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 (시126:6)
본문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이 저 북방 바벧론에 잡 혀가서 70년의 포로생활을 끝마치고 자기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서 감격과 기쁨에 넘쳐서 읊은 노래 중 한 구절입니다. 이 본문의 뜻은 그 들이 지금 얻은 자유와 해방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또한 그들이 그처럼 단을 거두게 된 것은 눈물로 씨를 뿌린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뿌린 눈물,에스겔이 뿌린 눈물의 씨,다니엘이 뿌린 눈물, 비단 이것들만이 아닌 줄 압니다. 에스라,느헤미야,스룹바벧 같은 자들은 70년의 기간동안 많은 눈물의 씨를 뿌린 줄 압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 로다." 이 말씀 중에서 특별히 '울며'라는 말과 '씨를 뿌리러 나가는'이란 말에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을 묵상함으로 이 시간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슬픔 후의 기쁨 첫재로 '울며'라는 이 말씀은 슬픔을 의미합니다. 또한 애통하는 것을 의 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본문도 애통하며 슬퍼하는 자가 정녕(반드시)복을 받고 기쁨의 단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여기의 애통과 슬픔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말하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또는 근원적인 의미의 영적 슬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 린도후서 7장10절에 보면"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고 세상 근심은 사랑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말한 눈물은 세상 근심에서 오는 눈물이 아니라,하나님의 뜻대 로 하는 근심과 슬픔에서 오는 눈물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망했을 때 무너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인 슬픔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이런 정치적 슬픔이 자기들의 죄와 허물을 슬퍼하는 영적눈물로 변했을 때 그들에게는 큰 축복이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조국에 있어서도 애국자의 눈물은 많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민족의 죄와 허물을 슬퍼하는 눈물을 많이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 복을 받지 못하는 줄 압니다. "여호와여 돌아보시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 서 마음이 괴롭고 번뇌하오니 나의 패역함이 심히 큼이니이다"(얘1:20). 이러한 눈물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먼저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슬퍼하며 우는 그런 사람이 복을 받고 기쁨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포로가 된 자기 동족을 향해 자기만 운 것이 아니라 같이 울 것을 호소했습니다. "처녀 시온아…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 네 어린 자녀 의 생명을 통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애2:18). 이것은 정치적인 눈물이 아닙니다. 죄를 슬퍼하는 이러한 영적 애통이 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걔인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슬피 울며 부 르짖는 세리의 눈물을 압니다. 감히 눈을 들어 위를 보지 못하고 눈물을 흘 리며 부르짖는 말은 "오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 소이다"라는 말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복 도 주셨습니다.
이러한 영적 애통으로 오는 눈물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통회의 눈물도 압니다. 베드로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를 사랑하던 자요,죽어도 예수를 따를 것을 맹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께서 악한 무리에게 끌려갈 때에 그는 멀리 뒤따라 갔습니다. 여 종이 나와서 "너도 예수를 따르던 자 중 한사람이 아니냐"고 물을 때,그는 세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야 예수의 말씀,즉"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 서 밖에 나가 슬피 울었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부 인하는 죄를 지었지만 통회의 눈물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고 새은사를 받 아서 오순절의 대사도가 된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저녁을 잡수실 때, 그 동리에서 가장 추악한 어떤 여자가 따라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눈 물을 흘리고 자기의 머리털을 내려서 예수의 발에 흘린 눈물을 닦았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그녀를 책명했고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몬을 타일렀고 그 여자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시편 34편1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죄사함이 있고,눈물이 있는 곳에 기쁨의 단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에 예수께서 슬피울며 따라오는 부녀 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은 "나를 향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입니다. 내 허물과 내 자녀의 죄를 위하여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 에게 복이 있습니다. 자식의 죄를 위하여 15년간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던 모니카의 눈물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드디어 기쁨의 단을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슬픔에 동참하는 기쁨 남의 눈물을 보고 같이 슬퍼하는 그런 사람,그런 교회는 복을 받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마리아가 울고 마르다가 울고 여러 여자들이 같이 울 때에 예수께서도 우셨 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주님은 억압과 착취로 헐벗고 굶주린 불쌍한 5천 명이 광야에서 헤맬 때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하시며 이적을 베푸 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두 눈에 어린 뜨거운 동정의 눈물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 교인들에게 "우는자와 같이 울라"고 간곡 히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고요히 생각할 때에,우리나라와 같이 골짜기마다 눈물로 사무친 나라도 드문 줄 압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눈물, 부모 잃은 고아들의 눈물,남편 잃은 아내들의 눈물, 실업자의 눈물, 헐벗고 굶주린 자의 눈물,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외로운 자들의 눈물. 