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시46:1-11)
본문
우리는 이번 한 주간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이미 몇 주전부터 이 부분에 대하여 설교나 성경공부 시간을 통하여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회를 여러 차례 가진 바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인한 바가 있고, 때로는 교회의 중요한 행사나 문제가 있을 때, 때로는 우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신 체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기도회 기간에 일주일 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다 참석한 성도들에게 조그만 선물과 함께 글을 적어주었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기도회 기간에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셨을 것이고, 또한 계속하여 그 위로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일평생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일에 기도만큼 중요한 것이 없음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적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 참석한 성도들 대부분이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응답해 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우리 믿음의 가족들이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특별한 체험들을 하기를 원하고 있고, 실제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일은 세상의 무당종교에서 말하는 접신현상도 아니고, 또한 한 종교가 아니라 생활의 전부라는 것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꼭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인물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경험하였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우리는 경험할 수 없을까요 성경의 주인공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신기하고 놀랍겠습니까 헨리 블랙가비와 클로드 킹이 공동으로 지은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 (Fresh Encounter)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을 읽는 동안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서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하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당신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려주신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그 백성들에게 오시기 때문에 말씀과의 만남은, 곧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만날 때마다 전인격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환영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연구하려는 시편 46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틴 루터가 작사하고 작곡한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시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시편을 읽고 묵상함으로 만난 하나님께서 당시 그가 처한 상황에서도 함께 해 주시리라는 강렬한 믿음으로 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이 시의 주제는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크게 세 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악상부호인 셀라(selah)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연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확신에 대하여(1-3절), 두 번째로는 일반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하나님을 특수한 상황에서 체험한 일에 대하여(4-7절), 세 번째로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8-11절).
1.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확신 사람들은 항상 자기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며 살다가 어떤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왜 내게만 일어나는가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하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저자 고라 자손은 자신이 믿고 알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1절에서 먼저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도움이시라." 여기에 피난처나 힘이나 환란 중에 만날 도움이라는 용어는 보호를 받고 안전하게 되리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환란 중에 만날 도움"이 되신다는 말은 정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번역에 나타나 있는 "만날"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있는 의미를 그대로 번역하면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또는 "분명하게 발견하게 될"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의미는 하나님은 우리가 환란을 당할 때 반드시 발견하게 되고, 경험하게 될 도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의 저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섭리에 대한 일반적인 확신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모든 신자의 일반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이어서 이 시의 저자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도전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2-3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여기에 시편 기자는 지금도 그렇지만 더욱 당시에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최악의 천재지변에 해당하는 자연의 재해 앞에서도, 그것이 지진이나 폭풍이나 해일이라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며, 환란을 당할 때마다 만나고 경험하게 된다는 믿음의 결과요 신앙의 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을 이론적이고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교리를 배우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신다든지, 힘이 되신다든지, 환란을 당할 때 만나게 될 분이라는 지식이 나타나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전능자가 되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는 지식, 또한 하나님의 섭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지식,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지식, 세상 사람들이 전도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택한 백성을 부르신다는 지식,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지식 등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이 관념의 체계 안에 머물고 있다면 신앙생활의 깊이와 오묘한 세계를 절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체계는 마귀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지식과 그 지식을 내가 경험하는 문제는 다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2. 특수한 상황에서 체험한 하나님 앞에서 이 시인은 앞의 연에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지진이나 폭풍, 해일의 상황을 예로 들면서 격정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두 번째 연에서는 아주 조용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4절을 보십시오. "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여기에는 한 강이 있는데, 그 강에서 여러 줄기의 시내가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이 시에서 이 하나님의 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본문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라고 뜻인데, 우리 번역은 그 곳이 성소라고 보고 의미를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 하나님의 성은 하나님이 당시 지상에 거하시는 곳으로 이해하였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4절에 나타난 그림을 머리에 그려보십시오. 이 그림은 에스겔서 47:1-12에 에스겔이 본 환상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서 여러 시내가 흘러 넘치는 그림을 에스겔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실제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에서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 강 좌우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러 시내가 흘러 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모든 풍부한 것이 다 거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은 여기에 거하시며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며 그 위치가 절대로 흔들리지 아니하고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치를 흔들려고 하여도 흔들리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아주 의미있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여기에 "새벽에"라는 말의 히브리어 뜻은 같은 뜻이긴 합니다만 "아침이 되려고 할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 시인이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 역사적인 경험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건너게 하시고 새벽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완전히 멸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4:27에 보면 "모세가 곧 바다로 손을 내어 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에 엎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19장에는 히스기야 왕이 통치할 때 앗수르의 산헤립이 18만5천명이라는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이때에 히스기야는 성전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18만5천명을 다 죽이시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다 죽어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19:35에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18만5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다 송장이 되었더라."(참고. 사37:36)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의 시인이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고 한 것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것을 변하여 다음 날에 기쁨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인이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은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였을까요 암시적이긴 하지만 6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이 말씀은 이방의 나라들이 일어나 침공할 때 왕국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이 절은 NIV 성경이 잘 번역하였습니다.
