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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을 수용하려면 (느4:1)

본문

당신은 아주 뜻있는 일, 좋은일, 귀한 일 등 보람있는 일을 마음 단단히 먹고 시도하였다가 예기치 않은 반대에 부딪혀 낙망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마 당신은 이 느헤미야서 4장을 실감있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옛 속담에도 호사다마(호사다마)라 하여, 좋은일에는 항상 나쁜 일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승인을 받아 백성들과 협력하여 일을 하는 데도 예기치 않은 커다란 반대에 부딪힙니다.
1. 성 쌓는 일이 비판당함 본문 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산발랏이 우리의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자다 사람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앞에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가 필력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1,2절). 느헤미야와 함께 성을 새는 사람들이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아니, 저들이 하루만에 이 거대한 공사를 마치려는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면 이 엄청난 일이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다 불타버린 벽돌과 보잘것없는 재료를 가지고 저 어마어마한 공사를 저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3절을 보십시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닷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도비야라는 사람은 한술 더 떠서 조롱을 합니다.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겠다. 저런, 어처구니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구. 성경은 '비판'과 '판단'을 구별하고 잇습니다. 판단이라는 것은 언제나 좋은 뜻으로 쓰여지고 빠다이라는 것은 언제나 나쁘게 쓰여집니다. 성경은 판단을 장려하되 비판을 금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별하지 않고 '비판'이라는 한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판을 생산적인 비판과 파괴적인 비판으로 나눌 수 잇습니다. 성경은 생산적인 비판을 장려하고 파괴적인 비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생산적인 비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비판의 동기가 사랑이며 비판의 목적이 긍정적으로 남을 돕기 위한 것이며 또 올바른 수단과 방법안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런 비판을 수용 할 수 잇는 안목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비극은 지도자들이 이러한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아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파괴적인 비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1,2). 파괴적인 비판이란 그릇된 동기에서 시작되는 비판, 부전적인 목적을 위한 비판, 그리고 잘못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비판을 말합니다. 우리는 파괴적인 비판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파괴적인 비판이 나에게 돌아올 때에는 이 비판을 올바로 감당할 수 잇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성 쌓는 일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파괴적인 비판을 한 것입니다. 그릭 그들은 성벽 건축만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시고 허락하신 사역을 비판 했으므로 그들은 사실, 하나님을 향해 비판하고 있엇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에는 산발랏과 도비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산발랏과 도비야에게서 시작된 비판은 점점 주위로 번져서 자기들의 비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파괴적인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항상 비판하는 사람들을 모으기 먀련입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처음에는 산발랏과 도비야만 나타났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숫자가 자꾸만 늘어납니다. 이런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남을 못살게 구는 파괴적인 비판에 동조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까요
2. 주위 사람들의 비판의 영향 우선, 비판과 반대, 조롱과 비웃음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찾아오기 시작한 위기를 본문에서 관찰해 보십시오.
첫째로, 그들은 기운이 다 빠졌습니다. 10절을 본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지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성 쌓는 사람들은 주위의 비웃음에 영향을 받아 할 일이 아지도 많이 남아 있는데 힘이 다 빠졌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그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어떤 큰 일을 하려고 잔뜩 벼르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한참을 그 일에 대해서 헐뜯습니다. 그러면 힘이 다 빠져버리지요. 열심히 주님을 섬기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노력을 하는데 '그것이 밥먹여 주느냐'고 비판을 합니다. 그래서 힘이 다 빠져버린 경험이 있습니까 마귀의 전략 가운데 하나가 김 빼기 작전입니다. 성경에 사단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의 김을 빼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새 힘을 부어 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40장 28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겟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 40:28-31). 새 힘을 더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능력과 힘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잇습니다. 당신이 반대나 조롱과 비판에 부딪혀 힘이 다 빠져버리고 무력감속에 빠졌던 경험이 있었다면 기억하십시오. 그러한 상황의 배후에는 사단이 역사하고 있음을.
