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23:1-6)
본문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인 다윗이 읆은 고백시, 찬양시, 간증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들판을 헤집고 다니면서 양을 칠 때 그가 겪었던 신앙적 경험을 자기의 시어로 엮어서 읆었기 때문에 시가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애송을 하고 거기에다가 곡조를 붙여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에 나타난 시인의 신관과 또 그의 고백, 또 그의 찬양 그의 신앙에 여러가지 단면들을 조명함으로써 우리 신앙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오늘 시편 23편을 간략하게 조명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전직은 목동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주종관계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의 모든 것을 책임집니다. 양의 건강, 양의 생명, 양의 기쁨, 양의 아픔, 양이 먹을 것, 양이 잠자는 것, 양이 것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목자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제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과 나의 재산과 나의 삶과 나의 행, 불행과 나의 흥망성쇠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하는 확실한 신앙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셨을 때 오는 축복을 아주 아름답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엘리뇨현상은 전 세계 기상이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홍수, 가뭄, 폭설, 폭풍, 폭우, 지구촌 곳곳을 할퀴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월드워치 연구소에 발표에 의하면 엘리뇨는 식량난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삼림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부라질에 아마존 강 유역에 4500만명이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 3분의 1인 1500만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에서는 500만 명의 기아로 굶어죽어가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시아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 북한, 태국, 파파나누기니 식량난을 겪고 있습니다. 세계 식량 기구에 의하면 37나라가 식량난을 겪게 될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세계 곡물 파동이 밀어달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전 세계 곡물 비축량은 48일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2015년까지는 8억 인구가 식량난으로 허덕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떤줄 아세요. 우리가 지금 800만석을 비축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석달밖에 못먹어요. 그러니까 이건 남줄 형편도 못됩니다. 석달먹으면 바닥이 나요. 계속 사다가 쟁이질 않으면, 그뿐입니까 어 그제 일기예보를 들으니까 올해 농사는 풍년이 들것으로 전망하지만 9월달과 10월달 사이에 또한차례 태풍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지요. 올해의 풍년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태풍 “올가”가 우리나라를 피해가도록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앞으로 올 태풍도 하나님께서 막아주시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하를 흐르는 지하수가 매말라가고 있습니다. 석유가 고갈되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자라도 보통 모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모자랍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노래 합니다. 나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나는 넉넉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그 근거가 뭔지 압니까 영적 만족감과 자족감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 보면 수천억원을 굴리면서도 늘 만족스럽지 못해서 헐떡헐떡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가 하면 기천만원짜리 구멍가계를 운영하면서도 늘 기뻐요. 늘 감사해요. 마음에 평화가 있어요. 수천억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해서 헐떡헐떡 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이 부잡니까 아니면 기천만원짜리 사글세 가계를 운영하면서도 늘 마음에 기쁨이 있고 마음에 만족이 있는 사람이 부잡니까 그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니까 누가 부잡니까 많이 가지면 뭐해요 만족이 없는데, 그래서 적게 벌고 적게 쓰더라도 감사할줄 알고 만족할줄 알고 자족하는 사람이 그사람이 부자예요. 시인은 계속 노래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따라합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면 큰소리로 아멘.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부정적 표현이고 내 잔이 넘친다는 것은 긍적적 표현입니다. 