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만나 (민11:7-9)
본문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 광야에서 죽지 않고 살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에 만족하지 않고 애굽에서 먹던 음식을 생각하며 원망 불평했다. 5-6절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 구약에 이스라엘에게 내려주신 만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셨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살았듯이 우리들도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먹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들 또한 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의 음식을 더 사모하고 만나를 먹는 것을 불평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하기보다는 저 세상 것을 더 사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고난 당하기보다는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 아닙니까 다음 주가 고난 주간이다. 구약에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다가오는 예수 그리스도 고난을 준비하는 자가 되자. 그리스도 고난을 모르고 예수를 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리스도 고난에 동참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 하면 거짓 신앙이다. 우리가 만나를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의 고난을 더 깊이 깨닫게 되기를 축원한다 첫 째:만나의 모양. 7절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만나가 깟씨처럼 작은 것이었다는 것은초림 예수의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작은 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 태어나실 때도 유대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 오셨다. 외모도 체격도 볼품없이 작고 초라하셨다. 이 땅에 사시면서도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으셨다. 깟씨 처럼 작은 자의 일생을 살으셨다. 또 진주 같다는 것은 귀한 자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진주는 당시에 보석으로는 아주 귀한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귀하신 분이시다.
깟씨 지중해 도처에서 자라나는 미나리과의 일년생 약초이다. 씨앗이 약 3 mm 정도에 불과하는 아주 작은 것이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것이다. 진주 다이아몬드가 가장 보석이지만 다이아몬드는 15세기 이후에야 발견된 옥석이다. 예수 초림때 까지는 진주가 가장 귀한 보석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소리 없이 이슬과 함께 내렸던 만나의 모양은 귀한 보석인 진주와 같았듯이 예수님도 타락으로 어두어진 이 땅에 소리 없이 귀하신 분이 내려 오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만나가 작은 깟씨 같았던 것처럼 우리 예수님 또한 작은 깟씨처럼 이 땅에 오셨고 그렇게 살다 가셨다. 만나가 작은 깟씨 같었지만 많은 생명을 살렸듯이 예수님 또한 작은자로 살았지만 많은 생명을 지금도 살리고 계신다 만나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신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만나를 주신 것은 낮추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고도 낮아지지 아니했다. 낮아지기는커녕 더욱 원망하고 불평하고 방방 뛰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으면 더욱 낮아지고 작아져야 할 터인데 그러기는커녕 더욱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높아지려고만 하지 낮아지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우리 예수님은 깟씨 만나처럼 죽기까지 낮아졌다고 빌 2:8에 말씀하고 있다. 성도 여러분! 만나를 먹었습니까 예수 만나를 만나셨습니까 예수 만나를 마음속에 모시고 계십니까 낮아져야 한다. 작은 자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작아지지 않고 겸손해지지 않은다면 우리는 아직 만나되신 예수를 못 만난 자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큰 소리가 많이 난다. 서로가 높아질려는 소리다. 큰 자와 높은 자는 많아도 작은 자와 겸손한 자는 보기 힘든 시대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작은 자가 되자.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큰 자로 사용하여 주실 것이다. (마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러나 반대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는 낮아지게 할 것이다. (마20:26-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또 만나는 진주 같다고 했다. 이것은 초림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진주와 같다는 말씀이 된다. (마13:45-46)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구원 성도는 마치 "진주 장사" 하는 사람과 같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값진 진주를 만나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다. 여기서 값진 진주는 초림의 만나 이신 예수님 이시다. 성도는 이제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뒤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여야만 한다. 예수보다도 더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찬 양'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성도 여러분 ! 이렇게 귀한 진주되신 예수를 우리를 정말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이 시대 예수가 귀하게 여겨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보다는 세상 것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소유보다 예수를 더 귀하게 여긴다. 귀한 예수를 소중히 여기며 신앙생활을 해야만 한다. 진주는 귀한 보배이기에 잃어버리기 쉽고 빼앗기기도 쉽다. 마찬가지로 귀한 예수 믿음을 이 세상 물질 유혹에. 세상의 명예에 권력에 출세에 세상 것들에게 쉽게 빼앗기기 쉽다.
