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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론 (시1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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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자연시인 워즈워드는 행복한 용사의 성격을 묘사한 시 첫줄에서 "누가 행복한 용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나는 행복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만인의 소원입니다.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며 어떻게 하면 이 행복에 도달하는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행복관을 가졌느냐 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추구는 온 인류의 공통된 갈 망입니다. 오늘의 정치,경제,교육등 문화 전부는 인생의 행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마다 많은 시인,철인,종교가들은 여러가지로 행복에 대한 해답 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과 같은 감각주의와 유물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행복을 가시적이고 유물적인 세계에서 찾아내려고 무한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요,행복은 곧 쾌락의 추구다"라는 인생의 방정식을 갖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또 어떤이는 행복을 물질에서,권세에서,지식에서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현세에서 지식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지혜의 부 족을 느끼게 되고,경제적으로 좀 여유를 가지면 가질수록 어딘지 만족을 느 끼지 못하고 쾌락에 생을 던지며 혓바닥을 기쁘게 하고 손끝을 간지럽게 하 고 귀를 즐겁게 하고 코를 흥분케 하고 눈을 황홀 도취케 합니다. 그러나 이런 쾌락 추구의 삶은 불안과 권태와 허무감으로 끝나 버리고 맙니다.
만일 이 세상에서 물질이 풍부하고 환경이 좋아서 마음껏 쾌락을 추구한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면 오늘날 행복에 겨워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못하다는데 깊은 고민이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론 여러해 전에 미국의 대부호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억만장자인 하워드 휴즈입니다. 그는 20억불의 재산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의 10년간은 가장 고독한 생활을 했다고 언론들은 보도했습니다. 외부의 사람들과는 일체 접촉을 끊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운명할 때는 슬퍼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끝없는 여성편력은 조강지처도 자녀도 없이 가장 외롭게 그를 죽게 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또한 사람은 석유재벌 장 폴케티였습니다. 그는 무려 40억불의 유산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러나 보도에 의하면 그의 사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던 것 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는 다섯번 결혼했고 다섯번 이혼했습니다. 59년도에는 그의 막내아들이 폐병으로 죽고,73년에는 그의 장남이 과음으로 그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물질의 풍요함만이 행복의 기초라면 역사 이래 가장 많은 재물을 모았던 위의 두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했어야 할 터인테 사실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미국의 한 사회학자가 '돈과 행복'에 대해서 이 년간 연구한 결과 '돈은 행복의 조건임에는 틀림없으나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정치와 돈은 파라독스의 관계라고 말했습니다. 정치는 거금을 모아 필요가 충족되었는데도 만족치 못하고,그런가 하면 큰돈을 모든 기업인은 돈보다도 권력 명예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돈과 세상 권력은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에 디오피아의 셀라시에 황제가 150억불의 큰 돈을 스위스 은행에 비밀리에 예 금했다고 한때 매스컴이 열을 올려 보도한 적이 있지만,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거액의 돈도 그의 수십년간의 권좌를 지켜주지 못했고,기울어지는 그 나라의 국운을 막지 못했고,또한 그 자신의 생명도 연장시켜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나라가 공산화 되고 백성들은 기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현대인은 아폴로 11호가 달 세계를 정복한 다음부터는 우주과학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달 세계 정복후 계속되는 우주과학의 발달 로 우주의 오랜 수수께끼인 화성에 생명의 존재여부를 탐색하기 위해 발사 한 바이킹 제1호가 1억5천3백만불의 투자와 11개월의 긴 시간,3억2천40만 Km를 날아가서 화성 표면에 착륙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태 양계 탐색에 새로운 기원을 열었습니다. 그후에 미국은 우주 왕복선을 성공 시켜 이제는 우주 정복이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막대 한 투자를 하여 우주과학을 개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런 우주과학이 과연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을 제공할 수 있을까 요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후 미국에서 '지구의 최후'라는 희곡이 한편 발 표되었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에 가서 보면 소련과 미국을 위시한 세계 열 강들이 수소폭탄을 장치한 로켓을 수없이 하늘에 띠우고 있었는데 본부에서 단추만 누르면 그 로켓이 공격목표에 자동적으로 떨어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한 조종사가 정보를 잘못 듣고 소련이 미국을 공격한다는 바람에 단추를 눌러 소련을 공격하자,소련이 이에 대응하고 또 다른나라 들도 연쇄반응을 일으켜 결국 지구는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편의 희곡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공상적인 이야기가 현실화되고 보니 우리의 궁극적인 행복의 원천은 과학에 있는 것 같지도 않 습니다. 성경의 행복론
