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남성상 (시103:13-18)
본문
오늘 많은 남자와 아버지들이 회사의 구조조정, 감량, 리엔지니어링으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고,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직업은 남자의 자존심과 정체감(Identity)에 직결되어 왔습니다. 그 사람의 일하는 직업이 그 사람의 성이 되어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서양사람들의 이름가운데 Miller 라는 성이 있는데, 이것은 방앗간에서 일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Smith란 성은 대장간에서 일하는 사람이란 뜻이며, Taylor란 성은 양복점에서 일하는 사람, Shoemaker는 구두를 만드는 사람, Joiner란 성은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는 그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가 누구냐가 결정되어 왔습니다. 직업이 그 사람의 정체감을 형성해온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남자가 직장이나 직업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감, 자존감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체감을 잃어버린 남자나 아버지는 스스로 무용한 사람, 인생의 패배라로 생각하며 남자로서의 긍지에 치명적인 상처를 가져다 주게됩니다. 어느 실직한 남자는 차마 이사실을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출근시간에 집을 나셨습니다. 낮에는 도서관에서 잡지등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면 집에 돌오와 하루의 일과를 그럴듯하게 꾸며대었습니다. 얼마 안되는 퇴직금으로 몇 달을 버티었으나, 퇴직금마져 바닥이 나버리자, 그는 자살을 해보리고 말았습니다. 가정의 재정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실직했다는 사실, 남자의 자존감을 잃어버린 실직자로서의 열등의식을 그는 스스로 용납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 남성과 크리스챤 어버지들은 자신의 정체감과 값어치를 직업에 의해 결정케해서는 안될것입니다. 나의 정체감과 자존감을 내가 하는 일과 직업에 의해 결정되게 한다면, 내가 조기은퇴를 당하거나, 실직하게 될 때, 나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 인생의 패배자가 된것입니다. 우리는 남성으로서의 정체감을 하나님과의 신앙의 관계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구원받은자로서의 정체감,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정체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도로서의 정체감과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 사명감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정체감, 자존감, 이미지를 세상의 직업과 일을 토대로 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구원의 반서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토대로 해서 남자로서의 정체감, 자존감, 이미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사랑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에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자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며,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판단하며, 바라보시며, 평가하느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칭찬하실것이고 이것만이 나에게 관심거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감이 만들어지게 해서는 아니될것입니다. 나의 정체감과 자존감이 나의 직업이나 하고있는 세상적인 일에 근거해서는 아니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고 했는데 "만든다"는 말을 헬라어로 "포이에이마"란 단어인데, 이 단어는 매우 귀한 예술작품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Poem 한국말로는 "시"라는 말이 유래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시"와도 같은 작품, 그 분의 걸작, 그분의 귀한 예술작품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이후 죄악으로 가득찬 사회속에 살고 있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불치의 병인 암에 걸려 고통당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주 모를 가능성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회사가 언제 파산하게 되어 실직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직업이란 잃어버릴수도 있으며, 또 직업이 얻어질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크리스챤 남성들과 아버지들은 자신의 정체감, 자존감을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나의 직업, 또 언젠가는 물러서고 아버지들은 자신의 정체감, 자존감을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나의 직업, 또 언젠가는 물러서고 은퇴해야만 하는 나의 직장에 근거하지 말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위에 우리의 정체감과 자존감이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남자들은 강해야 한다는 남성의 이미지와 정체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남자는 강하기에 눈물을 흘려도 안되며, 남자는 실패를 인정해도 안되고, 약한 모습을 드러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야성적인 카우보이, 근육이 매우 발달한 운동선수, 거치른 오토바이족, 타프카이의 이미지를 풍기는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투우드 등이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부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자기의 약한 모습을 숨기고, 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음으로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많은 질환을 갖게 된다고 의학자들은 말합니다. James Harrison 이란 의학자는 남자들이 울고 싶을 때, 나는 남자이기에 울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감정을 억제하기에 여자들보다 위궤양, 고혈압, 위장병 등을 더 많이 앓으며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단명한다고 연구결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남성다움의 모습을 세상의 멀티미디어가 제시하는 모델에게서가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할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장 남성다운 남성이라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는 남성의 강한 모습이 거칠고 무례한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온유함과 겸손, 부드러움, 용서와 사랑과 은혜가운데서 남성의 강한 모습을 발견해야 할것입니다.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며 독선과 교만으로 가득차있는 종교인들을 향하여는 강한 남성답게 그들을 책망하고 있으십니다. 반면에 연약한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신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축복해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또한 그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무덤가에서 우셨습니다. 회개할줄을 모르는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은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고 지쳐서 기가 죽어있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섰습니다.