그러므로 잘 간직하여야만 한다. 이 귀한 진주되신 예수를 우리에게 빼앗아 가기 위해서 저 흑암의 권세들은 지금도 우리를 미혹하고 있다. 그 어떤 것을 희생하더라도 귀한 예수를 놓치면 안된다. 두 번째:만나를 어떻게 먹었는가 8절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거두어서 먹는 방법이 놀랍도록 우리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이렇게 똑같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의미도 모르고 그들이 만나를 그렇게 해서 먹었지만 이것은 만나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실 고난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맷돌에 갈기도 맷돌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타한"인데 이 뜻은 "잘게 부수다" 이다 복음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계명,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온전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고난을 통하여 가루가 되셨다. (빌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절구에 찧기도 예수가 육체적으로 고난과 상하심으로 외부적으로 핍박과 환난을 당하신 것을 의미한다. 절구통에 덩어리를 넣고 찧으면 껍질이 벗겨지고, 터지고 깨어지고, 부수어뜨려져서 모든 것이 다 속살로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런 고통을 당하셨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가마에 삶았다. 여기서 "가마"란 히브리어로 "파루르" 인데 이 뜻은 "혈과 생기를 완전히 죽이고 살균시키는 항아리 돌그릇 솥 " 이라는 뜻이다. 복음적인 의미로는 인간의 모든 육이 완전히 끝나 버리는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무덤 속에서 3일 동안이나 묻혀 있었다는 것은 만나를 가마에 넣고 삶은 것과 같은 의미이다. (막15: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맛은 기름 섞은 과자맛 이것은 은혜의 복음을 의미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쁨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맷돌에 갈고 절구에 찧고 가마에 삶아서 먹어서 목숨을 건졌듯이 우리 또한 만나되신 예수를 만나야만 영원한 생명을 가질수 있다. 구약에 만나가 맷돌과 절구와 가마에서 만들어 졌듯이 우리 예수님도 맷돌 같은 온전한 순종함과 절구통에서 당하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당했고 가마속 같은 무덤 속에까지 들어 가셨다. 이러한 고난을 왜 당하셨는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몸소 당하셨다. 만나를 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신 8:16 낮아지게 하려고 먹이셨다고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만나를 먹고도 낮아지지 아니했다. 더욱 원망과 불평은 심해만 같다. 우리에게 만나 되신 예수를 믿게 하고 따르게 하신 것은 우리보고 세상에서 높아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온전히 섬기는 삶을 사시다가 가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빛이 되라고 하셨다. 소금이 되라고 하셨다. 이것은 세상 속에서 우리가 높아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가 희생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의 빛이 되셨고 소금이 되셨다. 빛이 되시고 소금이 되실 수 있는 것은 맷돌에 갈리는 단계를 통과 하셨기 때문이고, 절구통에 찧어지는 고통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고 가마솥 같은 무덤 속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 또한 그냥 세상 속에서 빛이 될 수 없고 소금이 될 수 없다. 주님이 당하신 그 단계를 우리들 또한 거쳐야만 한다 우리의 육적인 성품이 맷돌에 갈리우는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맷돌에 갈리어 가루가 되는게 무엇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 하셨다. 우리 또한 말씀에 순종하여야 만이 내 육적인 성품이 가루가 되어져서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어찌할꼬" 하는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야만 한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절대로 좋은 게 아니다. 가시적이고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우리의 육적인 성품은 가루가 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 내 모습을 비쳐 보면서 우리의 심령이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할 때 우리는 점점 가루가 되어져 갈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변함이 없고 모난 곳이 그대로 있다면 . 아니 자꾸 더 모난 곳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가루 되기를 포기한자 일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능력이 없다고 생각지 말라 !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우리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가루는 바로 하나님 심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의 가루로 소금의 가루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려면 우리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따라야만 한다.