내 잔이 넘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풍성하게 임한다 그런 뜻이예요. 넉넉하다. 넘친다. 그런 뜻이예요. 충청북도 수안보에서 문경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노라며는 이화여대 총장을 지냈던 김옥길 박사의 별장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집 뜰에가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제목이 붙은 조끄만 접시 같은 그릇 하나가 있고, 그 그릇 속으로 물방울이 쭈룩쭈룩 쏟아지는 그런 작품 하나가 있어요. 그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작품이예요. 계속 솓아나는 물길기가 잔을 채우고 있습니다. 폭포도 아닌 것이, 분수도 이닌 것이, 그렇다고 큰 소리 들리는 것도 아닌 것이, 어떻게 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제목을 달게 돼었을까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어요. 그것은 간단해요. 물이 그치질 않아요. 계속 떨어져요. 계속 솟아나요. 그래서 늘 잔이 차고 넘쳐는 거예요. 그 지속성, 연속성, 그 충만성 때문에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이 됐어요. 여러분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전기불은 소용이 없어요. 차라리 호롱불이 나요. 나오다 말다 하는 수돗물을 감질나서 재미가 없어요. 달리다 서다 하는 자동차는 그건 자동차가 아니예요. 차라리 걸어가는게 시원해요. 벌다 말다 하는 돈은 큰 부자가 못돼요. 돼다 말다 하는 사업은 성공하기가 어려워요. 교회도 그래요. 나오다 말다 신앙자라지 못해요. 예수 믿다 말다 천당 못가요. 작아도 좋으니까 계속 솟는 물, 양이 많지 않아도 좋으니까 365일 그치지 않고 솟아나는 분수, 흐르는 물, 그게 넘치는 겁니다. 부산 해운대나 강릉 경포대 쪽에서 그 해변가에서 여름에 장사를 하는 이들은 여름한철 벌어서 겨울을 먹고산대네요. 거기서 장사를 하는 어떤 분에게 물었어요. 여름한철 돈을 벌고 겨울은 무엇을 하고 지닙니까 하고 물었더니 뭐 다는 아니지만 더러는 여름에 돈을 벌어가지고 겨울에는 그 돈 가지고 술마시고 도박을 해서 돈을 다 탕진하는 경우도 있다고요. 그거는 축복이 아니예요. 넘치는 것도 아니예요. 계속되는 것, 연속적으로 넘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 축복을 누가 줄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내 잔을 넘치게 해주고 계십니다.
이 물이 잔에 넘쳤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은 잔을 들고 있다가 물을 쏟아부어요. 그리고 잔이 비었다고 투덜거려요. 어떤 사람은 자기가 들고 있어야 할 잔을 깨뜨려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투덜거립니다. 원망합니다.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진 잔을 잘 들고 있습니다. 계속 넘치는 거예요. 이게 축복이예요. 시인의 감동적인 노래는 계속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하고 노래합니다. 실직당한 40대 남자한테 요즘 심경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 대답이 갈곳이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집에도 갈곳이 없고 자식들한테도 갈곳이 없고 회사도 갈곳이 없고 그래서 갈곳이 없다는 거예요. 지금 노인들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갈곳이 없는계예요. 5살먹은 손자들까지도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안간다는 것예요.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원에 나온다는 겁니다. 나와서 말붙일 친구를 찾습니다.
그런데 소위 박카스 아줌마라는 사람들에게 돈을 뜯기고 성을 주고 받는다는 겁니다. 노인들은 면역성이 적어 성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면서 우려하는 모습을 그제 추적60분에서 방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노인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박카스 아줌마들이 다가와서 박카스 한병 팔면서 말동무도 해주고 친구가 되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는 것예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편히 쉬고 싶습니다. 라는 거예요. 이런 것은 모두 우리가 만든 졸작품입니다. 편히쉬고 싶다. 갈곳이 없다. 갈곳없는 우리들, 쉴곳 없는 우리들, 그래서 길거리에 미아가 되버린 우리들, 그들에게 들리는 신선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물이 없고 숲이 없는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물이 있고 숲이 있으면 오아시스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노래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그 푸른 숲이 있고 물이 넉넉한 오아시스로 인도해주신다. 거기서 쉬게 하시고 거기서 물을 먹게 하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아시스예요. 하나님이 쉼터예요. 하나님이 잔잔하 물가예요. 하나님이 푸른 숲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오아시스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품이 오아시스예요. 우린 하나님의 품에서 쉼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넓은 가슴에서 머무를 수가 있는겁예요. 거기가 우리의 쉼터예요. 주님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쉼터다. 내가 영혼에 안식처다. 여러분, 주님의 넓은 가슴이 영원한 쉼터인 것을 믿으면 큰 소리로 아멘. 아멘.
