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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되신 여호와 (시18:1-6)

본문

I. 만물은 힘이 있어야 활동이 가능합니다. 생물은 바깥으로부터 먹이를 흡수하여 자체의 내부에 서 힘을 만들어냅니다. 무생물은 자체의 동력이 불가능하므로, 외부에서 힘을 가해 주지 않는 한 스스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힘은 생물의 기본개념입니다. 힘이 없거나 힘을 잃게 되 면, 생물은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힘을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약입니다. 사람에게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육체의 힘을 얻는 것과 아울러 사랑에 의하여 정신과 육체를 소생케 함도 필수적으로 중요합니다. 사랑의 개념은 신령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이렇게 두 가지로 크게 나뉠 수가 있습니다. 그 두 가지가 한 인격 속에서 실제로 서로 나뉘어 사용되지는 않지만, 각각의 의미를 이해하여 우리 자 신 속에서 구별하여 실천되도록 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신령하고도 거룩한 것이므로 의로운 뜻에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하 고, 육체에 대한 사랑은 정욕과 과욕을 동반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므로 경계하는 입장에서 실천 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기자인 다윗은 자기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힘이 자기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 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백하는 자세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힘은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인생은 그 분에 의하여 지음을 받 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분에 의하지 않고서는 힘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여호와를 향하여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II.
1) 사랑의 고백(1-2)
다윗은 여러 가지의 확신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표현하였습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반석이신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반석은 모든 건축물의 든든한 기 초입니다. 지반이 암반일 경우에 건물의 기초를 다지기가 어렵지만 일단 기초를 만든 후에는 세 워진 건물이 붕괴될 것을 염려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모래 위에 터를 잡은 건물은 비바람에 흔들려 쉽게 넘어지게 됩니다. 인생의 기초를 모래 위에 둘까요, 아니면 반석 위에 놓아야 할것입니까 반석이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내 인생의 토대를 놓아 건축을 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내 인생의 실패를 결코 보지 않을 것입니다. 비바람의 시련이 계속하여 내게 닥쳐올지라도, 그 시련이 나를 넘어지게 하지는 못할 것이 확실합니다. 요새는 전쟁의 때에 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이루어진 아군의 처소입니다. 옛날의 요새는 강이 나 바다 혹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고지이거나 섬 또는 계곡 아니면 깊은 동굴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은 적군의 공격을 받게 되더라도 잘 무너지지 않으며 적을 공격하기에도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요새가 되신다는 사실은, 내 인생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보장과도 같 습니다. 요새라고 해서 모두 승리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므로, 다른 어떤 것을 나의 요새로 삼 더라도 나를 안심시켜 주지 못하지만, 여호와를 나의 요새로 삼아 내가 그 분 안에서 인생을 구 상하고 실행한다면 패배하여 고통에 빠지는 일이 나에게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의 승리를 쟁취하려면 쉽고 편안한 전쟁만 겪을 수 없듯이, 인생의 여정 가운데도 어려움 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때로는 실망하고 좌절하여 허덕이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백성을 어려움에서 건져 주십니다. 싸우다 보면 적의 공격을 피하여 잠시 숨을 경우도 있는데, 바위와 같은 엄폐물은 강력한 총알 도 막아 줍니다. 몸을 감추게 하고 무기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아주는 바위, 그것은 인생을 도우 시는 하나님의 보호막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적을 향해 공격할 때 나의 몸을 막아주는 방패와도 같이, 하나님을 방패로 삼아 자신있게 적을 공격한다면 적의 세력을 무참히 무찔러 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뿔'이란 구원의 영광을 상징하고, '산성'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도성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위와 같은 여러 가지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의 인생살이에서는 그 분을 무어라고 표현하면서 사랑의 고백을 할 것입니까
2) 기도와 구원의 확신(3)