둘째 단계는 절구통에 찧어지는 단계를 거쳐야만 세상에서 빛을 발하고 소금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예수님은 이 절구통 단계를 거치셨다. 이루말로 다 할수 없는 고통과 핍박과 수모를 주님은 당하셨다. 이 단계를 통과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에 빛이 되셨고 소금이 되셨다. 우리 또한 반드시 이 절구통 같은 고난의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행14:22) "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 성도는 고난이 없이는 신앙이 성장하지 않은다. 고난은 우리에게 아프고 괴로운 것이지만 반드시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이 단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약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벧전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 고난은 싫어하고 축복만 원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사용할 수가 없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한다
셋째는 가마솥 단계다 .이것은 온전히 죽는 단계다. 우리 주님은 온전히 죽으셨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우리 또한 본 받아야만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셨기 때문에 세상에 빛이 되셨고 소금이 되신 것이다. 우리 또한 죽어야만 한다. 죽으라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목숨을 끓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끓으라는 것이다. (골3:5-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우리가 육을 죽이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했다. 왜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게 이렇게 힘드는가 우리의 육을 죽이지 못해서 그런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마16:24) 나를 부인하는 삶 이것은 나를 죽이는 삶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죽지 아니하면 세상은 변함이 없다 내가 내 가정은 변함이 없다. 우리 교회는 . 우리는 죽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골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면 우리는 이제 세상 것을 따르고 쫓아서는 안된다. 예수와 함께 죽었다면서도 세상것을 좋아하고 세상것을 탐하고 세상 것을 따르며 산다면 죽은 자의 삶이 아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의 육이 죽으면 다시 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이다. 우리의 영이 살아날 때 우리는 육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영을 위해서 살게 되므로 예수를 위해서 살게 되는 것이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자의 삶이 바로 죽은 자의 삶이다. 유대 학자 니고데모가 어느 날 밤 예수님을 찾아왔다. 니고데모는 말씀도 잘 알고 하나님을 자칭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나야만 한다는 말을 해주셨다. 니고데모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네가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즉 이제 너는 죽어야만 이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이 상태로는 너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시대 우리 주위에 예수를 믿는다는 많은 자들의 신앙이 육적인 상태에서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안에서 아직 죽어지지 않고 있다. 이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얼마나 힘이 든지 모른다. 왜 힘이 드는가 죽지 안해서 그런다. 죽으면 편할턴데. 너무 편히 신앙생활 할 터인데 이들은 죽지 않은다. 이들도 알고는 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죽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세상 줄을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줄을 놓으면 죽는데 . 안 놓고 있다. 성도 여러분 !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거듭난 자의 삶을 살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것들이 아무리 귀해도 우리 예수 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예수 안에서 죽을 때 비로소 깨달아질 것이다 가마솥에 들어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만나가 언제 내렸는가 9절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내려주지 아니했다. 만나는 깊은 밤중에 이슬과 함께 조용히 내렸다. 낮에 내렸다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더 믿을 수 있었건만 하나님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 만나를 내려 주셨다.
밤 어두움을 뜻한다. 이것은 영적으로 타락을 뜻한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한 밤중이었다. 영적으로 타락할 대로 타락한 시대였다. 이슬 이슬은 한 밤중에 내린다. 이슬과 함께 만나는 이 땅에 내렸다. 복음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한다. 이슬은 해가 비치면 사라져 버린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를 알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만나가 한 밤중에 이스라엘 진에 이슬과 함께 조용히 내렸듯이 우리 예수님도 타락한 이 세상에 조용히 이 땅에 오셨다. 만나가 내릴 때 아무도 몰랐듯이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도 아무도 몰랐다. 이슬과 함께 만나가 내렸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 어두운 죄악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조용히 오셨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마9:13) 어두운 세상에 지금도 만나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이슬과 함께 내리고 있다.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에도 만나되신 예수는 찾아 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왜 모르는가 죄악 때문이다. (요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시대 너무나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사는 것 같다. 