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와 절재의 삶 (민12:1-3)
본문
그동안 저와 여러분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통해 성령님의 열매에서 나타나는 9가지의 요소에 대해 묵상해 왔습니다. 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의 삶에 대한 강론들이 바로 성령님의 열매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오늘은 이런 7가지의 요소에 이어 성령님의 8번째 요소인 온유와 9번째 요소인 절제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온유와 절제의 삶이라는 강론 이전에 한가지 사실을 참고로 말씀을 드리고 오늘 의 말씀을 전개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성령님의 열매에 대해 강론을 하면서 사랑의 열매 , 희락의 열매라는 말을 쓰지 않고 사랑의 요소 , 희락의 요소 , 온유의 요소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왜 제가 열매라는 말을 쓰지 않고 요소라는 말을 썼겠습니까 그것은 성령님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원문에 의하면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열매니 희락의 열매니 하면서 9가지의 열매로 이루어진 복수의 성령님의 열매들 이 아니라 한 성령님의 열매속에 9가지의 요소 사랑의 요소 , 희락의 요소등 9가지의 성 분을 가진 하나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과가 있으면 그 속에 여러가지 성분의 요소들로 이루어 진것과 똑같 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개의 사과가 잘익은 사과가 되기 위해서는 그 여러가지 성분들이 고루고루 있어야 하는것처럼 우리가 옳바른 성령님의 열매를 소유한 옳바른 균형잡힌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9가지의 성령님의 요소들을 고루고루 가지고 있어야만 되는것입니다. 이제 이런 기본적인 말씀에 대한 배경속에서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성령님의 허락하심속에서 민수기 12:1-3의 말씀을 봉독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속에서 말씀의 촛점이 온유함이라는 단어로 집중되어 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낮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데체 어떻게 해서 모세가 온유하다는 것입니까 모세의 어떤 부분이 온유하기에 하나님께서 온유하다고 인정을 했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상식선에서 볼때 모세는 절대로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는 그의 혈기로 애굽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을 했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선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윤리 규범으로 볼 때에 완전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실수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나이 100살이 넘었을때 구스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에디오피아 여자 피부가 검은 종을 소실로 삼았던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서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에 모세의 누나와 형이 그 일에 대해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그 비방은 비방할 만 한 것이며 , 비방을 듣는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방을 듣는 모세를 두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까 " 아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방을 들어 마땅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시고 오히려 비방을 한 누나 미리암에게는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도저히 인간의 머리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속에서 온유함이라고 하는것이 무엇인지 혼돈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 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을때 그 누구도 그 말에 대해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를 두고 그가 온유하다고 했을때 그냥 순순하게 받아 들일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설교를 하는 본인부터도 마음속에 큰 의아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 이런 의심은 기우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눈으로 다시 한번 더 본문을 대할때 우리 기독교의 큰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 인간적으로 볼 때 모세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새우기 위해 나일강에서 구해주시고 , 애굽의 궁궐에서 40년간 세상의 최고 교육을 시키시고 , 광야에서 40년간 하나님의 특수 교육을 받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광야에서의 40년간의 교육에 대해 어떤 신학자가 아주 재미있게 표현을 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동안 하나님으로 부터 교양과목과 목양학과 기본 신학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교양과목은 광야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요 목양학은 길 잃은 양을 발견하고,보호하고,인도하고,양털을 깎고,잃은 양을 찾기까지 의 인내를 배운다는것입니다.
