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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림 (말4:1-6)

본문

오늘 여러분들이 제 설교를 잘 들으신다면 수지맞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아직 여러 가지 이유에서 구약 성경을 한 번도 읽지 못한 분들이나 아무리 구약을 읽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은 특별히 이 시간을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늘 이 시간 구약 성경 전체를 요약하는 설교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읽으면 간혹 저는 시간은 없는데 많은 분량의 책을 읽어야만 할 때 그 책의 서론과 결론을 읽습니다. 그러면 대략 그 책의 저자가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설교는 그 중요성을 갖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실 말라기서는 구약 성경의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서를 잘 살피면 구약 성경의 개괄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혹 이렇게 말씀을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말라기서가 무슨 구약의 결론입니까 벌써 말라기서를 7번이나 들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오리발밖에는 없는데요 하고 말씀을 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면 여러분들은 잘 들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고 계시는 그 오리발은 누구의 오리발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리발 입니다. 누구를 향해 내미는 오리발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내미는 오리발이었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말라기서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약이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말씀하고 있는 바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목사님 성경에는 오리발 뿐만 아니라 아담도 나오고 아브라함도 나오고 모세도 나오고 다윗도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 전체가 오리발이라뇨 하고 반문을 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구약 성경의 이야기를 살펴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을 하는데 어떻습니까 저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멋지게 순종을 하던가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불순종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끊임없이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고요 이 때마다 이들은 오리발을 내밉니다. 물론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돌아서고 맙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출애굽기를 보십시오. 여러 구약 성경들을 보십시오. 모두 이 이야기입니다. 끊임없이 내미는 오리발 그리고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
그러므로 우리들이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모든 오리발은 실은 구약 시대에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내미는 오리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서를 구약 성경의 결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은 그 마지막 책 중에서도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장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라기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오늘 말씀만 잘 들으십시오. 그러면 구약 성경의 결론을 알 수 있는 수지맞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보라 자 그러면 먼저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분수령이 되는 단어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여러분들은 어떤 단어라 생각을 하십니까 예, 각자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제 생각에는 보라라는 단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오라라는 말이 몇 번 기록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두 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1절에 한 번 5절에 한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보여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으면서 보라고 말씀하실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라고 보여주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 그것들을 살펴보면서 오늘 말씀의 의미를 살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첫번째 보라를 살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자 여기 첫번째 보라라는 말을 중심으로 해서 두개의 그림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첫번째 그림은 1절이고 두번째 그림은
2,3절입니다. 자 이제 이 그림들을 살펴봅시다. 첫번째 그림 먼저 첫번째 그림입니다. 1절을 읽습니다. "." 이 첫번째 그림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이 그림은
첫째로 극렬히 타는 풀무 불이 그림 전체에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종종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때에는 불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이 그림은 쉽게 심판 때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심판 때에 타는 풀무불 가운데 있게 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교만한자와 악을 행하는 자라고 말하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교만한자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말라기서의 전체적인 문맥을 비추어 볼 때 이들은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할 때 끊임없이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말라기시대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이 진리는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하나님을 향해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저들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것은 저들 역시 이와 같은 풀무불 가운데서 괴로워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 심판의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말라기 시대에 득세를 하던 사람들입니다. 성공을 한 사람처럼 보여지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찬사를 보냈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말 3:1
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말라기 시대에 어떤 사람이 잘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교만한자 즉,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한 이런 사람들이 잘 됐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성공할 수 있는가 비법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의 방법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성공한 방법을 연구해 봤더니 하나님께 오리발을 내밀고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둘 저들의 방법을 따르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오리발을 내밀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신앙인으로서 과연 합당한 일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잘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공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을 하시든 그것은 별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들의 방법을 배우고 저들의 삶을 모방합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이러한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공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사례를 들어보기도 하고 연구해 보기도 합니다. 누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더라 하면 사람들이 구름 때같이 몰립니다. 너도나도 그렇게 하려 합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는 잘 생각지 않습니다. 