2. 내 영혼을 책임져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3절보니까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6절보니까 그리고 중요한 말씀은 “평생에” 그랬어요. 내 잔을 넘치게 해주시고, 나에게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고, 나를 푸른초장으로 인도해 주시고,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시고, 나에게 안식을 주시고, 내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그 일을 하루만 하는게 아니예요, 요 경제위기기간만 하시는게 아니예요. 평생에.평생에. 네 생명 다하는 날 까지, 네 생애가 끝나는 날까지, 네가 이땅에 머무는날 동안 평생토록 함께해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예요. 얼마나 위대한 은혜니까 평생에 같이 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남편 간병을 부인이 평생 못합니다. 평생 곁에 있지를 못합니다. 병든 아내 간병을 남편이 평생동안 못합니다. 평생 곁에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평생에 너와 함께하리라. 평생에 너를 지키리라.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평생에. 소생시킨다고 하는 것은 목말라 죽어가든 들짐승들이 물을 찾아 마시고 되살아 나는 것, 뙤악볕에 시들어 가든 들 풀들이 소낙비 맞고 다시 되살아 나는 것을 그것을 가리켜서 소생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죄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불의한 세력에 억눌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절망에 구렁텅이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나를 건져내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 그 분이 나를 소생시킨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졌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55절말씀에 보니까 “여호와여 내가 심히 고통에 깊은 구덩이에 빠져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시편 130편 1절 말씀보니까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그랬습니다. 깊은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옷로비사건 청문회를 보셨습니다. 사건마다 돈이예요. 감옥에 들었갔다하면 돈 때문에 들어가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한계가 없어요. 모두 돈에 환장들을 했나봐요. 깊은 구렁텅입니다. 너무나 깊고 지저분합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주께서 나를 의에 길로 인도하신다. 이것도 감사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안위하시는 도구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보니까 지팡이와 막대기라 그랬어요. 지팡이는 인도하는 도굽니다. 막대기는 때리는 도굽니다. 그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시고 막대기는 맹수가 오면 내어 쫓습니다. 독사를 내쫓습니다. 양이 잘못하면 때립니다. 우리 하나님은 두 도구를 가지고 계세요. 사랑의 지팡이와 진노의 막대기를 가지고 계세요. 내가 잘못하면 맞는 거예요. 우린 지금 하나님의 막대기로 매를 맞고 있습니다.
이 경제위기라는 막대기로 우린 호되게 맞고 있습니다. 구조조정이라는 막대기로 호되게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돌아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예요. 회개하면 돼요. 어제 부산으 모교회에 성도 30명이 행방불명이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말론에 속해있는 교회의 광신도들이 집단자살을 한 것이 아닌가 하여 떠들석했습니다. 찾고 보니까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종말론을 숭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단계 판매를 하다가 알게 된 사람들로서 그동안 잘못된 것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함께 모여 산에서 기도모임을 하고 있었노라고 하였습니다. 다단계가 그들의 갈곳이 아니었기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었던 것을 저들이 뭉친 결과였다는 것이었어요. 잃어버린 것이 만았지만 이제 하나님께 정신을 차리고 살아보자고 믿음으로 뭉쳐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한파탕 메스컴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갈곳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회개하면서 앞길을 의논하는 그런 모임이었다고 저도 믿고 싶습니다. 우리에겐 갈 곳이 있습니다. 기다리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쉴곳이 있습니다. 영원한 쉼터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느혜미야 9장 12절말씀보니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추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한번따라 하실래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추셨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아멘. 미국 격언가운데 “불행속에서도 함께 하는 사람만 있으면 슬픔이 덜어진다”라는 격언이 있어요. 맡습니다. 누가 함께만 있어줘도 슬픔이 덜어지는 거예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목자이신 주님이 나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맙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원망하지 맙시다. 불평하지 맙시다. 왜, 나의 영원한 쉼터,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품이 있기 때문에. 믿습니까
3. 시인의 마지막 소원이 있습니다. 마지막절인데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는 게 시인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시인의 소원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이 땅에서 잘살고 이 땅에서 번영하고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이 땅에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마지막 소원이 뭐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사는 거.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사는거, 그는 왕궁에 살던 사람입니다. 5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사람입니다. 그가 마지막 소원이 뭔지 아세요 정권 제 창출이 아니예요. 다시 왕이 되는게 아니예요. 그의 소원이 뭐냐 여호와의 집에 들어가 사는거, 여호와의 집이 뭡니까 땅에서는 교회입니다. 교회 멀리하지 마세요. 사업에 실패를 했기 때문에 직장을 잃었기 때문에 명태를 당했기 때문에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그런거로 교회를 떠나지 마세요. 그러면 길이 없어요. 여호와의 집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 천당을 말하는 거예요. 다윗의 평생 소원이 뭡니까 주의 나라, 그 영원한 성에 들어가 사는거예요. 내가 여호와에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잘살아도 천당, 못살아도 천당, 성공해도 천당, 실패해도 천당,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가 살아야 돼요. 