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드리는 예배 (말1:6-14)
본문
이웃에 사는 두 사람이 내 말이 맞느니 네 말이 맞느니하면서 싸웠습니다. 사연인즉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여름이 되면 몸보신을 할양으로 닭을 한 마리 사다 정성을 다해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웃집 사람이 "옳지 올 여름이 되면 저 닭을 몰래 잡아먹으면 되겠구먼" 하고 생각을 하고는 눈독을 드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드디어 여름이 되자 눈독을 드리고 있던 이웃집 사람이 먼저 닭을 잡아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닭이 없어진 것을 안 닭주인은 이웃에 사는 그 사람이 평소에 자신의 닭에 많은 눈독을 드리고 있던 것을 생각해 내고는 그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이 우리 집 닭을 잡아먹었오아니오 나는 닭을 잡아먹은 적이 없소" 두 사람이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화가 난 닭주인은 쓰레기통을 뒤져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닭 다리가 나왔습니다. "이래도 닭을 잡아먹지 않았노라고 시치미를 뗄 작정이오아니 이 사람이 생사람 잡겠네 난 어제 닭을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오리를 잡아먹었단 말이오 그건 닭발이 아니라 오리발이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 문제로 한참 동안 이것이 오리발인가 닭발인가를 놓고 싸웠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가리켜 닭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이렇게 닭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미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리발 내밀기 바로 오늘 우리들이 대하는 본문도 그런 경우 중의 하나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서 1장은 매우 재미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1장을 읽다보면 하나님과 제사장들이 닭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미는 것처럼 이야기가 진행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미는 닭발은 무엇입니까
6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 자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두려워하고 나를 공경하는 일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제사장들은 어떤 닭발을 내밀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했는가하고 그럴듯한 오리발은 내밀고있습니다. 또 7절을 보십시다. 7절에서도 그럴듯한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 어떤 오리발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주를 더럽혔나이까"하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논쟁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죄를 지었다 말씀하시는 것이고 제사장들은 우리들은 죄를 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기서 제사장들이 주장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내민 닭발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단순히 자신들은 죄를 짖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판단이 잘못되었군요"라고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서 정면 도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하나님 잘못 판단하실 수 있는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비록 우리들의 판단이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판단은 늘 정확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제사장들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제사장으로서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다소 하나님의 판단이 이해가 되지 않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그렇군요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해야 옳은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다윗의 고백은 귀감이 됩니다. '시 139:23,2
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내가 죄를 짖지 않았으니 나를 잘 살펴보십시오."라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보기에는 바르게 산것 같고 의롭게 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판단을 따르겠습니다. 혹 제가 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하여 주옵소서" 하는 뜻입니다. 제사장들도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옳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좀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 음성에 귀를 귀우리며 자신의 삶에 대해서 돌이켜 볼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나는 제사장들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항변의 자세를 취하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다윗과 같이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까 우리들은 이 제사장들의 자세가 아닌 다윗의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멸시하는 제사장들 이런 제사장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6절을 읽습니다. "." 무엇이라 부르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이라 말합니다. 사실 제사장은 누구 때문에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있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들은 어떻게 행동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여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도 아낌없이 드려야 하는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중재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의 길로 인도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제사장들은 오늘의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목회자들을 가르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 모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일부 특별한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지만 신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사실에서 어떤 것들이 느껴지십니까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끼십니까 예,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아무나 할 수 없었던 그런 직분을 우리 모두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제사장이라는 말에 책임을 느껴야합니다. 어떤 책임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과연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살고 있는가 내가 과연 제사장으로서 내 자신의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얻은 것에 대해서는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직분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지는 않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제사장은 성결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구별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역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사십니까 거룩하고 성결된 삶을 사십니까 아니면 오늘 말씀에서 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에 조용히 여러분들의 자세를 한 번 살펴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에서 기록되고 있는 제사장들처럼 오리발을 내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잘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들이 오리발을 내밀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제 이 문제를 본문을 살피면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6절에 있는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6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두 가지 관계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어떤 관계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아버지로 주인으로 나타나시기를 원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아버지와 주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와 주인은 나쁜 아버지와 나쁜 주인이 아닌 좋은 아버지 좋은 주인을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하나님이셨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아들 이스라엘을 돌보셨습니다. 