둘째로, 그들은 낙심하였습니다.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은 힘이 빠졌을 뿐만이 아니라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낙심합니다. 절망합니다. 낙망합니다. 아, 이제는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버찬 일이야. 이 놀라운 사역을 우리는 감당할 수 없어. 그들은 포기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만들어 낸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교훈적인 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마귀가 악령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타락시키는 일에 사용되었던 무기들을 전시하는 '무기 전시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곳에는 여러가지 무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무기에 제일 비싼 값이 매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을 궁금하게 여긴 악렬들이 마귀에게 물었습니다. "두목님, 이 무기에 왜 이렇게 비싼 가격이 책정되어 있나요" 그러자 두목이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이 무기를 사용하는 줄을 모르지. 그래서 나는 이 무기로 가단히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가 있어. 이 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타락했다구. 그 무기의 이름은 낙망입니다. 당신은 낙심해 본적이 있습니까 이 낙심의 배후에 사단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단은 우리를 절망케 하는 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성령님의 은사 가운데 권위(권위)라는 은사가 있습니다. 즉, 성령님 하나님은 "권고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왜 낙심하십니까 왜 낙망하십니까 왜 절망에 빠집니까 이 모든 낙망과 낙심의 배후에 사단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2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낙망할 수 밖에 없는 환경 속에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비판을 받으셨습니까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헤롯파들, 대제사장들에게 그분은 얼마나 신랄한 반대를 받으셨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을 생각하며 당신의 낙심에서 빠져나오십시오. 세째로, 그들은 두려워 하였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적군들이 실제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적군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쳐들어 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끝장이다라고 지레 겁을 먹고 잇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찾아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리하여 느헤미야는 두려움에 사로자빈 백성들을 격려합니다.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14절). 느헤미야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두려워 말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옵니까 디모데후서 1장 7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즉, 두려움은 마귀에게서 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요일4:16-18).
3. 비판에 대응하는 방법 우리가 파괴적인 비판과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이 될 때에 우리는 무력해지고 낙망 속에 빠지고 두려움의 포로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잇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어려움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상황 속에서 다시 제기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마침내 승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비판에 대응하는 방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본문 1-3절에서 비웃음을 당한 느헤미야가 제일 먼저 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자기들을 비웃는 자들을 향하여 같이 비웃으며 맞선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잘못한 것없이 비판을 당할 때 우리는 그 사람과 맛서 싸우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싸우면 문제의 해결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더 어려운 궁지에 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느헤미야는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를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염려속에 빠져서 좌절하고만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믄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그리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분노와 자기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절망 그리고 모든 괴로움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비립보서 4장 6절 말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 두 분이 심각한 문제 투성이의 교회에 각각 부임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분은 아주 놀라운 승리를 했고 한 분은 거기에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두 분의 목회 방법이 아주 달랐기 때문입니다. 한 분은 굉장히 똑똑한 분이라 교회에 부임한 그 날뿌터 문제를 발생시킨 사람들의 자랒마못을 심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자기의 언변과 지식으로 따져서, 철저하게 사건 규명을 했습니다. 그 사건이 분명하게 규명되자 아무도 목사님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조리있는 말씨와 논리가 분명한 그의 지혜를 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다 해결되엇을 때는 그 교회의 교인들이 다 떠나버리고 한 가람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한편, 또 다른 한 분은 시끄러운 문제들에 대해 전혀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모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셔서 그 문재가들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교회에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당신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앞으로 나아 가십시오.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신 그분께 나아가 모든 문제를 쏟아놓으십시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다 이야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기도의 성자, 죠지 뮬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릎으로 인생의 싸움을 싸우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기독교 신앙의 ABC를 모르는 사람이다."