이모양 저 모양의 슬픈 눈물들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강수와 같이 사무쳐 흐르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 닌 줄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은 눈물의 골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점점 눈물이 메말라 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백성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같이 우는 민족의 지도자는 과연 몇이나 됩니까 참정치가가 몇이나 됩니까 또 슬픔을 겪는 자와 같이 애통하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됩니까 예수께서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 살렘아"하시며 슬피 우셨건만,오늘 죄악의 도성을 향하여 눈물 흘리는 신도 들은 과연 몇이나 됩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는 눈물 없는 사 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눈물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만일 이것이 더욱 심화된다면 우리 의 사회나 교회는 복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와 우리 교회에서 기쁨의 단은 점차 사라지고,곳곳에 불평과 불만과 불화의 넝쿨이 자라나는 것 같습니다. 기쁨의 추수,기쁨의 단은 눈물 흘리는 자의 소유가 됩니다. 애통하는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남의 눈물을 내 눈물로 알고,남의 설움을 나의 설움으로 하는 그런 민족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제 눈물 을 아는 민족,눈물을 아는 신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눈물을 배우는 자 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의 눈물을 배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들의 눈 물도 계승해야 합니다. 눈물의 능력 사도바울의 위대한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의 위대한 점은 그의 훌륭 한 지식에 또는 그의 위대한 능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일깨 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않고 눈물로 각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20:31).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3년이나 에베소 한 교회를 위해서 흘린 그 눈물에 그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의 눈물,그것은 진실로 그의 능력의 원천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진실로 하나님을 움직인다고 가르칩니다. "너는(이사야)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사38:5). 히스기야왕은 자기가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선고를 받았을 때 벽 을 마주대고 슬피 울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생각한 눈물인 줄 압니다. 즉 앗수르의 산헤립의 대군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겼으나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의 마음이 잠시 교만해졌던 것을 슬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말하기를 "히스기야는 그때까지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를 인계할 후계자가 없음을 슬퍼하는 눈물"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 닌 줄 압니다. 자기가 죽은 후에 자기가 남긴 죄 때문에 어지러워질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민족의 멸망을 술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축복을 받 아 생명이 구원 되었고,그의 후계자 아들 므낫세를 두었고,민족을 부흥케 했습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은 자기에게만 복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나라 전체에 기쁨을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눈물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한 줄 압니다. 자기의 죄를 슬퍼하는 눈물,자기의 민족의 멸망을 슬퍼하는 눈물,이러한 눈물을 회복할 때에 우리에게 기쁨의 추수가 있게 될 것이며,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눈물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이 눈물은 저절로 생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압니다. "내가 다시 여호와를 선포하지 않으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 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그의 이 눈물이 어디서 생겼는지 아십니까 간절한 기도가 없는 곳 에 눈물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눈물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어찌 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당 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렘9:1).우리는 이제 우리의 눈물 없음을 회개하고 이 눈물을 간구할 때가 된 줄 압니다. 씨뿌리는 열심 끝으로,본문을 자세히 보면 눈물만 흘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가 기쁨의 단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눈물도 필요하지만 또한 씨를 뿌리는 열심도 필요하다는 것 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게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눈물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손이 뻗쳐 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씨를 뿌리러 나아가라. 이것은 시편의 교훈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마28:19,막16:15).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오늘날 우리 신도들이 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치 못함을 심히 유감입니다. 교회에 충성하고,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는 비교적 모범적인 신자인데도 씨 를 뿌리는 전도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어떤 성도는 기도 하기를 "제가 경건한 생활을 하게 하소서. 남이 저의 일상생활을 보고 믿을 수 있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언행이 반드시 일치되지 못하는 오늘 의 교인들에게 필요한 기도인 줄 압니다. 그렇게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전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예수께서 도 분명히 가르치시기를 "너희가 '가서'내 증인이 되라.너희는 열방에'다 니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씨를 뿌리러 나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가 정녕 기쁨의 단을 거둡니다. 