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1)
본문
시편 23편은 시편의 노래 150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져있으며 성경 전체를 통하여도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장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우는 영국의 찰스 스펄전 목사는 시편 23편을 시편의 노래가운데 진주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많은 사람들의 슬픈 눈물을 닦아주었고, 두려운 마음속에 강물같은 평강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다른 성경구절은 잘 암송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시편 23편만은 암송할수 있을 정도로 이 시편은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이 시편은 환란과 고난가운데 있는 사람들,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말로 다할수 없는 위로와 소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여러 단어로 표시하고 있는데,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부르라고 모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여호와"란 영어의 NIV성경에는 I AM WHO I AM으로 번역을 하고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로 번역을 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전지, 전능하신 분이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란 단어가 너무나 거룩하고, 너무나 존엄하신 이름이기에 여호와란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글로 기록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때, 여호와란 단어 대신에 Adonai라고 대신 불렀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은 여호와란 단어가 나오면 새로운 펜촉과 새로운 잉크를 사용하여 여호와란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온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하시고, 거룩하시며,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 지금도 우주를 운행하시며 인간의 삶과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이 내 삶을 보살펴주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나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모임에서 두 사람이 시편 23편을 낭독했습니다. 한 사람은 연극배우로 speech technique과 말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다 숙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연극 배우는 뛰어난 음성과 극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시편 23편을 사람들앞에서 암송했습니다. 모든 청중들은 탁월한 솜씨에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습니다.
시편 23편을 낭독할 다른 사람은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시편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노인이 시편을 나 당독하자, 아무런 소리나 박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침묵과 경건함과, 경외감속에 잠겨있었던 것입니다. 연극배우는 시편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암송하여 극적으로 낭독한 것에 불과했지만, 노인은 그의 삶을 통하여 그가 체험적으로 알고있는 자기의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고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자는 양떼들을 위험에서 구출해내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양을 보호해주며, 양들에게 항상 먹을 것을 공급해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친히 주관하시며, 돌보시며,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며, 그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고 있는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에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 삶속에 공허감, 외로움, 실망과 좌절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나 친구, 배우자나 애인이 나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실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술이나 마약이 나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낭비인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직장이나 사업체가 나의 목자가 된다면, 불안감과 두려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Phillip Keller는 목사이며 작가입니다. 그는 목사와 작가가 되기전에 오스트랠리아에서 8년간 양을 키우는 목장을 경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목자가 바라본 시편 23편"이란 베스트 셀러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말합니다. 양은 초장에 잘 눕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양들은 겁이 많기 때문에 4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눕게된다고 합니다.
1)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위험이 없다고 느껴야 하며
2) 양들 사이에 다툼이나 싸움이 없어야 하며
3) 파리나 기생충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야하며 4) 충분하게 꼴을 먹고 배가 불러야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4가지 조건이 다 만족되어야만 양들은 푸른 초장에 눕게된다고 합니다. 즉 양들은 두려움, 다툼, 해충, 배고픔의 문제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만족감을 가지고 되는 것입니다. Phillip Keller에 의하면 목자만이 양들에게 만족감과 충족감을 주어 푸른 초장에 눕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해로운 짐승을 쫓아냄으로 양들에게 두려움으로부터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목자는 양떼들끼리 다투고 싸우는 것을 중단시키고 양떼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이 파리나 기생충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면 양에게 약을 몸에 뿌려주어 해충을 제거함으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풍성한 꼴을 먹게함으로 양들이 포만감을 가지고 초장에 누울 수 있게 해줍니다. 목자만이 양들에게 만족감과 충족감을 가져다 줄 수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만족감, 충족감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불만과 원망의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높이 승진하고,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앞서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삶에 불만족이 가득하기에 우리는 두려움, 불안감, 신경쇠약과 궤양에 짓눌려있습니다. 