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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부패 (미2:1-13)

본문

인간의 계획과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라틴어로 ‘데오볼렌데’라고 하는 말은 영어 약자 DV로 표기되는데 서양에서는 상식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익서은 “GOd Willing”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If God Wills” “하나님이 뜻하신다면”하는 뜻입니다. 인간의 계획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 있느냐 하는 ㄱ서을 우리가 찾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획과 뜻을 알아 내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행동할 수 있는고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 의지, 계획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번 일에 하나님은 무엇을 의지하시고 어떤 계획을 가지고 게시는가” 공부를 잘한다. 시험을 잘 친다는 말은 시험관의 의중을 잘 살핀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는 것이 많고 준비도 많이 했는데 시험을 치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별로 공부를 안했는데도 시험 점수가 좋습니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시험관의 의중을 궤뜷어 볼 수 있으면 시험 점수를 잘 올릴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강조한 것, 비중을 두는 것, 반복 교육한 것 등 출제될 가능성이 있는 문제를 열심히 준비하면 이것을 모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밤세워 한 사람보다 점수를 잘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의중을 궤뚫어 볼 수 있는 학생이라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빨리 알아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획한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은 아닙니다. 또 우리가 결정했다고 하나님의 결재가 난다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듯뜻대로 하옵소서 해야 합니다. 죽은 내 외아들 살려 내라고 아무리 몸부림쳐봐야 하루가고 이틀가고 사흘가면 끝나는 것이지 안될 일이 떼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은 젼혀 다를 수가 있고 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언제든지 찾아야 되는고로 늘 “데오볼렌데”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어리석은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추수를 많이 한 다음에 하나님 없이도 잘 되었다고 가나한 자를 돌보지도 아니했고 자기 영혼을 가리키며 편히 쉬고 배불리 목고 그리고 열락을 취하자고 스스로 위로하고 자랑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 밤에 네 생을 거두어가면 네가 어지 되겠는냐“ 인간의 계회은 추수를 하고 마움껏 즐기고 열락을 취하기를 소원했지만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면 그 계획들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부자의 비유는 재물을 모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목적에 혼동을 일으킨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목적 혼동이 무엇입니까. 재물을 하나님이 주셨을 때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불쌍한 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주장했기에 결국은 목적에 혼란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심판감이 되어 버이고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축복을 상실해 버리는 불행한 자리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 힘을 꺽어 버리십니다. 선생님의 의중을 궤뚫어보는 학생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듯을 빨리 알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목적혼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을 주실 때는 하나님께서 불쌍한 자를 도울 목적이 있습니다. 자기의 뜻을 주장하려는 자는 목적의 혼동을 일으킵니다. 주어진 축복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계획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1.지도자들의 죄악상
1).악한 계획 “침상의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 찐저”(2:1) 인간은 늘 헛 것을 계획합니다. 밤중에 악을 계획합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고 백성의, 한 그룹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들이 밤중에 남 잠자는 동안에 잠 안자고 내일 새벽이 되면 무슨 악을 행해서 어떤 짓을 할까 침상에서 악을 도모하고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간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손에 능력이 있다고 조그마한 힘이 있다고 그 힘을 가지고 행사하는 자는 하나님께 징계를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네 생각이고 그것은 네 계획이고 그것은 네 생활방식이고 내 계획은 네게 화를 미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계회이 하나님의 계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계획에 맞추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야 됩니다. 부부가 오래 살다보며 “나 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하면서 바로 웃을 때가 있습니다. 뜻을 서로 알려고 애쓰고 노력하면 이와같은 경험을 종종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빨리 찾아내려고 예쓰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밤에 악을 도모하느니라고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한다면 얼마나 복된 일이겠습니까.
2).탐심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 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는도다”(2:2) 미가 선지자의 예언과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이 매우 흡사한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미가가 예언하려고 하는 2장에서의 초점은 탐심에 있습니다. 인간의 계획이 왜 하나님의 계획과 다릅니까. 그이유는 탐심 때문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열번째 계명이 탐내지 말라,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모든 것을 탐내지 말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에 만족하지 않고 허락하시지 않는 것을 갖기를 원하는 것을 탐심이라고 합니다. 큰 비전과 포부를 갖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루에 만 원 버는 사람이 십만 원 벌겠다고 하는 것이 탐심이 아닙니다. 중학교 졸업한 사람이 고등학교에 진학할려고 하는 마음을 탐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리를 소훌히 취급하면 인간의 권리도 소홀히 여김을 당하게 됩니다. 허락하실 권리도 허락하지 않으실 권리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지적한 죄는 내적인 죄입니다. 마음에 진 죄는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이미 죄를 지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미워하면 살인죄요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라 하셨습니다. 내적인 것이 외형적으로 드어난 것이 탐심입니다. 탐심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 자신이 다스려야 합니다. 미가 선지자가 지적한는 지도자의 죄가 바로 탐심입니다.
