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인 무리 (느13:1-3)
본문
열매가 익기 전에 농토는 참 바쁜 손길을 요구합니다. 특히 넓은 밭에 가라지는 농부의 마음을 아프 하고, 바쁜 일손을 더디게 합니다. 가라지는 농부에 적입니다. 가라지는 곡식이 아니면서도 곡식과 섞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장에도 가라지와 같은 섞인 무리들이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60만의 장정들이 나왔는데, 그들 중에 섞인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중다한 잡속들이 선민들과 함께 있었다. 출12:37-38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 이방인과 결혼하여 혼혈족이 된 사람들은 잡족으로 구별되어 천민으로 취급을 받았다. 선민인 이스라엘에게 이방인과 잡혼 관계로 인하여 생긴 잡족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스라엘의 거침돌이 되었다. 섞인 무리들은 매사에 부정적이고, 성령님의 역사를 거슬려 왔다. 섞이 무리들이 누구인가 오늘 우리는 구원의 길에 들어선 우리가 섞인 무리와 같은 성도는 아닌가 돌아보며 깨닫고 변화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섞인 무리들은 성전에 거침돌이 되었다. 섞인 무리는 아름다운 포도우너을 헐어뜨리는 여우처럼 성전에 대하여 도전하였고, 푸르고 기름진 목장을 유린하는 자들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남과 북으로 분리되었을 때, 혼혈족인 사마리아 사람들이 있었다. 스룹바벨이 성전을 지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도 성전을 짓는데 함께 참여하겠다고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잡족들이 지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시기하여 자기들이 사는 곳에 가증스런 우상의 제단을 쌓았다. 에스라 선지자가 성전을 재건할 때도 사마리아 사람이 방해를 하며 온갖 모략과 중상을 일삼았다. 그 결과 성전 재건이 15년이나 중단되었던 것이다. 느헤미야 선지자가 성을 재건할 때도 산발랏과 도비야가 스마야를 매수하여 거짓 예언을 하게 하였고, 기회만 있으면 느헤미야 선지자를 살해하려고 하였다. 섞인 무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거침돌이 된다. 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섞인 무리들은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교회에 불화를 조성하며, 교회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하고, 교회를 허는 무리들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와 같이 섞인 무리들이 존재한다. 교회의 불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교회의 불화가 있어서 문제의 근원을 캐보면 언제나 한, 두명의 섞인 무리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맑은 물을 온통 흐리게하는 것과 같다. 교회는 한두명의 섞인 무리에 의하여 흐려지는가 하면, 한두명의 깨어있는 사람의 의하여 뜨거워지고 변화되기도 합니다.
2. 섞인 무리들은 하나님의 종(사역자)에게 불평을 조장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할 때 섞인 무리들은 선량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모세를 원망하게 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마실 물이 없다고 하며 계속하여 백성들의 불평을 조장하였고,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양식에 대한 불평 섞인 무리들이 양식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고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섞인 무리들의 요구대로 하나님은 주셨습니다. 섞인 무리들이 실제로 요구한 것은 단순한 빵과 고기가 아니라 애굽의 빵과 고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워하였습니다. 배불리 먹던 때를 말하며 빵과 고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탐욕 의한 것입니다. 섞인 무리들이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늘의 양식이 아니라 애굽의 배부른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아니라 자기의 배를 불리우며 정욕을 체우는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불평하며 애굽의 양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식에 대한 불평은 영적인 생명인 말씀에 대한 불평으로 오늘날 나타나고 있습니다. 길으면 길어서 불평, 짧으면 짧아서 불평, 너무 쉬우면 목사님이 공부도 안한다고 불평, 너무 어려우면 어렵다고 불평, 기도에 대한 설교를 많이하면 기도만 말한다고 불평, 예수의피에 대하여 설교하면 왠 “피” 얘기냐고 불평. 자기의 모습에 대해 조그만 지적이 있어도 도둑이 제발저리다고 목사님은 나만 친다고 불평. 결국 말씀에 대한 불평은 자기 입맛에 안맞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음식은 우리의 입맛에 맞추어서 소금도 넣고 미원도 넣고 간을 해서 먹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길은 우리와 다르기에 그 말씀이 우리의 입맞에 안맞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고, 능력이 있는 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며 순종하여 충성된 종. 섞인 무리는 말씀에 대한 불평이 넘칩니다. 아멘하지 않고, 불충성합니다. 목회에 대한 불평 섞인 무리들은 자아내는 지도자에 대한 불평은 큰 죄를 범하게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십계명과 성막의 계시를 받느라 오랜 시간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불평이 시작되었고, 그 불평은 아론에게 향하여 졌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라는 그들의 불평은 그치지 않았고 결국 아론을 죽이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아론은 결국 금을 거두어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인도한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동안 섞인 무리들은 모세에 대하여 아론에 대하여 불평을 시작하였고 결국 우상숭배라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우상을 만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며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섞인 무리들은 그들의 목회에 불평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가 인간의 편리와 계산과 방법에 의하여 이끌어져가고 있다. 섞인 무리들은 자기들의 편리대로 방법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어져야 한다.