현대인들과는 달리 바울은 빌립보서 말합니다. ".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또한 19절에서는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날마다 자족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되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구원과 영생의 떡을 받는 사람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게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과 영생의 떡은 우리를 영원히 배부르게 하며, 만족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영원한 만족감과 행복, 충족감이 있습니다. 선한 목자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다윗은 말합니다. 쉴 만한 물가란 잔잔한 물가를 의미합니다. 양들은 물이 급하게 흐르는 곳에서는 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헤엄을 잘 치지 못할 뿐더러, 털이 물에 젖으면, 몸무게가 무거워져서 물에 쉽게 빠져 죽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이 두터운 겨울 털 오버를 입고 수영을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양은 본능적으로 물이 험하게 급히 흐르는 격류에는 가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목자는 급히 물이 흐르는 격류에 지류를 만들어 물을 옆으로 끌어 들인 다음, 돌로 울타리를 만들어 물을 잔잔하게 만듭니다. 그래야 양들은 안심하고 물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험한 파도와 태풍이 몰아 칠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험한 풍랑과 거센 파도가 배를 덮어씌우는 갈릴리 호수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두려운 우리의 마음을 잔잔케 하시며, 우리 마음속에 평강을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 평강을 약속하는 세상의 유혹은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씌우지만,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참된 안식과 평강이 있습니다. 다윗은 3절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양들은 영리하지 못합니다. 양들은 풀이 많은 초장에서 꼴을 배불리 먹고 잔잔한 물가에서 물을 흡족히 마시다가도, 방향 감각이 없이 푸른 초장을 떠나 아무 먹을것과 마실물이 없는 광야로 방황하며 길을 잃어버리기가 쉽다고 합니다. 양들은 한번 길을 잃어버리면 왔던 길을 되돌아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고양이나 개는 2천 8백킬로미터나 되는 먼곳에서 자기 집을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한 번 길을 잃어버리면 영원히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가 발견해야만 되돌아 올수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양들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어느 기독교 잡지에 실린 삽화에 보면 길을 잃어버려 광야에서 헤매는 양두마리가 있는데 그들중 한 마리가 다른 양에게 "우리는 다 사람들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라고 말하고 있는 만화였습니다. 양들은 사람들과 같고 사람은 양들과 같습니다. 양과 사람은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거함으로 풍성한 삶을 살지못하고, 말씀을 벗어난 삶이 더 행복해보이고, 더 좋아보여 세상의 유혹을 따라 살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떠나 죄가운데 거할때가 있는것입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십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을 때, 그는 간음의 죄를 은폐하려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최전방 전투에 내어보냄으로 죽게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앞에 간음과 살인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어 죄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지만, 베드로가 그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회개하자,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며, 그에게 사도의 직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0-11)." 3절 중간쯤에서 다윗은 말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양들은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 10미터 정도밖에 앞을 내어다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양들은 목자가 이끌어 주어야만 합니다. 양처럼 우리 인생도 한치 앞을 내어다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 시간후에 어떠한 일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중대한 교차점에 이르러 어느 길을 선택하여 가야할지 알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잘못된 선택과 결정을 내리는 것이 두려워하여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과 같은 첨단과학 문명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점쟁이 무당 등을 찾아가서 점을 치며 궁합을 보며 내일 어떠한 일이 일어날것인지를 알기 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앞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참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겠습니다.
잠언 3장 5-6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지식을 의지하지 말아라. 너는 모든 일에 여호와를 인정하라. 그러면 그가 너에게 바른 길을 보이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5절에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된 우리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우리를 올바른 길, 의의 길로 인도하실것입니다.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생활을 하여야합니다. 그러할 때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이사야 30장 21절에 보면 "그리고 만일 너희가 바른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면 너희는 '바른 길이 여기 있다 이 길을 걸어라' 하고 너희 뒤에서 말씀하시는 그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4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evil)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어둡고, 두려운 삶의 경험들을 말합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푸른초장과 잔잔한 물가만 전개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풀과 물이 없는 험난한 광야길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도 불치의 병에 걸리기도 하며, 큰 사고나 재정적인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불행한 일로부터 면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앞길을 친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선한목자가 계시지 않습니다.