위대한 존재이거나 무엇을 잘 해냈을 경우에는, 그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찬송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 주변에 찬송을 받는 대상은 무수히 많습니다. 종교적인 대상이거나 훌륭한 업적을 남 겨서, 칭송을 받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완전하고도 거룩한 찬송의 대상은 오직 하나, 여호와 신 밖에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무리는 그 우상을 자기들의 신으로 받듭니다. 매우 잘못된 착각 속에서 그러한 우상을 절대시하는 경우도 있고, 단지 자위의 수단으로서 신적 대상을 칭송하다가 자기에게로 신앙의 목표를 귀결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모양이든, 그러한 것들이 하나의 신앙적인 형 태를 취할 수는 있으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 대상이 참된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허구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여, 자위하는 것이라면, 찬송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 받으시는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창조와 주관자 이시므로, 마땅히 찬송의 대상이 되십니다. 만물이 그를 향하여 찬양하고, 또한 인생이 그의 성호 를 끊임없이 찬송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냇물이 졸졸졸-' '숲속의 바람이 쏴악쏴악-' '종달새가 지지배배-' '각종 새들이 (각기 제목소리로)-' '바다가 (파도소리로)-' '산 과 하늘이 (뇌성과 메아리로)-' 창조주를 노래한다고, 말했습니다. 천진스런 자연은 이다지도 순박하게 창조주의 솜씨와 영광을 노래하는데,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 을 받은 존재인 인간은, 과연 얼마큼이나 주님을 찬송하고 있습니까
만물의 지배자로 우월하게 지음을 받은 인간은 다른 만물 보다도 더욱 고상한 방법으로, 주님 을 찬송하여야 합니다. 그가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써, 창조의 노력을 기울여 적극적인 방법을 개 발하고 동원하여, 완전하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 분은 어떻게든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 기뻐하십니다. 그를 향하여 진심의 기도를 올립시다. 헛된 우상 앞에서 독백을 일삼지 말고, 반향 있는 신 앞 에 자신의 고백을 합시다. 그는 나의 삶을 일일이 주장하시는 분이므로, 나의 기도하는 것까지도 빠짐없이 알고 계시며,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때에 맞추어 응답으로 허락하여 주십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나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님, 주님이 내게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믿음으로 되뇌이며 순종하는 삶으로써 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찬송합시다. 원수들은 끊임없이 공격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공 격을 기필코 물리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바람이 없거나 고통의 심연이 없 고, 원수들의 공격이 없다면, 이미 이 세상이 아닌 것이고, 이 세상에 사는 의미 자체가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그 만큼, 이 세상에서 원수들의 공격이란 당연지사인데, 내게는 구원자가 언제나 계시니,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굳건히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의 수련이 잘 되지 않은 처지에서는, 확신적인 고백을 하지 못합니다. 아직 세상살이에 익 숙하지 않은 소년은 작은 일을 당해도 두려움 때문에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지만, 경험을 충분하 게 쌓은 성인은 자신있고 여유있게 상황에 대처하는 것과 같이, 신앙의 확신자는 넉넉한 자세로 확신적인 고백을 하면서 힘있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3) 고통의 심연(4)
사망은 피조물의 마지막, 최고의 형벌입니다. 죽음 앞에 이르게 되면, 모든 피조물은 머리 를 숙이게 됩니다. 그것에 대항할 피조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에게도 사망은 공격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도 사망의 범주 안에 들어있기 때문 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사망의 줄로 인간을 얽어 매기 위하여, 사망은 온 힘을 기울입니다. 인간 육체의 사망은 인간에게 정해진(죄의 값으로 말미암아) 것이므로, 현세에서 돌이킬 수는 없지 만, 다만 새로운 부활체로서의 재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확보하였으며, 그것은 영혼의 사망 극복 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원수는 우리 영혼의 파멸을 이루려고 우리 앞에 호시탐탐 사망의 그물을 던지고 있습니다. 사망은 불의를 통해서 인간에게 접근합니다. 홍수가 심해지면, 거기에 집이나 가재도구 뿐만 아 니라 사람의 생명까지도 쓸려 내려가듯이, 원수는 사람 앞에 불의의 홍수를 일으켜서, 사람의 영 혼을 앗아가고자 수작을 부립니다. 본문에서 '불의의 창수'라고 표현된 것으로 볼 때, 불의의 세력이 얼마나 강하고 풍성한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가 일어났을 때, 노아의 방주에 실렸던 것 외에는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아무런 생명체도 없었습니다. 오직 방주가 살아남은 것들의 생명선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불의가 창궐할 때에, 모든 인간은 불의의 제물로서 사라지고 말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한(구원에 방주에 올라 타고 있는) 이들은 그 창수를 충분히 면할 수가 있습니다. 내 옆의 상황이 아주 심하도록 험악하여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 렀을지라도', 나는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선장인 구원선에 나는 이미 승선 하여 항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사망의 올무
