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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주의로 살자 (말1:2-5)

본문

저는 2-5절까지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앞에 이런 한마디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1.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1나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때문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자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고 하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야곱보다는 에서가 먼저 난 사람입니다. 대접을 받아도 그가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도 에서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야곱보다 잘난이가 에서입니다. 그런 반면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형의 것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는 야비한 사람입니다. 비록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기는 했지만 야곱이 그의 형에 대해서 그렇게 야비하게 하지 않았다면 에서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자면 야곱이 더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보다는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하였다’라는 말은 단순히 야곱을 하나님이 좋아 하셨다는 측면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셔서 그를 언약의 조상으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에서가 아니라 야곱같은 사람을 택하셔서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심, 즉 선택하심의 이유였습니다. 이스라엘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특별나게 달라서, 뛰어나서 그 나라를 택하심이 아니요, 비록 약하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저가 서두에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내 주변에는 에서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잘나 보이고, 훌륭해보이고, 대단해 보이고, 조건적으로 볼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반면 나는 연약하고, 거룩하지 못하고, 대단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야곱같은 야비하고, 나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런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심입니다. 이것이 나의 공로나, 자격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에서가 야곱의 형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사랑하시다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식어진 가슴에, 냉냉한 가슴에 뜨거운 불이 불어서 그 불의 힘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속에서 불이 너무 뜨거워서 견딜수 없을 감사와, 감격과, 은혜가 있어지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이 바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모습임을 믿기 바랍니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시고, 자녀 되어지기 위하여 그의 독자를 나를 위하여 피 흘리기 까지 사랑하신 이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득차기를 바랍니다. 이 하나님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합시다.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불이 꺼졌다는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들의 가슴이 차갑고, 우리들의 신앙이 무너졌다는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 입술과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감사가 되어지지 않고 있다면 내 가슴에 불이 꺼졌다고 보면 됩니다. 내 신앙이 무너졌구나 여기면 됩니다.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입시다. 왜 우리가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이어야 하겠습니까 즉 다시 하나님의 이런 은혜앞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항상 불평, 불만 거리만 찾습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인 말만 입에서 튀어 나옵니다. 귀찮아 지고, 싫어집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행입니까 가슴에 불이 붙어 있을때는 못생긴 남편도, 무능한 자녀도 불평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불이 꺼지면 매사가 싫어집니다. 귀찮아 집니다. 행하는 일들에, 있는 그 모습에 감사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불난이 끊임없다는 말입니다. 혼자 사는 어떤 분이 스물두 살난 외동 아들을 잃었습니다. 딸도 없고 아들 하나인데 갑자기 사고로 죽었습니다. 얼마나 큰 슬픔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분이 그 사실을 놓고 감사 했습니다. 감사의 의미를 세가지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감동적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외로운 나에게 아들을 주셔서 22년동안 함께 살게 해 주신 것을 감사 드린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내가 데리고 있는 것도 좋지만 내 아들을 더 좋은 곳인 천국에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 드린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 감사 한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제야 비로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에 내어 놓은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 같으면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할 것 같은데 스물 두 살난 외 아들을 빼앗겼던 사람에게서 이렇게 감사의 기도 제목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럴 때 그의 가슴은 더 뜨거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니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가슴이 뜨거우니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능력이 있겠습니까 나 같이 못난 이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로 가슴이 뜨거워 질수 있기를 바랍니다.
2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3절) 이 3절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3절의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에서는 에돔족속입니다. 이 에돔 족속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셨다’→증오의 감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유기(遺棄) 하셨다-택하지 않음 ‘황무케 하였다’→아무것도 없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광야의 시랑에 붙였다’→다른 사람에 붙잡히도록 하셨다. 그것도 일시적인 붙잡힘이 아니라 영영히 회복할 수 없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 야곱은 ‘사랑하였고’→택하여 주셨고, 그리고 에서와 같이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러나 야곱은 에서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그들을 권고하셔서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회복하심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심입니다. 즉 잡혀갔지만 다시 돌아 오게 하심이요, 잃어버렸지만 다시 되 찾게 해 주셨다는 것이며, 넘어 졌지만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분’이요, 다시 ‘회복 시켜주시는 분이시오’, ‘다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하며 하나님앞에,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잃어 버리고, 빼앗겨 버리고, 넘어져 버렸지만 우리 하나님은 다시 찾게하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고, 회복케 하실 하나님이 계심을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가 잃어 버렸던 것을 되찾게 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읍시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가 넘어졌던 것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분을 믿기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가 빼앗겨 버린 것을 찾아 주시고, 회복케 하심을 믿읍시다. 오늘 주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되찾아 주겠다고요, 회복해 주시겠다고요, 일으켜 세워 주시겠다고요. 그러니 이런 하나님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2.그러나 경계해야 할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4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인본주의’(人本主義)입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도움없이, 하나님없이 자신의 힘을 믿고, 자신의 지혜를 믿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행하는 일입니다. 본문에 보면 에돔 족속들은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 갔습니다.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서운 말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힘으로는 무엇이든지 한다. 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우리들은 얼마든지 한다는 무서운 말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에돔의 생각은 하나님 없이도 우리들의 힘으로 얼마든지 할수 있다. 얼마든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오직 그들의 힘만 의지합니다. 혹시 이 중에 계신 분중에 나는 기도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아갈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내마음에 인본주의가 싹이 트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이 곧 인본주의에 물들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에 하나님 도움을 구하지 않고 내 힘과,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 곧 인본주의 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말 1:4-5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목도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 우리가 아무리 쌓겠다, 쌓겠다 해도 하나님의 간섭 없이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없이는 쌓아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 127: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이 되게하셔야 됩니다. 내가 아무리 해도, 아무리 내 능력이 클지라도 하나님이 하게하시지, 되게하시지, 있게 하시지 않으면 안되고, 없고,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삼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그렇습니다.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의뢰하는 길이 사는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잠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것이 신본주의 입니다. 신본주의는 내 공로나, 자격으로나, 능력으로나,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되어짐을 믿고 그를 범사에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너희가 쌓겠다 하더라도 헐리라’, 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 크시도다’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은 대적할 때는 다 망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살수 있다고 믿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망한자가 아니라 흥한자, 패한자가 아니라 이긴자, 없는 자가 아니라 가진자로 살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며 살아 갑시다. (시 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3)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여호와로 나의 힘을 삼고 나가는 심령에 성령님의 뜨거운 불이 임할줄 믿습니다. 모두가 심령에 여호와께서 내려 주시는 불로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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