3. 섞인 무리들은 신적 권위에 도전한다. 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섞인 무리들은 예수에 대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주님에 대한 모독은 곧 하나님께 대한 신적인 도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예수께 침뱉고, 회롱하며, 욕하며,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무리들은 섞인 무리입니다. 섞인 무리들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들입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세계정복을 꿈꾸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한니발, 시이저, 나폴레옹 등 많은 사람들이 세계 정복의 꿈꾸며 많은 나라를 다스렸지만 모두 꿈과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총칼의 정복은 순간적인 것이고, 그것은 한 때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세계지배를 꿈꾼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도전한다. “하나님이 어디있야” “하나님이 있다면 그럴 수가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한 번 보여줘라” 교만, 불순종, 불충성등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고, 섞인 무리들의 행동이다.
4. 섞인 무리를 이기는 성도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선지자 느헤미야도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하자 적들이 간계를 꾸미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고 왕이 되려한다는 소문과 모반을 일으키려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섞인 무리들이 느헤미야를 넘어뜨리려고 온갖 거짓과 술책으로 수고했지만 느헤미야는 쓰러지지 않고 승리하여 이기는 성도의 모습을 보입니다.
1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온갖 술책과 문제 가운데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섞인 무리에게 왜 흔드리며, 넘어지는가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무리 성인군자라고 불려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다. 바울도 자기 안에 끊임없이 죄의 소욕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사람을 바라보면 죄와 문제만이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우리의 삶의 문제의 해결도 마찬가지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 육체의 병을 해결하는 것도, 자녀를 제대로 키우는 것도, 물질을 얻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 섞인 무리들은 교회를 흔들고,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부정적이게 만든다. 초신자들과 불신자들이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어떠해야 하는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
2 기도해야 합니다. 섞인 무리를 이기는 비결은 기도해야 합니다. 섞인 무리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인간적이다. 그러나 거기에 함정이 있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신앙과는 배치된다는 사실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속에 섞인 무리들의 요구는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것이었다. 떡과 고기를 찾는 것,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는 것등. 그렇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섞인 무리들의 의견에 동조했고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적이거나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거나, 인간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방법,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기도외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인간적인 말이 아주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것이 최상의 방법인냥 생각된다. 그러나 기도하면 그것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방법이 보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날마다 기도하여 섞인 무리들을 이기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야 한다.