(5) 음부란 지옥을 뜻하는 말로서, 극단적인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는 대명사입니다. 그리고 사 망이란 단어도 고통의 극치를 표현한 말입니다. 흔히 힘든 일을 경험할 때, '지옥 같은-' 또는 '지옥 훈련' 등의 표현을 하고, '죽겠다' '죽을 지경이다' 같은 말을 합니다. 다윗은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다"고 자신의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몸에 줄을 감아 두르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고, 올무에 몸이 걸려도 마음대로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범죄자를 붙잡아 포승줄로 묶거나 수갑으로 채우면, 그것을 풀지 않는 한 쉽게 달아나지 못하여, 남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음부와 사망의 고통이 사람에게 이르면, 사람은 자유롭고 의로운 행동을 할 수가 없으므로, 고통 가운데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고통의 주도자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훼방하려는 사단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끊임없이 그 고통의 위협을 받습니다. 양심을 져버린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는 고통이 있을 수 없으나, 최소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신앙적인 고통의 위협이 수시로 더욱 심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자기의 고통 스런 처지를 호소하였습니다. 그렇게도 훌륭한 사람에게도 그처럼 심각한 고통이 있었던 사실을 생각한다면, 고통이란 한낱 특정인의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필수적 과제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게 고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시인합시다. 그것이 극도의 상황일 수도 있음을 예상합시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할 수 있다면, 거기에서 무언가 대비책도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응답(6)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두 가지 중 하나의 대처 방법을 취하는데, 어려움을 피하려 고 하거나, 적극적으로 대응하려고 합니다. 적극적인 대응방안 중에 필수적이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을 향한 기도의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더라도, 현실을 놓고 주님의 보호와 인도를 구하는 태도는 아주 합당하고 의로운 모습입니다. 자기의 생각이 아무리 옳고 분명하며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을지라도, 먼저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겸손하고 훌륭한 인간의 자세입니다. "사람이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과 같이, 사람이 똑똑한 두뇌로써 철저하게 확신적으로 무슨 계획을 하더라도, 일의 성패가 어찌될는지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원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기도에 의하여 만사를 대처하려는 신앙의 현명 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전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전은 주님의 제단을 일컫는데, 제단이란 피흘 림이 있는 희생의 처소로서,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희생의 제단을 통하여, 다 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의한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도가 아버지 하나님께 이른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적 은총에 의하여, 아 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응답되는 것임을 의심치 맙시다. 엘리야 선지 자와 바알의 종들이 갈멜산상에서 기도의 대결을 할 때, 바알의 종들은 해가 지기까지 소리소리 치며 심지어 몸을 상하기까지 하면서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를 했지만, 결코 그 응답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신, 또는 죽은 신, 힘없는 우상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줄 리가 없 었습니다. 그에 반하여, 엘리야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자, 여호와께서는 곧 확실하게 응답하여, 자신의 참 신이심을 고스란히 증거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주 하나님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그는 우리의 소원하는 바를 그의 뜻대로 모두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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