남성의 강한 모습은 거칠고 무례하고 폭력적인데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겸손하고 온유하며 용서하시며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된 남성상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국가의 경제가 경제위기의 긴급지원과 통제를 받고 있는 위기 상황속에서 이땅의 남성들, 특히 아버지들의 기가 죽고 고개를 수그리며,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었습니다. 아버지가 위축되고 낙심하고 기가 죽음으로 가정의 모든 식구들은 같이 낙심하고 용기를 잃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속에서 우리 크리스찬 아버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과 모습을 더욱더 닮기를 원해야겠습니다. 예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여러 가지 속성, 성품, 모습에 대해 수많은 단어들로 나타내지만 크게 나누어 몇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첫번째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움과 죄가운데 거하며 거기서 멸망당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그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니다. 로마서 5:8절에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아무조건없이 받아주시고 용납해주십니다. 내가 예수안에서 그의 자녀가 되었기에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용납해주십니다. 크리스찬 남성으로서 특히 가정의 아버지로서 나는 하늘아버지를 본받아 나의 자녀들과 아내를 나의 직업보다, 나의 취미생활보다, 나의 친구들보다, 교회의 직분보다, 사회적인 위치보다 더 중요시 여길수 있기를 원해야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고 머리가 명석하고 재능이 많아서가 아니라, 단지 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기를 원해야겠습니다. 몇 년전에 Time 주간 시사잡지에 빌리그래함 목사와 그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에 관한 기사가 커버스토리로 다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은 The Prodigal Son 이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와 그의 아내 룻 그래함은 미국인들은 물론 온 세계의 사람들이 존경하는 훌륭한 크리스챤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빌리 그래함의 목사의 큰 아들 프랭클린은 열두살때부터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독한 위스키를 마시고 마약에도 손을 대었으며 총기를 들고 다니다가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으며 오토바이로 폭주를 하다 잡히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망이 없는 청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 목사는 인내하고 사랑과 용납으로 대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어느날 빌리 그래함목사는 아들을 앉혀놓고 "너 언제까지 이러한 삶을 살려고 하느냐고" 타이르자 아버지 그 지겨운 설교는 그만하세요라고 아들은 말하며 집을 나갔습니다. 그후 프랭클린은 계속하여 방랑자의 삶을 살다가 이스라엘까지 오게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어느 값싼 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방안의 케비넷의 설합속에서 성경책 한권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성경책을 펼쳐보니 로마서 8:1절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느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프랭클린은 방황하며 살고 있는 자기와 같은 사람도 하나님은 사랑하시며 용납해주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지금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어 빌리그래함 전도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는 자기 아버지를 닮은 모습과 음성과 제스쳐로 복음을 증거하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탕자와 같은 아들을 정죄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고 참으며 기도하며 계속하여 사랑하고 용납하는 자세를 보여주었기에 그 아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불순종하거나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슬퍼하시며 아파하실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의 무한하신 사랑을 켤코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처럼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을 베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우리 남성들, 특히 아버지가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로, 우리 크리스챤 남자들은 자녀들의 피난처와 항구가 되어주여야 할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가 안전하게 거처할 에덴 동산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가운데서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18:1-2절에 보면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시편36:7절에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46:7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융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이도다.