3 우리가 성장해야 합니다. 섞인 무리를 이기기 위해서는 성장해야 한다. 섞인 무리는 가라지와 같다. 이것이 자라고 나면 어쩔수 없이 함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으려다 곡식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라지가 자라기 전에 곡식이 크게 자라면 가라지는 자라나지 못한다. 작년에 교회 화장실 앞에 아주 풀이 많이 자라서 몇번을 베고, 제초제를 뿌렸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곳에 풀이 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콩이 먼저 크게 커서 풀이 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섞인 무리는 연약한 곳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이미 성장한 곳에는 섞인 무리가 자랄 틈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야 한다. 먼저 내 자신이 섞인 무리가 아닌지 돌아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전에 거친 돌 주의 종에 거친 돌-말씀에 불평 목회에 대한 불평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 섞인 무리를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므로 깨어 기도하므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므로
그런데 하나님의 목장에도 가라지와 같은 섞인 무리들이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60만의 장정들이 나왔는데, 그들 중에 섞인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중다한 잡속들이 선민들과 함께 있었다. 출12:37-38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 이방인과 결혼하여 혼혈족이 된 사람들은 잡족으로 구별되어 천민으로 취급을 받았다. 선민인 이스라엘에게 이방인과 잡혼 관계로 인하여 생긴 잡족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스라엘의 거침돌이 되었다. 섞인 무리들은 매사에 부정적이고, 성령님의 역사를 거슬려 왔다. 섞이 무리들이 누구인가 오늘 우리는 구원의 길에 들어선 우리가 섞인 무리와 같은 성도는 아닌가 돌아보며 깨닫고 변화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섞인 무리들은 성전에 거침돌이 되었다. 섞인 무리는 아름다운 포도우너을 헐어뜨리는 여우처럼 성전에 대하여 도전하였고, 푸르고 기름진 목장을 유린하는 자들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남과 북으로 분리되었을 때, 혼혈족인 사마리아 사람들이 있었다. 스룹바벨이 성전을 지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도 성전을 짓는데 함께 참여하겠다고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잡족들이 지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시기하여 자기들이 사는 곳에 가증스런 우상의 제단을 쌓았다. 에스라 선지자가 성전을 재건할 때도 사마리아 사람이 방해를 하며 온갖 모략과 중상을 일삼았다. 그 결과 성전 재건이 15년이나 중단되었던 것이다. 느헤미야 선지자가 성을 재건할 때도 산발랏과 도비야가 스마야를 매수하여 거짓 예언을 하게 하였고, 기회만 있으면 느헤미야 선지자를 살해하려고 하였다. 섞인 무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거침돌이 된다. 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섞인 무리들은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교회에 불화를 조성하며, 교회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하고, 교회를 허는 무리들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와 같이 섞인 무리들이 존재한다. 교회의 불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교회의 불화가 있어서 문제의 근원을 캐보면 언제나 한, 두명의 섞인 무리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맑은 물을 온통 흐리게하는 것과 같다. 교회는 한두명의 섞인 무리에 의하여 흐려지는가 하면, 한두명의 깨어있는 사람의 의하여 뜨거워지고 변화되기도 합니다.
2. 섞인 무리들은 하나님의 종(사역자)에게 불평을 조장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할 때 섞인 무리들은 선량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모세를 원망하게 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마실 물이 없다고 하며 계속하여 백성들의 불평을 조장하였고,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양식에 대한 불평 섞인 무리들이 양식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고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섞인 무리들의 요구대로 하나님은 주셨습니다. 섞인 무리들이 실제로 요구한 것은 단순한 빵과 고기가 아니라 애굽의 빵과 고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리워하였습니다. 배불리 먹던 때를 말하며 빵과 고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탐욕 의한 것입니다. 섞인 무리들이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늘의 양식이 아니라 애굽의 배부른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아니라 자기의 배를 불리우며 정욕을 체우는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불평하며 애굽의 양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식에 대한 불평은 영적인 생명인 말씀에 대한 불평으로 오늘날 나타나고 있습니다. 길으면 길어서 불평, 짧으면 짧아서 불평, 너무 쉬우면 목사님이 공부도 안한다고 불평, 너무 어려우면 어렵다고 불평, 기도에 대한 설교를 많이하면 기도만 말한다고 불평, 예수의피에 대하여 설교하면 왠 “피” 얘기냐고 불평. 자기의 모습에 대해 조그만 지적이 있어도 도둑이 제발저리다고 목사님은 나만 친다고 불평. 결국 말씀에 대한 불평은 자기 입맛에 안맞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음식은 우리의 입맛에 맞추어서 소금도 넣고 미원도 넣고 간을 해서 먹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길은 우리와 다르기에 그 말씀이 우리의 입맞에 안맞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고, 구원이 있고, 능력이 있는 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며 순종하여 충성된 종. 섞인 무리는 말씀에 대한 불평이 넘칩니다. 아멘하지 않고, 불충성합니다. 목회에 대한 불평 섞인 무리들은 자아내는 지도자에 대한 불평은 큰 죄를 범하게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십계명과 성막의 계시를 받느라 오랜 시간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불평이 시작되었고, 그 불평은 아론에게 향하여 졌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라는 그들의 불평은 그치지 않았고 결국 아론을 죽이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아론은 결국 금을 거두어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인도한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동안 섞인 무리들은 모세에 대하여 아론에 대하여 불평을 시작하였고 결국 우상숭배라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우상을 만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며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섞인 무리들은 그들의 목회에 불평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가 인간의 편리와 계산과 방법에 의하여 이끌어져가고 있다. 섞인 무리들은 자기들의 편리대로 방법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어져야 한다.