아버지로서 아들 이스라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저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은 모른체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위기의 순간 순간을 놓치시지 않으시고 저들을 지키시기를 위해서 애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좋은 아들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 이스라엘을 위해서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는 공경함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또,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는 두려움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관계가 유지되었다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관계에서 공경함과 두려움이 유지되지 않는 다면 그 관계는 사실 파산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부부 사이에서 기본적으로 유지되어야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부부 사이에 이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법적으로 부부 인줄 몰라도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는 부부 인줄 몰라도 사실은 파산한 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관계도 사실은 파산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이스라엘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효를 하는 아들인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어떻게 주를 더럽혔나이까 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사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제사장들처럼 오리발은 내미는 사람은 문제가 있어도 아주 심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지 아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제사장들처럼 아직도 하나님을 향해 오리발을 내밀지는 않습니까 흠 있는 것으로 이렇게 오리발을 내미는 제사장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내미는 오리발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에 있는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 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눈먼 짐승을 재물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병든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13절을 보십시다. 토색한 것을 가지고 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지고 왔노라고 말합니다. 또, 14절을 보십시다. 흠 있는 것으로 사기를 쳤다고 말합니다. 누구에게 사기를 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사기를 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재물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재물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흠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린 것은 그런 것이 아니였습니다. 눈멀고 병들고 절고 토색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어떤 것도 조건을 갖춘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흠 없는 재물을 요구하셨을 까요 그 이유는 마음을 받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재물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아무것도 드리지 않아도 홀로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드리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무엇이 부족해서 재물을 요구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재물 자체로는 하나님께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흠 없는 재물을 요구하심으로 재물이 아닌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흠 없는 재물을 고름으로 하나님께 정성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마음이 드려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드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재물이 드려졌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드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쫓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이 드려지지 않았던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13절을 자세히 보십시다. 이들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변폐스러운고" 하였다고 말합니다. 사실 여기서 변페스럽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해 놓고 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번거러운 일인고" 즉, 제사 드림이 기쁨이 아니고 즐거움은 더더욱 아니고 마지못해서 하는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코웃음을 치면서 재물을 드렸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제 생각은 코방귀를 뀌면서 재물을 드렸다고 번역을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코웃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비웃음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재물을 번거러운 마음으로 비웃으면서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을 드리는 일과는 참으로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비웃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말라기서의 배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말라기서는 학개 선지자의 예언이 있고난지 약 9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기록된 것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학개 선지자의 예언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짓는 이 성전이 지금은 초라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한 보배가 나타나면 이 성전의 영광이 이 전의 영광스러움 보다 더 크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꿈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꿈을 가지고 이들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바로 이 일을 90여 년 가까이했습니다. 그랬더니 보배가 나타났습니까 그렇습니다.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9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꿈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을 까요 얼마나 많은 재물들이 드려졌을까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무위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 변폐스러운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코웃음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드려도 드려도 쓸데없는 그런 제사를 요구하실까왜 하나님은 아무런 효험도 없는 그런 제사를 자꾸 요구하시는 것일까자신이 한 말도 지키지 않으면서 왜 이런 것만 달라고 하시는 것일까" 하면서 재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마음이 아닌 형식만 남은 그런 제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 문제를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님을 향해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그렇습니다.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아 남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어서 식사를 하려 하는데 들어오는 음식들에서 상한 냄새가 납니다. 기형인 물고기들 누가 먹다 만 듯한 음식들 이런 것들이 나왔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다. 아마 상당히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욀까요 저는 음식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즉, 상대가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그만 기분이 상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마음이 상해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예배는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께 어떤 것들을 드리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들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시간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들의 재능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들의 땀을 요구하십니다. 또, 우리들의 재물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것들을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일까요 우리들이 시간과 땀을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까 우리들이 물질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가난해 지시기 때문에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부요하십니다. 