까지 하였다만 요샌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자기 만족을 위해 산다. 돈, 명예, 쾌락, 권력… 이런 것이나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이다. 딤후 3:1-5를 읽어보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그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 자기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만 사랑한다. 부모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고, 하나님께도 감사할 줄도 모른다. 무정하기 짝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돈만 사랑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해주셨다. 왜 어리석는가 돈밖에 몰랐다. 풍년을 들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도 모른다. 지금까지 고생한 일꾼들에게 그 동안 수고했다는 따뜻한 말 한 마디 할 줄 모른다. 그저 자기만 알고 돈만 안다. 그러니 주님이 “이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 교회도 취미 삼아 나온다. 이런 사람은 믿음 생활까지도 자기 만족을 위해 하는 사람이다. 교회도 자기 만족을 위해 나간다. 봉사를 하는 것도, 헌금을 하는 것까지도 자기 만족을 위해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3. 어리석은 사람은 뒤늦게 후회한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질러도 반응이 없었다.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소리를 지르기를 언제까지 이렇게 살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하여도 못들은 체 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후회를 한다. 언제인가 27절을 보자. (잠1:27)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한 후이다. 재앙이 폭풍같이 임하고 나자 후회한다. 근심과 슬픔이 닥쳐오니 그제야 후회한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기회를 놓치고 나서 때늦은 후회를 한다. 부모가 ‘공부해라. 학교에 열심히 다녀라’해도 못들은 체 하고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만 하던 사람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후회한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기회를 놓치고 나서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이치며 하나님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결국 자기 행위를 먹는다. 자기를 죽이고 만다.
두 젊은 여자가 아파트에서 잠을 자다가 아파트를 휩쓸었던 불 속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집에 성능이 좋은 화재탐지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작동하지 않았 습니다. 왜냐고요 전날 밤 파티가 열리는 동안에 누군가가 안전장치를 작동하지 않도록 해 놨기 때문입니다. 음식요리나 촛불에서 나오는 연기 때문에 탐지기가 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 장치를 차단시켰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우리는 자신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경보장치를 꺼버린 두사람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이 한 일들에 대해 충분히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고 믿고서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함으로써 성령님을 소멸 시켰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결국 그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민감한 화재탐지기처럼 우리를 귀찮게 하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거짓 경보를 울리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어떤 원칙이나 경고를 생각나게 하시어 우리의 양심을 작동시킬 때 그것은 사실상 성령님의 사랑과 지혜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에서 오는 희생을 막기 위해 성령님이 주시는 사랑의 경고를 귀중히 여김으로써 우리는 항상 후회보다는 안전이 더 좋은 것임을 곧바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을 소멸치 말며" (살전5:19)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선물이네 안내의 불빛이라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같게 될 때 그것은 무엇이 옳은지를 보여 준다네-스퍼어 명상:양심을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곤경을 겪게 된다.
이번 일을 통하여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아들이 언제 또 사람들에게 붙들려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아비 까마귀는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아들의 머리통을 심하게 쥐어 박았다.
그런데 급소를 맞았던지 아들 까마귀가 죽고 말았다. 그러자 아비 까마귀는 어디로 날아가더니 이상한 나뭇잎 하나를 물고 와서 아들 위에 얹었다. 그러자 죽은 까마귀가 거짓말 같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그네는 까마귀가 날아간 다음 그곳에 남아있는 신기한 그 나뭇잎을 주워서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까마귀 부자를 구경하느라고 허비한 시간을 보충할 양으로 부지런히 산길을 가다가 죽어 자빠진 사자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나그네는 자기가 지니고 있는 나뭇잎의 효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죽은 사자 위에 나뭇잎을 얹었다.
그런데 순간 거짓말 같이 되살아난 사자가 자기를 살려준 그 나그네를 잡아 먹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본 까마귀 부자는 “참 딱한 것이 인간이로군 그 풀잎을 얹으면 어떻게 될 것을 자기 눈으로 보았으면서 이런 불행을 자초하다니 역시 어리석은게 인간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우화이다. 도적질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전과자가 또 다시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유괴하거나 죽이면 어떤 결과가 올것인가를 모르고, 그 자신도 필경은 죽게된다는 사실을 모르는체 어리석은 짓을 하고, 부정한 짓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공직자가 뇌물을 받아 먹고 철창으로 들어가고, 마약을 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면서도 마약을 먹고 폐인이 되어 죽어 가고 하는 것을 보면, 어리석은 자들은 아무리 그 귀에 진리를 들려 줘도 깨닫지 못하나 보다. 만약 이런 사람들을 까마귀들이 보면 과연 무엇이라고 말을 할까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4:1)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부인하는무신론자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어리석은 사람은 무신론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이런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왜 이런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인가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겠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1.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교훈을 멸시한다. 무신론자는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 안에도 무신론자들이 있다. 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자는 누구일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훈을 멸시하는 사람이다. 교회는 출석하지만 하나님의 교훈대로 순종하며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책망을 우습게 여긴다.
