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을 기억하라 (민15:37-41)
본문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출복은 머리가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뚫고 옷단 네 귀퉁이를 만들고 그 네 귀퉁이에 술을 달아서 입었던 것입니다. 술은 8가닥의 실과 5개의 매듭으로 만들어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술"이란 말이 히브리어로 "치치트"라는 말인데, 600이란 뜻 입니다. 600과 8가닥의 실, 그리고 5매듭을 합하면 613이 되는 것인데, 이 613 은 율법 조항의 숫자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술은 율법 자체를 상징하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 옷술을 보면서 오늘 말씀과 같이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중 특히 종교 지도자들 중에서는 이 옷단에 다는 옷술을 화려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장식품으로 만 들었던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바와는 달리 옷술이 사용되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옛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옷단 끝에 술을 매달 라고 말씀하시며, 그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 듯이 지금 우리에게 그 옷술을 통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옷술이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졌듯이 오늘 우리도 분명 이 옷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이 옷술의 의미를 적용시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말씀 등으로 풀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적용해 보면서 우리가 지금 이 옷술을 어떻게 기억해야 될지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이 옷술은 우리 믿는 자에겐 안전표지판과 같은 것입니다. 운전하는데 있어서 안전표지판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위험, 사고 다발지역 등 등의 표지판이 나올 때마다 운전자는 긴장을 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발을 브레이크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옷술은 말씀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종종 삶의 방향감각을 잃게 되었을 때 말씀을 보면 다시금 길을 찾게 되는 것이고, 괴로울 때 주님을 보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아니 겠습니까 우리는 진정 매사에 주님을 보고 말씀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보는 대신 세상을 본다거나 육적인 것을 보게 된다면 큰 실패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여인을 구경하기 위해서 나갔다가 얼마나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이와같이 우리의 보는 눈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군이었던 다윗도 지붕위에서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보았다가 큰 시험 에 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모압여인들을 보고 유혹에 빠져 바알브올 이라고 하는 그 이방신에게 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헛된 우상에게 절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압 여인들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빠지게 되었을 때 우상에게 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12정탐꾼들 중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가 그들의 생각을 결정 하게 만들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환경을 보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신 주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했을 때 그들은 소망적이고 긍정적인 보 고를 하게 되었고, 나머지 10사람은 환경을 보다가 부정적인 보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베드로의 일을 통하여 확실히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풍랑 가운데 걸어가게 되었지 않습니까 풍랑 위로 잘 걸어 가던 베드로가 왜 바닷속으로 빠지게 되었던가요 풍랑과 바람을 보았 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주님의 얼굴만을 보아야 했던 상황이었는데, 그는 주님을 보지 않고 풍랑을 보았기에 그만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직 주 예수님만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얼 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광야의 사건을 통해 또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모세가 기도하게 되었 을 때,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매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누구든지 쳐다보면 나을 것이 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다 그 독으로부터 건짐을 받 았지만, 쳐다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주 예수님은 우리 앞에 높이 들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이 세상이 참으로 무서운 독처럼 우리를 죽이려 하고 삼키려 한다 해 도, 주님을 보게 된다면 결코 세상의 독에게 삼키우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 가운데만 모든 문제의 해결 열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여인이 삶의 용기를 잃고 지치고 상한 마음이 되어서, 주일이 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아갈 힘조차 없어서 털썩 주저앉아서 괴로 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열려진 창문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습니다. 그 새는 잘못하여 방에 들어왔기에 다시 나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여인이 보니 새가 들어온 창문은 지금 새가 날고 있는 위치보다 아래 에 있었는데 새는 계속해서 네 구퉁이 천정으로만 날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새를 바라보았습니다. 조금만 밑을 보 게 되면 열린 창문이 있어 빠져나갈 수 있을텐데, 새는 전혀 밑을 보지 못하고 계속 퍼득거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는 지쳐서 방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가 방바닥에 떨어지 고 보니, 그의 피곤한 눈 속으로 열려진 창문이 보였던 것입니다. 창문을 본 새는 다시금 힘을 내어 날아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 이 새처럼, 주 예수를 바라볼 수 있다면 항 상 힘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 새의 모습을 보며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즉, 주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 용기를 얻게 되었고, 그는 힘차 게 교회에 나아가 새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보고 있습니까 지금 보는 그것이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결정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본다면 여러분은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물질을 보고 있다면 세상적인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롯의 처 처럼 세상을 보지 맙시다. 