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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119:65-72)

본문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고난 당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시편 기자는 유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깊은 뜻이 있기에 고난당하는 것을 유익하게 보았을까 요. 사실 고난이 고난 그 자체로 끝나 버린다면 유익할 것은 없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인하여 새롭고도 좋은 것을 얻게 되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꽃을 모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을 겪지 않고는 귀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말하기를 "불은 금의 시금석이요, 역경은 강한 인간의 시금석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런 고난이라면 당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은 진리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이다"라고 한 바이런의 말같 이 그 고난은 오히려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은 유익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된다고 한다면 고난이 무익한 것만은 아 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조소 속에서 방주를 지은 노아는 고난을 당하며 지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주를 짓는 고난 때문에 그들은 물의 심판을 면할 수 있었 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말로 표현키 어려운 고난이었습니다. 그 고난을 초인적인 인내로 극복하였는데, 그 결과는 갑절의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너무 쓰라린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만인을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대로 그의 피 흘림이 고통이 있었으므로 우리가 평안을 얻게 된 것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인간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욥기 21장 25절에 "어떤 사람은 죽도록 마음에 고통을 한다"고 말씀한 것같 이 인생 삶의 과정에서 고난의 쓴 맛을 안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이 고난을 좋아서 일부러 받아 들이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 싫어하빈다. 싫어하면서도 당하게 되니 여기에 문제점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다른 면으로 해결책을 찾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시편기자를 통하여 하신 해결의 말씀이 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 고난이 유익이 된다" 참 들어 볼만한 말씀이요, 고난을 당하고 있는 현장에 서 먹구름 사이로 빛을 본듯 희망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중에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그 고난을 잘 승화하여 유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고난은 범죄의 길을 막아줌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하다가 즉 범죄의 길에 있다가 고난의 채찍을 맞음으로 깨닫 고 주의 말씀을 지켜 바로 살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은 육의 낙을 즐기기를 원합니다. 이 일이 지나치면 신령한 생활을 등 지게 되고 육의 욕구대로 따라 살다가 타락하게 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 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하신 말씀같이 육신의 생각 만을 따라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채찍을 통하여 정신을 가다듬게 하십니다. 다윗은 인간의 육을 따라 한가하게 살다가 밧세바를 취하는 범죄를 하였습니다. 그후 밧세바가 다윗을 통하여 낳은 아이를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심히 앓아 죽었습니다 (삼하 12:15-18).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이 육신의 낙으 로만 기울어질때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통하여서라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심이니라"(고후 12:7)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받은 계시만 큰 것이 아니라 학식도 가문도 혈통도 다 자랑할 수 있는 바울이였기 에 그에게 찌르는 가시 즉 고난이 없었더라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비뚤어져 갈 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빈다. 매를 맞아 고통을 느끼는 것을 볼 때 괴롭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고통을 통 하여서 바로잡아지기만 한다면 채찍을 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업이 너무나 잘 되어가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신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귀하기 보다는 돈이 더 귀하게 보여지면 그 사업의 실패를 통하여 서라도 깨닫게 어려움을 당하게 함으로 깨닫게 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다가 큰 물 고기 뱃속에 들어갔는데 그 고통 중에서 기도하기를 "내가 받은 고난을 인 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 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라고 했습니다. 이 요나의 기도는 인간의 잘못된 길을 고난으로 막아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깨닫게 회개하며 드린 기도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만 한다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됩니다. 고난이 더 큰 형벌을 받을만한 일을 막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면 분명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고난이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게기가 된다면 유익한 것입니다. 안일무사하고 평범한 생활속에 사는 극적인 새 역사가 시작되지 못하는 것 입니다. 