첫째,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다. 가끔 우리는 ‘어떻게 믿는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때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하나님이 무섭지도 않나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어떻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부정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 어떻게 신자라는 사람이 사기를 칠 수 있는가 어떻게 집사가 남의 돈을 떼어먹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장로가 교회 재정을 유용할 수 있는가 어떻게 목사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착복할 수 있는가 모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집사라고 해도 장로나 목사라고 해도 이런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사람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아는 사람은 양심에 가책받는 짓을 할 수 없다. 사람의 이목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둘째,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 쉽게 낙심한다. 사람은 고난과 시련을 겪어 보아야 그 믿음을 알 수 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이고 퍽 믿음이 좋아 보이던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쉽게 좌절하고 낙심하는 경우를 본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가 개혁의 기치를 내세웠다가 교황청에서 너무 심하게 반발을 하니 크게 실의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이를 본 그의 아내는 하나님이 돌아가셨다고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능력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돕는 자 중에 계심을 믿는다면 왜 우리가 좌절하고 낙심하겠는가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왜 그렇게 좌절했는가 자신들을 이곳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다. 또 그 하나님이 이 위기에서도 보호하실 것을 믿었다.
그러므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2. 어리석은 사람은 오직 자기 만족을 위해 산다. 오늘날 교회밖에 있는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보라. 옛날에는 사상이나 이념을 위해 죽기까지 하였다만 요샌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자기 만족을 위해 산다. 돈, 명예, 쾌락, 권력… 이런 것이나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이다. 딤후 3:1-5를 읽어보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그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 자기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만 사랑한다. 부모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고, 하나님께도 감사할 줄도 모른다. 무정하기 짝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돈만 사랑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해주셨다. 왜 어리석는가 돈밖에 몰랐다. 풍년을 들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도 모른다. 지금까지 고생한 일꾼들에게 그 동안 수고했다는 따뜻한 말 한 마디 할 줄 모른다. 그저 자기만 알고 돈만 안다. 그러니 주님이 “이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 교회도 취미 삼아 나온다. 이런 사람은 믿음 생활까지도 자기 만족을 위해 하는 사람이다. 교회도 자기 만족을 위해 나간다. 봉사를 하는 것도, 헌금을 하는 것까지도 자기 만족을 위해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3. 어리석은 사람은 뒤늦게 후회한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질러도 반응이 없었다.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소리를 지르기를 언제까지 이렇게 살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하여도 못들은 체 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후회를 한다. 언제인가 27절을 보자. (잠1:27)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한 후이다. 재앙이 폭풍같이 임하고 나자 후회한다. 근심과 슬픔이 닥쳐오니 그제야 후회한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기회를 놓치고 나서 때늦은 후회를 한다. 부모가 ‘공부해라. 학교에 열심히 다녀라’해도 못들은 체 하고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만 하던 사람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후회한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기회를 놓치고 나서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이치며 하나님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결국 자기 행위를 먹는다. 자기를 죽이고 만다.
두 젊은 여자가 아파트에서 잠을 자다가 아파트를 휩쓸었던 불 속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집에 성능이 좋은 화재탐지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작동하지 않았 습니다. 왜냐고요 전날 밤 파티가 열리는 동안에 누군가가 안전장치를 작동하지 않도록 해 놨기 때문입니다. 음식요리나 촛불에서 나오는 연기 때문에 탐지기가 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 장치를 차단시켰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우리는 자신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경보장치를 꺼버린 두사람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이 한 일들에 대해 충분히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고 믿고서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함으로써 성령님을 소멸 시켰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결국 그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민감한 화재탐지기처럼 우리를 귀찮게 하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거짓 경보를 울리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어떤 원칙이나 경고를 생각나게 하시어 우리의 양심을 작동시킬 때 그것은 사실상 성령님의 사랑과 지혜가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에서 오는 희생을 막기 위해 성령님이 주시는 사랑의 경고를 귀중히 여김으로써 우리는 항상 후회보다는 안전이 더 좋은 것임을 곧바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을 소멸치 말며" (살전5:19)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선물이네 안내의 불빛이라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같게 될 때 그것은 무엇이 옳은지를 보여 준다네-스퍼어 명상:양심을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곤경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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