조셉 알렉산더(J. A. Alexander)나 데렉 키드너(Derik Kidner), 존 스토트(J. Stott)같은 성경학자들은 바로 이 절에 근거하여 히스기야 시대에 산헤립이 18만5천명이라는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온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썼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때의 상황에 대하여서는 열왕기하 18-19장에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인의 말처럼 앗수르의 산헤립이 이끄는 18만5천명이 아침이 되어 보니 모두 송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체험한 하나님을 기초로 하여 다시금 7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여기 만군의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뜻은 온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이 표현은 야곱의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스라엘과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두 가지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온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별한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경험들이 없습니까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의 경험들이 없습니까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말씀처럼 기도하면서 자고 일어나니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 일은 없습니까 야곱이 20년간의 밧닷 아람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의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창32:6). 그는 그 때에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겨울에 눈이 따스한 햇볕에 녹듯이 녹여주셨습니다(창33:4). 여러분 가운데 은행의 빚이나 기타 사람들에게 빌린 돈 문제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또는 장래의 진로 문제로 간절히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고치지 못할 질병이라고 말하는 것을 가지고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시편의 저자처럼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신뢰하라 지금까지 우리는 앞의 두 연을 연구하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어떤 역사적인 특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할 때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면서 능력을 행하셨다는 체험적인 내용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체험을 한 사람은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여기에 "와서 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에 명령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과거에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구원을 주셨지만,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믿음으로 한번 지켜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이 시인은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시46:9) 이 말씀은 이사야 2:4의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이 말씀의 전체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평화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먼 미래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실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 가운데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어떻게 이루시는지를 보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어서 다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초청하면서 이 세상에서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나타내시는지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이 말씀 역시 역사 가운데 잘 알고 있는 문구입니다. 출애굽기 14:13-18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현재적으로도 임재하셔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에 조용히 기다리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집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능력을 지켜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다시금 결론으로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11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이 말씀은 이미 앞의 7절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인데, 여기서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하지만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문제는 다릅니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이 시편 기자처럼 성정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편의 저자가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는 역사적인 체험을 근거로 그러한 체험을 하게될 것을 고백한 것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의 표제에 이 시를 "영장으로 알라못에 맞춘 노래"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알라못이라는 말은 원래 처녀 또는 젊은 여자로서 사용되는 말인데, 여기서는 음악적인 표현으로 소프라노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 시를 격정적으로 불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부르짖을 때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알고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가운데 한가지입니다. 영국의 스펄전(C. Spurgeon) 목사님은 "하나님과 씨름하며 기도의 응답을 얻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하늘과 땅을 자기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합니다. 특별히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 보십시오. 격정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존재를 나타내시는 지 꼭 체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다 참석한 성도들 대부분이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응답해 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우리 믿음의 가족들이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특별한 체험들을 하기를 원하고 있고, 실제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일은 세상의 무당종교에서 말하는 접신현상도 아니고, 또한 한 종교가 아니라 생활의 전부라는 것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꼭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인물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경험하였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우리는 경험할 수 없을까요 성경의 주인공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신기하고 놀랍겠습니까 헨리 블랙가비와 클로드 킹이 공동으로 지은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 (Fresh Encounter)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을 읽는 동안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서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하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당신이 어떤 분이신 지를 알려주신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그 백성들에게 오시기 때문에 말씀과의 만남은, 곧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만날 때마다 전인격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환영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연구하려는 시편 46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틴 루터가 작사하고 작곡한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시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시편을 읽고 묵상함으로 만난 하나님께서 당시 그가 처한 상황에서도 함께 해 주시리라는 강렬한 믿음으로 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이 시의 주제는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크게 세 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악상부호인 셀라(selah)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연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확신에 대하여(1-3절), 두 번째로는 일반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하나님을 특수한 상황에서 체험한 일에 대하여(4-7절), 세 번째로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8-11절).