그 길을 포기하면 그길로 끝이예요. 더 이상 길이없어요. 그래서 시인의 고백대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따라 하세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소망과 믿음으로 날마다 잔이 넘치는 삶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전직은 목동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주종관계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의 모든 것을 책임집니다. 양의 건강, 양의 생명, 양의 기쁨, 양의 아픔, 양이 먹을 것, 양이 잠자는 것, 양이 것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목자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제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과 나의 재산과 나의 삶과 나의 행, 불행과 나의 흥망성쇠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하는 확실한 신앙이 있기 때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셨을 때 오는 축복을 아주 아름답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엘리뇨현상은 전 세계 기상이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홍수, 가뭄, 폭설, 폭풍, 폭우, 지구촌 곳곳을 할퀴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월드워치 연구소에 발표에 의하면 엘리뇨는 식량난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삼림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부라질에 아마존 강 유역에 4500만명이 살고 있는데 그 가운데 3분의 1인 1500만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에서는 500만 명의 기아로 굶어죽어가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시아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 북한, 태국, 파파나누기니 식량난을 겪고 있습니다. 세계 식량 기구에 의하면 37나라가 식량난을 겪게 될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세계 곡물 파동이 밀어달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전 세계 곡물 비축량은 48일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2015년까지는 8억 인구가 식량난으로 허덕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떤줄 아세요. 우리가 지금 800만석을 비축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석달밖에 못먹어요. 그러니까 이건 남줄 형편도 못됩니다. 석달먹으면 바닥이 나요. 계속 사다가 쟁이질 않으면, 그뿐입니까 어 그제 일기예보를 들으니까 올해 농사는 풍년이 들것으로 전망하지만 9월달과 10월달 사이에 또한차례 태풍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지요. 올해의 풍년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태풍 “올가”가 우리나라를 피해가도록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앞으로 올 태풍도 하나님께서 막아주시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하를 흐르는 지하수가 매말라가고 있습니다. 석유가 고갈되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자라도 보통 모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모자랍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노래 합니다. 나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나는 넉넉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그 근거가 뭔지 압니까 영적 만족감과 자족감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 보면 수천억원을 굴리면서도 늘 만족스럽지 못해서 헐떡헐떡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가 하면 기천만원짜리 구멍가계를 운영하면서도 늘 기뻐요. 늘 감사해요. 마음에 평화가 있어요. 수천억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해서 헐떡헐떡 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이 부잡니까 아니면 기천만원짜리 사글세 가계를 운영하면서도 늘 마음에 기쁨이 있고 마음에 만족이 있는 사람이 부잡니까 그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니까 누가 부잡니까 많이 가지면 뭐해요 만족이 없는데, 그래서 적게 벌고 적게 쓰더라도 감사할줄 알고 만족할줄 알고 자족하는 사람이 그사람이 부자예요. 시인은 계속 노래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따라합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면 큰소리로 아멘.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부정적 표현이고 내 잔이 넘친다는 것은 긍적적 표현입니다. 내 잔이 넘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풍성하게 임한다 그런 뜻이예요. 넉넉하다. 넘친다. 그런 뜻이예요. 충청북도 수안보에서 문경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노라며는 이화여대 총장을 지냈던 김옥길 박사의 별장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집 뜰에가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제목이 붙은 조끄만 접시 같은 그릇 하나가 있고, 그 그릇 속으로 물방울이 쭈룩쭈룩 쏟아지는 그런 작품 하나가 있어요. 그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작품이예요. 계속 솓아나는 물길기가 잔을 채우고 있습니다. 폭포도 아닌 것이, 분수도 이닌 것이, 그렇다고 큰 소리 들리는 것도 아닌 것이, 어떻게 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제목을 달게 돼었을까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어요. 그것은 간단해요. 물이 그치질 않아요. 계속 떨어져요. 계속 솟아나요. 그래서 늘 잔이 차고 넘쳐는 거예요. 그 지속성, 연속성, 그 충만성 때문에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이 됐어요. 여러분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전기불은 소용이 없어요. 차라리 호롱불이 나요. 나오다 말다 하는 수돗물을 감질나서 재미가 없어요. 달리다 서다 하는 자동차는 그건 자동차가 아니예요. 차라리 걸어가는게 시원해요. 벌다 말다 하는 돈은 큰 부자가 못돼요. 돼다 말다 하는 사업은 성공하기가 어려워요. 교회도 그래요. 나오다 말다 신앙자라지 못해요. 예수 믿다 말다 천당 못가요. 작아도 좋으니까 계속 솟는 물, 양이 많지 않아도 좋으니까 365일 그치지 않고 솟아나는 분수, 흐르는 물, 그게 넘치는 겁니다. 부산 해운대나 강릉 경포대 쪽에서 그 해변가에서 여름에 장사를 하는 이들은 여름한철 벌어서 겨울을 먹고산대네요. 거기서 장사를 하는 어떤 분에게 물었어요. 여름한철 돈을 벌고 겨울은 무엇을 하고 지닙니까 하고 물었더니 뭐 다는 아니지만 더러는 여름에 돈을 벌어가지고 겨울에는 그 돈 가지고 술마시고 도박을 해서 돈을 다 탕진하는 경우도 있다고요. 그거는 축복이 아니예요. 넘치는 것도 아니예요. 계속되는 것, 연속적으로 넘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 축복을 누가 줄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내 잔을 넘치게 해주고 계십니다.