누가복음10장 17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파송하신 70인들이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으 로 귀신들도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다시말하면,씨를 뿌리러 나가는 전도자의 이름은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뿐 아니라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다니엘서 12장4절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하늘에서 빛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씨를 뿌리는 자,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책에 기록될 뿐 아니라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내 가족 내민족 내 나라를 위해서 진심으로 울어봅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달려가 복음의 씨를 뿌려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한 그리고 놀 라운 기쁨의 단을 거둘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한 눈물은 세상 근심에서 오는 눈물이 아니라,하나님의 뜻대 로 하는 근심과 슬픔에서 오는 눈물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망했을 때 무너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인 슬픔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이런 정치적 슬픔이 자기들의 죄와 허물을 슬퍼하는 영적눈물로 변했을 때 그들에게는 큰 축복이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 조국에 있어서도 애국자의 눈물은 많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민족의 죄와 허물을 슬퍼하는 눈물을 많이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 복을 받지 못하는 줄 압니다. "여호와여 돌아보시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 서 마음이 괴롭고 번뇌하오니 나의 패역함이 심히 큼이니이다"(얘1:20). 이러한 눈물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먼저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슬퍼하며 우는 그런 사람이 복을 받고 기쁨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포로가 된 자기 동족을 향해 자기만 운 것이 아니라 같이 울 것을 호소했습니다. "처녀 시온아…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 네 어린 자녀 의 생명을 통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애2:18). 이것은 정치적인 눈물이 아닙니다. 죄를 슬퍼하는 이러한 영적 애통이 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걔인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슬피 울며 부 르짖는 세리의 눈물을 압니다. 감히 눈을 들어 위를 보지 못하고 눈물을 흘 리며 부르짖는 말은 "오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 소이다"라는 말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복 도 주셨습니다.
이러한 영적 애통으로 오는 눈물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통회의 눈물도 압니다. 베드로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를 사랑하던 자요,죽어도 예수를 따를 것을 맹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께서 악한 무리에게 끌려갈 때에 그는 멀리 뒤따라 갔습니다. 여 종이 나와서 "너도 예수를 따르던 자 중 한사람이 아니냐"고 물을 때,그는 세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야 예수의 말씀,즉"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 서 밖에 나가 슬피 울었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부 인하는 죄를 지었지만 통회의 눈물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고 새은사를 받 아서 오순절의 대사도가 된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저녁을 잡수실 때, 그 동리에서 가장 추악한 어떤 여자가 따라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눈 물을 흘리고 자기의 머리털을 내려서 예수의 발에 흘린 눈물을 닦았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그녀를 책명했고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몬을 타일렀고 그 여자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시편 34편1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 죄사함이 있고,눈물이 있는 곳에 기쁨의 단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에 예수께서 슬피울며 따라오는 부녀 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은 "나를 향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입니다. 내 허물과 내 자녀의 죄를 위하여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 에게 복이 있습니다. 자식의 죄를 위하여 15년간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던 모니카의 눈물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드디어 기쁨의 단을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슬픔에 동참하는 기쁨 남의 눈물을 보고 같이 슬퍼하는 그런 사람,그런 교회는 복을 받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마리아가 울고 마르다가 울고 여러 여자들이 같이 울 때에 예수께서도 우셨 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주님은 억압과 착취로 헐벗고 굶주린 불쌍한 5천 명이 광야에서 헤맬 때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하시며 이적을 베푸 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두 눈에 어린 뜨거운 동정의 눈물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 교인들에게 "우는자와 같이 울라"고 간곡 히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고요히 생각할 때에,우리나라와 같이 골짜기마다 눈물로 사무친 나라도 드문 줄 압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눈물, 부모 잃은 고아들의 눈물,남편 잃은 아내들의 눈물, 실업자의 눈물, 헐벗고 굶주린 자의 눈물,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외로운 자들의 눈물. 이모양 저 모양의 슬픈 눈물들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강수와 같이 사무쳐 흐르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 닌 줄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은 눈물의 골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점점 눈물이 메말라 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백성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같이 우는 민족의 지도자는 과연 몇이나 됩니까 참정치가가 몇이나 됩니까 또 슬픔을 겪는 자와 같이 애통하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됩니까 예수께서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 살렘아"하시며 슬피 우셨건만,오늘 죄악의 도성을 향하여 눈물 흘리는 신도 들은 과연 몇이나 됩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는 눈물 없는 사 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눈물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만일 이것이 더욱 심화된다면 우리 의 사회나 교회는 복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와 우리 교회에서 기쁨의 단은 점차 사라지고,곳곳에 불평과 불만과 불화의 넝쿨이 자라나는 것 같습니다. 