이 나라에 주신하나님의 은혜를 이 백성이 저버리고 있다. 이 나라 교회 위에 너무나 많은 은혜를 주셨다. 믿는 자들에게 너무 많은 은혜를 주셨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은혜를 간수하지 못했다. 탐욕으로 채우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에 내린 만나를 날마다 거두게 하셨다. 7일째에는 만나를 내려 주지 아니했다. 매일 만나를 거두되 아침까지는 남겨두지 말라고 했다. 즉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6일째에는 다음날 것까지 거두도록 허락 하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했다. 어떤 자는 많이 거두어서 다음날까지 남겨 두었다. 남겨둔 만나는 벌레가 생기고 상해 버렸다. 7일째에도 만나를 구하러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가서 만나를 구했다. 만나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출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만나는 주신 목적이 백성들을 살기 위함만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더 깊은 뜻이 있었다. 백성들이 말씀대로 사는가 안 사는가 보셨다. 또 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 만나가 무엇을 예표한 것인가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생명의 양식이다. 예수님이 친히 (요6장) 에서 말씀 하셨다. (요6:31-35) 다같이 읽어보자. 만나를 매일 구했듯이 우리들도 매일 예수 신앙을 잊어서는 안된다. 7일째 되는 주일은 온전히 주님을 위한 하루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만나되신 예수를 만났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육을 위해서 예수를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하고 예수로 인해 축복을 받은 우리가 탐욕으로 만나를 구한 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만나는 해가 뜨면 없어져 버렸다. 만나는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상징은 실제가 나타나면 필요가 없게 된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 무엇 때문입니까 내 육을 위함으로 사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육의 양식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더 중요한 것은 영의 양식이다. 바로 하나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 이다. 성도 여러분! 시대는 갈수록 어두워져 가고 있다. 지금도 이 만나되신 예수는 우리게 내리고 있다. 만나되신 예수를 육을 위해서 믿지 말고 영을 위해서 믿고 전하는 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요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이 보이신 모든 것은 우리가 그대로 하도록 몸소 본을 보이신 것이라고 했다. 만나가 멧돌에 갈리고 절구에 찧기고 가마에 삶은 그 일은 우리 주님은 몸소 다 당하셨다 주님은 우리도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것을 지금 말씀하고 계신다. 이 세 단계가 거치지 않고는 기름 섞은 고소한 과자 맛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고난 없이 성공한 것을 우리는 성공으로 볼 수 없다. 노력 없이 일류 대학에 합격한 것 우리는 박수를 보낼 수 없다. 헬리콥터 타고 아무리 높은 산을 정복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정상 정복으로 볼 수없다. 우리의 신앙도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뜨거운 눈물이 없이 예수를 알고 만났다면 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아닐 것이다. 아픈 가슴으로 만난 예수 잊지 못할 것이다. 상한 마음으로 눈물 때문에 앞이 안 보일 때 만난 예수 잊지 못할 것이다. 고난 가운데서 만난 예수 잊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예수를 만난 사람은 맷돌에 갈리우고 절구에 찧기고 가마솥에 들어가는 고난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예수를 절대로 부인하지 아니하고 하나 뿐인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를 것이다. 고난주간에 "아! 예수가 고난을 우리 때문에 당하셨구나"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우리들 또한 그리스도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육만 위해서 내 삶만 위해서 예수 믿는 자세 이제는 버리자 ! 육만 위한 신앙인 이 될 때 어느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인간은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고등동물이라고 한다. 짐승들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주인을 잊지 아니한다. "만나되신 예수를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
그런데 우리들 또한 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의 음식을 더 사모하고 만나를 먹는 것을 불평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하기보다는 저 세상 것을 더 사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고난 당하기보다는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 아닙니까 다음 주가 고난 주간이다. 구약에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다가오는 예수 그리스도 고난을 준비하는 자가 되자. 그리스도 고난을 모르고 예수를 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리스도 고난에 동참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 하면 거짓 신앙이다. 우리가 만나를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의 고난을 더 깊이 깨닫게 되기를 축원한다 첫 째:만나의 모양. 7절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만나가 깟씨처럼 작은 것이었다는 것은초림 예수의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작은 자로서 이 땅에 오셨다. 태어나실 때도 유대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 오셨다. 외모도 체격도 볼품없이 작고 초라하셨다. 이 땅에 사시면서도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으셨다. 깟씨 처럼 작은 자의 일생을 살으셨다. 또 진주 같다는 것은 귀한 자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진주는 당시에 보석으로는 아주 귀한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귀하신 분이시다.