벧세메스로 올라갔던 암소 두 마리 처럼 좌나 우를 보지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전진해 가야 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생각은 결심을 가져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옷단 끝에 매달린 옷술을 보면서 시험과 유혹을 이 길 수 있었듯이, 주님을 언제 어디서나 바라보아야 시험과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눈이 어디를 향해, 누구를 향해 열려졌는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점검해 보아야 겠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 살았고, 야곱의 우물에서 주님을 만났던 여인이, 이 제 지금까지 바라보았던 여섯 남편에서 주님을 보게 되었을 때 그의 모 든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다시금 주님을 바라봅시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하지 않았습니까 즉, 주님을 간절히 바라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성가에서도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는 가사가 있기도 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될 때만이 소망과 모든 욕심이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술을 매단 끈은 청색끈이었습니다. 청색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늘 기억하고 소망하고 살아가야 되는 것처럼 그 하늘의 색 청색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언제나 주님을 기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주님을 기억해야 되는 것도 오늘 말씀과 같이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게 하기 위함인 것이지요. 주님을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크리미안 전쟁에서 인터맨 전투때 한 청년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청년은 나무밑 그늘에서 부상의 회복을 꾀하였지만 불가능한 것을 깨 닫고 품속에서 성경을 꺼내어 요한복음 11장 25126절을 펼치고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 가 믿느냐"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쯤에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키며 죽 었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시체를 거둘 때 사람들은 한 숭고한 젊은이의 시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전쟁과 죽음 앞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진정 주님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모든 공포와 풍파 앞에서도 강하고 담 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귀에게 세 번 시험을 당할 때에 말씀과 하나님을 기억했 습니다. 배고픈 유혹 속에서 마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 억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라 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진정 우리가 늘 주님의 생각으로 기억되어야 될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기억속에 받아들이지 말고 주님의 생각으로 채워야겠 습니다. 아픈 기억, 슬픈 기억, 실패했던 기억은 지워버리고 주 예수님만 기억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엘리사에게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남편은 생도 중 한 사람으로 죽고 없었습니다. 남편이 죽자, 가계는 기울었고 두 아들은 종으로 팔려가게 되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 찾아온 여인에게 엘리사는 너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게 된 것입니다. 여인은 한 병의 기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그 한 병의 기 름으로 그 여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한 병의 기름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성령님이 요,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엘리사는 결국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통해 주님 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 즉 주님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모세가 쫓아오는 애굽 군사와 가로막힌 홍해바다로 인해 어쩔줄 몰라 기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 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손에 든 것은 지팡이였지 않습니까 10가지 재앙을 내렸던 지 팡이, 그 지팡이는 곧 믿음의 지팡이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기억하라고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을 나의 생각과 마음속에 새겨야 겠습니다. 구원의 투구를 항상 써서 주님을 생각에 새겨야 된다는 것이지요.
셋째는 준행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옷단에 술을 달게 하신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결국은 말씀을 준행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주님을 보고, 또한 기억해야 되는 최종적인 목적은 결국 그 말씀을 실천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뒤를 따르고 주님이 원하는 삶이 이루 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군대를 시찰하던 중 한 겁 많은 군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군사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알렉산더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대단히 노한 음성으로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용감한 군인이 되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있으니 우리도 주님이 이 땅 에 계셨을 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라 살 때 진정 주님의 제자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켜지지 않는 안전 표지판은 결국 운전자에게 결코 유익을 주지 못하 듯이 지키지 않는 말씀은 무의미한 것이며,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되 겠습니다. 옷단에 옷술을 달아 항상 지니고 다니게 만들었던 것은 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준행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설 명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행여나 옷단의 술을 치장 삼아 달고 다녔던 이 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 처럼 우리도 믿음이나 말씀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믿음의 고백이 한낮 치장, 즉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구 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본래의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옷술의 의미가 시급히 지금도 믿음과 말씀 을 갖은 성도들에게 이루어져야 겠습니다.
