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잠13:1-12)
본문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소망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소망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소망 없는 사람은 자연히 절망합니다. 자포자기합니다. 그러다가 자살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본문 12절에 보면 “(잠13:12)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 ”고 했습니다. 소망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잠10:28)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고 했습니다. 반면에 “(잠23: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잠23:18)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다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부류의 소망 소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소망이요, 다른 하나는 하늘의 소망입니다. 잠언에서는 의신,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 소망을 하늘에 두며, 악인,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그 소망을 이 세상, 이 땅에 둔다고 했습니다.
1. 보이는 소망 이 세상의 소망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령 세상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이 그대로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되는 경우보다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다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들어가는 학생보다 못 들어가는 학생이 많은 게 현실이 아닙니까 또 대학에 드어간다고 해서 다 훌륭한 학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못 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사람이 가지는 세상적인 희망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실망이 있고, 비극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런 세상의 소망이 혹 이루어지는 수가 있다 해도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의 만족은 없습니다. 더러는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사업하고, 성공만 해서 돈이 많게 되면 무엇이나 다 되고, 만족할 줄로만 생각했는데 정작 그렇게 되고 보니 기대하던 것처럼 그런 만족은 없다”는 것이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 속에 있는 해초가 물 밖에서 볼 때는 그렇게 싱싱하고, 보암직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해도 정작 바다 속에 드러가서 그 해초를 뜯어 물 밖에서 보면 이전에 보던 것과는 너무너무 다릅니다. 세상 것은 얻기 전에나 굉장해 보이지, 얻고 나면 별거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의 영화를 말할 때 솔로몬의 영화를 말합니다. 솔로몬만큼 지혜로운 왕도 없었고, 솔로몬 왕만큼 부하게 산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근방에 있는 모든 왕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올 때 그냥 옵니까 선물을 잔뜩 싣고 와서 그리곤 했는데, 솔로몬 왕 때 얼마나 나라가 부했는지 “은덩어리가 예루살렘 거리에 돌덩어리처럼 굴러 다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인생을 다 살고 쓴 전도서를 보게 되면 그의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지혜와 재물, 부귀와 영광을 한 몸에 지니고 즐겨 본 사람입니다. 만일 보통 사람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했다면 “자기가 가져보지 못하고 누려 보지 못했으니까 허튼 소리 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솔로몬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영화를 누리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얻기 전에는 굉장한 것 같지만 얻어 놓고 보면 별 개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혹시 이 세상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어느 정도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느낀다고 하여도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얼마 가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입니다. 잠깐입니다. 빨리 지나갑니다. 세상의 소망이란 문자 그대로 풀의 꽃과 같습니다. 안개처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집니다. 결국 세상의 소망은 절망의 식은 재로 화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망은 썩은 소망이요, 없어지는 소망이요, 죽은 소망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하루를 기분 좋게 살려느냐 이발소 가서 이발을 해라.” 덥수룩 한 머리는 다 잘라 버리고, 면도를 하고, 세수를 깨끗이 하고 나면 시원하고 기분이 상쾌합니다.
그런데 기분이 상쾌하고 좋은 게 며칠 갑니까 하루 갑니다. “한 주일을 기분 좋게 살려느냐 새 자동차를 사라.” 새 자동차를 타면 기분 좋잖아요. 문이 탄탄하고, 새 자동차 냄새나고, 또 좋은 차 사면 “누가 나좀 봐주나” 하고 아주 기분 좋습니다.
그런데 그게 한 주일쯤 갑니다. 한 주일이 지나고 나면 아무리 고급 차, 좋은 차 타 봐야 그저 그렇고 그렇습니다. “한 달을 기분 좋게 행복하게 살기 원하느냐 결혼을 해라.” 결혼을 한 후 한 달을 뭐라고 그래요 ‘밀월’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honeymoon"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꿀처럼 달다’는 겁니다. 여러분 다 경험해 보셨겠지만 얼만 달면 꿀처럼 달다 그러겠습니까 얼마나 좋으면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지나고 나면 어떻습니까 씁씁하죠 이게 세상입니다. 요사이 서양 청년들 가운데는 물질주의에 휩쓸려서 현실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편하게, 어떻게 하면 생을 소위 'enjoj' 하며 살아갈 것인가만 생각하고 장래 일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찰나주의, 현실주의입니다. 이상이란 것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은 내일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이 전부라면 이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오느 날 하루살이하고 모기하고 싸움이 붙었다고 합니다. 하루종일 싸움을 하다가 해가 지게 되니 모기가 “야, 내일 하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살이가 “아니, 내일이 뭐야 내일이 뭐야”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하루살이는 오늘 살다 끝나고 말기에 내일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인간 가운데도 “오늘 벌고, 오늘 먹다가 죽자” 하지, 내일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하루살이 같은 현실주의자, 찰나주의자가 많습니다. 분명히 들으십시오. 세상의 것은 잠깐 지나갑니다.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안개와 같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집니다. 세상의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은 소망하다가 없어지면 절망하게 되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닝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세상의 희망은 보이는 희망입니다. 세상의 희망은 잠깐인 것입니다.