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며 위기나 큰 환란이나 산이 넘어지고 바다가 흔들려도 우리는 하늘아버지의 피난처가 있으니 두려울것이 없다고 시편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아내는 악한 세상에서 위협을 느끼고 두려운 일을 만날때가 많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산성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신 것처럼 우리 아버지들이 그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의 자녀들은 누군가가 뒤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변호하며 그들을 위험에서 막아주고 붙들어주는 자가 있는 것을 알게되면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질 수가 있게됩니다. 에이미라는 30대의 여자가 5살때의 일이었습니다. 자기방에서 잠을 자다가 창밖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크게 울려댐으로 밤 12시쯤 잠을 깨었습니다. 칠흑같은 어두움과 무서운 천둥소리에 크게 놀라 자기방을 뛰쳐나와 아빠와 엄마가 자는 침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에이미는 부모의 침대곁에서 엄마가 깨기를 바라며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깨기전에 아빠가 먼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에이미, 너 거기서 뭘하는거냐 네 방으로 돌아가지 못해! 라고 아빠는 단잠을 깬 것이 화가나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빠 난 무서워요"라고 에이미는 말하며 더 크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막잠에서 깨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 내말이 안들리니" 아빠가 고함을 질렀고 에이미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렸습니다. "네방으로 돌아가란 말이야, 다시는 나를 귀찮게 하지말아라"고 아버지가 성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에이미는 부모의 침실에서 나와 화장실에 들어가 불을 켜고 문을 걸어 잠근체 밤새껏 화장실에서 울며 천둥이 칠때마다 떨며 그날밤을 새웠다고 합니다. 에이미는 그후 10살 때까지 번개가 치고 천둥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때에는 무서워서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불을 켜고 문을 걸어잠구고 벌벌떨며 새웠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후 청소년이 되면서 번개와 천둥벼락에 대한 무서움은 국복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위로와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아버지가 피난처가 되지 못한 결과로 많은 심리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는 안식처와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위협을 느끼고 실망을 당할때에는 피할 피난처가 필요한 것입니다. 폭풍으로부터 도피처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넓은 가슴속에서 우리가 안식할수 있는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몸안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해야겠습니다.
셋째로 우리를 사랑과 말씀과 본이 되는 삶으로 자녀들을 훈계하며 양육하는 아버지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며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훈육하시며 터가 되어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의 자녀가 잘못된 길을 계속걸어갈 때 우리가 회개하도록 말씀으로 훈계하시며 책망하시며 징계하시기도 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그들과의 관계성속에서 좋은 신앙의 길잡이 안내자 멘터가되어야 되겠고 특별히 가정에서 아버지는 말로서 더 이상 자녀를 교육시킬수 없습니다. 삶으로서 좋은 자녀들의 스승으로서 멘터로서 그들의 삶을 잘 이끌어 가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James P. Lenfestey는 뉴욕의 건축가입니다. 몇해전 그는 어느 신문에 그가 열한살 때 아버지와 함께 뉴헴프셔 주 어느 호숫가에 있는 오두막 별장에 머물며 낚시를 하던 일을 회고했습니다. 해가 진후 저녁부터 호수가에서 낚시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의 낚싯대가 거의 5cm정도 밑으로 휘었습니다. 원가 큰 것이 물렸다는 신호였습니다.