깟씨 지중해 도처에서 자라나는 미나리과의 일년생 약초이다. 씨앗이 약 3 mm 정도에 불과하는 아주 작은 것이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것이다. 진주 다이아몬드가 가장 보석이지만 다이아몬드는 15세기 이후에야 발견된 옥석이다. 예수 초림때 까지는 진주가 가장 귀한 보석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소리 없이 이슬과 함께 내렸던 만나의 모양은 귀한 보석인 진주와 같았듯이 예수님도 타락으로 어두어진 이 땅에 소리 없이 귀하신 분이 내려 오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만나가 작은 깟씨 같았던 것처럼 우리 예수님 또한 작은 깟씨처럼 이 땅에 오셨고 그렇게 살다 가셨다. 만나가 작은 깟씨 같었지만 많은 생명을 살렸듯이 예수님 또한 작은자로 살았지만 많은 생명을 지금도 살리고 계신다 만나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신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만나를 주신 것은 낮추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고도 낮아지지 아니했다. 낮아지기는커녕 더욱 원망하고 불평하고 방방 뛰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으면 더욱 낮아지고 작아져야 할 터인데 그러기는커녕 더욱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높아지려고만 하지 낮아지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우리 예수님은 깟씨 만나처럼 죽기까지 낮아졌다고 빌 2:8에 말씀하고 있다. 성도 여러분! 만나를 먹었습니까 예수 만나를 만나셨습니까 예수 만나를 마음속에 모시고 계십니까 낮아져야 한다. 작은 자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작아지지 않고 겸손해지지 않은다면 우리는 아직 만나되신 예수를 못 만난 자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큰 소리가 많이 난다. 서로가 높아질려는 소리다. 큰 자와 높은 자는 많아도 작은 자와 겸손한 자는 보기 힘든 시대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작은 자가 되자.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큰 자로 사용하여 주실 것이다. (마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러나 반대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는 낮아지게 할 것이다. (마20:26-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또 만나는 진주 같다고 했다. 이것은 초림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진주와 같다는 말씀이 된다. (마13:45-46)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구원 성도는 마치 "진주 장사" 하는 사람과 같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값진 진주를 만나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다. 여기서 값진 진주는 초림의 만나 이신 예수님 이시다. 성도는 이제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뒤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여야만 한다. 예수보다도 더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찬 양'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성도 여러분 ! 이렇게 귀한 진주되신 예수를 우리를 정말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이 시대 예수가 귀하게 여겨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보다는 세상 것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소유보다 예수를 더 귀하게 여긴다. 귀한 예수를 소중히 여기며 신앙생활을 해야만 한다. 진주는 귀한 보배이기에 잃어버리기 쉽고 빼앗기기도 쉽다. 마찬가지로 귀한 예수 믿음을 이 세상 물질 유혹에. 세상의 명예에 권력에 출세에 세상 것들에게 쉽게 빼앗기기 쉽다.
그러므로 잘 간직하여야만 한다. 이 귀한 진주되신 예수를 우리에게 빼앗아 가기 위해서 저 흑암의 권세들은 지금도 우리를 미혹하고 있다. 그 어떤 것을 희생하더라도 귀한 예수를 놓치면 안된다. 두 번째:만나를 어떻게 먹었는가 8절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거두어서 먹는 방법이 놀랍도록 우리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이렇게 똑같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의미도 모르고 그들이 만나를 그렇게 해서 먹었지만 이것은 만나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실 고난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맷돌에 갈기도 맷돌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타한"인데 이 뜻은 "잘게 부수다" 이다 복음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계명,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온전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고난을 통하여 가루가 되셨다. (빌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절구에 찧기도 예수가 육체적으로 고난과 상하심으로 외부적으로 핍박과 환난을 당하신 것을 의미한다. 절구통에 덩어리를 넣고 찧으면 껍질이 벗겨지고, 터지고 깨어지고, 부수어뜨려져서 모든 것이 다 속살로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런 고통을 당하셨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가마에 삶았다. 여기서 "가마"란 히브리어로 "파루르" 인데 이 뜻은 "혈과 생기를 완전히 죽이고 살균시키는 항아리 돌그릇 솥 " 이라는 뜻이다. 복음적인 의미로는 인간의 모든 육이 완전히 끝나 버리는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무덤 속에서 3일 동안이나 묻혀 있었다는 것은 만나를 가마에 넣고 삶은 것과 같은 의미이다. (막15: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맛은 기름 섞은 과자맛 이것은 은혜의 복음을 의미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쁨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맷돌에 갈고 절구에 찧고 가마에 삶아서 먹어서 목숨을 건졌듯이 우리 또한 만나되신 예수를 만나야만 영원한 생명을 가질수 있다. 구약에 만나가 맷돌과 절구와 가마에서 만들어 졌듯이 우리 예수님도 맷돌 같은 온전한 순종함과 절구통에서 당하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당했고 가마속 같은 무덤 속에까지 들어 가셨다. 이러한 고난을 왜 당하셨는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몸소 당하셨다. 만나를 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신 8:16 낮아지게 하려고 먹이셨다고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만나를 먹고도 낮아지지 아니했다. 더욱 원망과 불평은 심해만 같다. 우리에게 만나 되신 예수를 믿게 하고 따르게 하신 것은 우리보고 세상에서 높아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온전히 섬기는 삶을 사시다가 가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빛이 되라고 하셨다. 소금이 되라고 하셨다. 이것은 세상 속에서 우리가 높아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가 희생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의 빛이 되셨고 소금이 되셨다. 빛이 되시고 소금이 되실 수 있는 것은 맷돌에 갈리는 단계를 통과 하셨기 때문이고, 절구통에 찧어지는 고통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고 가마솥 같은 무덤 속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 또한 그냥 세상 속에서 빛이 될 수 없고 소금이 될 수 없다. 주님이 당하신 그 단계를 우리들 또한 거쳐야만 한다 우리의 육적인 성품이 맷돌에 갈리우는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맷돌에 갈리어 가루가 되는게 무엇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 하셨다. 우리 또한 말씀에 순종하여야 만이 내 육적인 성품이 가루가 되어져서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어찌할꼬" 하는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야만 한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절대로 좋은 게 아니다. 가시적이고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성도 여러분 !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우리의 육적인 성품은 가루가 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 내 모습을 비쳐 보면서 우리의 심령이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할 때 우리는 점점 가루가 되어져 갈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변함이 없고 모난 곳이 그대로 있다면 . 아니 자꾸 더 모난 곳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가루 되기를 포기한자 일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능력이 없다고 생각지 말라 !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우리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가루는 바로 하나님 심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의 가루로 소금의 가루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려면 우리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따라야만 한다.
