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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침체 (시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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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편의 서두에 보면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했습니다. 고라 자손이란 레위지파에 속한 한 집안이며, 마스길이란 교훈이란 말입니다. 즉 고라 자손의 교훈시로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부른 노래라는 말입니다. 4편 42편의 저자는 극심한 영적인 침체, 낙심,그리고 depression에 빠져있었다가 치유받은 체험을 이 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42편 저자는 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의 영혼이 심히 낙망 하며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걸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depression에 빠지기도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읽어보면 위대한 신앙인들도 항상 신앙의 극치감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영적으로 심한 낙심과 depression빠져 있었던 것을 알게됩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우는 영국의 챨스 스펄젼목사는 주기적으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런던의 일가가 침울하고 어둡기에 열년중 1-2달은 날씨좋은 프랑스남쪽 해안지대인 리비에라에가서 요양을 하고 했습니다. 그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나는 완전히 부서진 질그릇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밤을 잠자지 못하며, 많은 낮에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20세기 미국 설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해리 이며슨 포스딕목사는 유니온 신학교에 다닐 때, 극심한 우울증엑 빠져 학업을 중단하고 휴학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인생을 걸어가면서 때때로 신앙적으로 낙망하며, 낙심하여, 심한 depression에 빠질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의 사정과 형편을 알고 계신가
그렇다면 왜 내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나의 사정을 외면하시며, 왜 도우시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낙심의 수렁에 빠져있을때가 있는것입니다. 그러면 시편 42편의 저자는 왜 영적으로 낙심하게 되었습니까
첫째로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최북방지역인 헤르몬산 지역에 억류되어 부자유한 몸으로 살고 있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자 그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듯이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시편 40의 저자는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가던 시대의 사람으로 유다 지역의 최북단인 헤르몬산 부근에 거류민으로 억류되어 살고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헤르몬산은 2743미터가 되는 높은산으로 일년내내 산정에는 눈이 싸여있습니다. 헤르몬산의 계곡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들이 포효하는 폭포를 이루어 산 밑으로 내려와 요단강의 상류 근원지를 이루게 됩니다. 시인은 헤르몬산 지역에 억류되어 살고 있으면서 예루살렘성전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을 목말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목말라 합니다. 1-2절을 보면:"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니이다." 라고 말합니다.
C. S. Lewis의 말을 빌리자면 이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배고파 하는 식욕(appetite)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요 명절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때에는 예루살렘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도록 되어있습니다. 출애급기 23장 17절에 보면 "너희 가운데 남자들은 모두 한 해에 세 번 주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찬양으로 제사장을 도와 예배를 인도하던 이 시인은 헤르몬산 지역에 억류되어 살고 있기 때문에 성전에서 올라와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더욱더 하나님을 그리워합니다. 2절에 보면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라고 말합니다. 헤르몬산 지역은 경치가 뛰어난 지역입니다. 산 위에서 내리는 장엄한 폭포와 계곡의 바위를 치며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볼 때, 신앙인들은 찬송가 78장의 "참 아름다워라"의 3절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 알듯하도다."라고 찬송이 터져나올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영적으로 매우 낙심 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광경이 그를 더 우수에 잠기게 합니다. 시인은 6-7절에서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하나님이시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하므로 요단강이 흐르고 헤르몬산과 미살산이 우뚝 선 이 곳에서 내가 주를 기억합니다.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습하고 슬픔의 홍수가 폭포같이 나에게 쏟아집니다." 라고 탄식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예배에 참여할수 없었기에 아름다운 자연세계를 바라볼 때, 그는 영적으로 더 낙망과, 낙심, 그리고 depression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배를 게을리하면 영적으로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성령님으로 감동있는 예배는 우리의 영성에 건강을 가져다 주지만, 예배를 게을리하면 조금만 어려운 일에 직면하면 곧 낙심하게 되며 depression에 빠지게 됩니다.
