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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찬양하는 성도 (시14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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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교회 성도중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인사말 앞에 '할렐루야'를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사실을 깊이 알고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깊은 뜻을 알고서 사용한느 사람과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남이 쓰니까 나도 사용한다는 사람과의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할렐루야'는 두 말의 합성어이다. 그중 하나는 할렐(Hallel) 인데 그것은 '찬미하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축제일에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에 이 말을 사용해 왔다 (시 113-118). 또 다른 하나는 '야'이다. 이 두말을 합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이 된다. 이는 용어 그 자체안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명령적 구속력이 함축돼 있다. 즉 '할렐' 이 명령동사로 돼있으며 거기에 '야' 라는 '야훼'가 목적어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를 찬양하라'는 또는 '그를 찬양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라'(시150:3)는 말씀으로도 나타나 있다. 이 낱말은 시편에 24회,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4회 기록돼 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이 말씀인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일진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무엇을 찬양할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찬양 (시104) 했으며, 그 둘째로는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의 선택하신 민족을 애굽의 멸종위기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구출해 내신 그 은총을 찬양(시105.106,135) 하고 있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축복은 다른 신들의 축복보다 훨씬 더 우월하고 큰 것 (시115)임을 찬양했다. 넷째는 이방인들마저도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깨닫고 찬양하게 될 것 (시117) 을 찬양했다. 끝자트로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만민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찬양(시 146-150)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가운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예배드릴 때 성서 낭독후에는 '할렐루야'를 노래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영국의 작곡가 헨덴의 명작 '메시아'의 마지막 절정에는 '할렐루야'를 제창하므로 메시아 의 승리를 찬양하고 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일진대 이 세상 죄악과 고통의 질곡에서 승리하는 비결이요 개선가이기도 하다.
1. 찬양은 삶이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하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존재의 모든 궁극적 이유는 삶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여기서 감사와 찬양이라 함은 말이나 노래로만을 칭하는것이 아니라 전 인격적인 응답을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나에게 이런 것도 주시고 저런 것도 주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에게 이런 불행도 안 일어나고 저런 불행도 안 일어나기 때문일까 이 모든 것도 감사할 내용일찌 모르지만 가장 근본적인 감사는 존재로부터의 감사이다. 하나님께 내 전 존재가 긍정되었음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만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앞에 설 때 나올 수 있는 가장 큰 감사인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예수를 증거했다고 39대의 채찍질을 맞고 빌립보 지하감옥에 갖혀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존재를 지으시고 또한 무한이 용납하신 이유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존재적 감사로부터찬양은 이어지게 된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삶속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여기서 계명이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에 흐르는 정신이자 예수님이 말씀으로 주신 바로 그 계명을 말한다. 다른 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우리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세상을 향하신 성품이 나타남을 말한다. 크리스챤으로서 즉 메시야(그리스도)같은 자로서 세상을 살아감이 바로 우리의 가장 깊고 진실한 찬양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는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눈먼 자에게 다시 봄을,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셨다. 이러한 능력은 그분의 뒤를 따르는 자들에게 분명히 나타나고 있으며 그들은 삶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기서는 우리가 보통 찬양이라 부르는 노래에 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특별히 노래로의 찬양은 앞에서 설명한 감사와 찬양의 내용을 제한적으로 담고 있다. 노래는 삶이고 삶은 노래여야한다. 이것이 일치될 때 우리의 찬양은 진실될 것이다. 이 글에서 이제부터 찬양이라 언급할 때는 노래로의 찬양을 말함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2. 찬양은 신앙고백이며 기도이다. 우리는 아주 기쁜 일이 있을 때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큰 소리로 웃기도 한다. 또한 슬플 때는 엉엉 울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 어떠한 감정이 있으면 구체적인 표현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충동적이고 격렬할 수도 있고, 체계적이고 정적일 수도 있다. 후자의 예로 아주 큰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정성들여 선물을 고르고 포장해서 선물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찬양은 음악이란 구체적인 도구를 사용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개인 또는 공동체의 마음의 체계적인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과 감사 이유가 잘 표현된 가사의 곡을 고르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의 감사 이유라는 말을 좀 더 포괄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신앙 고백이라 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우리 구원의 고백이며 생활의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어린양 찬양'을 외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가 '호산나','할렐루야'의 의미를 모르며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가사의 이해는 이래서 중요하다. 우리 신앙의 고백을 뜻도 모르고 가사가 그러니까, 남들이 다 하니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존재적인 고백인 동시에 성령님안에서 교통하는 성도들과 함께하는 고백이다. 가사 하나하나에 집중함은 이 노래가 진실한 고백이기 위함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에 부합하는 가사를 가진 노래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는 행동은 또한 기도의 의미를 포함한다. 오할레스비의 말을 빌면 기도는 우리의 무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필요를 아뢰거나 신령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력성을고백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리하여 전적인 신뢰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사와 찬양은 우리의 무력성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된 기적의 역사에(구원의 역사) 감사하고 그 감사에 근거한 찬양으로 노래한다. 우리의 무력성을 깊이 인식하는 만큼 우리의 감사도 깊으며 또한 우리의 찬양도 깊다. 우리는 노래하며 기도한다.