사실은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어느것 하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또다시 우리들에게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욉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시간 곰곰이 내가 드리는 것은 과연 어떤 것들인가 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 어떻습니까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저는 "주일날 교회를 빠지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주일을 지키는 성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바른 자세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또, 어떤 분들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것 역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과연 여러분들은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십니까 또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들이 드리는 땀은 어떤 것들입니까 어떤 분들은 마치 취미 생활을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봅니다. 취미 생활은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자기도취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성가대를 하는 것이 재미있고 교사를 하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에 합니다. 봉사를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할 때 재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것이어서는 곤란합니다. 또 어떤 분은 자신을 과시해 보려고 봉사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 정도의 사람이다.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멋지게 한번 처리해 보리라는 생각으로 봉사를 합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동기가 아닌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들의 드리는 헌금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분은 마치 하나님께 기부를 하는 것처럼 헌금을 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자신의 의를 쌓기 위해서 헌금을 드리는 사람을 볼 수 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바른 헌금이 아닙니다. 이런 헌금은 아무리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형식에 치우친 그런 것들이 아닌 우리들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9절의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렇게 마음이 없는 것을 드리면서도 저들은 무엇을 얻기를 기대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이들을 향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예, 하나도 받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구절이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드리는 것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그것들에 대해서는 번거럽게 생각을 하면서 무엇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받기는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으로 대접을 해 드리지 않으면서 자신들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오늘 여러분들의 모습은 아닌 지요 내가 하나님께 헌신을 하고 드리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고 기대하는 우리들은 아닌 지요 이런 제사장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10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 어떤 의미입니까 여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헛된 제사가 드려지지 않기 위해서 성전의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제사라면 차라리 성전의 문이 닫히고 제사가 중단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그렇게 의미 없이 제사하고 예배할 바에는 차라리 그 모든 것을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오늘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개인적으로는 우리들의 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을바에는 차라리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르지 않는 헌신을 하면서 헌신을 하는체 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 모든 것들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또, 이 메시지를 교회적으로 적용을 해보면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지 못하는 교회라면 차라리 문을 닫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을 하고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르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가 아니라면 차라리 문이 닫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생겼다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이 성남동 일대만 하더라도 벌써 여러 교회가 생기고 사라져 갔습니다. 이런 현상을 볼 때면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해봅니다. 하나님 우리 사랑하는 교회는 그렇게 쉽게 닫히게 하지 마옵소서. 그러나 이런 기도는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면 우리 교회도 문을 닫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바른 예배가 없는 교회가 굳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문이 닫혀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한국에는 문을 닫아야 할 교회들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한국 교회를 바라보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리라 생각을 하십니까 오늘 이 본문처럼 차라리 저 교회의 문을 닫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교회를 향해서는 어떠하리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혹 우리 교회도 닫아야 하는 대상에 올라 있지는 않을 까요 곰곰이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탄식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던 유대인들의 오늘은 어떠합니까 저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까 저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도 하나님도 계시지 않고 형식과 의식만 남아 있는 유대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저들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은 남아 있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1 절을 읽겠습니다. ""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저 이방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제사합니까 그렇습니다. 각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실 구약은 정한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성전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말씀은 어떤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각처에서 하나님의 이름 앞에 분향하며 예배하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이 말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아십니까 '요 4:20' 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요 4:21-2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장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그렇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고 드리는 예배가 아닌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책임이 누구에게 돌려져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돌려져 있습니다. 