둘째 단계는 절구통에 찧어지는 단계를 거쳐야만 세상에서 빛을 발하고 소금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예수님은 이 절구통 단계를 거치셨다. 이루말로 다 할수 없는 고통과 핍박과 수모를 주님은 당하셨다. 이 단계를 통과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에 빛이 되셨고 소금이 되셨다. 우리 또한 반드시 이 절구통 같은 고난의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행14:22) "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 성도는 고난이 없이는 신앙이 성장하지 않은다. 고난은 우리에게 아프고 괴로운 것이지만 반드시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이 단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약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벧전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 고난은 싫어하고 축복만 원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사용할 수가 없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한다
셋째는 가마솥 단계다 .이것은 온전히 죽는 단계다. 우리 주님은 온전히 죽으셨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을 우리 또한 본 받아야만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셨기 때문에 세상에 빛이 되셨고 소금이 되신 것이다. 우리 또한 죽어야만 한다. 죽으라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목숨을 끓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끓으라는 것이다. (골3:5-6)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우리가 육을 죽이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했다. 왜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게 이렇게 힘드는가 우리의 육을 죽이지 못해서 그런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마16:24) 나를 부인하는 삶 이것은 나를 죽이는 삶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죽지 아니하면 세상은 변함이 없다 내가 내 가정은 변함이 없다. 우리 교회는 . 우리는 죽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골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면 우리는 이제 세상 것을 따르고 쫓아서는 안된다. 예수와 함께 죽었다면서도 세상것을 좋아하고 세상것을 탐하고 세상 것을 따르며 산다면 죽은 자의 삶이 아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의 육이 죽으면 다시 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이다. 우리의 영이 살아날 때 우리는 육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영을 위해서 살게 되므로 예수를 위해서 살게 되는 것이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자의 삶이 바로 죽은 자의 삶이다. 유대 학자 니고데모가 어느 날 밤 예수님을 찾아왔다. 니고데모는 말씀도 잘 알고 하나님을 자칭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나야만 한다는 말을 해주셨다. 니고데모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네가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즉 이제 너는 죽어야만 이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이 상태로는 너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시대 우리 주위에 예수를 믿는다는 많은 자들의 신앙이 육적인 상태에서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안에서 아직 죽어지지 않고 있다. 이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얼마나 힘이 든지 모른다. 왜 힘이 드는가 죽지 안해서 그런다. 죽으면 편할턴데. 너무 편히 신앙생활 할 터인데 이들은 죽지 않은다. 이들도 알고는 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죽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세상 줄을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줄을 놓으면 죽는데 . 안 놓고 있다. 성도 여러분 !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거듭난 자의 삶을 살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것들이 아무리 귀해도 우리 예수 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예수 안에서 죽을 때 비로소 깨달아질 것이다 가마솥에 들어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만나가 언제 내렸는가 9절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내려주지 아니했다. 만나는 깊은 밤중에 이슬과 함께 조용히 내렸다. 낮에 내렸다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더 믿을 수 있었건만 하나님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 만나를 내려 주셨다.