Alexander Maclaren는 100여년 전에 영국의 스카트랜드에서 사역한 세계적인 명설교자였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기전 16살의 소년으로 글라스코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Maclaren은 주중에는 글라스코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자기집에 돌아와 지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은 직장이 있는 글라스코시로부터 약 6마일즈(10킬로미터)정도 떨어진곳에 있었습니다. 글라스코와 그의 집 사이에는 깊은 협곡이 있는데 옛날부터 그 험한 계곡에는 공동묘지가 있어 많은 유령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곳이었습니다. 소년 맥클라랜은 낮에도 홀로 그곳을 지나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특히 한 밤중에 그곳을 홀로 지나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월요일 아침 글라스코로 출근하려는 그에게 아버지가 말하기를 토요일 직장일이 끝나면 토요일 밤에는 꼭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자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 토요일 저녁에는 직장에서 파티가 있기 때문에, 저녁 늦게 파티가 끝나면 하숙집에서 토요일밤을 자고, 주일 아침에 집에 오려고 Maclaren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밤중에 유령이 나타난다는 공동묘지가 있는 협곡을 지나온다는 것은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야! 너는 토요일 저녁을 아직까지 한번도 밖에서 잠을 잔일이 없지 않았느냐 토요일 저녁에라도 네 얼굴을 보아야하겠다. 나는 한 주간 동안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단다. 그러니 토요일 저녁 늦게라고 꼭 집에 와야만 하겠다." 고 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말에 소년 Maclaren은 할 수 없이 토요일 저녁 늦게라도 집에 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한 주간 내내 맥크라랜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토요일 저녁 무서운 협곡을 혼자 지나갈 생각을 하며 두려워했습니다. 토요일 저녁 직장의 파티가 끝나자, 그는 소지품을 들고 공동묘지가 있는 협곡을 홀로 지나가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는 용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찬송가를 부르며 갔습니다. 한참 앞만보고 가다가 길 옆에 있는 묘지들을 바라보고 너무나 두려운 생각이 들어, 하숙집으로 다시 뛰어 가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캄캄한 앞에서 누가 자기를 향하여 오는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던길을 돌이켜 하숙집을 향하여 사력을 다하여 뛰어가려고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멈추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발자국 소리는 그에게 매우 익숙한 소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두움속에서 그를 향하여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는 바로 그의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협곡을 홀로 걷는 것을 두려워할 것을 알았기에, 아들을 마중나왔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마중나왔단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동 묘지를 통과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는 Maclaren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되시는 하나님, 나의 하늘 아버지와 함께 인생을 걸어간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5절에서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자,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로 신하들을 데리고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다윗의 일행이 압살롬의 추격을 피해 머나먼 마하나임에 도달했을 때, 사무엘하 17장 27절 이하에 보면 암몬의 랍바성에 사는 나히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아미엘의 아들인 마길과 로글림에 사는 릴르앗사람 바실래가 "침구와 취사 도구,밀, 보리, 밀가루, 볶은 곡식, 콩, 팥, 꿀, 버터, 양, 치이즈를 가져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그 일행이 광야를 걸어오는 동안 몹시 지치고 피곤하여 목마르고 배고플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삼하 17:28-29).
" 다윗은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몹시도 피곤하고 지처있는 그에게 이러한 여러 사람들을 통하여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생각하고 감격하며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항상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그를 대해주셨음을 회고하면서, 앞으로도 하나님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그를 영원하신 하나님나라로 인도해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6절에서 말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프랑스의 절대군주였던 루이 14세는 죽음이란 단어를 그 앞에서는 사용하지 못하게끔하였습니다. 그의 침실방의 창문에는 두터운 커튼이 창문을 가리움으로 밤에 죽음의 천사가 침실방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화가 피카소도 그 앞에서 아무도 죽음이란 말을 일체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미신적이라 할만큼 죽음의 공포증에 걸려, 죽음에 대해 말을 하거나 생각만 해도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피카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회피하거나 싫어합니다. 말못하는 동물들조차 그런 것 같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마지막으로 처량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보면, 짐승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아무리 생각하기를 회피하고 싫어한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에게 죽음은 찾아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날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삶에 종말의 날이 있습니다. 문제는 죽음이후에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입니다. 죽음이후에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영원한 파멸과 심판의 장소인 지옥에 영원토록 거할것이냐, 아니면 내가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영원토록 자녀로서 거할 것이냐입니다. 미국의 작가였던 John Payne은 파리에서 한때 문학수업을 하고있었습니다. 빠리의 어느 하숙집에서 어느날 저녁 퇴근 시간에 창밖을 내어다 보게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버스나, 자동차를 타도 분주하게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머나먼 타향의 하숙집 2층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바라볼 때 크나큰 외로움에 젖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하여도, 내 쉴곳은 작은 집 내집 뿐이리"라는 시를 작시하며 두고온 고향집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트웹스키는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절망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있었기에 그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기업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거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거할 아버지 집이 있기에 오늘도 삶에서 크나큰 용기와 담대함과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로 번역을 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전지, 전능하신 분이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란 단어가 너무나 거룩하고, 너무나 존엄하신 이름이기에 여호와란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글로 기록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때, 여호와란 단어 대신에 Adonai라고 대신 불렀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은 여호와란 단어가 나오면 새로운 펜촉과 새로운 잉크를 사용하여 여호와란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온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하시고, 거룩하시며,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 지금도 우주를 운행하시며 인간의 삶과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이 내 삶을 보살펴주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나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모임에서 두 사람이 시편 23편을 낭독했습니다. 한 사람은 연극배우로 speech technique과 말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다 숙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연극 배우는 뛰어난 음성과 극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시편 23편을 사람들앞에서 암송했습니다. 모든 청중들은 탁월한 솜씨에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습니다.