그런데 고기는 쉽게 끌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1살먹은 그는 끈기있게 물고기와 싸워 결국 탈진해버린 고기를 물속에서 끌어올렸다고 합니다. Lenfestey는 그대까지 본 것중에 가장 큰 물고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잡힌 물고기가 농어의 일종인 bass였는데 bass를 합법적으로 낚시할 수 있는 시기는 아직은 아니었습니다. 2시간이 지나면 밤 12시가 되어 새날이 되는데, 그때부터는 bass를 합법적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허용되는 날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진실을 속일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bass를 합법적으로 잡을 수 있는 날은 불과 2시간만 지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겨우 두시간! 두시간 정도면 봐줄수 있지 않겠는가하고 그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안된다고 했습니다. bass를 잡을 수 있는 시간은 2시간 후부터 시작되니 그 고기는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나게 큰 고기를 잡은지라 아들이 아무리 그 고기를 가지기를 원해도, 아버지는 고기를 호수에 다시 놓아주여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내가 bass를 잡은 것을 누가 주변에서 보고있는지 사방을 훌터보아도 한밤중이라 그와 아버지밖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그 큰 물고기를 가지고 있기를 원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허용시간이 아닐 때 잡힌 고기는 놓아주어야 한다고 요지부동했다고 합니다. 토라진 그는 이렇게 큰 물고기는 다시는 볼수 없을것이라고 불평하며 bass를 물속으로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영적훈련과 교훈을 받으며 성장하였기에 Lenfestey는 건축사로 일하면서 설계도를 기간안에 제출하기 위하여 적당히 지름길을 택하고자 하는 유혹을 때때로 받기도 했지만 그러한 유혹을 물리칠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합법적이 아니기 때문에 고기를 다시 놓아주어야 한다고 배우면서 성장했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불의한일과 타협하며 적당히 살고자하는 유혹을 물리칠수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Lenfestey는 신문에 기도한 글에서 계속하여 말합니다. 그 거대한 bass고기를 물속에 놓아준지가 벌써 34년이 지났습니다. 그 오두막집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옛날 나의 아버지와 함께 낚시했던 바로 그 자리로 이제는 Lenfestey는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낚시하며 나는 내가 아버지로부터 전승받은 가치관. 기독교적인 도덕적 규범, 인생관, 인생철학, 신앙관을 나의 아이들에게 전승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내 자녀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으며 살아가는 본을 보이고 싶다. 하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의 본을 보이고 싶다. 나는 하늘아버지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그러하시듯, 아버지로서 내 아이들에게 위로와 피난처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렇게 많은 크리스챤들 아버지가 가정에서 신앙의 선배 신앙의 안내자 멘터에서의 역할을 우리가 포기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많은 불신자들과 함게 일하면서도 좋은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역할을 우리가 그들의 신앙의 안내자 되는 역할을 우리 남성들이 포기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아버지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주위에 있는 예수 믿지않는 사람에게, 자녀들에게 좋은 신앙의 센터, 본보기, 선배가 우리 아버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세기에 좋은 아버지지 노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도우심 성령님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되겠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오늘도 온전하신 하늘 아버지의 성품으로 조금이라도 이웃과 내가정에서 표현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는 사랑하는 성도들 특별히 아버지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정체감을 잃어버린 남자나 아버지는 스스로 무용한 사람, 인생의 패배라로 생각하며 남자로서의 긍지에 치명적인 상처를 가져다 주게됩니다. 어느 실직한 남자는 차마 이사실을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출근시간에 집을 나셨습니다. 낮에는 도서관에서 잡지등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면 집에 돌오와 하루의 일과를 그럴듯하게 꾸며대었습니다. 얼마 안되는 퇴직금으로 몇 달을 버티었으나, 퇴직금마져 바닥이 나버리자, 그는 자살을 해보리고 말았습니다. 가정의 재정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실직했다는 사실, 남자의 자존감을 잃어버린 실직자로서의 열등의식을 그는 스스로 용납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 남성과 크리스챤 어버지들은 자신의 정체감과 값어치를 직업에 의해 결정케해서는 안될것입니다. 나의 정체감과 자존감을 내가 하는 일과 직업에 의해 결정되게 한다면, 내가 조기은퇴를 당하거나, 실직하게 될 때, 나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 인생의 패배자가 된것입니다. 우리는 남성으로서의 정체감을 하나님과의 신앙의 관계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구원받은자로서의 정체감,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정체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도로서의 정체감과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 사명감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정체감, 자존감, 이미지를 세상의 직업과 일을 토대로 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구원의 반서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토대로 해서 남자로서의 정체감, 자존감, 이미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사랑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에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자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며,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판단하며, 바라보시며, 평가하느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칭찬하실것이고 이것만이 나에게 관심거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감이 만들어지게 해서는 아니될것입니다. 