밤 어두움을 뜻한다. 이것은 영적으로 타락을 뜻한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한 밤중이었다. 영적으로 타락할 대로 타락한 시대였다. 이슬 이슬은 한 밤중에 내린다. 이슬과 함께 만나는 이 땅에 내렸다. 복음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한다. 이슬은 해가 비치면 사라져 버린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를 알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만나가 한 밤중에 이스라엘 진에 이슬과 함께 조용히 내렸듯이 우리 예수님도 타락한 이 세상에 조용히 이 땅에 오셨다. 만나가 내릴 때 아무도 몰랐듯이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도 아무도 몰랐다. 이슬과 함께 만나가 내렸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 어두운 죄악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조용히 오셨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마9:13) 어두운 세상에 지금도 만나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이슬과 함께 내리고 있다.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에도 만나되신 예수는 찾아 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왜 모르는가 죄악 때문이다. (요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시대 너무나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사는 것 같다. 이 나라에 주신하나님의 은혜를 이 백성이 저버리고 있다. 이 나라 교회 위에 너무나 많은 은혜를 주셨다. 믿는 자들에게 너무 많은 은혜를 주셨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은혜를 간수하지 못했다. 탐욕으로 채우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에 내린 만나를 날마다 거두게 하셨다. 7일째에는 만나를 내려 주지 아니했다. 매일 만나를 거두되 아침까지는 남겨두지 말라고 했다. 즉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6일째에는 다음날 것까지 거두도록 허락 하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했다. 어떤 자는 많이 거두어서 다음날까지 남겨 두었다. 남겨둔 만나는 벌레가 생기고 상해 버렸다. 7일째에도 만나를 구하러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가서 만나를 구했다. 만나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출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만나는 주신 목적이 백성들을 살기 위함만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더 깊은 뜻이 있었다. 백성들이 말씀대로 사는가 안 사는가 보셨다. 또 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 만나가 무엇을 예표한 것인가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생명의 양식이다. 예수님이 친히 (요6장) 에서 말씀 하셨다. (요6:31-35) 다같이 읽어보자. 만나를 매일 구했듯이 우리들도 매일 예수 신앙을 잊어서는 안된다. 7일째 되는 주일은 온전히 주님을 위한 하루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만나되신 예수를 만났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육을 위해서 예수를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하고 예수로 인해 축복을 받은 우리가 탐욕으로 만나를 구한 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만나는 해가 뜨면 없어져 버렸다. 만나는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상징은 실제가 나타나면 필요가 없게 된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 무엇 때문입니까 내 육을 위함으로 사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육의 양식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더 중요한 것은 영의 양식이다. 바로 하나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 이다. 성도 여러분! 시대는 갈수록 어두워져 가고 있다. 지금도 이 만나되신 예수는 우리게 내리고 있다. 만나되신 예수를 육을 위해서 믿지 말고 영을 위해서 믿고 전하는 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요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이 보이신 모든 것은 우리가 그대로 하도록 몸소 본을 보이신 것이라고 했다. 만나가 멧돌에 갈리고 절구에 찧기고 가마에 삶은 그 일은 우리 주님은 몸소 다 당하셨다 주님은 우리도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것을 지금 말씀하고 계신다. 이 세 단계가 거치지 않고는 기름 섞은 고소한 과자 맛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고난 없이 성공한 것을 우리는 성공으로 볼 수 없다. 노력 없이 일류 대학에 합격한 것 우리는 박수를 보낼 수 없다. 헬리콥터 타고 아무리 높은 산을 정복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정상 정복으로 볼 수없다. 우리의 신앙도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뜨거운 눈물이 없이 예수를 알고 만났다면 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아닐 것이다. 아픈 가슴으로 만난 예수 잊지 못할 것이다. 상한 마음으로 눈물 때문에 앞이 안 보일 때 만난 예수 잊지 못할 것이다. 고난 가운데서 만난 예수 잊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예수를 만난 사람은 맷돌에 갈리우고 절구에 찧기고 가마솥에 들어가는 고난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예수를 절대로 부인하지 아니하고 하나 뿐인 생명을 걸고 예수를 따를 것이다. 고난주간에 "아! 예수가 고난을 우리 때문에 당하셨구나"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우리들 또한 그리스도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육만 위해서 내 삶만 위해서 예수 믿는 자세 이제는 버리자 ! 육만 위한 신앙인 이 될 때 어느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인간은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고등동물이라고 한다. 짐승들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주인을 잊지 아니한다. "만나되신 예수를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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