3).거짓 예언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2:6중) 오늘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체하고 거짓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가득차 있습니다. 거짓 예언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부자를 즐겁게 해주고 방종하는 사람을 담대하게 해주고 세상적인 약속을 강단에서 많이 위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무서운 헛점이 있다면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학과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하고 기독교를 절대적인 종교로부터 상대화시켜서 다른 종교와 같은, 종교간의 대화 내지는 종교 상대주의를 주장하므로 인해서 기독교의 유일성 내지 구원의 종교를 흐리게 하는 신학입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시도가 되어있고 또 그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에 반해서 또 보수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신비주의 사상에 접해서 특별히 계시문제에서 큰게 혼란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지금도 게시를 받을 수 있는 것같이, 현제 계시를 받고 있다고 판단을 하므로 소위 계시의 연속성 문제에 신학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만일 계시가 지금까지 계속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삼각산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요한계시록 후서를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신비주의 특별히 게시 문제에서 듣거나 보았거나 혹은 만지거나 체험을 했다고 강조하면서 성도들을 현혹기키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하나님의 말씀을 흐리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와같은 잘못된 예언이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수천년 전 미가 선지자가 예언하던 그때에도 있었는데 이 때에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보고 거짓 예언자가 오히려 거짓되다고 주장을 했으니 아이러니요 우수광스러운 일입니다. 참이 거짓 앞에 멸시를 당하고 진리가 불의 앞에서 쫓겨 다녀야 되는 그런 시대가 바로 그 시대였습니다. ‘예언하지 말라’는 말은 철부지 소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예언을 하니까 미가 선지자에게 오히려 “네가 그런 예언은 하지 말아라, 철부지같은 소리는 하지 말라. 시대를 물라도 분수가 있지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오히려 힐난하는 시대였습니다. 거직 선지자들이 입으로 멸시하고 잔악한 반역의 말을 합니다.
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이 우습다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어떤 분은 강단에서 욕지거리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농담을 해도 지나치게 해서 하나님께 굉장한 불경죄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른 앞에서 말조심을 하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강단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함부로 밷으면서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로 증거되어야지 다른 잘못된 방법으로, 악한 방법으로 증거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철부지 같은 소리를 하는 자들이 진리를 말하는 사람에게 철부지 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니 그 시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참 선지자의 예언의 말에 귀를 닫아 버렸습니다. 듣지를 않았습니다.
4).평화 파괴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빼앗는도다”(2:9)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말씀을 증거하는 선지자들의 말씀은 거절하고 거짓 선지자들은 잘 받아들이고 그들의 말을 마음에 간직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약해질 때 도덕적 타락을 가져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도덕적으로 혼란했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의 죄 가운데 하나는 평화를 깨뜨리는 일입니다. 전쟁을 피하여 지나가는 자들의 겉웃을 벗겼습니다. 겉옷이란 가난한 사람들이 밤에 이불 대신 덮고 자는 것이니 그것을 빼앗는다는 것은 전재산을 빼앗는 것과 같습니다. 또 즐거운 집이란 남편으로부터 물려받은 추억이 담긴 사랑의 보금자리를 말합니다. 이런 집에서 즐겁게 살고 있는 부녀들을 쫓아내니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또한 방비없는 사람을 침범합니다. 어린 자녀는 아직 방비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은 힘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들은 이런 힘없는 어린아이들에게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빼앗고 그들의 조그만 ㄱ서을 빼앗고 쫓아버리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만국의 협약 가운데 전쟁하는 데도 협약이 있습니다. 전쟁 때라고 아무렇게나 쏘면 안됩니다. 적십자가 그려져 있는 자동차나 위생병이 환자를 끌고 갈 떼는 거기다가 총을 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이지만 적십자가 있는 곳은 함부로 못합니다. 또 만국협약 가운데 군목에게도 권총을 주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권총은 상대편이 자기를 쏘려고 할 때 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상대 편이 쏘면 죽으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목사에게 권총을 주는 것은 부상을 당해서 적에게 아무런 해를 줄 수 없는 형편의 사람이 적의 총격을 받게 되었을 때에 이 권총으로 정당방위를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발을 쏘든가 손을 쏴서 그 사람이 해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방비태세가 없는 사람을 죽이거나 그런 사람에게 덤벼들어 빼앗아 가는 것은 악랄한 방법입니다. 전쟁을 할 때는 반드시 선전포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만국 재판소에 끌려가야 됩니다. 인간이 해봐야 무슨 재판을 하겠습니까만 아무튼 인간끼리 협약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하는 지도자들이 지금 평화를 깨뜨리고 방비 없는 사람들을 쳐들어가서 그들의 것을 빼앗아 오게 되었으니 이들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어찌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하신 말씀이 그냥 나온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도 보호할 수 없는 그런 형편에 있는 사람을 돌보아 주라는 말씀입니다. 학대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대했으니 공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지도자들은 남의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고 개인의 마음의 평화가 깨뜨리고 이웃의 평화를 깨뜨리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 렸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입니다. 