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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권태기 (말1:1-5)

본문

옛말에 "물에 빠진 사람 건졌더니 내 봇짐 내놓으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에게 신세를 지고 그것을 갚기는 커녕 도리어 그 은인을 원망하는 경우를 일컬어 사용하는 말입니다. 모두가 제 살길을 찾는 세상에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준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자신의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선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욕을 얻어먹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만 할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물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때 어떤 대가를 기대하고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선행이 오도될 때면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못내 서운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을 해 보시지는 않으셨는지요 만약 이런 경험을 해 보셨다면 어느 경우입니까 물에 빠진 사람이 되어서 건짐을 받고도 그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입니까 아니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 경우가 되어서 오히려 원망을 듣고 서운해 한 경우입니까 물에 빠진 이스라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 경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에 빠졌다가 건짐을 받은 경우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건짐을 받았다면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을 할까요 그 은혜 앞에 감사를 할까요 아니면 물에 빠졌던 사람처럼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반응을 할까요 2절에 있는 말씀을 읽겠습니다. "." 어떻습니까 은혜에 감사를 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그 은혜를 저버리고 원망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까" 하고 질문을 던지는 무례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렇게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은 아닌 지요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를 함께 살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경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 이 말씀에서 우리들은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라기라는 책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고하기 위해서 말라기라는 선지자를 세우셔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고해야만 했을까요 이제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면서 말라기 선지자를 세우셔서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경고를 하셔야만 했는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말라기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가 어떤 시대 였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라기서는
B.C 430년경에 기록된 책으로 구약의 책들 중에 가장 늦게 기록된 책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돌아온지 약 100년이 되는 때 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B.C 538년경에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들이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중단이 되고 14년의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이 1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성전 건축을 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성전을 건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때 나타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학개 선지자입니다. 학개는 이렇게 성전 건축을 중단한체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을 하면서 성전 건축을 독려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 때의 상황을 학개서 1:4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성전은 황폐한 채로 있는데 너희는 호화 주택에 살고 있느냐
그러므로 전능한 나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는 자기 소행을 잘 살펴보아라 너희가 많이 심었으나 적게 거두었으며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셔도 흡족하지 않으며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품삯을 받아도 구멍 뚫린 지갑에 넣는 격이 되었다. 전능한 나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는 자기 소행을 잘 살펴보아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목재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러면 내가 그것으로 기뻐하고 영광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나 여호와의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다시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새로 짓고 있는 성전이 솔로몬이 지었던 그 때의 성전보다 못하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렇게 초라한 성전은 지을 필요가 없다고 낙심을 하고 성전 건축을 중단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학개 선지자는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클것이다는 소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독려에 힘입어 성전이 완공이 된 때가
B.C 516년 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이들이 꿈꾸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보잘 것이 없고 초라해 보이지만 언젠가는 이 성전이 화려하게 변할 것이다.는 것이 저들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라기서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린지 약 86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조들의 꿈이 이루어 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전이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기는 커녕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더 퇴락해 갈 뿐이였습니다. 신앙의 권태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는 많은 꿈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새롭게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학개의 말은 꿈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도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성전은 퇴락해 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끼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 까요 그렇습니다. 무력감에 빠져들기 십상입니다. 사람들은 변화가 있어야 사는 재미를 느낍니다. 그러나 변화가 없으면 무력감에 빠져들기도 하고 권태기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바로 말라기서가 기록되는 시점이 그러했습니다.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그래서 권태로와지는 시기였습니다. 저들에게 영적인 권태기가 다가 왔던 것입니다. 권태기에 접어들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행동은 예전처럼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례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부부 지간에 권태기를 가져 보신 분들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예전처럼 밥도 하고 집안 일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밥에 돌이 들어가기도 하고 음식의 간이 이상해지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먼지 하나 없던 집안이 먼지가 쌓입니다. 청소를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전처럼 청소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설렁설렁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괜히 상대방이 미워지고 싫습니다. 모든 것들이 불만스럽습니다. 상대방이 하는 일들마다 트집을 잡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부부 싸움을 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권태기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모든 일들이 그저 의례적일 뿐입니다. 6절 이하에 보면 이런 권태기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 이것이 이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고는 어떤 내용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의례적인 행동에서 마음을 드리는 행동으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서 전체는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가득 차 있습니다. 말라기서를 읽다보면 곳곳에서 사랑하는 자여 돌아오라는 음성을 곳곳에서 듣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3: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이제 우리들은 앞으로 약 8주 동안 말라기서를 살피면서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영적인 무력감에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권태감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재미가 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저 의례적일 뿐입니다. 가슴에 뜨거움도 사라지고 남은 것은 냉랭한 것 밖에 없습니다. 이러면 안된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마음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찬양을 하면서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흘린 것은 그저 옛날의 한낱 추억에 불과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 역시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영적인 권태기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따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 믿을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눈물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습니다. 왜 그리 예수를 믿는 것이 재미있던지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예수 이야기를 해도 부끄러운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꾸 시계를 보게 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권태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말라기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돌아 오라! 사랑하는 자여 돌아 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사랑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경고는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2절에 있는 말씀을 읽겠습니다. "." 하나님의 경고가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의 고백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경고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경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경고라는 말은 무거운 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경고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경고는 무거운 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거운 짐이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받아 들여야만 합니다. 욉니까 그렇습니다. 그 경고는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사실입니다. 우리들도 삶을 살아가면서 이런 경고를 듣습니다. 경고를 듣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잘못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들의 문제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말라기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악들을 적나라하게 들추어 냅니다. 이런 것들이 들추어지면 사실 기분 좋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를 드러내시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드러나면 자존심이 상하고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 경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근거로 한 경고 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랑하였노라는 말은 미완료형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미완료형은 계속적인 행동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계속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다가오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마치 장마철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과 같이 하나님은 하염없이 자신의 사랑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랑을 잘 표현한 예화가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할까 합니다. 어느 날 스펄젼 목사님이 농촌을 방문하는 중에 어떤 농장 건물 꼭대기에 세워놓은 바람개비가 있어서 보았더니 그 뱅뱅 돌아나가는 바람개비 꼬리에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써 붙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못내 못마땅한 생각이 들어서 목사님은 그 농부에게 "형제여 아니 하나님의 사랑이 이 바람개비처럼 변덕이 많다는 말이오 어찌하여 저기에다 저렇게 써 놓았소"라며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농부가 하는 말이 "그게 아닙니다. 바람은 어느 방향에서 불든지 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이야 어느 방향에서 불든 그 쪽으로 돌리기만 하면 바람개비는 돌아가는 것이니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부느냐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그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내 자세만 바로하면 모든 것이 사랑이기에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써 놓았노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요,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형편에 있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랑의 바람을 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런 하나님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사랑하노라고 하나님은 고백을 하십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이라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응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신들은 사랑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이였는가고 물을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부부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당신이 날 사랑하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 가고 따져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좀 전에 오늘 말씀의 배경을 살펴 본 것과 같이 90년 가까이 아무런 변화도 없고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세월을 보냈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누구 하나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극이 없었고 변화가 없었습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렇게 삶을 살아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감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렇게 무감각하게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하나님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고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처럼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고 질문을 던지시지 않습니까 에서와 야곱
그렇다면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을 하실까요