2. 보이지 않는 소망
그런데 우리에게는 보이지 아니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늘의 소망입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우리에게는 하늘에 간직한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늘에 간직한 소망은 없어지는 소망이 아닙니다. 하늘의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이 하늘의 소망,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 영원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시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 “(시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주님께로부터 소망이 좇아온다는 말입니다. “(시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세상에 소망을 두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시71: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 ”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언제나 찬송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소망을 둔 사람은 한숨과 눈물로 끝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시119: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 이 소망이 누구로 말미암아 있습니까 주님이 나에게 소망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공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론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생생한 삶의 체험에 의지해서 우리에게 솔직히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골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과 생명이 되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까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셔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뭐라고 부릅니까 반석이라고 부릅니다. 반석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은 흔들리지만 그리스도는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세상은 변하지만 그리스도는 변하지 아니합니다. 그의 말씀도 일점 일획이라도 변하지 아니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둔 사람은 세상이 변할 때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둔 사람은 어떤 환경, 어떤 절망적인 조건 속에서도 절대로 절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적인 환경은 있지만 절망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연단은 소망을 낳습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순간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라는 것 전체가 다 자기 몸에 대한 바랍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세상에 사람이 사는 동안 자기 몸을 잘 간수하는 것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몸의 건강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되고, 위생을 지켜야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낡아집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우리 육신은 날로 부패해집니다. 혹 “나는 그렇지 않겠다” 라고 생각하는 젊은이 있습니까 저도 한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늙어갑니다. 이것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붙들어 매려고 해도 지나갑니다. 젊어서는 손에 힘이 서려도 나이들면 아무리 꽉 쥐려고 해도 부들부들 떨리면서 맥이 풀입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갈 때는 어떻게 갑니까 다 놓고 갑니다. 이것을 아시는 게 좋습니다. 좀 섭섭한 말이지만, 잠깐이면 지나갑니다. 겉사람은 후패합니다. ‘장막’이란 표현은 참 묘한 표현 같습니다. 장막은 천막이라는 말입니다. 새 천막을 쳐 놓으면 처음에는 팽팽합니다. 비도 막아주고, 햇빛도 막아주고, 바람도 막고 팽팽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보십시오. 햇빛에 색깔이 바랩니다. 줄이 늘어집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훅 불면 넘어지고 맙니다. 우리 육신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에다 소망을 두어야 됩니까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에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어떤 것입니까 보이는 소망입니까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까 세상의 소망닙니까 하늘의 소망입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에 소망을 두는 사람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앞에 놓여 있는 희망을 붙잡으려고 피하여 나온 우리들은 이것으로 용기와 격려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입니다.” 닻! 배에는 닻이 필요합니다. 닻이 엇는 배는 아무리 큰 베라고 해도 물결 흐르는 대로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닻이 있는 배는, 닻을 튼튼히 걸어 놓으면, 아무리 풍파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끄덕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를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 영혼의 닻이 있습니까 소망이 있습니까 소망이 있습니까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 어떤 조건 속에서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이 소망의 줄을 굳건히 붙잡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큰 파도에 일어날 때 이 닻이 긾은 바다 밑에 박혀 있어야 파도에 밀리지 아니하고 파선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을 우리 영혼의 닻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의 배후에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힘써 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이야기 하나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테리 로마에 가면 유서 깊은 명문 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 졸업식 때 천주교 신부가 와서 졸업 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졸업식 미사를 다 드린 다음에 학생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법과 대학생과 얘기를 했답니다. “자네는 법과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뭘 하려고 그러나” “예, 이제 변호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예, 어려운 사람들을 변호하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그 다음에는 돈을 좀 벌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결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을 낳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 공부를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 학교 다 보내고 결혼을 시키겠습니다. ”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저도 은퇴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아내와 세계 여행을 하면서 여유 있게 지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다음에는 죽는 것밖에 남은 게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죽겠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분명히 듣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소망의 닻을 든든히 던진 사람에게는 참고 견디어 나가는 힘이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험을 당하신 분 계십니까 사업의 실패로 다시 일어나기 어렵습니까 중한 병으로 절망 가운데 빠진 분 계십니까 이 사회에 일어나는 일들을 볼 때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해하는 젊은이가 계십니까 이런 때일수록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꿈을 계속 지녀야 합니다. 잠언에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여서는 안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아주 넘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진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를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님의 능력으로 소망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넘치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잠10:28)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고 했습니다. 반면에 “(잠23: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잠23:18)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다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부류의 소망 소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소망이요, 다른 하나는 하늘의 소망입니다. 잠언에서는 의신,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 소망을 하늘에 두며, 악인,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그 소망을 이 세상, 이 땅에 둔다고 했습니다.