어떤 자극이 될만한 사건의 발생으로 인하여 새 각오와 새 출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 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 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자를 다시 살리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 라"라고 바울이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극심한 고난 을 받았을 때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참 신앙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고난 그 자체로 끝나버리는 비참한 결과가 아니라 고난으로 인하여 보다 더 좋은 것이 새롭게 전개되는 것이기에 고난 당하는 일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영광을 한몸에 받았떤 요셉은 그 영광이 오기 전에 무수한 고난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 땅으로 팔 려 갔으며 보디발의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런 어려운 고난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며, 이를 악물고 기어이 성공해 보려는 결심이 그의 가슴을 뛰게 했을 것입니다. 가 령 요셉이 부모슬하에서 사랑만 받고 형들의 귀여움만 받으며 손톱하나 다 치지 않고 편안하게 자랐다면, 그에게 애굽의 총리대신의 영광은 오지 않았 을 것입니다. 성서에 나타난 인물 중에는 이와 같은 경우의 사람들이 얼마 든지 있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경우의 인물들을 맣다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대제(Constantine,The Great 306-337)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그가 개심하여 박해하던 기독교를 자유화 하고 권장함으로 기독교 역사를 크게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연히 된 것은 아닙니다. 그당시 콘스탄틴 대제는 다른 여러 제후들과 전쟁을 하느라고 지쳐 있습니다.큰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또 싸움터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때는 312년 10 월 27일 뮬비인(Mulvian)이란 다리를 지나고 있을 때 " 십자가와 이 표식으 로 이겨라"란 말씀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이에 깨달은 그는 곧 십자가의 깃발을 만들어 앞세우고 그 싸움터에 나가 싸워 대승을 거두었 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313년에 기독교 자유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하면 콘스탄틴 대제에게 부딪쳤던 고난이 기독교 역사 속에 크나 큰 유익을 가져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분이 여기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 시오. 그 고난으로 인하여 새 역사, 새 믿음, 새 축복을 받은 계기가 될 것 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번 고난 당하면 한 번 더 기도하고 두번 고난당하 면 두 번 더 기도하십시오. 믿음으로 그 고난을 이기십시오. 그리하면 반드 시 그 곤고한 일들로 인하여 새 역사의 장이 펼쳐질 것입니다.
셋째,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다면 유익한 것입니다. 찬송중에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 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나가기 원합니다 "란 가사는 의미가 참 깊습니다. 내가 고생될 때 더욱 주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빈다. 어린아 이가 몸이 괴로울 때 엄마를 더 찾게되는 것입니다. 객지에 있는 사람들이 일이 잘 되어가고 건강할 때는 부모생각 안하다가 일의 낭패를 당하고 몸이 아파 누었을 때 몹시 고향생각이 나고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원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탕자가 부모님 집으로 돌아오게 된 동기가 어디있었습니까 돈이 떨어지니 친구도 없어지고 가난과 고독만 남게 되었 습니다. 이런 설움이 어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탕자는 이 배 고픈 설움을 당하여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할 정도로 고난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아버지께로 돌아갈 각오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집에 돌아오므로 모든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탕자의 경우를 보면 분명 고난당한 것이 유익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집회에 가서 어느 교인의 신앙 간증을 들었습니다. 40세 갓 넘은 장년이 사업에 실패를 하고 자살할 장소를 찾아 다니다가 잃 어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고, 신앙을 복구함으로 사업도 복구하게 되 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깨닫기를 사업이 계속 번창하게 잘되어 갔더 라면 하나님과는 영영 멀어질뻔 하였으리라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되어 간 다고 다 신앙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만약에 사업이 잘 되어가므로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면 그 사업은 차라리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된다면 신앙의 바탕 위에서 사업도 재건 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성도들과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 하나님을 멀리 할 때는 여러 방법으로 가깝게 되도록 역사합니다. 사랑 으로 어루만지시기도 하시고 채찍을 가하여서 따끔하니 맛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환난을 만났을 때 주님의 품속 깊숙히 찾아 안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보면 손에 치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 낸다고 하셨습니다. 귀질을 할 때 보면 바람이 일고 바람이 일면 알곡은 귀를 잡은 사람 앞 으로 굴러 들어오고 쭉정이는 귀 밖으로 날라가 버립니다. 이 세상을 살아 가는 동안 환난의 바람이 볼 때 주님께 더욱 더 가까이 가는 기회를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 빈다. 결론 야고보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약 5:13) 하였습니다. 고난당하는 성도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야고보의 권고대로 하면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유익을 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9:15)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 셔서 우리들의 고난을 유익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직면해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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