이 물이 잔에 넘쳤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은 잔을 들고 있다가 물을 쏟아부어요. 그리고 잔이 비었다고 투덜거려요. 어떤 사람은 자기가 들고 있어야 할 잔을 깨뜨려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투덜거립니다. 원망합니다.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진 잔을 잘 들고 있습니다. 계속 넘치는 거예요. 이게 축복이예요. 시인의 감동적인 노래는 계속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하고 노래합니다. 실직당한 40대 남자한테 요즘 심경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 대답이 갈곳이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집에도 갈곳이 없고 자식들한테도 갈곳이 없고 회사도 갈곳이 없고 그래서 갈곳이 없다는 거예요. 지금 노인들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갈곳이 없는계예요. 5살먹은 손자들까지도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안간다는 것예요.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원에 나온다는 겁니다. 나와서 말붙일 친구를 찾습니다.
그런데 소위 박카스 아줌마라는 사람들에게 돈을 뜯기고 성을 주고 받는다는 겁니다. 노인들은 면역성이 적어 성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다면서 우려하는 모습을 그제 추적60분에서 방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노인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박카스 아줌마들이 다가와서 박카스 한병 팔면서 말동무도 해주고 친구가 되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는 것예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편히 쉬고 싶습니다. 라는 거예요. 이런 것은 모두 우리가 만든 졸작품입니다. 편히쉬고 싶다. 갈곳이 없다. 갈곳없는 우리들, 쉴곳 없는 우리들, 그래서 길거리에 미아가 되버린 우리들, 그들에게 들리는 신선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물이 없고 숲이 없는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물이 있고 숲이 있으면 오아시스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노래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그 푸른 숲이 있고 물이 넉넉한 오아시스로 인도해주신다. 거기서 쉬게 하시고 거기서 물을 먹게 하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아시스예요. 하나님이 쉼터예요. 하나님이 잔잔하 물가예요. 하나님이 푸른 숲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오아시스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품이 오아시스예요. 우린 하나님의 품에서 쉼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넓은 가슴에서 머무를 수가 있는겁예요. 거기가 우리의 쉼터예요. 주님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쉼터다. 내가 영혼에 안식처다. 여러분, 주님의 넓은 가슴이 영원한 쉼터인 것을 믿으면 큰 소리로 아멘. 아멘.
