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읍을 향해 뿌리시는 하나님 (미6:1-16)
본문
1.하나님 상실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6:5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고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전능 자를 잃어버렸고 가마솥 같은 애굽에서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은총을 상실해 버렸고 모세와 아론 미리암과 같은 지도자를 보내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하였습니다. 미련한 노새처럼 앞발을 내밀고 하나님의 명령 순종하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잊어버렸다는 말은 명령만을 안 들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능의 행사만을 잊어버렸다는 아니며,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자신을 잊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기억 속에서도 자기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상실해 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인생들은 호홉이 자기 코에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인생은 살아 있는 것같지가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생애가 구만리 같다고 30년, 50년, 100년을 계획하는 것같아도 하나님이 어느 순간 순간들을 주시고 한 사람씩 불러 가는데 그 순서가 언제 우리에게 닥쳐 올런지 아무도 모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합니다. 무덤에 가면 ‘그렇게 했으면 안 죽었을 텐데’ 핑계가 많습니다. 그러나 핑계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잠을 자는 순간까지도 방심하면 안됩니다. 어떤 성도는 취침 전에 아무리 피곤해도 정리할 것을 정리하고 꿈속에서라도 죄짓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혹 새벽에 재림 나팔 소리 들을까 뛰어나가기 위해 옷 잘개켜 놓고 주무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이 준비하는 마음입니다. 미련한 노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매만 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그분만이 모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았다고 큰 소리 치지 말고 내일 부르심을 받을 준비에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만 정리할 것이 아니라 주변을 항상 깨끗이 정리해야 합니다. 새벽에 오실런지 밤중에 오실런지 언제 오셔도 부끄러운 흔적을 남기지 맙시다.
2.하나님의 음성 “내 백성이”(6:5상) 하나님이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내 백성아”라고 불러 주십니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려주고 당연한 문제에 대해 양심을 깨우쳐주기 위해 그들을 지적하며 “내 백성아”라고 강조하여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억울하면 고소해 보라고 하십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는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구를 하셨는가, 과도한 주장을 하였는가 혹은 약속을 불이행하셨는가를 이야기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랑의 표징과 축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구원의 행위를 거듭해 오셨습니다. 노새같이 미련하여 거역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성읍을 향해서 부르십니다. 공의를 부르시고 자비를 부르시고 겸손히 행할 것을 부르십니다. 6장 6절과 7절을 보면 네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첫째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둘째는 “내가 번제물 1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셋째는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넷째는 “내 맏아들을 드릴까.” 이렇게 한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제물을 아무리 갖다 바친다 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여기서 공의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공의입니다. 자비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약한 사람을 붙잡아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 을 즐겁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섭긴 다고 한다면 네 사랑하는 가족을, 사랑하는 자녀들, 사랑하는 이웃들을 돌봐주라” 그것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고 자신은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겸손히” 이것이 미가 선지자의 주제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의 메시지의 핵심 부분은 겸손입니다. 아모스는 공의요, 호세아는 사랑이요, 미가는 겸손인데 이것이 바로 6장 8절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공의와 자비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세가 지는 미가 당시에만 있어 던 부르심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이 세가 지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종들이 이런 것을 지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위 지식인, 가진 자, 앞에서는 도시인들,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범죄하고 멀리멀리 떠나가고 있는데도 부자의 눈치를 보고 권세 있는 사람 앞에 아부를 하느라고 외칠바를 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할 소리를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게 된다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미가는 자기를 자랑하고 교만하고 패역과 부패를 일삼고 있는 그 도시인들을 향해서 거침없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지적을 해 내고 있습니다. 날마다 늘어가는 상습도박자, 살인자, 알콜 중독자, 마약중독자, 부도덕한 사람, 사기행각자, 정신적 혹은 물질적 폭력자, 만신창이된 도시인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도를 행할 때에 나라가 튼튼히 서 갑니다. 자비를 행할 때에 가난한 자들이 힘을 얻습니다. 겸손히 행할 때에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3.하나님의 심판 거역하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강조되는 데 세가지 강조가 나타납니다. 6:13절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어보면 “내가 너를 멸하기 시작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를 멸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멸망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1).점진적인 심판 “네 죄를 인하여 너를 적막하게 하였나니”(6:13하) 하나님의 심판은 점진적으로 옵니다. 점진적으로 싸인을 보내 주십니다. 갑자기 폭풍이 오는 것이 아니라 설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폭풍을 예고합니다. 갑작기 소나기가 오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점점 시커매지는 것처럼 싸인이 옵니다. 그 싸인을 볼 때 속히 회개하고 엎드리면 마지막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2).본격적인 심판 “네가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속이 항상 빌 것이며”(6:14상) 본격적인 심판이 하나는 정신적인 심판입니다. 허망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물질적인 심판입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나 항상 벌 것도 다 얻지도 못합니다. 감추지만 보존하지도 못합니다. 씨를 뿌리지만 추수할 것도 없습니다. 감람나무를 밟고 기름을 짜지만 기름을 몸에 바르지도 못하고 포도즙을 밟지만 마실 수도 없고 수고는 하는데 얻는게 없습니다. 헛수고입니다. 다른 하나는 불명예의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뚜렷한 명령과 율법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율법을 지켰습니까. 제멋대로 오므리와 아합의 사악한 길을 따랐던 것입니다. 오므리는 사마리아와 우상 숭배의 아합의집의 창시자이며 여로보암의 사악한 행위를 후원한 자입니다. 아합시대는 배교와 타락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정신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뼈를 마르게 하고 눈을 쇠하게 합니다. 물질적 고통 또한 참기 어려운 것이니 배고품의 고통은 질병과 함께 3대 고통 중의 하나님입니다. 이에 못지 않은 것이 있으니 수칙의 고통입니다. 명예가 땅에 떨어질 때 사람들에게 당하는 수모와 멸시는 사람들을 자살로까지 몰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거역하므로 정신적 물질적 불명예적 심판을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을 자는 순간까지도 방심하면 안됩니다. 어떤 성도는 취침 전에 아무리 피곤해도 정리할 것을 정리하고 꿈속에서라도 죄짓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혹 새벽에 재림 나팔 소리 들을까 뛰어나가기 위해 옷 잘개켜 놓고 주무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이 준비하는 마음입니다. 미련한 노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매만 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그분만이 모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았다고 큰 소리 치지 말고 내일 부르심을 받을 준비에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만 정리할 것이 아니라 주변을 항상 깨끗이 정리해야 합니다. 새벽에 오실런지 밤중에 오실런지 언제 오셔도 부끄러운 흔적을 남기지 맙시다.