3. 섞인 무리들은 신적 권위에 도전한다. 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섞인 무리들은 예수에 대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주님에 대한 모독은 곧 하나님께 대한 신적인 도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예수께 침뱉고, 회롱하며, 욕하며,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무리들은 섞인 무리입니다. 섞인 무리들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들입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세계정복을 꿈꾸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한니발, 시이저, 나폴레옹 등 많은 사람들이 세계 정복의 꿈꾸며 많은 나라를 다스렸지만 모두 꿈과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총칼의 정복은 순간적인 것이고, 그것은 한 때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세계지배를 꿈꾼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도전한다. “하나님이 어디있야” “하나님이 있다면 그럴 수가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한 번 보여줘라” 교만, 불순종, 불충성등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고, 섞인 무리들의 행동이다.
4. 섞인 무리를 이기는 성도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선지자 느헤미야도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하자 적들이 간계를 꾸미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고 왕이 되려한다는 소문과 모반을 일으키려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섞인 무리들이 느헤미야를 넘어뜨리려고 온갖 거짓과 술책으로 수고했지만 느헤미야는 쓰러지지 않고 승리하여 이기는 성도의 모습을 보입니다.
1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온갖 술책과 문제 가운데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섞인 무리에게 왜 흔드리며, 넘어지는가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무리 성인군자라고 불려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다. 바울도 자기 안에 끊임없이 죄의 소욕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사람을 바라보면 죄와 문제만이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우리의 삶의 문제의 해결도 마찬가지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 육체의 병을 해결하는 것도, 자녀를 제대로 키우는 것도, 물질을 얻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 섞인 무리들은 교회를 흔들고,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부정적이게 만든다. 초신자들과 불신자들이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어떠해야 하는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
2 기도해야 합니다. 섞인 무리를 이기는 비결은 기도해야 합니다. 섞인 무리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인간적이다. 그러나 거기에 함정이 있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신앙과는 배치된다는 사실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속에 섞인 무리들의 요구는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것이었다. 떡과 고기를 찾는 것,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는 것등. 그렇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섞인 무리들의 의견에 동조했고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적이거나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거나, 인간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방법,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기도외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인간적인 말이 아주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것이 최상의 방법인냥 생각된다. 그러나 기도하면 그것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방법이 보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날마다 기도하여 섞인 무리들을 이기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야 한다.
3 우리가 성장해야 합니다. 섞인 무리를 이기기 위해서는 성장해야 한다. 섞인 무리는 가라지와 같다. 이것이 자라고 나면 어쩔수 없이 함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으려다 곡식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라지가 자라기 전에 곡식이 크게 자라면 가라지는 자라나지 못한다. 작년에 교회 화장실 앞에 아주 풀이 많이 자라서 몇번을 베고, 제초제를 뿌렸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곳에 풀이 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콩이 먼저 크게 커서 풀이 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섞인 무리는 연약한 곳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이미 성장한 곳에는 섞인 무리가 자랄 틈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야 한다. 먼저 내 자신이 섞인 무리가 아닌지 돌아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전에 거친 돌 주의 종에 거친 돌-말씀에 불평 목회에 대한 불평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 섞인 무리를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므로 깨어 기도하므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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