1. 보이는 소망 이 세상의 소망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령 세상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이 그대로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되는 경우보다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다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들어가는 학생보다 못 들어가는 학생이 많은 게 현실이 아닙니까 또 대학에 드어간다고 해서 다 훌륭한 학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못 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사람이 가지는 세상적인 희망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실망이 있고, 비극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런 세상의 소망이 혹 이루어지는 수가 있다 해도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의 만족은 없습니다. 더러는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사업하고, 성공만 해서 돈이 많게 되면 무엇이나 다 되고, 만족할 줄로만 생각했는데 정작 그렇게 되고 보니 기대하던 것처럼 그런 만족은 없다”는 것이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 속에 있는 해초가 물 밖에서 볼 때는 그렇게 싱싱하고, 보암직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해도 정작 바다 속에 드러가서 그 해초를 뜯어 물 밖에서 보면 이전에 보던 것과는 너무너무 다릅니다. 세상 것은 얻기 전에나 굉장해 보이지, 얻고 나면 별거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의 영화를 말할 때 솔로몬의 영화를 말합니다. 솔로몬만큼 지혜로운 왕도 없었고, 솔로몬 왕만큼 부하게 산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근방에 있는 모든 왕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올 때 그냥 옵니까 선물을 잔뜩 싣고 와서 그리곤 했는데, 솔로몬 왕 때 얼마나 나라가 부했는지 “은덩어리가 예루살렘 거리에 돌덩어리처럼 굴러 다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인생을 다 살고 쓴 전도서를 보게 되면 그의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지혜와 재물, 부귀와 영광을 한 몸에 지니고 즐겨 본 사람입니다. 만일 보통 사람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했다면 “자기가 가져보지 못하고 누려 보지 못했으니까 허튼 소리 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솔로몬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영화를 누리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얻기 전에는 굉장한 것 같지만 얻어 놓고 보면 별 개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혹시 이 세상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어느 정도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느낀다고 하여도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얼마 가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입니다. 잠깐입니다. 빨리 지나갑니다. 세상의 소망이란 문자 그대로 풀의 꽃과 같습니다. 안개처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집니다. 결국 세상의 소망은 절망의 식은 재로 화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망은 썩은 소망이요, 없어지는 소망이요, 죽은 소망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하루를 기분 좋게 살려느냐 이발소 가서 이발을 해라.” 덥수룩 한 머리는 다 잘라 버리고, 면도를 하고, 세수를 깨끗이 하고 나면 시원하고 기분이 상쾌합니다.
그런데 기분이 상쾌하고 좋은 게 며칠 갑니까 하루 갑니다. “한 주일을 기분 좋게 살려느냐 새 자동차를 사라.” 새 자동차를 타면 기분 좋잖아요. 문이 탄탄하고, 새 자동차 냄새나고, 또 좋은 차 사면 “누가 나좀 봐주나” 하고 아주 기분 좋습니다.
그런데 그게 한 주일쯤 갑니다. 한 주일이 지나고 나면 아무리 고급 차, 좋은 차 타 봐야 그저 그렇고 그렇습니다. “한 달을 기분 좋게 행복하게 살기 원하느냐 결혼을 해라.” 결혼을 한 후 한 달을 뭐라고 그래요 ‘밀월’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honeymoon"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꿀처럼 달다’는 겁니다. 여러분 다 경험해 보셨겠지만 얼만 달면 꿀처럼 달다 그러겠습니까 얼마나 좋으면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지나고 나면 어떻습니까 씁씁하죠 이게 세상입니다. 요사이 서양 청년들 가운데는 물질주의에 휩쓸려서 현실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편하게, 어떻게 하면 생을 소위 'enjoj' 하며 살아갈 것인가만 생각하고 장래 일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찰나주의, 현실주의입니다. 이상이란 것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은 내일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이 전부라면 이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오느 날 하루살이하고 모기하고 싸움이 붙었다고 합니다. 하루종일 싸움을 하다가 해가 지게 되니 모기가 “야, 내일 하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살이가 “아니, 내일이 뭐야 내일이 뭐야”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하루살이는 오늘 살다 끝나고 말기에 내일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인간 가운데도 “오늘 벌고, 오늘 먹다가 죽자” 하지, 내일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하루살이 같은 현실주의자, 찰나주의자가 많습니다. 분명히 들으십시오. 세상의 것은 잠깐 지나갑니다.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안개와 같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집니다. 세상의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은 소망하다가 없어지면 절망하게 되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닝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세상의 희망은 보이는 희망입니다. 세상의 희망은 잠깐인 것입니다.