기본신학은 출 3:13에 나오는 말씀인데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말하리이까 " 이물음에 하나님 께서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모르고 있었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론 , 하나님을 아는 기본신학인 것입니다. 이렇게 8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모양으로 여러방법으로 교육시킨 하나님께서 모세가 잠시 실수를 하여 비방을 받고 있을때 하나님께서 그 비방하는 말을 듣고 있다 가 하시는 말씀이 "이 사람은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 사람의 온유함에 대한 평가는 누가 내리고 있습니까 한 사람의 온유함에 대한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 온유함에 대한 평가요 기준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배움을 받은 사람이 인간적인 실수 가운데서도 하나님 보시기 에 온유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비난을 하고 비방을 해도 하나님께서 온유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온유한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 그의 삶을 추적해 보면 앞에서 언급한데로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삶은 여기서 끊나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온유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철저하 게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애굽의 궁궐에서 40년동안이나 그 당시의 최고의 공부를 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모든일에 자신감이 있었고 당당했습니다.그로인해 교만했습니다. 온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온유하지 못한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훈련을 시키십니까 광야로 보냅니다.왕자의 신분에서 목동의 신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철저하게 낮아지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비참하리 정도로 낮아졌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내시기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마지막 훈련을 시키는 구체적인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훈련 장면을 보면 철저하게 낮아져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모세의 모습을 발견하 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는 모세 ! 하나님의 능력까지도 의심하는 모세 !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 하나님의 이름도 가르쳐주시고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내 보여줍니다. 이렇게 훈련을 시킨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 굽시키는데 지도자로 세웁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출 4:11-12 ,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자나 소경 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 할 말을 가르치리라 온유한 자의 시작은 이렇게 철저하게 낮아지는데서 부터 시작이 되어지고 철저한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우리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높은 보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이라는 광야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30년동안 우리 인간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를 받으실때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리고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이런 예수님과 모세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모세의 공통점은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철저하게 낮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로 이루어 진것입니다. 흔히들 신학적으로 말하기를 구약은 신약의 성취를 위한 모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의 모세와 신약에서의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을 통해 예수님의 온유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이렇게해서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프로그램속에서 철저하게 온유함의 훈련을 받고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비록 그가 연약하고 나약하고 혈기있었던 자였지만 하나님께서 쓰시고자할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온유한 사람으로 변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까 우리도 역시 온유한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로인해 더럽고 추악하고 나약하고 볼품없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원하신다면 우리 역시도 모세처럼 많은 훈련을 통해 온유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가장 큰 위로를 받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야고보서 5:17-18의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말고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역시도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신앙의 선조들과 똑같은 사람이 될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희소식인 것입니다. 모세가 온유한 사람이라면 우리 역시도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거꾸로 못박혀 순교했다면 우리 역시도 그런 순교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 세계를 복음화시킨 선교사가 되었다면 우리 역시도 그런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 이런 무한한 실현가능한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나약해야만 합니 까 이렇게 긴가민가하는 의심속에서 살아야만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요 권속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서 훈련을 시키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합당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사실도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75년동안 정들었던 본토 갈데아 우르를 떠나라고 할 때 믿고 순종하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때 미련없이 바쳤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우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그를 붙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애굽에 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만 한다면 저들 신앙의 조상들과 우리들 사이에서 생기는 차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모세가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면 우리 역시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온유한 사람이 될때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복을 받고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최종적인 승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온유한자에 대한 약속입니다. 사실 온유라고 하는것은 쩔쩔매면서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이고 바보처럼 구는것 이 아닙니다. 온유는 자신에게 권리와 힘과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경건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생산적인 목적으로 그 힘이 통제되어지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온유함이 있을때 결국에는 승리를 하게 되고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온유함이 어데게 생깁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훈련과 그에 다른 우리의 순종함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온유함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유함으로 인해 주어지는 축복을 받아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제 마지막으로 성령님의 열매의 마지막 요소인 절제에 대해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절제라고 하는것은 성령님의 열매를 구성하는 마지막 요소입니다. 이 절제는 영어로 셀프 콘트롤이라고 부르는데 자기자신을 통제하고 조정하는것입니다. 잠언서 25;28에보면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절제하지 못했을때 음행을 하게 되고 분쟁을 하게 되고 술취하고 방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제를 하게 될때 우리의 내적인 인간은 요세화가 되어집니다. 절제는 파괴적인 악의 세력들을 대항하고 그 주변에 방어벽을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절제의 생활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1) 우리는 말에 있어서 절제해야 합니다. 약 1:26에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 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을 헛 것이라 "고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신이 말이 많다는 결점을 깨닫고난 후부터는 식사 시간이나 설교 시간 외에는 3년 동안이나 항상 입에 자갈을 넣고 다니면서 말에 조심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실수의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 않아도 되고 ,해서는 안 될 말을 절제하지 못하고 함부로 하다가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하게도 되는 경우가 많이 있씁니다. 시 34:13에 보면 " 네 혀를 악에서 금하여 네 입술을 간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 라 고 했습니다. 또 잠 10:19에도: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 가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는데 있어서 절제를 해야 됩니다.