의지할 데 없고 방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강탈하므로써 그들은 피해자와 하나님의 적이 되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라 하셨으니 이들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응분의 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그의 백성을 위한 안식처러 삼으셔서 순종과 축복의 때에는 그 땅을 주셨으나 그들의 악한 행위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그 거민들을 쫓아 내십니다. 불순종의 결과는 추방이 있을 뿐입니다. 계약이 위반되고 지켜지지 않으므로 하나님은 추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약한 자 못 가진 자에게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이웃에 고아와 과부가 있는지 살펴보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또한 공의를 일삼고 도덕적으로 부패해 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2.하나님의 심판 “내기 이 족속에게 재앙 내리기를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2:3중) 사악한 계책과는 대조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악한 행위에 대한 재앙을 내리십니다. 탐심으로 찌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하십니다. 이 심판은 이방인의 무거운 통치가 이스라엘의 살찐 송아지의 목에 멍에를 메우는 것으로 비유가 되어 있습니다. 탐심에 가득한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무거운 멍에에 매인 소가 어찌 그 멍에로부터 그 못을 벗어낼 수 있으며 행동이 자유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남의 나라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자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가난하게 되지 아니할 것이요 긁어 모을지라도 부자가 되는 법이 없습니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 모리배 노릇, 구두쇠 노릇해서 긁어 모아도 하나님이 흩으시면 남아날 것이 없습니다. 모리배가 다른 게 모리배가 아닙니다. 이익을 정당히 남기지 않고 폭리를 하는 것이 모리배입니다. 땅 한 평이 한 달 사이에 배로 값이 뛰는 것 때문에 투기가 횡행하고 없는 사람들의 눈에 눈물을 짜 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길 열어 주셨다고 감사 헌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속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투기꾼이고 그것이 바로 모리배 입니다. 기독교인들마져 그런 짓을 하고 돌아다니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즈음 젊은이들이 취직을 안하려고 합니다. 취직해보아야 10 년 가야 집 한 채 못 삽니다. 어떻게 일억 원 짜리를 만져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니따 팽배해 가는 한탕주의입니다. 은행도 털고 자동자도 빼앗고 한달 동안 땀흘려 수고해서 번 돈 핸드백 속에 넣고 가는 것 빼앗아 가면서 오늘 재수 좋다고 그돈 갖다가 십일조 바치고 감사헌금 바치면 하나님이 그것 받으시겠습니까. 돈을 절었다고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았다고 잘못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차라리 가난해도 정당하게 벌어야 되고 정당하게 일을 해야 됩니다. 한국의 엘리트들이 지금 모조리
그런데 머리를 쓰기 시작하고 한국의 젊은이들이 전부가 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오늘 한국교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크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주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남의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며 남을 억울하게 하고 남의 것을 탈취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심판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게 돈을 벌어야 합니다. 정당하게 일을 해야 됩니다. 욕심을 부리는 자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될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특히 한탕주의 가치관이 주입되지 않도록 바른 가치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공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자들로 길러내야 합니다.
2).땅을 제비 뽑아 나누다.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비를 뽐고 줄을 딸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2:5)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을 제비뽐아 나눕니다.
그런데 그들이 범죄했기 때문에 그 땅을 오히려 처음부터 하나님을 배신할 배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성도들에게 뻬앗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거두어만 가시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자도 여호와시다” 하면 마음이나 편하겠는데 하나님이 빼앗아서 오히려 하나니을 대적하는 사람에게 주시니 복통할 노릇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자, 하나님 주신 것을 제것인 줄 알고 함부로 하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은 빼앗아 가십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면 하나님은 우리의ㅣ 산업을 옮겨 가시고 우리밭을 패역자에게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은혜를 취소되는 장면입니다.
3.소망 없는 자를 위한 소망 “내가 전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앵떼같게 하며 초장의 야떼같게 하리니 귿르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2:12) 소망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것이 소선지서의 공통점입니다. 아모스, 호세아.요엘, 오바댜 모든 선지서를 보면 다 소망이 없는 형편 없는 백성, 죄를 질대로 짓고 하나님을 배신할 대로 하고 하나니의 품안을 멀리 멀리 떠나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결국은 가서 끌어내어서 자기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악한 세상에 살면서 악인의 죄 때문에 무죄한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고 선지자의 의복을 입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도 있고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도 있고 죄를 범해서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억울하게 당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마지막에 가서는 다 자기 백성으로 택할 백성을 용서하시고 끌어들이시는 장면이 소선지서의 공통점입니다. 하나니의 푸른 초장으로 자기 백성을 다시 긁어 모으시는 일이 없었드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 혼자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남겨두신 백성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땅, 그렇게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도 하나니께서 자기 백성을 심어놓으시고 감추어 놓으시고 키워 놓으셨고 북한 땅에 아무도 없는 것같아도 거기에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남은 자를 모으시는 때가 되었는데 오늘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주님 앞에 차자온 저와 여러분들이 자기 혼자인줄 알고 로뎀 나무 밑에서 원망하고 있던 엘리야 선지자와 같이 되지 말고 이 시대의 남은 자가 되고 이 시대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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