둘째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낙심케 만들었습니다. 3절에 보면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10절에 보면 "내 뼈를 찌른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고대국가에서는 국가마다 섬기는 신들이 달랐습니다. 이짚트 사람들은 태양을 신으로 섬겼고, 바빌론 사람들은 달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국가마다 그들의 수호신들이 있었습니다. 강대국이 약소국가를 점령하면, 강대국의 신이 약소국의 신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강대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가령, 바벨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아갔을 때, 바벨론 사람들은 "너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가 섬기는 월신인 "마덕"보다 약한 신이라 너희를 보호할 수가 없었기에, 너희가 패배한 것이라고 놀렸습니다. 유대가 페르샤, 헬라나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희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너희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너에게 있을 수 있는가"라는 이방인들의 조롱으로 인해 그는 더욱더 낙심하게 됩니다. 마치 시편 22:2절의 말씀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밤낮 울부짖어도 주께서는 아무 대답도 없으십니다."라는 말씀이 바로 시편 42편저자의 심정이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너는 그렇게 열심히 믿는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네가 믿는 하나님은 무능하여 너를 돕지 못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은 아니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교회는 무엇하느냐," 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질타하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이 시인은 이방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빈정댈 때, "그 조롱 소리가 나의 뼈를 찌르는구나(10절)"라고 마음 아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비방할 때, 우리는 부당한 비판으로부터 교회를 변호하고, 교회가 비난을 받을 때, 내 마음이 이 시인처럼 아파하고 있습니까 시편 42편의 저자는 이방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방할 때, 심한 낙담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depression, 영적인 낙심과 우울증으로부터 어떻게 이 시인은 자유함을 얻고 있습니까
첫째로 이 시인은 그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를 찬양함으로 영적인 낙심과 depression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나나의나에게"라는 단어를 수없이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바라보는데 너무 분주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기자신의 처지와 형편만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는 가멜 산상에서 우상 숭배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진멸 시키는 크나큰 승리를 거두고 온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부흥의 역사가 있을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엘리야는 그를 죽이려는 악독한 이사벨 왕후의 추격을 받아 광야로 피신하였습니다. 열왕기 상 19장에 보면 광야로 피신하던 엘리야는 로뎀 나무아래 않아 죽기를 바라며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이제 더 발랄 것이 없습니다.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내가 내 조상들보다 더 나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도 광야로 피신하는 자기 자신만을 바라볼 때 낙심하여 차라리 죽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려운 때를 당하면 주로 자기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생각하게 낙심하거나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것처럼 느껴질 때일수록, 성령님으로 우리와 더욱 가깝게 계시는 하나님, 모든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워가시는 하나님을 믿음안에서 바라볼수 있어야 합니다. 욥기 35장 10절에서 하나님은 밤중에도 우리에게 노래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억울한일을 당해도, 낙심되고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에게 최후의 승리을 주시는 하나님, 모든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워 주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한 밤중에도 노래를 부를수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매맞고 감옥에 같혔었지만, 그들이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바라보지 않고, 구원의 하나님, 그들의 삶을 오늘도 이끄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사의 찬양을 한밤중에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밤중에도 노래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의 삶에는 나를 낙심시키며, 나를 절망케하며, 나의 모든 희망을 빼앗아가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신세를 한탄하거나 불평하거나 의기소침하여 낙심하기 보다는 나를 영원히 사랑하시며, 나의 삶을 책임져주시는 선한목자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수 있기를 원합니다. 시편 42편의 시인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5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11절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라"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시편 40편의 저자는 미래 지향적인 삶,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영적인 침체, 낙심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영국의 중년 여인이 두 딸을 가지고 있었는데, 맏딸은 일찍 죽었고, 둘째 딸은 미국에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딸을 만나려고 배를 타고 미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런데 대서양 한복판에서 배는 큰 태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배가 침몰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자 모든 승객들이 공포감에 사로잡혀 어찌 할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만큼은 너무나 침착하게 평온을 일치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배는 침몰을 면했고, 태풍은 지나가버렸습니다. 사람들이 그 중년의 영국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위기 속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침착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 여인은 "나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한 딸은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고, 다른 딸은 천국에서 살고있습니다. 나는 지금 미국에 있는 딸을 만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가고 있는데, 배가 무사히 미국에 도착하면 미국에 사는 딸을 만날것이요, 배가 바다에 침몰하여 내가 죽게된다면, 나는 천국에 있는 딸을 만나게 될것입니다. 바다에 빠져 죽던지, 아니면 살아서 미국에 가게되던지, 나는 내 딸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에 두렵지가 않은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것입니다. 현실의 삶이 너무나 절망적이면 사람들은 과거지향적으로 됩니다. 