2)우리는 보는 것에도 절제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죄는 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귀의 유혹도 눈으로부터 들어오기 쉽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도 마귀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게 되자, 그 선악과를 보니 그야말로 "보암직도 하고 , 먹으직도 하고 ,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생기는 모든 죄는 눈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간음죄도 , 도덕질도, 살인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군 다윗도 그토록 점잖고 흠과 티가 없을 정도의 훌륭한 임금이지만 그래서 하나님 으로 부터 내 마음에 합당한 자라는 칭찬을 들은 사람이지만 어느날 옥상 위에서 민가 를 내려다 보다가 어느 아릿따운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여 무서운 간 음죄를 범하고 나중에는 그 여인의 남편의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하게 된 것 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토록 안목의 정욕은 무서운 것입니다.
3)우리는 먹는데도 절제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먹는 것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의 본능중에는 무엇보다도 식욕이 제일 강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에서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팥죽 한 그릇에 귀한 장자권도 동생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평생에 그리고 자자손손에 이어질 하나님의 축복을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먹는것을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먹을 것과 안 먹을 것을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서 우리 몸에나 정신에나 어떤 면에도 하나의 유익이 없는 술과 담배같 은 것, 우리 신앙인의 양심으로 금해야 마땅한 것 !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잠 23:29에 보면 "재앙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 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 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요 또 네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은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고 했습니다. 술이라는 것이 우리의 영육간에 백해무익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날 악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온갖 유혹을 다 합니다. 올무를 쳐놓고 걸려 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삼손과 같이 영적인 힘도 다 잃어 버리고 믿음도 다 팔아버리게 되고 신령한 눈이 어두워져서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먹는데에 있어서 절제를 해야 합니다.
4)우리는 육신의 정욕 특히 성욕을 절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시대야 말로 음란한 세대입니다. 조금전에 말씀드린 삼손의 비극도, 다윗왕의 범죄도, 이 정욕을 절제하지 못해서 무서 운 실수와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일어날 때 마다 그는 자기의 팔을 물어 뜯어 가면서 참고 이겨 나갔다고 합니다. 그외에 초대교회 교부들중에도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려고 추운 겨울날에도 맨 마루 바닥에 누워자고 가시덩굴에 딩굴면서 자신의 몸에 피가 나도록 몸을 괴롭히면서 까지 참고 절제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기분나는데로 나타내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혈기,시기,질투 이 모든 감정을 잘 제어 할 줄 알아야 올바른 신앙생활과 건전한 인격을 갖출수 있게 됩니다. 잠 14:30에 보면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제어하고 절제하는 자가 훌륭한 사람이요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옳바른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절제해야 될 부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말하는것,보는것,먹는것,육신의 정욕 그리고 감정까지도 절제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성령님 하나님께서 우리속에 임재하시는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속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충만함이 우리속에 있어야 되고 하시고 , 성경을 많이 묵상하셔서 아름답게 고루고루 잘익은 성령님의 열매 를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셔서 올 1993년은 정말로 후회없는 보람되고 행복한 한해 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한개의 사과가 잘익은 사과가 되기 위해서는 그 여러가지 성분들이 고루고루 있어야 하는것처럼 우리가 옳바른 성령님의 열매를 소유한 옳바른 균형잡힌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9가지의 성령님의 요소들을 고루고루 가지고 있어야만 되는것입니다. 이제 이런 기본적인 말씀에 대한 배경속에서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성령님의 허락하심속에서 민수기 12:1-3의 말씀을 봉독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속에서 말씀의 촛점이 온유함이라는 단어로 집중되어 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낮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데체 어떻게 해서 모세가 온유하다는 것입니까 모세의 어떤 부분이 온유하기에 하나님께서 온유하다고 인정을 했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상식선에서 볼때 모세는 절대로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는 그의 혈기로 애굽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을 했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선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윤리 규범으로 볼 때에 완전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실수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나이 100살이 넘었을때 구스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에디오피아 여자 피부가 검은 종을 소실로 삼았던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서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에 모세의 누나와 형이 그 일에 대해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그 비방은 비방할 만 한 것이며 , 비방을 듣는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방을 듣는 모세를 두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까 " 아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방을 들어 마땅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시고 오히려 비방을 한 누나 미리암에게는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도저히 인간의 머리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속에서 온유함이라고 하는것이 무엇인지 혼돈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 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을때 그 누구도 그 말에 대해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를 두고 그가 온유하다고 했을때 그냥 순순하게 받아 들일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설교를 하는 본인부터도 마음속에 큰 의아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 이런 의심은 기우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눈으로 다시 한번 더 본문을 대할때 우리 기독교의 큰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 인간적으로 볼 때 모세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새우기 위해 나일강에서 구해주시고 , 애굽의 궁궐에서 40년간 세상의 최고 교육을 시키시고 , 광야에서 40년간 하나님의 특수 교육을 받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광야에서의 40년간의 교육에 대해 어떤 신학자가 아주 재미있게 표현을 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동안 하나님으로 부터 교양과목과 목양학과 기본 신학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교양과목은 광야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요 목양학은 길 잃은 양을 발견하고,보호하고,인도하고,양털을 깎고,잃은 양을 찾기까지 의 인내를 배운다는것입니다.