그저 성공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각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만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 가는 잘 생각지 않습니다. 그저 성공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옳은 일인가 아닌가는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노회의 일로 한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제법 그럴듯하게 생긴 이 장로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한 장의 명함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 명함에는 "0 0 캬바레 이사 0 0 0 장로"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버젓이 자신이 장로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아무런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은 나약한 사람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양심도 팔아야 합니다. 이것에 연연하고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사십니까 혹 이들과 같이 그렇게 사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성공을 한다 칩시다. 무엇을 위한 성공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첫번째 그림을 보십시다. 타는 풀무불속에 누가 주인공으로 등장을 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게 삶을 살아온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들의 말로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두 가지 사실에 비교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초개와 같이 먼저 이들은 초개에 비교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개란 지푸라기나 검불을 말합니다. 여러분 마른 검불이나 집푸라기가 타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어떻던가요 불속에 넣자 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의 말로입니다. 얼마나 허망합니까 그렇게 아둥바둥 살았는데 결국 이렇게 허망하게 다 불탈 것이라면 얼마나 허망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들은 누구만큼 돈을 벌고 싶습니까 이병철입니까 정주영입니까 좋습니다. 정주영씨를 예로 들어보십시다. 정주영씨만큼 돈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상상만해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오늘 말씀과 같이 지푸라기에 비교를 해 보십시다. 자 이것을 저 불속에 던집니다. 어떻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넣자마자 흔적도 없이 없어지고 맙니다. 여러분 얼마나 허망합니까 여러분들도 이 그림의 주인공들처럼 사시다가 인생의 최후를 맞이하시렵니까 뿌리를 제거함 같이 두 번째로 이들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뿌리와 가지입니다. 자 여기 수양버들이 있습니다. 나무가 너무 커서 가지를 잘라 냅니다. 그러면 그 나무가 죽습니까 아닙니다. 얼마의 가지를 잘라낸다고 해서 그 나무가 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소망이 있습니다. 좀 아프기는 하겠지만 세월이 지나면 다시 예전과 같이 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나무가 뿌리째 뽑혀집니다. 이렇게 되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욥기서는 이렇게 이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 14:7-9'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그렇습니다. 나무는 웬만큼 가지가 상한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즉, 내일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뿌리째 나무가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은 이 땅에서 내일을 기약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앞에 섰을 때 바로 그 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첫번째 그림은 모든 것들이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고 더이상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번째 그림의 교훈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그림을 통해서 무엇이 연상되십니까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은 이 그림을 좀더 자세하게 그리고 있는 본문이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해 드립니다. 계 20:9-15절입니다.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 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의 그림과 얼마나 닮았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이 그림을 보여주시면서 저들의 미래를 예고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그림 자 이제 두번째 그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절을 읽습니다. "." 여러분들은 이 구절에서 두번째 그림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절에서 살핀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입니다. 자 무엇이라 시작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자" 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일까요 우리들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좀전에 살펴보았던 말 3:15에 있는 말씀을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될 줄 압니다.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자 이 구절에 의하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떠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교만하면서도 잘 되는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가운데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거기에 관심을 가지지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출세보다는 성공보다는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여길 것인가에 더 관심이 많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더많은 관심을 갖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렇게 사는 이들이 당시에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보여졌습니다. 어리석은 자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두번째 보여지는 이 그림에는 어떠한지 보십시오. 날개 계속 2절을 읽습니다. "." 사실 이 번역은 본문에 가까운 번역이 아닙니다. 좀더 본문에 가까운 번역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의로운 해가 치료하는 날개를 달고 떠오를 것이다." 달라진 점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광선이 날개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날개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성경은 자주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이 날개에 비교해서 설명을 합니다.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 36: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날개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인 줄 알고 그리로 피하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출애굽기를 보십시다.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날개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또한군데 더 볼 까요 '사 31:
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 를 보호함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 하셨나니"