현실의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기 때문에,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며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움을 가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시대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했었다고 생각하는 과거가 실제로는 그렇게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지나간 세월은 다 행복하고 좋았던 시절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현실도피의 방편으로 과거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됩니다. 현재의 삶이 불행하다고만 생각하게 됩니다. 시편 42편의 저자는 지나간 과거를 생각할 때 현재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4절에서 말합니다. 표준 새번역으로 보면 "지나간 날들이 생각난다. 무리의 앞장을 서서 하나님의 집에 이르던 일, 환희와 찬송소리 드높던 그 행렬, 순례지의 축제로 법석을 떨던 그 일, 이제 이런 일들을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어지는 구나." 시인이 과거의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할 때 마음이 상했지만, 그러나 그는 과거에만 집작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그의 삶을 지켜주셨던 하나님께서 현재의 삶속에서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의 삶을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5절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Hope in God).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리려 찬송하리로다." 11절에서도 시인은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Hope in God).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며 바라본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망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됩니다. 소망이 하나님께 있으니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소망을 우리마음속에 심어주었으니,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오늘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에 영적인 침체, 낙심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셋째로 시편 42편의 저자는 자기 자신에게 긍정적으로 말함으로 낙심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말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평균 1분당 150-200개의 단어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과 대화할때에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인 1분간에
1,300개의 단어를 말할수 있다고 합니다. 나 자신과의 대화를 심리학자들은 self-talk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 자신과 이처럼 빠른 속도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것입니까
그런데 연구가들에 의하면 우리는 나자신과 긍정적으로 대화하기 보다는 부정적인 대화, 스스로 나 자신을 패배시키는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있다고 합니다. Depression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눔으로 더 낙심케 되며 더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관한 깊은 연구를 한Albert Ellis박사는 우리가 스스로 부정적으로 대화하는 예를 몇가지 열거합니다. 나는 행복할 권리가 없다.즉 조금 행복하면 곧 불행이 올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저임금을 받는 직업밖에는 다른 직업을 구할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결코 변화될수 없는 가망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항상 실수를 하여 일을 망쳐놓는다. 내가 불행한 것은 내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외부의 어떠한 조건과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나와 같은 무능력하고 값어치가 없는 사람을 만드셨을까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부정적인 대화를 날마다 자기 자신과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내가 나 자신과 어떠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정적인 대화를 긍정적인 대화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부정적인 대화를 항상 되풀이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나 자신의 긍정적인 모습, 나가 성공적을 성취한 어떠한 일, 내가 그동안 성장해온 모습, 나의 가능성,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로서의 영원한 신분에 나의 생각을 집중시켜야 할것입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생각을 채우며, 긍정적으로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우리는 성서에 의거하여 나 자신과 긍정적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몇가지 예를 들면:하나님은 나의 선한 목자가 되시기에 그의 기르시는 양인 나의 삶을 책임져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나의 죄를 용서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다. 예레미야 31:3에 의거하여,하나님은 나를 영원한 사랑으 사랑하신다. 나는 사랑 받을만한 사람이다. 나는 유용한 사람이다. 나는 변화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나는 정상에 오를 수가 있다. 그리스도안에서 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직장에서 성공할 권리가 있다. 요한계시록 21:7 말씀에 의거하여 나는 승리하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내 몸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는 건강할 권리가 있다. 나는 삶을 살 권리가 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해지기 위하여는 나 자신과 나누는 부정적인 대화를 긍정적인 대화로 바꾸어야만 할 것입니다. 시편 40편의 저자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눕니다. 낙심하여 있는 자신을 타이르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라고 자기 자신에게 설교합니다. 5절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리려 찬송하리로다." 11절에서도 시인은 자기자신과 긍정적인 대화를 나눕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리려 찬송하리로다." 세계적인 강해설교자인 영국의 마틴 로이드 죤스목사는 영국 왕실의 주치의인 의사였다가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시편 42편을 강해하면서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말을 해야합니다. 자신에게 설교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에게 말하여야 합니다. `네가 어짜하여 낙망하느냐 무엇 때문에 불안하여 하느나' 여러분은 자신을 책망하고 권면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말하여야 합니다. 이 침체되고 불행한 상황속에서 불평하는 대신에 `하나님만 바라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는 삶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크게 낙심하고 계십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감속에 계십니까 심한 우울증,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며, 우리의 영원하신 소망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으니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항상 나 자신과 긍정적인 대화를 나누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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