우리들이 삶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을 할 때 비로소 우리들은 우리들의 책임을 완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삶으로 예배하기 시작할 때 11절의 말씀과 같이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리라 말씀하신 이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로 이 막중한 책임이 우리들에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해지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들이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우리들의 마음을 드리는 예배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우리들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 예배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웃집 사람이 "옳지 올 여름이 되면 저 닭을 몰래 잡아먹으면 되겠구먼" 하고 생각을 하고는 눈독을 드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드디어 여름이 되자 눈독을 드리고 있던 이웃집 사람이 먼저 닭을 잡아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닭이 없어진 것을 안 닭주인은 이웃에 사는 그 사람이 평소에 자신의 닭에 많은 눈독을 드리고 있던 것을 생각해 내고는 그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이 우리 집 닭을 잡아먹었오아니오 나는 닭을 잡아먹은 적이 없소" 두 사람이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화가 난 닭주인은 쓰레기통을 뒤져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닭 다리가 나왔습니다. "이래도 닭을 잡아먹지 않았노라고 시치미를 뗄 작정이오아니 이 사람이 생사람 잡겠네 난 어제 닭을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 오리를 잡아먹었단 말이오 그건 닭발이 아니라 오리발이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 문제로 한참 동안 이것이 오리발인가 닭발인가를 놓고 싸웠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가리켜 닭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이렇게 닭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미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리발 내밀기 바로 오늘 우리들이 대하는 본문도 그런 경우 중의 하나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서 1장은 매우 재미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1장을 읽다보면 하나님과 제사장들이 닭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미는 것처럼 이야기가 진행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미는 닭발은 무엇입니까
6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 자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두려워하고 나를 공경하는 일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제사장들은 어떤 닭발을 내밀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했는가하고 그럴듯한 오리발은 내밀고있습니다. 또 7절을 보십시다. 7절에서도 그럴듯한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 어떤 오리발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주를 더럽혔나이까"하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논쟁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죄를 지었다 말씀하시는 것이고 제사장들은 우리들은 죄를 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기서 제사장들이 주장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내민 닭발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단순히 자신들은 죄를 짖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판단이 잘못되었군요"라고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서 정면 도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하나님 잘못 판단하실 수 있는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비록 우리들의 판단이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판단은 늘 정확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제사장들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제사장으로서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다소 하나님의 판단이 이해가 되지 않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그렇군요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해야 옳은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다윗의 고백은 귀감이 됩니다. '시 139:23,2
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내가 죄를 짖지 않았으니 나를 잘 살펴보십시오."라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보기에는 바르게 산것 같고 의롭게 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판단을 따르겠습니다. 혹 제가 죄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하여 주옵소서" 하는 뜻입니다. 제사장들도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옳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좀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 음성에 귀를 귀우리며 자신의 삶에 대해서 돌이켜 볼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나는 제사장들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항변의 자세를 취하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다윗과 같이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까 우리들은 이 제사장들의 자세가 아닌 다윗의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멸시하는 제사장들 이런 제사장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6절을 읽습니다. "." 무엇이라 부르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이라 말합니다. 사실 제사장은 누구 때문에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있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들은 어떻게 행동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여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도 아낌없이 드려야 하는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중재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의 길로 인도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제사장들은 오늘의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목회자들을 가르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 모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일부 특별한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지만 신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사실에서 어떤 것들이 느껴지십니까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끼십니까 예,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아무나 할 수 없었던 그런 직분을 우리 모두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제사장이라는 말에 책임을 느껴야합니다. 어떤 책임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과연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살고 있는가 내가 과연 제사장으로서 내 자신의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얻은 것에 대해서는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직분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지는 않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제사장은 성결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구별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역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사십니까 거룩하고 성결된 삶을 사십니까 아니면 오늘 말씀에서 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에 조용히 여러분들의 자세를 한 번 살펴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에서 기록되고 있는 제사장들처럼 오리발을 내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잘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들이 오리발을 내밀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제 이 문제를 본문을 살피면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6절에 있는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6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두 가지 관계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어떤 관계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아버지로 주인으로 나타나시기를 원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아버지와 주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와 주인은 나쁜 아버지와 나쁜 주인이 아닌 좋은 아버지 좋은 주인을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하나님이셨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아들 이스라엘을 돌보셨습니다. 