2. 내 영혼을 책임져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3절보니까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6절보니까 그리고 중요한 말씀은 “평생에” 그랬어요. 내 잔을 넘치게 해주시고, 나에게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고, 나를 푸른초장으로 인도해 주시고,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시고, 나에게 안식을 주시고, 내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그 일을 하루만 하는게 아니예요, 요 경제위기기간만 하시는게 아니예요. 평생에.평생에. 네 생명 다하는 날 까지, 네 생애가 끝나는 날까지, 네가 이땅에 머무는날 동안 평생토록 함께해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예요. 얼마나 위대한 은혜니까 평생에 같이 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남편 간병을 부인이 평생 못합니다. 평생 곁에 있지를 못합니다. 병든 아내 간병을 남편이 평생동안 못합니다. 평생 곁에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평생에 너와 함께하리라. 평생에 너를 지키리라.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평생에. 소생시킨다고 하는 것은 목말라 죽어가든 들짐승들이 물을 찾아 마시고 되살아 나는 것, 뙤악볕에 시들어 가든 들 풀들이 소낙비 맞고 다시 되살아 나는 것을 그것을 가리켜서 소생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죄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불의한 세력에 억눌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절망에 구렁텅이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나를 건져내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 그 분이 나를 소생시킨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졌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55절말씀에 보니까 “여호와여 내가 심히 고통에 깊은 구덩이에 빠져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시편 130편 1절 말씀보니까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그랬습니다. 깊은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옷로비사건 청문회를 보셨습니다. 사건마다 돈이예요. 감옥에 들었갔다하면 돈 때문에 들어가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한계가 없어요. 모두 돈에 환장들을 했나봐요. 깊은 구렁텅입니다. 너무나 깊고 지저분합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주께서 나를 의에 길로 인도하신다. 이것도 감사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안위하시는 도구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보니까 지팡이와 막대기라 그랬어요. 지팡이는 인도하는 도굽니다. 막대기는 때리는 도굽니다. 그 지팡이로 나를 인도하시고 막대기는 맹수가 오면 내어 쫓습니다. 독사를 내쫓습니다. 양이 잘못하면 때립니다. 우리 하나님은 두 도구를 가지고 계세요. 사랑의 지팡이와 진노의 막대기를 가지고 계세요. 내가 잘못하면 맞는 거예요. 우린 지금 하나님의 막대기로 매를 맞고 있습니다.
이 경제위기라는 막대기로 우린 호되게 맞고 있습니다. 구조조정이라는 막대기로 호되게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돌아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예요. 회개하면 돼요. 어제 부산으 모교회에 성도 30명이 행방불명이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말론에 속해있는 교회의 광신도들이 집단자살을 한 것이 아닌가 하여 떠들석했습니다. 찾고 보니까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종말론을 숭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단계 판매를 하다가 알게 된 사람들로서 그동안 잘못된 것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함께 모여 산에서 기도모임을 하고 있었노라고 하였습니다. 다단계가 그들의 갈곳이 아니었기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었던 것을 저들이 뭉친 결과였다는 것이었어요. 잃어버린 것이 만았지만 이제 하나님께 정신을 차리고 살아보자고 믿음으로 뭉쳐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한파탕 메스컴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갈곳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회개하면서 앞길을 의논하는 그런 모임이었다고 저도 믿고 싶습니다. 우리에겐 갈 곳이 있습니다. 기다리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쉴곳이 있습니다. 영원한 쉼터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느혜미야 9장 12절말씀보니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추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한번따라 하실래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추셨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아멘. 미국 격언가운데 “불행속에서도 함께 하는 사람만 있으면 슬픔이 덜어진다”라는 격언이 있어요. 맡습니다. 누가 함께만 있어줘도 슬픔이 덜어지는 거예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목자이신 주님이 나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맙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원망하지 맙시다. 불평하지 맙시다. 왜, 나의 영원한 쉼터,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품이 있기 때문에. 믿습니까
3. 시인의 마지막 소원이 있습니다. 마지막절인데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는 게 시인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시인의 소원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이 땅에서 잘살고 이 땅에서 번영하고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이 땅에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마지막 소원이 뭐냐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사는 거.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사는거, 그는 왕궁에 살던 사람입니다. 5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사람입니다. 그가 마지막 소원이 뭔지 아세요 정권 제 창출이 아니예요. 다시 왕이 되는게 아니예요. 그의 소원이 뭐냐 여호와의 집에 들어가 사는거, 여호와의 집이 뭡니까 땅에서는 교회입니다. 교회 멀리하지 마세요. 사업에 실패를 했기 때문에 직장을 잃었기 때문에 명태를 당했기 때문에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그런거로 교회를 떠나지 마세요. 그러면 길이 없어요. 여호와의 집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 천당을 말하는 거예요. 다윗의 평생 소원이 뭡니까 주의 나라, 그 영원한 성에 들어가 사는거예요. 내가 여호와에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잘살아도 천당, 못살아도 천당, 성공해도 천당, 실패해도 천당,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집에 들어가 살아야 돼요. 그 길을 포기하면 그길로 끝이예요. 더 이상 길이없어요. 그래서 시인의 고백대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따라 하세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소망과 믿음으로 날마다 잔이 넘치는 삶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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