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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가족에게 있는 축복 (시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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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둥지를 틀지 않은 새가 완전한 새일 수 없듯이,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자기 가정을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은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체스털튼(G. K. Chesterton)이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한 사람의 인생에게 있어서 가정에 대한 성실함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지으셨을 때, 우리는 분 명 독립된 한 인격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회 로부터 단절된 외로운 한 개인으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작지만 참으로 중 요한 공동체, 곧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만드셨습니다. 가족 은 단순한 생활 공동체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가족과 더불어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울고 웃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 가족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 가족이 서로 얼마나 강하게 결속하고 있느냐는 것은, 각 사람이 다른 가족에 대해 얼마나 성실한 자세로 임하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가족 안에 있는 서로를 향한 성실함과 충성됨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으로 설명합니다. 시편 128편 1절에서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 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의 기록대로, 하나님 께서 축복하시는 가정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를 행하는 그런 가정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도를 행 하는 가정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아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아는 일에서 출발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가 족과 함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 가족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바 른 길로 가족의 삶을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리스도의 참된 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함으로" 위 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가 정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으로 자라날 뿐만 아니라, 이웃에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복된 가정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가정에 주시는 풍성한 축복을 누리며 사는 하루가 되길기도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골 1:19-20 화란의 신학자이자 정치가로, 1800년대 후반에 활동했던,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는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못할 것은 손톱 만큼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섭 리와 인간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인(Master)을 기억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그 이유는, 미세하게 작은 미분자 한 조각일지라도, 우주의 모든 것이 왕 중의 왕이신 그분의 주권하심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래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경륜하심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안 다면, 우리들 자신의 삶을 경외감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에베소서 1장 9절 과 10절을 보십시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 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온 우주를 운행하시는 제 1의 목적은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것, 즉 우주의 전적인 회복, 그리고 세상의 완전한 구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께서 각 사람의 삶에 뜻하신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풍성히 누리 게 하는 것입니다. 형체 없는 진흙을 빚어 아름답고 쓸모있는 질그릇을 만 들어 내는 조각가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형체를 갖추지 못한 공허한 공간의 우주를, 아름답고 유용한 창조물로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물든 한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빚어지기 시작하면, 이제 그 삶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름답고 귀한, 영원한 삶이 됩니다.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과 목적을 찾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에 빚어진 새 사람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 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나 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지면,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의 삶은 결코 나 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목적을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서둘지 않지만, 그 걸음을 늦추지도 않습니다.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세상과 우리 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하심이 있음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목적하심 안에서 생활하는 복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에게 삶의 목적도 없습니다. 고전 15:32 어느 신문의 칼럼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현대 사회에서 문 명이 고도로 발달한 것은 사실이다. 문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의문을 푸는 열쇠가 될 뿐만 아니라, 문명으로 인해 가능해진 생활의 편리 함을 향유하게 한다. 하지만 문명이 과연 인간을 얼마나 유익하게 할 것 이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문명은 현상이 왜, 어떻게 나 타나는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문명은 결코, 이러한 인간의 가장 큰 질문,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각각의 사실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가장 중요한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문명의 한계이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회가 비대해질수 록, 인간은 사소한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에는 무관 심하기 쉽다." 아마도 이것은 단순한 문명 비판론이 아닐 것입니다. 문명을 평가하면서, 무조건적인 비판론이나 무조건적인 옹호론은 별로 의미가 없 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속한 사회 환경이 문명의 발달 과 함께 변화하고 있다는 것과, 이러한 변화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에게 삶의 의미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인의 상황은 그렇게 현대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 습니다. 과거에 보았던 전도자의 탄식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1장 2절에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 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절망적인 탄식이 흐르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완전히 헛되다는 뜻을 나타 내는 최상급 표현입니다. 이어지는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무엇이 전도자 의 삶을, 이토록 헛되고 헛되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한때, 전도자가 하나님을 떠나서, 그 삶에 목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은, 목적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끝(end)은 있어도 도 착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end)가 없는 여행과 같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삶에, 이처럼, 끝은 있어도 목적이 없다면, 이것은 얼마나 슬프고 무의미한 일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쁨"이 있는 것은,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살아가기에 충분한 삶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소망"이 있는 것은, 그 삶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삶을 지켜본 사람들에게서 그의 소망 의 이유를 묻는 질문을 받으며, 또 이에 대해 항상 대답할 것이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해 아래에서 바람을 잡으려고 헛된 일에 분주 한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끝을 향해 전진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방법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 14:1-4 인간은 누구나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가를 고민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여러 가지 행복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를 묻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살아가는 방법의 문제가 아 니라, 살아가는 목적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가 아니 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행복에 이르는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제 막, 그리스도를 구주 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시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예수 를 구주로 시인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구원과 함께 오는 즉각적인 변화입니다. 그리고 일회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며, 이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겉모양은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사람의 환경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당장 이 사람의 삶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주님 앞에 영광 돌리며 살겠다는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긴 것입니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 으니, 이 사람의 생각은 이전과 다르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생각이 변하니, 말(言)이 변하고 행동이 변화합니다.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구원과 함께 시작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어야 하는 점진적인 변화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그렇습니다. 시간을 지키며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시계 바 늘을 확인하며 살아가듯이, 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허탄한 욕심(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을 소망 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삶에 얼 마나 큰 행복이 있는지 경험하며 사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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