시편 23편을 낭독할 다른 사람은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시편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노인이 시편을 나 당독하자, 아무런 소리나 박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침묵과 경건함과, 경외감속에 잠겨있었던 것입니다. 연극배우는 시편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암송하여 극적으로 낭독한 것에 불과했지만, 노인은 그의 삶을 통하여 그가 체험적으로 알고있는 자기의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고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자는 양떼들을 위험에서 구출해내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양을 보호해주며, 양들에게 항상 먹을 것을 공급해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친히 주관하시며, 돌보시며,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며, 그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고 있는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에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 삶속에 공허감, 외로움, 실망과 좌절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나 친구, 배우자나 애인이 나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실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술이나 마약이 나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낭비인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직장이나 사업체가 나의 목자가 된다면, 불안감과 두려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Phillip Keller는 목사이며 작가입니다. 그는 목사와 작가가 되기전에 오스트랠리아에서 8년간 양을 키우는 목장을 경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목자가 바라본 시편 23편"이란 베스트 셀러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말합니다. 양은 초장에 잘 눕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양들은 겁이 많기 때문에 4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눕게된다고 합니다.
1)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위험이 없다고 느껴야 하며
2) 양들 사이에 다툼이나 싸움이 없어야 하며
3) 파리나 기생충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야하며 4) 충분하게 꼴을 먹고 배가 불러야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4가지 조건이 다 만족되어야만 양들은 푸른 초장에 눕게된다고 합니다. 즉 양들은 두려움, 다툼, 해충, 배고픔의 문제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만족감을 가지고 되는 것입니다. Phillip Keller에 의하면 목자만이 양들에게 만족감과 충족감을 주어 푸른 초장에 눕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해로운 짐승을 쫓아냄으로 양들에게 두려움으로부터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목자는 양떼들끼리 다투고 싸우는 것을 중단시키고 양떼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이 파리나 기생충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면 양에게 약을 몸에 뿌려주어 해충을 제거함으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풍성한 꼴을 먹게함으로 양들이 포만감을 가지고 초장에 누울 수 있게 해줍니다. 목자만이 양들에게 만족감과 충족감을 가져다 줄 수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만족감, 충족감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불만과 원망의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높이 승진하고,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앞서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삶에 불만족이 가득하기에 우리는 두려움, 불안감, 신경쇠약과 궤양에 짓눌려있습니다. 현대인들과는 달리 바울은 빌립보서 말합니다. ".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또한 19절에서는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날마다 자족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되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구원과 영생의 떡을 받는 사람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게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과 영생의 떡은 우리를 영원히 배부르게 하며, 만족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영원한 만족감과 행복, 충족감이 있습니다. 선한 목자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다윗은 말합니다. 쉴 만한 물가란 잔잔한 물가를 의미합니다. 양들은 물이 급하게 흐르는 곳에서는 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헤엄을 잘 치지 못할 뿐더러, 털이 물에 젖으면, 몸무게가 무거워져서 물에 쉽게 빠져 죽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이 두터운 겨울 털 오버를 입고 수영을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양은 본능적으로 물이 험하게 급히 흐르는 격류에는 가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목자는 급히 물이 흐르는 격류에 지류를 만들어 물을 옆으로 끌어 들인 다음, 돌로 울타리를 만들어 물을 잔잔하게 만듭니다. 