그렇다면 여기서 이 날개는 바로 보호하심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단순히 보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치료와 더불어 보호하심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보호하고 치료를 하는 것일까요 의로운 해가 떠오르면 이 일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당시 햇빛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이 사람들을 치료하고 보호하는 의로운 해가 떠오르리라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오늘 본문의 해를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바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리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아물게 하고 보호할 것입니다. 상처입은 사람들 사실 당시의 신실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있기는 하였지만 저들의 마음은 많은 상처들을 입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향해 조롱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생긴 상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이 잘되는 것을 보면서 그래 그것은 아니야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마음에 응어리 진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 모양 저 모양의 상처들을 치료하시고 싸매줄 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적인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영적인 상처 인격적인 상처 이 모양 저 모양의 상처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처들은 여러 가지 통로들을 거쳐 우리들에게 옵니다. 인간관계에를 통해서 오는 상처도 있고 물질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오는 상처도 있고 일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오는 상처도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상처를 입은 채 치료받지 못하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한 의로운 해를 떠오르게 해서 이렇게 상처 나고 찢겨진 저들을 위로하고 싸매어 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계시록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누가 이런 놀라운 위로를 받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상처를 치료받고 나니 힘이 넘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이 장면을 본문은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여러분 송아지가 뛰노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신납니다. 바로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입니까
그러므로 두번째 보여주는 이 그림은 첫번째 그림과 달리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위로가 있습니다. 최후의 승리
그런데 이 그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3절을 보십시다. "." 이 구절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최종적인 승리를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승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 실패를 하는 것 같고 패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결국은 누가 성공을 합니까 누가 승리를 차지합니까 경주는 끝까지 달려봐야 합니다. 그래야 누가 이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얼마전 월드컵을 할 때의 일입니다. 우리 나라가 독일과의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 T.V 시청을 하는 것을 포기를 하고 교회로 왔습니다.
그런데 뒤에 보니 비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경주는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가봐야 아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추앙을 받는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의 성공을 바라보지 말고 영원한 성공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림의 결론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두 그림을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리발을 내미는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을 향해 아니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제는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판가름 날 날이 이를 것이니 이제는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보여주는 이 두 그림은 지금까지의 지금까지 부르셨던 모든 부름을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저들을 향해 경고를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두 그림을 통해 경고의 음성을 듣습니까 첫번째 그림은 불타오르는 심판의 그림입니다. 여기에는 소망도 없고 위로도 없습니다. 부끄러움과 괴로움 허망함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로가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그림의 주인공이 되시고자 합니까 첫번째 그림입니까 아니면 두번째 그림입니까 우리의 결단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5,6절을 읽습니다. "." 두번째 보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엇을 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심판 전에 임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엘리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엘리야란 세례요한을 말합니다. 자 이들이 무엇을 할 것이라 말합니까 6절을 보십시다. "." 자 6절에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돌이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하나님은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를 닫기 전에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돌이키는 사람을 보낼 것이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이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요한이 왔을 때 어떠했습니까 당시 사람들이 돌이켰습니까 예, 처음에는 그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결국 돌이키지 않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았던 어리석음이 저들에게 있었습니다. 이 사랑의 메시지를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또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게 과연 돌이켜야 할 것이 무엇이 있나를 살펴 보고 돌이키십시오.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기억하라 이제 마지막으로 4절에 있는 말씀을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70인경에서는 오늘 본문을 4절을 제일 뒤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즉, 1-3,5,6,4 순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4절을 구약 성경의 제일 끝에 위치하게 한 것입니다. 상당히 생각이 있는 재구성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자 4절을 읽습니다. "." 4절이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두개의 그림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그림입니다. 무섭고 두려운 그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다릅니다. 위로와 소망의 그림입니다. 그리고는 돌이키는 자를 보내겠다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말씀하십니다. 기억하라고요 무엇을요 예,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기억하라는 것은 단지 머릿속에서만 잊지 않고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두 번째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시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잠시 눈을 감으십시다. 그리고 오늘 그림을 생각해 보십시다. 먼저 불붙는 심판의 그림이 보여집니다. 여기에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거기에는 내가 평소 잘 아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보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내가 그렇게 부러워했던 사람들도 보입니다. 그들은 모두 허망한 얼굴로 또 두려운 얼굴로 타는 풀무불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번째 그림이 보여집니다. 주님께서 따뜻하게 안으시면서 세상에서 수고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처를 싸매시고 계십니다. 저들은 이것이 너무 기뻐서 뛰놀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도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평소 왜 저렇게 어리석게 살지 하며 놀리던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미래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니 어디에 있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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