둘째로, 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만 하고 게으르게 누워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전념햇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기도하면서 현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4장 9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그는 기도하면서,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므로 방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4장 13절 "내거 성 뒤 낮고 넓은 곳에 백성들을 그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게 하고." 성둘레의 어디가 취약지구인가를 발견해 내고 그 취약지구의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4장 16절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황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백성의 일부분은 공사하는 사람으로, 일부분은 경계하는 사람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4장 17절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일하는 자에게 한 손에는 연장을, 한 손에는 병기를 듣게 했습니다. 4장 18절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나팔부는 자를 배치해서, 만일의 경우 경계의 연락 조치를 취하게 했습니다. 4장 22절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안에서 잘찌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겟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하고." 밤에는 보초를 두어 순찰하게 했습니다. 4장 23절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엿으며. " 밤중에도 그들은 옷을 벗지 아니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이와같이 그들은 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도는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일했습니다. 기도와 일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와 일을 분리시키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에 복종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쉬지 않고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까 항상 기도하기 위해서 지그부터 기도원으로 이사가서 그 기도원에서 평생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까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기도만 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문제를 두고 기도하기 위해서 시간을 따로 정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때만이 아니라 모든 시간, 모든 활동에서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무디 목사님이 어느 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는데 그 배 안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그 배 안에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 목사님이 잇다는 것을 안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불이 났습니다. 기도 좀 해주십시오"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화급히 일어나면서 아니오. 물동이를 가져와요. 물을 부어 불을 끄면서 기도해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때 무디 목사님이 그 사람의 요청대로 배 뒤편에서 기도만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었겠습니가 불을 끄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결코 우리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참된 의미입니다. 대영제국과 전 구라파가 나찌의 위협을 받고 있엇을 때에 처칠 경은 주님 앞에 5 분간의 경건한 기도를 드린 후에 단에 나와서 연설을 했습니다. "눈물과 땀을 흘리며 싸웁시다!" 이와같이 기도는 인간의 노력을 배제하지 않습니다.참된 기도는, 기도하기 때문에 우리를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더 잘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두고 기도할 때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세째로,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14절). 크신 하나님 당신의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까 당신은 참으로 크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느헤미야는 지금, 문제 앞에서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는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여러분, 크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만일 그 문제가 우리 주님보다 더 크게 보인다면 정말 문제입니다. 느헤미야는 커다란 문제앞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제보다도 주님이 더 크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불신앙은 문제를 극대화 시키지만 신안은 주님을 더 크게 보이게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더 크게 보게 만들지만 불신잉은 문제를 더 크게 보이게 합니다. 조그만 일만 생겨도 목사님을 찾아 와서 "아이고 목사님, 큰일났어요"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정말 큰일입니다. 또한편, 불가사의한 극한 상황이 닥쳤는데도 "제게는 하나님이 계시니까요"하며 담담하게 그 상황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문제보다 주님을 더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 땅이 어던 땅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하는 보고를 보십시오. 열 명의 믿음없는 사람들과 두 명의 믿음있는 사람들의 보고가 얼마나 다른 보십시오. 열 명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자이 장대한 자들이며.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앗을 것이니라" (민 13:28,32,33).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모든 상황을 분석할 줄 알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 14:8,9).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의 거인들보다 하나님이 휠씬 크신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했습니다. 그의 나이가 백 살이 다 되엇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화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4). 하나님의 관점에서 상황을 볼 줄 아는 사람들, 크신 하나님으로 마확신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문제에 직면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도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이 땅에 없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에게 젊은 신학생 한 명이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낙망하신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놀라운 답변을 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낙망해 본 적이 없네. 나는 그 동안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하고 있었지.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네. 나는 하루에 15분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간 일이 없네. 그때 이래로 나는 낙망을 모르고 살아 왔어. 크신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내 주위의 사람들이 어떠한 비판을 가하여도, 조롱하며 비웃어도 우리는 크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늘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핍박과 반대와 조롱을 당하신 분이 어디 잇습니까 그분은 그러한 문제들을 끌어안고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이 가셔야만 했던 십자가 그 길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 가실뿐 모든 비웃음과 고난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두려우신 하나님 본문 14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사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주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은 두려워 하지않고 환경을 두려워하고 별것 아닌 사건을 두려워합니다. 당신은 내 삶을 끝까지 책임을 지시는 그분을 두려워합니까 그리고 늘 그분을 바라보십니까
4. 결과 느헤미야의 멧세지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앗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드디어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상황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제, 16절을 보십시오. 아주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그때로부터", 즉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승리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로부터 모든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파괴적인 비판을 당하고 있습니까 낙망하여 그 문제에 대응하기가 두렵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상황속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또한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때로부터 당신은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때로부터 당신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때로부터 당신은 비판을 극복할 수 잇습니다. 이제 일어나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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