그러므로 인간의 참 행복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듯이 물질의 풍요함이 나 문명의 발달에서 저절로 굴러오는 선물이 아니라 가시적인 차원을 휠씬 넘어 보다 깊은 곳에 그 원리가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즉 인간의 영혼소에 서, 정신속에서 부단히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전에는 참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참 행복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행복의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은"마음 이 가난한자애통하는자온유한 자마음이 청결한 자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또 시편 기자는 "복있는 사람은 악한 자의 의론대로 행치 아니하며,오만 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죄인의 길에 서지도 않고,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하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설명한 팔복이 나 시편 기자가 말한 행복의 원리는 곧 기독교의 행복론을 대표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행복론은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둘째는"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죄 문제의 해결 복있는 사람은 언제나 죄를 무서워하며 또 죄를 미워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죄 속에서 쾌락을 찾고 쾌락 속에서 인간의 행복 을 추구하다가 감각주의 문명에 병들어서 건강하고 생산적인 행복관을 갖지 못하고 병적인 소비적 행복관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니 행복에 사로잡힌 것 이 아니라 감각적 쾌락의 노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와 반대로 죄와의 관계를 끊을 때에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재산이나 지식이 풍부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멀리 하는데서 발견된다고 확신합니다. 인간이 아무 리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 해도 마음 속에 죄로 인한 불안과 공포 가 꽉 차 있으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힐티박사는 그의 행복론에서 "허다한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불행의 원 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도 관심도 없다.
그런데 불행의 원인이 제거되기 전에는 참 행복은 소유할 수가 없다. 그 원인은 죄라는 가시다.
그러므로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과감하게 이 가시부터 제거해 버려야 행복 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행복의 조건은 생활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 영혼의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대해서,이웃에 대해 서,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생애의 행복과 불행은 결정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정당한 상태에 놓여 있는가,또 나와 이웃과의 관계는 정당한가 다시 말해서 나의 종교생활과 윤리생활이 얼마 나 건전하냐에 따라서 행복의 기준은 정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문제는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 목해야 행복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 화목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요인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모든 것을 내 소유로 만들려는 욕심입니다. 이런 죄가 하나님과 인간,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성한 종교와 윤리적 관계를 깨고 불행 의 세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때때로 혁명도 일어나고 정권도 바꿔보고 제도도 개혁했지 만 오늘까지 우리가 이상으로 하는 맑고 명랑한 사회를 이룩하지 못한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죄, 그리고 사회의 정의를 깨는 구조적인 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 두번째로 기독교는 참 행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에게 주어진다고 주 장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행복한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역사 속에 표현되는 하나님의 섭리,자연속 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자신의 생활을 통해서 체험되는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깨닫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하여 취해야 할 기본 자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주 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에 복종하는 것이 복 받는 비결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큰 복을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고 그 명령에 무조건 복종했기 때문입니다(창12장). 그러나 현대인은 세상 권세를 두려워 하고 돈의 힘을 두려워하고 과학의 힘을 두려워하지만 인류의 몸과 영혼 그 리고 역사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인간의 행복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겉만 보시지 않고 우리의 속 깊은 곳,즉 역사의 깊은 이면 까지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적 행동만 살필 수 있으나 하나님은 그 행동 배후에 숨어있는 동기까지 보십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일까지 아시고, 인간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은밀한 중에 개인,민족,세 계의 모든 사건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감시 밑에서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 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어두운 곳에서 말한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 습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라야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마음이 가난한 자","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 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빈 마음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모셔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인간의 깊은 이면까지 다 보 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맑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의 육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공산주의자들이 생명의 존엄성 을 쇠사슬에 묶어놓고도 그것이 죄인줄 모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정한 일을 마음대로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이 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육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능히 그분을 속일 수 있다고 믿기 대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인도 국가 도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는 잠시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육안으로 보는 것같이 두 려운 마음으로 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 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개인이나 민족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정치도 안정되고 경제도 부흥되 고 교육,예술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번영해야 함은 말할나위 없지만,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불행의 원인인 죄를 제거하고 축복의 원천인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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