그래야 양들은 안심하고 물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험한 파도와 태풍이 몰아 칠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험한 풍랑과 거센 파도가 배를 덮어씌우는 갈릴리 호수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주님은 두려운 우리의 마음을 잔잔케 하시며, 우리 마음속에 평강을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 평강을 약속하는 세상의 유혹은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씌우지만,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참된 안식과 평강이 있습니다. 다윗은 3절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양들은 영리하지 못합니다. 양들은 풀이 많은 초장에서 꼴을 배불리 먹고 잔잔한 물가에서 물을 흡족히 마시다가도, 방향 감각이 없이 푸른 초장을 떠나 아무 먹을것과 마실물이 없는 광야로 방황하며 길을 잃어버리기가 쉽다고 합니다. 양들은 한번 길을 잃어버리면 왔던 길을 되돌아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고양이나 개는 2천 8백킬로미터나 되는 먼곳에서 자기 집을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한 번 길을 잃어버리면 영원히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가 발견해야만 되돌아 올수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양들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어느 기독교 잡지에 실린 삽화에 보면 길을 잃어버려 광야에서 헤매는 양두마리가 있는데 그들중 한 마리가 다른 양에게 "우리는 다 사람들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라고 말하고 있는 만화였습니다. 양들은 사람들과 같고 사람은 양들과 같습니다. 양과 사람은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거함으로 풍성한 삶을 살지못하고, 말씀을 벗어난 삶이 더 행복해보이고, 더 좋아보여 세상의 유혹을 따라 살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떠나 죄가운데 거할때가 있는것입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십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을 때, 그는 간음의 죄를 은폐하려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최전방 전투에 내어보냄으로 죽게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앞에 간음과 살인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어 죄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지만, 베드로가 그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회개하자,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며, 그에게 사도의 직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0-11)." 3절 중간쯤에서 다윗은 말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양들은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 10미터 정도밖에 앞을 내어다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양들은 목자가 이끌어 주어야만 합니다. 양처럼 우리 인생도 한치 앞을 내어다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 시간후에 어떠한 일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중대한 교차점에 이르러 어느 길을 선택하여 가야할지 알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잘못된 선택과 결정을 내리는 것이 두려워하여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과 같은 첨단과학 문명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점쟁이 무당 등을 찾아가서 점을 치며 궁합을 보며 내일 어떠한 일이 일어날것인지를 알기 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앞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참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겠습니다.
잠언 3장 5-6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지식을 의지하지 말아라. 너는 모든 일에 여호와를 인정하라. 그러면 그가 너에게 바른 길을 보이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5절에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된 우리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우리를 올바른 길, 의의 길로 인도하실것입니다.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생활을 하여야합니다. 그러할 때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이사야 30장 21절에 보면 "그리고 만일 너희가 바른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면 너희는 '바른 길이 여기 있다 이 길을 걸어라' 하고 너희 뒤에서 말씀하시는 그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4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evil)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어둡고, 두려운 삶의 경험들을 말합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푸른초장과 잔잔한 물가만 전개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풀과 물이 없는 험난한 광야길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도 불치의 병에 걸리기도 하며, 큰 사고나 재정적인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불행한 일로부터 면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앞길을 친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선한목자가 계시지 않습니다.