1.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확신 사람들은 항상 자기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며 살다가 어떤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왜 내게만 일어나는가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하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저자 고라 자손은 자신이 믿고 알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1절에서 먼저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도움이시라." 여기에 피난처나 힘이나 환란 중에 만날 도움이라는 용어는 보호를 받고 안전하게 되리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환란 중에 만날 도움"이 되신다는 말은 정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번역에 나타나 있는 "만날"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있는 의미를 그대로 번역하면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또는 "분명하게 발견하게 될"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의미는 하나님은 우리가 환란을 당할 때 반드시 발견하게 되고, 경험하게 될 도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의 저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섭리에 대한 일반적인 확신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모든 신자의 일반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이어서 이 시의 저자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도전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2-3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여기에 시편 기자는 지금도 그렇지만 더욱 당시에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최악의 천재지변에 해당하는 자연의 재해 앞에서도, 그것이 지진이나 폭풍이나 해일이라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며, 환란을 당할 때마다 만나고 경험하게 된다는 믿음의 결과요 신앙의 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을 이론적이고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교리를 배우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신다든지, 힘이 되신다든지, 환란을 당할 때 만나게 될 분이라는 지식이 나타나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전능자가 되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는 지식, 또한 하나님의 섭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지식,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지식, 세상 사람들이 전도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택한 백성을 부르신다는 지식,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지식 등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이 관념의 체계 안에 머물고 있다면 신앙생활의 깊이와 오묘한 세계를 절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체계는 마귀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지식과 그 지식을 내가 경험하는 문제는 다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2. 특수한 상황에서 체험한 하나님 앞에서 이 시인은 앞의 연에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지진이나 폭풍, 해일의 상황을 예로 들면서 격정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두 번째 연에서는 아주 조용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4절을 보십시오. "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여기에는 한 강이 있는데, 그 강에서 여러 줄기의 시내가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이 시에서 이 하나님의 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본문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라고 뜻인데, 우리 번역은 그 곳이 성소라고 보고 의미를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 하나님의 성은 하나님이 당시 지상에 거하시는 곳으로 이해하였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4절에 나타난 그림을 머리에 그려보십시오. 이 그림은 에스겔서 47:1-12에 에스겔이 본 환상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서 여러 시내가 흘러 넘치는 그림을 에스겔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실제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에서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 강 좌우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러 시내가 흘러 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모든 풍부한 것이 다 거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은 여기에 거하시며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며 그 위치가 절대로 흔들리지 아니하고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치를 흔들려고 하여도 흔들리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아주 의미있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여기에 "새벽에"라는 말의 히브리어 뜻은 같은 뜻이긴 합니다만 "아침이 되려고 할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 시인이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 역사적인 경험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건너게 하시고 새벽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완전히 멸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4:27에 보면 "모세가 곧 바다로 손을 내어 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에 엎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19장에는 히스기야 왕이 통치할 때 앗수르의 산헤립이 18만5천명이라는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이때에 히스기야는 성전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18만5천명을 다 죽이시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다 죽어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19:35에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18만5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다 송장이 되었더라."(참고. 사37:36)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의 시인이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고 한 것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것을 변하여 다음 날에 기쁨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인이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은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였을까요 암시적이긴 하지만 6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이 말씀은 이방의 나라들이 일어나 침공할 때 왕국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이 절은 NIV 성경이 잘 번역하였습니다.
조셉 알렉산더(J. A. Alexander)나 데렉 키드너(Derik Kidner), 존 스토트(J. Stott)같은 성경학자들은 바로 이 절에 근거하여 히스기야 시대에 산헤립이 18만5천명이라는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온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썼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때의 상황에 대하여서는 열왕기하 18-19장에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인의 말처럼 앗수르의 산헤립이 이끄는 18만5천명이 아침이 되어 보니 모두 송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체험한 하나님을 기초로 하여 다시금 7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여기 만군의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뜻은 온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이 표현은 야곱의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스라엘과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두 가지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온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별한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경험들이 없습니까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의 경험들이 없습니까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말씀처럼 기도하면서 자고 일어나니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 일은 없습니까 야곱이 20년간의 밧닷 아람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의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창32:6). 그는 그 때에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겨울에 눈이 따스한 햇볕에 녹듯이 녹여주셨습니다(창33:4). 여러분 가운데 은행의 빚이나 기타 사람들에게 빌린 돈 문제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또는 장래의 진로 문제로 간절히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고치지 못할 질병이라고 말하는 것을 가지고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시편의 저자처럼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신뢰하라 지금까지 우리는 앞의 두 연을 연구하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어떤 역사적인 특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할 때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면서 능력을 행하셨다는 체험적인 내용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체험을 한 사람은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여기에 "와서 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에 명령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과거에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구원을 주셨지만,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믿음으로 한번 지켜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이 시인은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평화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시46:9) 이 말씀은 이사야 2:4의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이 말씀의 전체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평화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먼 미래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실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 가운데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어떻게 이루시는지를 보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어서 다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초청하면서 이 세상에서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나타내시는지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이 말씀 역시 역사 가운데 잘 알고 있는 문구입니다. 출애굽기 14:13-18을 보십시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현재적으로도 임재하셔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에 조용히 기다리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집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능력을 지켜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다시금 결론으로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11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이 말씀은 이미 앞의 7절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인데, 여기서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하지만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문제는 다릅니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이 시편 기자처럼 성정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편의 저자가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는 역사적인 체험을 근거로 그러한 체험을 하게될 것을 고백한 것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의 표제에 이 시를 "영장으로 알라못에 맞춘 노래"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알라못이라는 말은 원래 처녀 또는 젊은 여자로서 사용되는 말인데, 여기서는 음악적인 표현으로 소프라노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 시를 격정적으로 불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부르짖을 때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알고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가운데 한가지입니다. 영국의 스펄전(C. Spurgeon) 목사님은 "하나님과 씨름하며 기도의 응답을 얻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하늘과 땅을 자기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합니다. 특별히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 보십시오. 격정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존재를 나타내시는 지 꼭 체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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