기본신학은 출 3:13에 나오는 말씀인데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말하리이까 " 이물음에 하나님 께서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모르고 있었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론 , 하나님을 아는 기본신학인 것입니다. 이렇게 8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모양으로 여러방법으로 교육시킨 하나님께서 모세가 잠시 실수를 하여 비방을 받고 있을때 하나님께서 그 비방하는 말을 듣고 있다 가 하시는 말씀이 "이 사람은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 사람의 온유함에 대한 평가는 누가 내리고 있습니까 한 사람의 온유함에 대한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 온유함에 대한 평가요 기준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배움을 받은 사람이 인간적인 실수 가운데서도 하나님 보시기 에 온유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비난을 하고 비방을 해도 하나님께서 온유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온유한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 그의 삶을 추적해 보면 앞에서 언급한데로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삶은 여기서 끊나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온유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철저하 게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애굽의 궁궐에서 40년동안이나 그 당시의 최고의 공부를 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모든일에 자신감이 있었고 당당했습니다.그로인해 교만했습니다. 온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온유하지 못한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훈련을 시키십니까 광야로 보냅니다.왕자의 신분에서 목동의 신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철저하게 낮아지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비참하리 정도로 낮아졌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내시기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마지막 훈련을 시키는 구체적인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훈련 장면을 보면 철저하게 낮아져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모세의 모습을 발견하 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는 모세 ! 하나님의 능력까지도 의심하는 모세 !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 하나님의 이름도 가르쳐주시고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내 보여줍니다. 이렇게 훈련을 시킨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 굽시키는데 지도자로 세웁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출 4:11-12 ,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자나 소경 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 할 말을 가르치리라 온유한 자의 시작은 이렇게 철저하게 낮아지는데서 부터 시작이 되어지고 철저한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우리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높은 보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이라는 광야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30년동안 우리 인간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를 받으실때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리고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이런 예수님과 모세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모세의 공통점은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철저하게 낮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로 이루어 진것입니다. 흔히들 신학적으로 말하기를 구약은 신약의 성취를 위한 모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의 모세와 신약에서의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을 통해 예수님의 온유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이렇게해서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프로그램속에서 철저하게 온유함의 훈련을 받고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비록 그가 연약하고 나약하고 혈기있었던 자였지만 하나님께서 쓰시고자할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온유한 사람으로 변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까 우리도 역시 온유한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로인해 더럽고 추악하고 나약하고 볼품없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원하신다면 우리 역시도 모세처럼 많은 훈련을 통해 온유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가장 큰 위로를 받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야고보서 5:17-18의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말고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역시도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신앙의 선조들과 똑같은 사람이 될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희소식인 것입니다. 모세가 온유한 사람이라면 우리 역시도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거꾸로 못박혀 순교했다면 우리 역시도 그런 순교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 세계를 복음화시킨 선교사가 되었다면 우리 역시도 그런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 이런 무한한 실현가능한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나약해야만 합니 까 이렇게 긴가민가하는 의심속에서 살아야만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요 권속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서 훈련을 시키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합당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사실도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75년동안 정들었던 본토 갈데아 우르를 떠나라고 할 때 믿고 순종하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때 미련없이 바쳤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우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그를 붙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애굽에 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만 한다면 저들 신앙의 조상들과 우리들 사이에서 생기는 차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모세가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면 우리 역시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온유한 사람이 될때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복을 받고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최종적인 승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온유한자에 대한 약속입니다. 