기쁨의 추수,기쁨의 단은 눈물 흘리는 자의 소유가 됩니다. 애통하는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남의 눈물을 내 눈물로 알고,남의 설움을 나의 설움으로 하는 그런 민족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제 눈물 을 아는 민족,눈물을 아는 신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눈물을 배우는 자 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의 눈물을 배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들의 눈 물도 계승해야 합니다. 눈물의 능력 사도바울의 위대한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의 위대한 점은 그의 훌륭 한 지식에 또는 그의 위대한 능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일깨 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않고 눈물로 각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20:31).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3년이나 에베소 한 교회를 위해서 흘린 그 눈물에 그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의 눈물,그것은 진실로 그의 능력의 원천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진실로 하나님을 움직인다고 가르칩니다. "너는(이사야)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사38:5). 히스기야왕은 자기가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선고를 받았을 때 벽 을 마주대고 슬피 울었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생각한 눈물인 줄 압니다. 즉 앗수르의 산헤립의 대군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겼으나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의 마음이 잠시 교만해졌던 것을 슬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말하기를 "히스기야는 그때까지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를 인계할 후계자가 없음을 슬퍼하는 눈물"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 닌 줄 압니다. 자기가 죽은 후에 자기가 남긴 죄 때문에 어지러워질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민족의 멸망을 술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축복을 받 아 생명이 구원 되었고,그의 후계자 아들 므낫세를 두었고,민족을 부흥케 했습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은 자기에게만 복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나라 전체에 기쁨을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눈물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한 줄 압니다. 자기의 죄를 슬퍼하는 눈물,자기의 민족의 멸망을 슬퍼하는 눈물,이러한 눈물을 회복할 때에 우리에게 기쁨의 추수가 있게 될 것이며,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눈물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이 눈물은 저절로 생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압니다. "내가 다시 여호와를 선포하지 않으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 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그의 이 눈물이 어디서 생겼는지 아십니까 간절한 기도가 없는 곳 에 눈물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눈물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어찌 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당 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렘9:1).우리는 이제 우리의 눈물 없음을 회개하고 이 눈물을 간구할 때가 된 줄 압니다. 씨뿌리는 열심 끝으로,본문을 자세히 보면 눈물만 흘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가 기쁨의 단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눈물도 필요하지만 또한 씨를 뿌리는 열심도 필요하다는 것 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게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눈물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손이 뻗쳐 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씨를 뿌리러 나아가라. 이것은 시편의 교훈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마28:19,막16:15).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오늘날 우리 신도들이 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치 못함을 심히 유감입니다. 교회에 충성하고,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는 비교적 모범적인 신자인데도 씨 를 뿌리는 전도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어떤 성도는 기도 하기를 "제가 경건한 생활을 하게 하소서. 남이 저의 일상생활을 보고 믿을 수 있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언행이 반드시 일치되지 못하는 오늘 의 교인들에게 필요한 기도인 줄 압니다. 그렇게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전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예수께서 도 분명히 가르치시기를 "너희가 '가서'내 증인이 되라.너희는 열방에'다 니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씨를 뿌리러 나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가 정녕 기쁨의 단을 거둡니다. 누가복음10장 17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파송하신 70인들이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으 로 귀신들도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다시말하면,씨를 뿌리러 나가는 전도자의 이름은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뿐 아니라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다니엘서 12장4절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하늘에서 빛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씨를 뿌리는 자,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책에 기록될 뿐 아니라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내 가족 내민족 내 나라를 위해서 진심으로 울어봅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달려가 복음의 씨를 뿌려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한 그리고 놀 라운 기쁨의 단을 거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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