그러므로 "술"이란 말이 히브리어로 "치치트"라는 말인데, 600이란 뜻 입니다. 600과 8가닥의 실, 그리고 5매듭을 합하면 613이 되는 것인데, 이 613 은 율법 조항의 숫자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술은 율법 자체를 상징하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 옷술을 보면서 오늘 말씀과 같이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중 특히 종교 지도자들 중에서는 이 옷단에 다는 옷술을 화려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장식품으로 만 들었던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바와는 달리 옷술이 사용되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옛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옷단 끝에 술을 매달 라고 말씀하시며, 그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 듯이 지금 우리에게 그 옷술을 통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옷술이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졌듯이 오늘 우리도 분명 이 옷술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이 옷술의 의미를 적용시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말씀 등으로 풀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적용해 보면서 우리가 지금 이 옷술을 어떻게 기억해야 될지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이 옷술은 우리 믿는 자에겐 안전표지판과 같은 것입니다. 운전하는데 있어서 안전표지판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위험, 사고 다발지역 등 등의 표지판이 나올 때마다 운전자는 긴장을 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발을 브레이크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옷술은 말씀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종종 삶의 방향감각을 잃게 되었을 때 말씀을 보면 다시금 길을 찾게 되는 것이고, 괴로울 때 주님을 보면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아니 겠습니까 우리는 진정 매사에 주님을 보고 말씀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보는 대신 세상을 본다거나 육적인 것을 보게 된다면 큰 실패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여인을 구경하기 위해서 나갔다가 얼마나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이와같이 우리의 보는 눈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군이었던 다윗도 지붕위에서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보았다가 큰 시험 에 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모압여인들을 보고 유혹에 빠져 바알브올 이라고 하는 그 이방신에게 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헛된 우상에게 절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압 여인들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빠지게 되었을 때 우상에게 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12정탐꾼들 중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가 그들의 생각을 결정 하게 만들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환경을 보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신 주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했을 때 그들은 소망적이고 긍정적인 보 고를 하게 되었고, 나머지 10사람은 환경을 보다가 부정적인 보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베드로의 일을 통하여 확실히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풍랑 가운데 걸어가게 되었지 않습니까 풍랑 위로 잘 걸어 가던 베드로가 왜 바닷속으로 빠지게 되었던가요 풍랑과 바람을 보았 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주님의 얼굴만을 보아야 했던 상황이었는데, 그는 주님을 보지 않고 풍랑을 보았기에 그만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직 주 예수님만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얼 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광야의 사건을 통해 또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모세가 기도하게 되었 을 때,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매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누구든지 쳐다보면 나을 것이 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다 그 독으로부터 건짐을 받 았지만, 쳐다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주 예수님은 우리 앞에 높이 들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이 세상이 참으로 무서운 독처럼 우리를 죽이려 하고 삼키려 한다 해 도, 주님을 보게 된다면 결코 세상의 독에게 삼키우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 가운데만 모든 문제의 해결 열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여인이 삶의 용기를 잃고 지치고 상한 마음이 되어서, 주일이 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아갈 힘조차 없어서 털썩 주저앉아서 괴로 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열려진 창문으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습니다. 그 새는 잘못하여 방에 들어왔기에 다시 나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여인이 보니 새가 들어온 창문은 지금 새가 날고 있는 위치보다 아래 에 있었는데 새는 계속해서 네 구퉁이 천정으로만 날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새를 바라보았습니다. 조금만 밑을 보 게 되면 열린 창문이 있어 빠져나갈 수 있을텐데, 새는 전혀 밑을 보지 못하고 계속 퍼득거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는 지쳐서 방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가 방바닥에 떨어지 고 보니, 그의 피곤한 눈 속으로 열려진 창문이 보였던 것입니다. 창문을 본 새는 다시금 힘을 내어 날아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 이 새처럼, 주 예수를 바라볼 수 있다면 항 상 힘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 새의 모습을 보며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즉, 주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 용기를 얻게 되었고, 그는 힘차 게 교회에 나아가 새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를 보고 있습니까 지금 보는 그것이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결정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본다면 여러분은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물질을 보고 있다면 세상적인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롯의 처 처럼 세상을 보지 맙시다. 