나의 정체감과 자존감이 나의 직업이나 하고있는 세상적인 일에 근거해서는 아니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고 했는데 "만든다"는 말을 헬라어로 "포이에이마"란 단어인데, 이 단어는 매우 귀한 예술작품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Poem 한국말로는 "시"라는 말이 유래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시"와도 같은 작품, 그 분의 걸작, 그분의 귀한 예술작품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이후 죄악으로 가득찬 사회속에 살고 있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불치의 병인 암에 걸려 고통당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주 모를 가능성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회사가 언제 파산하게 되어 실직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직업이란 잃어버릴수도 있으며, 또 직업이 얻어질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크리스챤 남성들과 아버지들은 자신의 정체감, 자존감을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나의 직업, 또 언젠가는 물러서고 아버지들은 자신의 정체감, 자존감을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나의 직업, 또 언젠가는 물러서고 은퇴해야만 하는 나의 직장에 근거하지 말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위에 우리의 정체감과 자존감이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남자들은 강해야 한다는 남성의 이미지와 정체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남자는 강하기에 눈물을 흘려도 안되며, 남자는 실패를 인정해도 안되고, 약한 모습을 드러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야성적인 카우보이, 근육이 매우 발달한 운동선수, 거치른 오토바이족, 타프카이의 이미지를 풍기는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투우드 등이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부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자기의 약한 모습을 숨기고, 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음으로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많은 질환을 갖게 된다고 의학자들은 말합니다. James Harrison 이란 의학자는 남자들이 울고 싶을 때, 나는 남자이기에 울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감정을 억제하기에 여자들보다 위궤양, 고혈압, 위장병 등을 더 많이 앓으며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단명한다고 연구결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남성다움의 모습을 세상의 멀티미디어가 제시하는 모델에게서가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할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장 남성다운 남성이라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는 남성의 강한 모습이 거칠고 무례한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온유함과 겸손, 부드러움, 용서와 사랑과 은혜가운데서 남성의 강한 모습을 발견해야 할것입니다.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며 독선과 교만으로 가득차있는 종교인들을 향하여는 강한 남성답게 그들을 책망하고 있으십니다. 반면에 연약한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신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축복해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께서는 또한 그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무덤가에서 우셨습니다. 회개할줄을 모르는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은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고 지쳐서 기가 죽어있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섰습니다.
남성의 강한 모습은 거칠고 무례하고 폭력적인데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겸손하고 온유하며 용서하시며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된 남성상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국가의 경제가 경제위기의 긴급지원과 통제를 받고 있는 위기 상황속에서 이땅의 남성들, 특히 아버지들의 기가 죽고 고개를 수그리며,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었습니다. 아버지가 위축되고 낙심하고 기가 죽음으로 가정의 모든 식구들은 같이 낙심하고 용기를 잃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속에서 우리 크리스찬 아버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과 모습을 더욱더 닮기를 원해야겠습니다. 예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여러 가지 속성, 성품, 모습에 대해 수많은 단어들로 나타내지만 크게 나누어 몇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첫번째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움과 죄가운데 거하며 거기서 멸망당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그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니다. 로마서 5:8절에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아무조건없이 받아주시고 용납해주십니다. 내가 예수안에서 그의 자녀가 되었기에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용납해주십니다. 크리스찬 남성으로서 특히 가정의 아버지로서 나는 하늘아버지를 본받아 나의 자녀들과 아내를 나의 직업보다, 나의 취미생활보다, 나의 친구들보다, 교회의 직분보다, 사회적인 위치보다 더 중요시 여길수 있기를 원해야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고 머리가 명석하고 재능이 많아서가 아니라, 단지 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기를 원해야겠습니다. 