2. 보이지 않는 소망
그런데 우리에게는 보이지 아니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늘의 소망입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우리에게는 하늘에 간직한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늘에 간직한 소망은 없어지는 소망이 아닙니다. 하늘의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이 하늘의 소망,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 영원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시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 “(시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주님께로부터 소망이 좇아온다는 말입니다. “(시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세상에 소망을 두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시71: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 ”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언제나 찬송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소망을 둔 사람은 한숨과 눈물로 끝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시119: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 이 소망이 누구로 말미암아 있습니까 주님이 나에게 소망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공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론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생생한 삶의 체험에 의지해서 우리에게 솔직히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골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과 생명이 되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까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셔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뭐라고 부릅니까 반석이라고 부릅니다. 반석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은 흔들리지만 그리스도는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세상은 변하지만 그리스도는 변하지 아니합니다. 그의 말씀도 일점 일획이라도 변하지 아니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둔 사람은 세상이 변할 때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둔 사람은 어떤 환경, 어떤 절망적인 조건 속에서도 절대로 절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적인 환경은 있지만 절망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연단은 소망을 낳습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순간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라는 것 전체가 다 자기 몸에 대한 바랍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세상에 사람이 사는 동안 자기 몸을 잘 간수하는 것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몸의 건강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되고, 위생을 지켜야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낡아집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우리 육신은 날로 부패해집니다. 혹 “나는 그렇지 않겠다” 라고 생각하는 젊은이 있습니까 저도 한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늙어갑니다. 이것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붙들어 매려고 해도 지나갑니다. 젊어서는 손에 힘이 서려도 나이들면 아무리 꽉 쥐려고 해도 부들부들 떨리면서 맥이 풀입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갈 때는 어떻게 갑니까 다 놓고 갑니다. 이것을 아시는 게 좋습니다. 좀 섭섭한 말이지만, 잠깐이면 지나갑니다. 겉사람은 후패합니다. ‘장막’이란 표현은 참 묘한 표현 같습니다. 장막은 천막이라는 말입니다. 새 천막을 쳐 놓으면 처음에는 팽팽합니다. 비도 막아주고, 햇빛도 막아주고, 바람도 막고 팽팽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보십시오. 햇빛에 색깔이 바랩니다. 줄이 늘어집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훅 불면 넘어지고 맙니다. 우리 육신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에다 소망을 두어야 됩니까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에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어떤 것입니까 보이는 소망입니까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까 세상의 소망닙니까 하늘의 소망입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에 소망을 두는 사람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앞에 놓여 있는 희망을 붙잡으려고 피하여 나온 우리들은 이것으로 용기와 격려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입니다.” 닻! 배에는 닻이 필요합니다. 닻이 엇는 배는 아무리 큰 베라고 해도 물결 흐르는 대로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닻이 있는 배는, 닻을 튼튼히 걸어 놓으면, 아무리 풍파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끄덕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를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 영혼의 닻이 있습니까 소망이 있습니까 소망이 있습니까 소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 어떤 조건 속에서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이 소망의 줄을 굳건히 붙잡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큰 파도에 일어날 때 이 닻이 긾은 바다 밑에 박혀 있어야 파도에 밀리지 아니하고 파선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을 우리 영혼의 닻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의 배후에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힘써 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이야기 하나 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테리 로마에 가면 유서 깊은 명문 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 졸업식 때 천주교 신부가 와서 졸업 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졸업식 미사를 다 드린 다음에 학생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법과 대학생과 얘기를 했답니다. “자네는 법과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뭘 하려고 그러나” “예, 이제 변호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예, 어려운 사람들을 변호하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그 다음에는 돈을 좀 벌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결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을 낳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 공부를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 학교 다 보내고 결혼을 시키겠습니다. ”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저도 은퇴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아내와 세계 여행을 하면서 여유 있게 지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다음에는 죽는 것밖에 남은 게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죽겠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분명히 듣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소망의 닻을 든든히 던진 사람에게는 참고 견디어 나가는 힘이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험을 당하신 분 계십니까 사업의 실패로 다시 일어나기 어렵습니까 중한 병으로 절망 가운데 빠진 분 계십니까 이 사회에 일어나는 일들을 볼 때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해하는 젊은이가 계십니까 이런 때일수록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꿈을 계속 지녀야 합니다. 잠언에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여서는 안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아주 넘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진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를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님의 능력으로 소망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넘치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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