3. 더 깊은 찬양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기분과 상태와 관계없이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러므로 찬양으로 침체된 분위기를 회복해보려거나 빈 시간을 때우려는 시도들은 매우 잘못된 모습이다. 찬양은 감정적인 충동 보다는 의지적인 결단으로 드려져야한다. 물론 감정을 배제시키자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찬양은 감정에 좌우되기 쉬우므로 충분히 조심해야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찬양은 우리의 생활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이 말은 우리의 이웃과 함께하는 찬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개인의 신앙을 노래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공동체가 함께하는 찬양은 공동체의 지체들과 공동체 밖의 지체들, 특히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찬양이어야한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찬양의 바닥또한 바로 그 자리여야 한다. 또한 우리의 찬양은 종말을 노래한다. 오실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은 우리 신앙의 근간이되며 다람쥐통같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기쁨과 기대를 가지고 살아갈 힘이다. 종말을 향한 마음이 흐려질 때 우리의 영성은 무뎌지고 말 것이다. 성도의 수고와 고난의 눈물이 딴여질 그 날, 모든 전쟁과 싸움이 멈춰질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할 그 날, 위풍당당하던 악한 자들이 수치를 당하고 고난받던 의인이 높이들릴 그 날, 바로 이 날을 향한 감격스럽고 가슴벅차는 기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성도들의 특권이다. 무엇보다도 가사에 집중되어져야한다. 가사가 지어지게된 성경구절을 묵상하거나 가사에 포함된 중요한 단어들을(보혈,십자가,어린양.)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찬양은 어떠한 테크닉이나 기술이 아니다. 진실된 마음의 고백이다. 우리의 마음이 진실되지 않고 여러가지 관념적인 고집들에 쌓여 있을 때 우리의 찬양은 참으로 교만한 소음일 것이다. 우리의 삶과 노래를 통해 영광받으실 하나님께 진실된 감사와 찬양을드리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 '고전 8:1'
1.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는 육체적인 것을 의지 않는다. 앞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1'방백들을 의지말며 여기서 방백들은 지배계급을 뜻한다. 통치자 권세있는 자. 이들은 육체적으로 조그만 한 도움이 있을지라도 더 자세하게 나아가면 영적인것과 모든 것에 무능하다는 것을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 구원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 영혼 을 구원 할수 없는자을 의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무익하다는 것이다.
2'인생도 의지말라 “도움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돌아가서(3,4)” 인간은 본질적으로 남을 도울 능력이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죄의 결과로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로 전략했기 때문이다. 이기심 때문에 모든 것을 나에 대해 맞추다보면 모든 문제가 일어나게 될 수 밖에 업다. 그러나 성령님의 충만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3'그 도모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직역하게되면 “그의 생각(계획)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계획했던 것이 그리고 목적햇던 것이 모두가 세상 떠나는 날 모든 것이 허무하게 된다.
2.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인간의 모든 것이 무로 끝나게 된 이 때 구원받은 사람은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 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점이라고 본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게된 성도들은 모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1'모든 것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가 진정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2'모든 것을 하나님께 소만을 둔 성도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심 오늘날 서도들은 하나님만이 참된 보호자요,인도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고 피난처와 산성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에 하나님이 도우시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말씀을 살펴보고 있다.
1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하나님의 창조하심은 통치하심 그리고 하나님은 연약한 성도들의 기도을 들어주심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보호자가되심을 보여 주고 있다.
2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하나님이 영원한 진리를지키시는 것을 보이신다.
3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직역하면 “눌린자를 위하여 심판을 행하시다”
4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영적인 만족을 허락하심 5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영적인 압박감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자들의 구원을 암시하고 있다. 6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7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기서 비굴한자는 꿇은 자에서 “염려,근심,고통,혹은 재앙으로 인해 그 마음이 눌리고 구부러진 자를 가리킨다. 8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전심 전력하는 자을 의인이라고 한다. ⑨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10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11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여기서 길은 “계획,음모”ㄹ르 뜻하며, “굽게하시도다”는 구부리다,왜곡시키다,전복시키다, 결국은 악인의 악한 계획은 음모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통치만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씀하고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완벽한 교제를 이루는 풍요로운 영원을 내다보며 시온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며 우리와 함께하여 주심을 감사하며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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