사실 온유라고 하는것은 쩔쩔매면서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이고 바보처럼 구는것 이 아닙니다. 온유는 자신에게 권리와 힘과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경건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생산적인 목적으로 그 힘이 통제되어지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온유함이 있을때 결국에는 승리를 하게 되고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온유함이 어데게 생깁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훈련과 그에 다른 우리의 순종함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온유함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유함으로 인해 주어지는 축복을 받아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제 마지막으로 성령님의 열매의 마지막 요소인 절제에 대해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절제라고 하는것은 성령님의 열매를 구성하는 마지막 요소입니다. 이 절제는 영어로 셀프 콘트롤이라고 부르는데 자기자신을 통제하고 조정하는것입니다. 잠언서 25;28에보면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것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절제하지 못했을때 음행을 하게 되고 분쟁을 하게 되고 술취하고 방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제를 하게 될때 우리의 내적인 인간은 요세화가 되어집니다. 절제는 파괴적인 악의 세력들을 대항하고 그 주변에 방어벽을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절제의 생활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1) 우리는 말에 있어서 절제해야 합니다. 약 1:26에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 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을 헛 것이라 "고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신이 말이 많다는 결점을 깨닫고난 후부터는 식사 시간이나 설교 시간 외에는 3년 동안이나 항상 입에 자갈을 넣고 다니면서 말에 조심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실수의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 않아도 되고 ,해서는 안 될 말을 절제하지 못하고 함부로 하다가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하게도 되는 경우가 많이 있씁니다. 시 34:13에 보면 " 네 혀를 악에서 금하여 네 입술을 간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 라 고 했습니다. 또 잠 10:19에도: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 가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는데 있어서 절제를 해야 됩니다.
2)우리는 보는 것에도 절제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죄는 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귀의 유혹도 눈으로부터 들어오기 쉽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도 마귀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게 되자, 그 선악과를 보니 그야말로 "보암직도 하고 , 먹으직도 하고 ,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생기는 모든 죄는 눈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간음죄도 , 도덕질도, 살인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군 다윗도 그토록 점잖고 흠과 티가 없을 정도의 훌륭한 임금이지만 그래서 하나님 으로 부터 내 마음에 합당한 자라는 칭찬을 들은 사람이지만 어느날 옥상 위에서 민가 를 내려다 보다가 어느 아릿따운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여 무서운 간 음죄를 범하고 나중에는 그 여인의 남편의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하게 된 것 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토록 안목의 정욕은 무서운 것입니다.
3)우리는 먹는데도 절제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먹는 것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의 본능중에는 무엇보다도 식욕이 제일 강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에서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팥죽 한 그릇에 귀한 장자권도 동생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평생에 그리고 자자손손에 이어질 하나님의 축복을 놓쳐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먹는것을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먹을 것과 안 먹을 것을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서 우리 몸에나 정신에나 어떤 면에도 하나의 유익이 없는 술과 담배같 은 것, 우리 신앙인의 양심으로 금해야 마땅한 것 !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잠 23:29에 보면 "재앙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 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 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요 또 네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은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고 했습니다. 술이라는 것이 우리의 영육간에 백해무익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날 악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온갖 유혹을 다 합니다. 올무를 쳐놓고 걸려 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삼손과 같이 영적인 힘도 다 잃어 버리고 믿음도 다 팔아버리게 되고 신령한 눈이 어두워져서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먹는데에 있어서 절제를 해야 합니다.
4)우리는 육신의 정욕 특히 성욕을 절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시대야 말로 음란한 세대입니다. 조금전에 말씀드린 삼손의 비극도, 다윗왕의 범죄도, 이 정욕을 절제하지 못해서 무서 운 실수와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일어날 때 마다 그는 자기의 팔을 물어 뜯어 가면서 참고 이겨 나갔다고 합니다. 그외에 초대교회 교부들중에도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려고 추운 겨울날에도 맨 마루 바닥에 누워자고 가시덩굴에 딩굴면서 자신의 몸에 피가 나도록 몸을 괴롭히면서 까지 참고 절제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기분나는데로 나타내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혈기,시기,질투 이 모든 감정을 잘 제어 할 줄 알아야 올바른 신앙생활과 건전한 인격을 갖출수 있게 됩니다. 잠 14:30에 보면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제어하고 절제하는 자가 훌륭한 사람이요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옳바른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절제해야 될 부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말하는것,보는것,먹는것,육신의 정욕 그리고 감정까지도 절제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성령님 하나님께서 우리속에 임재하시는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속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충만함이 우리속에 있어야 되고 하시고 , 성경을 많이 묵상하셔서 아름답게 고루고루 잘익은 성령님의 열매 를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셔서 올 1993년은 정말로 후회없는 보람되고 행복한 한해 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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