몇 년전에 Time 주간 시사잡지에 빌리그래함 목사와 그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에 관한 기사가 커버스토리로 다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은 The Prodigal Son 이었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와 그의 아내 룻 그래함은 미국인들은 물론 온 세계의 사람들이 존경하는 훌륭한 크리스챤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빌리 그래함의 목사의 큰 아들 프랭클린은 열두살때부터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독한 위스키를 마시고 마약에도 손을 대었으며 총기를 들고 다니다가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으며 오토바이로 폭주를 하다 잡히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망이 없는 청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 목사는 인내하고 사랑과 용납으로 대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어느날 빌리 그래함목사는 아들을 앉혀놓고 "너 언제까지 이러한 삶을 살려고 하느냐고" 타이르자 아버지 그 지겨운 설교는 그만하세요라고 아들은 말하며 집을 나갔습니다. 그후 프랭클린은 계속하여 방랑자의 삶을 살다가 이스라엘까지 오게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어느 값싼 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방안의 케비넷의 설합속에서 성경책 한권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성경책을 펼쳐보니 로마서 8:1절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느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프랭클린은 방황하며 살고 있는 자기와 같은 사람도 하나님은 사랑하시며 용납해주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지금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어 빌리그래함 전도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는 자기 아버지를 닮은 모습과 음성과 제스쳐로 복음을 증거하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탕자와 같은 아들을 정죄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고 참으며 기도하며 계속하여 사랑하고 용납하는 자세를 보여주었기에 그 아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불순종하거나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슬퍼하시며 아파하실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의 무한하신 사랑을 켤코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처럼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을 베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우리 남성들, 특히 아버지가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로, 우리 크리스챤 남자들은 자녀들의 피난처와 항구가 되어주여야 할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가 안전하게 거처할 에덴 동산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가운데서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18:1-2절에 보면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시편36:7절에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46:7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융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이도다.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며 위기나 큰 환란이나 산이 넘어지고 바다가 흔들려도 우리는 하늘아버지의 피난처가 있으니 두려울것이 없다고 시편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아내는 악한 세상에서 위협을 느끼고 두려운 일을 만날때가 많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산성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신 것처럼 우리 아버지들이 그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의 자녀들은 누군가가 뒤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변호하며 그들을 위험에서 막아주고 붙들어주는 자가 있는 것을 알게되면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질 수가 있게됩니다. 에이미라는 30대의 여자가 5살때의 일이었습니다. 자기방에서 잠을 자다가 창밖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크게 울려댐으로 밤 12시쯤 잠을 깨었습니다. 칠흑같은 어두움과 무서운 천둥소리에 크게 놀라 자기방을 뛰쳐나와 아빠와 엄마가 자는 침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에이미는 부모의 침대곁에서 엄마가 깨기를 바라며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깨기전에 아빠가 먼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에이미, 너 거기서 뭘하는거냐 네 방으로 돌아가지 못해! 라고 아빠는 단잠을 깬 것이 화가나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빠 난 무서워요"라고 에이미는 말하며 더 크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막잠에서 깨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 내말이 안들리니" 아빠가 고함을 질렀고 에이미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렸습니다. "네방으로 돌아가란 말이야, 다시는 나를 귀찮게 하지말아라"고 아버지가 성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에이미는 부모의 침실에서 나와 화장실에 들어가 불을 켜고 문을 걸어 잠근체 밤새껏 화장실에서 울며 천둥이 칠때마다 떨며 그날밤을 새웠다고 합니다. 에이미는 그후 10살 때까지 번개가 치고 천둥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때에는 무서워서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불을 켜고 문을 걸어잠구고 벌벌떨며 새웠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후 청소년이 되면서 번개와 천둥벼락에 대한 무서움은 국복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위로와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아버지가 피난처가 되지 못한 결과로 많은 심리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는 안식처와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위협을 느끼고 실망을 당할때에는 피할 피난처가 필요한 것입니다. 폭풍으로부터 도피처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넓은 가슴속에서 우리가 안식할수 있는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몸안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해야겠습니다.