벧세메스로 올라갔던 암소 두 마리 처럼 좌나 우를 보지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전진해 가야 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생각은 결심을 가져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옷단 끝에 매달린 옷술을 보면서 시험과 유혹을 이 길 수 있었듯이, 주님을 언제 어디서나 바라보아야 시험과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눈이 어디를 향해, 누구를 향해 열려졌는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점검해 보아야 겠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 살았고, 야곱의 우물에서 주님을 만났던 여인이, 이 제 지금까지 바라보았던 여섯 남편에서 주님을 보게 되었을 때 그의 모 든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다시금 주님을 바라봅시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하지 않았습니까 즉, 주님을 간절히 바라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성가에서도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는 가사가 있기도 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될 때만이 소망과 모든 욕심이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술을 매단 끈은 청색끈이었습니다. 청색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늘 기억하고 소망하고 살아가야 되는 것처럼 그 하늘의 색 청색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언제나 주님을 기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주님을 기억해야 되는 것도 오늘 말씀과 같이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게 하기 위함인 것이지요. 주님을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크리미안 전쟁에서 인터맨 전투때 한 청년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청년은 나무밑 그늘에서 부상의 회복을 꾀하였지만 불가능한 것을 깨 닫고 품속에서 성경을 꺼내어 요한복음 11장 25126절을 펼치고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 가 믿느냐"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쯤에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키며 죽 었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시체를 거둘 때 사람들은 한 숭고한 젊은이의 시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전쟁과 죽음 앞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진정 주님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모든 공포와 풍파 앞에서도 강하고 담 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귀에게 세 번 시험을 당할 때에 말씀과 하나님을 기억했 습니다. 배고픈 유혹 속에서 마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 억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라 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진정 우리가 늘 주님의 생각으로 기억되어야 될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기억속에 받아들이지 말고 주님의 생각으로 채워야겠 습니다. 아픈 기억, 슬픈 기억, 실패했던 기억은 지워버리고 주 예수님만 기억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엘리사에게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남편은 생도 중 한 사람으로 죽고 없었습니다. 남편이 죽자, 가계는 기울었고 두 아들은 종으로 팔려가게 되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 찾아온 여인에게 엘리사는 너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게 된 것입니다. 여인은 한 병의 기름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그 한 병의 기 름으로 그 여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한 병의 기름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성령님이 요,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엘리사는 결국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통해 주님 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 즉 주님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모세가 쫓아오는 애굽 군사와 가로막힌 홍해바다로 인해 어쩔줄 몰라 기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 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손에 든 것은 지팡이였지 않습니까 10가지 재앙을 내렸던 지 팡이, 그 지팡이는 곧 믿음의 지팡이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기억하라고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을 나의 생각과 마음속에 새겨야 겠습니다. 구원의 투구를 항상 써서 주님을 생각에 새겨야 된다는 것이지요.
셋째는 준행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옷단에 술을 달게 하신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결국은 말씀을 준행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주님을 보고, 또한 기억해야 되는 최종적인 목적은 결국 그 말씀을 실천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뒤를 따르고 주님이 원하는 삶이 이루 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군대를 시찰하던 중 한 겁 많은 군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군사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알렉산더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대단히 노한 음성으로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용감한 군인이 되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있으니 우리도 주님이 이 땅 에 계셨을 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라 살 때 진정 주님의 제자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켜지지 않는 안전 표지판은 결국 운전자에게 결코 유익을 주지 못하 듯이 지키지 않는 말씀은 무의미한 것이며,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되 겠습니다. 옷단에 옷술을 달아 항상 지니고 다니게 만들었던 것은 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준행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설 명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행여나 옷단의 술을 치장 삼아 달고 다녔던 이 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 처럼 우리도 믿음이나 말씀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믿음의 고백이 한낮 치장, 즉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구 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본래의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옷술의 의미가 시급히 지금도 믿음과 말씀 을 갖은 성도들에게 이루어져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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