2.하나님의 음성 “내 백성이”(6:5상) 하나님이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내 백성아”라고 불러 주십니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려주고 당연한 문제에 대해 양심을 깨우쳐주기 위해 그들을 지적하며 “내 백성아”라고 강조하여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억울하면 고소해 보라고 하십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는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구를 하셨는가, 과도한 주장을 하였는가 혹은 약속을 불이행하셨는가를 이야기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랑의 표징과 축복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구원의 행위를 거듭해 오셨습니다. 노새같이 미련하여 거역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성읍을 향해서 부르십니다. 공의를 부르시고 자비를 부르시고 겸손히 행할 것을 부르십니다. 6장 6절과 7절을 보면 네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첫째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둘째는 “내가 번제물 1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셋째는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넷째는 “내 맏아들을 드릴까.” 이렇게 한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제물을 아무리 갖다 바친다 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여기서 공의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공의입니다. 자비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약한 사람을 붙잡아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 을 즐겁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섭긴 다고 한다면 네 사랑하는 가족을, 사랑하는 자녀들, 사랑하는 이웃들을 돌봐주라” 그것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고 자신은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겸손히” 이것이 미가 선지자의 주제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의 메시지의 핵심 부분은 겸손입니다. 아모스는 공의요, 호세아는 사랑이요, 미가는 겸손인데 이것이 바로 6장 8절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공의와 자비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세가 지는 미가 당시에만 있어 던 부르심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이 세가 지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종들이 이런 것을 지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위 지식인, 가진 자, 앞에서는 도시인들,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범죄하고 멀리멀리 떠나가고 있는데도 부자의 눈치를 보고 권세 있는 사람 앞에 아부를 하느라고 외칠바를 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할 소리를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게 된다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미가는 자기를 자랑하고 교만하고 패역과 부패를 일삼고 있는 그 도시인들을 향해서 거침없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지적을 해 내고 있습니다. 날마다 늘어가는 상습도박자, 살인자, 알콜 중독자, 마약중독자, 부도덕한 사람, 사기행각자, 정신적 혹은 물질적 폭력자, 만신창이된 도시인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도를 행할 때에 나라가 튼튼히 서 갑니다. 자비를 행할 때에 가난한 자들이 힘을 얻습니다. 겸손히 행할 때에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3.하나님의 심판 거역하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강조되는 데 세가지 강조가 나타납니다. 6:13절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어보면 “내가 너를 멸하기 시작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를 멸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멸망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1).점진적인 심판 “네 죄를 인하여 너를 적막하게 하였나니”(6:13하) 하나님의 심판은 점진적으로 옵니다. 점진적으로 싸인을 보내 주십니다. 갑자기 폭풍이 오는 것이 아니라 설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폭풍을 예고합니다. 갑작기 소나기가 오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점점 시커매지는 것처럼 싸인이 옵니다. 그 싸인을 볼 때 속히 회개하고 엎드리면 마지막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2).본격적인 심판 “네가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속이 항상 빌 것이며”(6:14상) 본격적인 심판이 하나는 정신적인 심판입니다. 허망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물질적인 심판입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나 항상 벌 것도 다 얻지도 못합니다. 감추지만 보존하지도 못합니다. 씨를 뿌리지만 추수할 것도 없습니다. 감람나무를 밟고 기름을 짜지만 기름을 몸에 바르지도 못하고 포도즙을 밟지만 마실 수도 없고 수고는 하는데 얻는게 없습니다. 헛수고입니다. 다른 하나는 불명예의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뚜렷한 명령과 율법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율법을 지켰습니까. 제멋대로 오므리와 아합의 사악한 길을 따랐던 것입니다. 오므리는 사마리아와 우상 숭배의 아합의집의 창시자이며 여로보암의 사악한 행위를 후원한 자입니다. 아합시대는 배교와 타락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정신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뼈를 마르게 하고 눈을 쇠하게 합니다. 물질적 고통 또한 참기 어려운 것이니 배고품의 고통은 질병과 함께 3대 고통 중의 하나님입니다. 이에 못지 않은 것이 있으니 수칙의 고통입니다. 명예가 땅에 떨어질 때 사람들에게 당하는 수모와 멸시는 사람들을 자살로까지 몰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거역하므로 정신적 물질적 불명예적 심판을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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