셋째로 우리를 사랑과 말씀과 본이 되는 삶으로 자녀들을 훈계하며 양육하는 아버지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며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훈육하시며 터가 되어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의 자녀가 잘못된 길을 계속걸어갈 때 우리가 회개하도록 말씀으로 훈계하시며 책망하시며 징계하시기도 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그들과의 관계성속에서 좋은 신앙의 길잡이 안내자 멘터가되어야 되겠고 특별히 가정에서 아버지는 말로서 더 이상 자녀를 교육시킬수 없습니다. 삶으로서 좋은 자녀들의 스승으로서 멘터로서 그들의 삶을 잘 이끌어 가는 아버지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James P. Lenfestey는 뉴욕의 건축가입니다. 몇해전 그는 어느 신문에 그가 열한살 때 아버지와 함께 뉴헴프셔 주 어느 호숫가에 있는 오두막 별장에 머물며 낚시를 하던 일을 회고했습니다. 해가 진후 저녁부터 호수가에서 낚시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의 낚싯대가 거의 5cm정도 밑으로 휘었습니다. 원가 큰 것이 물렸다는 신호였습니다.
그런데 고기는 쉽게 끌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1살먹은 그는 끈기있게 물고기와 싸워 결국 탈진해버린 고기를 물속에서 끌어올렸다고 합니다. Lenfestey는 그대까지 본 것중에 가장 큰 물고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잡힌 물고기가 농어의 일종인 bass였는데 bass를 합법적으로 낚시할 수 있는 시기는 아직은 아니었습니다. 2시간이 지나면 밤 12시가 되어 새날이 되는데, 그때부터는 bass를 합법적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허용되는 날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진실을 속일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bass를 합법적으로 잡을 수 있는 날은 불과 2시간만 지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겨우 두시간! 두시간 정도면 봐줄수 있지 않겠는가하고 그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안된다고 했습니다. bass를 잡을 수 있는 시간은 2시간 후부터 시작되니 그 고기는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나게 큰 고기를 잡은지라 아들이 아무리 그 고기를 가지기를 원해도, 아버지는 고기를 호수에 다시 놓아주여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내가 bass를 잡은 것을 누가 주변에서 보고있는지 사방을 훌터보아도 한밤중이라 그와 아버지밖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그 큰 물고기를 가지고 있기를 원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허용시간이 아닐 때 잡힌 고기는 놓아주어야 한다고 요지부동했다고 합니다. 토라진 그는 이렇게 큰 물고기는 다시는 볼수 없을것이라고 불평하며 bass를 물속으로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영적훈련과 교훈을 받으며 성장하였기에 Lenfestey는 건축사로 일하면서 설계도를 기간안에 제출하기 위하여 적당히 지름길을 택하고자 하는 유혹을 때때로 받기도 했지만 그러한 유혹을 물리칠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합법적이 아니기 때문에 고기를 다시 놓아주어야 한다고 배우면서 성장했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불의한일과 타협하며 적당히 살고자하는 유혹을 물리칠수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Lenfestey는 신문에 기도한 글에서 계속하여 말합니다. 그 거대한 bass고기를 물속에 놓아준지가 벌써 34년이 지났습니다. 그 오두막집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옛날 나의 아버지와 함께 낚시했던 바로 그 자리로 이제는 Lenfestey는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낚시하며 나는 내가 아버지로부터 전승받은 가치관. 기독교적인 도덕적 규범, 인생관, 인생철학, 신앙관을 나의 아이들에게 전승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내 자녀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으며 살아가는 본을 보이고 싶다. 하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납의 본을 보이고 싶다. 나는 하늘아버지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그러하시듯, 아버지로서 내 아이들에게 위로와 피난처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렇게 많은 크리스챤들 아버지가 가정에서 신앙의 선배 신앙의 안내자 멘터에서의 역할을 우리가 포기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많은 불신자들과 함게 일하면서도 좋은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역할을 우리가 그들의 신앙의 안내자 되는 역할을 우리 남성들이 포기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아버지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주위에 있는 예수 믿지않는 사람에게, 자녀들에게 좋은 신앙의 센터, 본보기, 선배가 우리 아버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세기에 좋은 아버지지 노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도우심 성령님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되겠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오늘도 온전하신 하늘 아버지의 성품으로 조금이라도 이웃과 내가정에서 표현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는 사랑하는 성도들 특별히 아버지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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