Alexander Maclaren는 100여년 전에 영국의 스카트랜드에서 사역한 세계적인 명설교자였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기전 16살의 소년으로 글라스코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Maclaren은 주중에는 글라스코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자기집에 돌아와 지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은 직장이 있는 글라스코시로부터 약 6마일즈(10킬로미터)정도 떨어진곳에 있었습니다. 글라스코와 그의 집 사이에는 깊은 협곡이 있는데 옛날부터 그 험한 계곡에는 공동묘지가 있어 많은 유령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곳이었습니다. 소년 맥클라랜은 낮에도 홀로 그곳을 지나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특히 한 밤중에 그곳을 홀로 지나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월요일 아침 글라스코로 출근하려는 그에게 아버지가 말하기를 토요일 직장일이 끝나면 토요일 밤에는 꼭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자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 토요일 저녁에는 직장에서 파티가 있기 때문에, 저녁 늦게 파티가 끝나면 하숙집에서 토요일밤을 자고, 주일 아침에 집에 오려고 Maclaren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밤중에 유령이 나타난다는 공동묘지가 있는 협곡을 지나온다는 것은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야! 너는 토요일 저녁을 아직까지 한번도 밖에서 잠을 잔일이 없지 않았느냐 토요일 저녁에라도 네 얼굴을 보아야하겠다. 나는 한 주간 동안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단다. 그러니 토요일 저녁 늦게라고 꼭 집에 와야만 하겠다." 고 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말에 소년 Maclaren은 할 수 없이 토요일 저녁 늦게라도 집에 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한 주간 내내 맥크라랜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토요일 저녁 무서운 협곡을 혼자 지나갈 생각을 하며 두려워했습니다. 토요일 저녁 직장의 파티가 끝나자, 그는 소지품을 들고 공동묘지가 있는 협곡을 홀로 지나가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는 용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찬송가를 부르며 갔습니다. 한참 앞만보고 가다가 길 옆에 있는 묘지들을 바라보고 너무나 두려운 생각이 들어, 하숙집으로 다시 뛰어 가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캄캄한 앞에서 누가 자기를 향하여 오는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던길을 돌이켜 하숙집을 향하여 사력을 다하여 뛰어가려고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멈추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발자국 소리는 그에게 매우 익숙한 소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두움속에서 그를 향하여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는 바로 그의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협곡을 홀로 걷는 것을 두려워할 것을 알았기에, 아들을 마중나왔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네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마중나왔단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동 묘지를 통과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는 Maclaren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되시는 하나님, 나의 하늘 아버지와 함께 인생을 걸어간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5절에서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자,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로 신하들을 데리고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다윗의 일행이 압살롬의 추격을 피해 머나먼 마하나임에 도달했을 때, 사무엘하 17장 27절 이하에 보면 암몬의 랍바성에 사는 나히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아미엘의 아들인 마길과 로글림에 사는 릴르앗사람 바실래가 "침구와 취사 도구,밀, 보리, 밀가루, 볶은 곡식, 콩, 팥, 꿀, 버터, 양, 치이즈를 가져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그 일행이 광야를 걸어오는 동안 몹시 지치고 피곤하여 목마르고 배고플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삼하 17:28-29).
" 다윗은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몹시도 피곤하고 지처있는 그에게 이러한 여러 사람들을 통하여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생각하고 감격하며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항상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그를 대해주셨음을 회고하면서, 앞으로도 하나님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그를 영원하신 하나님나라로 인도해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6절에서 말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프랑스의 절대군주였던 루이 14세는 죽음이란 단어를 그 앞에서는 사용하지 못하게끔하였습니다. 그의 침실방의 창문에는 두터운 커튼이 창문을 가리움으로 밤에 죽음의 천사가 침실방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화가 피카소도 그 앞에서 아무도 죽음이란 말을 일체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미신적이라 할만큼 죽음의 공포증에 걸려, 죽음에 대해 말을 하거나 생각만 해도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피카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회피하거나 싫어합니다. 말못하는 동물들조차 그런 것 같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마지막으로 처량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보면, 짐승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아무리 생각하기를 회피하고 싫어한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에게 죽음은 찾아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날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삶에 종말의 날이 있습니다. 문제는 죽음이후에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입니다. 죽음이후에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영원한 파멸과 심판의 장소인 지옥에 영원토록 거할것이냐, 아니면 내가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영원토록 자녀로서 거할 것이냐입니다. 미국의 작가였던 John Payne은 파리에서 한때 문학수업을 하고있었습니다. 빠리의 어느 하숙집에서 어느날 저녁 퇴근 시간에 창밖을 내어다 보게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버스나, 자동차를 타도 분주하게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머나먼 타향의 하숙집 2층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바라볼 때 크나큰 외로움에 젖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하여도, 내 쉴곳은 작은 집 내집 뿐이리"라는 시를 작시하며 두고온 고향집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트웹스키는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절망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있었기에 그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기업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거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거할 아버지 집이 있기에 오늘도 삶에서 크나큰 용기와 담대함과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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