2,3절을 읽습니다. "" 자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야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감정은 어떤 것입니까 예, 사랑이라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에서에 대해서 가지시는 감정은 어떤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입니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사랑과 미움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사랑과 미움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선택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 즉, 야곱은 선택을 했지만 에서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갑자기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일까요 저는 한동안 야곱과 에서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불만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무엇이 잘나서 저를 선택하셨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야곱은 선하고 에서는 나쁘다는 선입관이 있어서 야곱이 행동한 것은 무조건 좋게 보려하고 에서가 한 일은 무조건 잘못된 일로 보려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야곱과 에서를 비교를 해 보면 야곱 보다는 에서가 훨씬 더 인간적이고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이야기를 크게 다루면서 에서는 장자권을 판 나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렇게 쉽게 판다는 것은 나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야곱은 어떠합니까 그의 마음에 넘치는 탐욕스러움을 보십시오. 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그는 형 에서를 속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도 속였습니다. 삼촌도 속였습니다. 그의 인생은 속임수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에서가 한 실수는 얼마든지 접어 둘 수 있는 그런 실수가 아닙니까 뿐만 아닙니다. 야곱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수 년 동안 아버지를 떠나 있었지만 그 순간에도 에서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충성스러움을 보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에서가 어떻게 합니까 용서하지 못할 야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아량을 베풀어서 그 못 된 야곱을 용서하지 않습니까 형이 이렇게 야곱을 용서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형을 믿지 못하고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엉뚱한데 가서 살 정도로 야곱은 비열하고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런 야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다니요 왜 이렇게 선한 에서는 버려졌을까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야곱이 바로 저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을 했던 지요 사실 바로 이 야곱의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들과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봐서 저들보다 더 선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더 문제가 있고 더 죄된 것이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선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너희들도 야곱의 후손들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잘나서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닌 것처럼 너희들도 선택을 받아야 할 만큼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잘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택을 받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스바냐 3:17절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다고요 예, 저들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말합니다. 여러분 기쁨을 이기지 못할 때 어떤 행동이 나타나는 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인하여 춤을 추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잠잠히 사랑하신다 말씀하십니다. 여기 잠잠히 사랑하신다는 말은 침묵 속에서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요란스런 장마비처럼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고요중에 내리는 이슬처럼 그렇게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저들로 인하여 즐거운 노래를 부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이스라엘이 이런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 당신이 날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고 묻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처럼 사랑했노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바로 이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서 부르심을 입었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망각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생활에 있어서 참 좋은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산다면 우리들의 머리는 터질 것입니다. 아마 정신병자라도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산다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에게 어떻게 넘쳤는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향해 우리를 과연 사랑하십니까 하고 항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바로 이 모습 속에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숨어 있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하고 말은 하지 않더라도 은밀한 중에 내 마음속에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고 원망스런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선택해 주신 그것만으로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준 그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에게 넘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더 큰사랑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랑이면 족합니다. 십자가의 사랑 이상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현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하십니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이런 사실을 잘 알았던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히 12:1-
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그렇습니다. 늘 이 십자가를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넘치고 있는가를 잊지 않고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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