아버지로서 아들 이스라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저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은 모른체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위기의 순간 순간을 놓치시지 않으시고 저들을 지키시기를 위해서 애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좋은 아들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 이스라엘을 위해서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는 공경함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또,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는 두려움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관계가 유지되었다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관계에서 공경함과 두려움이 유지되지 않는 다면 그 관계는 사실 파산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부부 사이에서 기본적으로 유지되어야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부부 사이에 이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법적으로 부부 인줄 몰라도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는 부부 인줄 몰라도 사실은 파산한 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관계도 사실은 파산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이스라엘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효를 하는 아들인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어떻게 주를 더럽혔나이까 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사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제사장들처럼 오리발은 내미는 사람은 문제가 있어도 아주 심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지 아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제사장들처럼 아직도 하나님을 향해 오리발을 내밀지는 않습니까 흠 있는 것으로 이렇게 오리발을 내미는 제사장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내미는 오리발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에 있는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 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눈먼 짐승을 재물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병든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13절을 보십시다. 토색한 것을 가지고 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지고 왔노라고 말합니다. 또, 14절을 보십시다. 흠 있는 것으로 사기를 쳤다고 말합니다. 누구에게 사기를 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사기를 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재물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재물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흠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린 것은 그런 것이 아니였습니다. 눈멀고 병들고 절고 토색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어떤 것도 조건을 갖춘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흠 없는 재물을 요구하셨을 까요 그 이유는 마음을 받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재물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아무것도 드리지 않아도 홀로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드리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무엇이 부족해서 재물을 요구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재물 자체로는 하나님께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흠 없는 재물을 요구하심으로 재물이 아닌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흠 없는 재물을 고름으로 하나님께 정성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마음이 드려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드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재물이 드려졌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드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쫓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이 드려지지 않았던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13절을 자세히 보십시다. 이들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변폐스러운고" 하였다고 말합니다. 사실 여기서 변페스럽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해 놓고 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번거러운 일인고" 즉, 제사 드림이 기쁨이 아니고 즐거움은 더더욱 아니고 마지못해서 하는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코웃음을 치면서 재물을 드렸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제 생각은 코방귀를 뀌면서 재물을 드렸다고 번역을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코웃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비웃음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재물을 번거러운 마음으로 비웃으면서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을 드리는 일과는 참으로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비웃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말라기서의 배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말라기서는 학개 선지자의 예언이 있고난지 약 9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기록된 것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학개 선지자의 예언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짓는 이 성전이 지금은 초라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한 보배가 나타나면 이 성전의 영광이 이 전의 영광스러움 보다 더 크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꿈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꿈을 가지고 이들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바로 이 일을 90여 년 가까이했습니다. 그랬더니 보배가 나타났습니까 그렇습니다.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9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꿈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을 까요 얼마나 많은 재물들이 드려졌을까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무위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 변폐스러운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코웃음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드려도 드려도 쓸데없는 그런 제사를 요구하실까왜 하나님은 아무런 효험도 없는 그런 제사를 자꾸 요구하시는 것일까자신이 한 말도 지키지 않으면서 왜 이런 것만 달라고 하시는 것일까" 하면서 재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마음이 아닌 형식만 남은 그런 제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 문제를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님을 향해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그렇습니다.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아 남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어서 식사를 하려 하는데 들어오는 음식들에서 상한 냄새가 납니다. 기형인 물고기들 누가 먹다 만 듯한 음식들 이런 것들이 나왔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다. 아마 상당히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욀까요 저는 음식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즉, 상대가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그만 기분이 상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마음이 상해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예배는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께 어떤 것들을 드리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들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시간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들의 재능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들의 땀을 요구하십니다. 또, 우리들의 재물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것들을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일까요 우리들이 시간과 땀을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까 우리들이 물질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가난해 지시기 때문에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부요하십니다. 사실은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어느것 하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또다시 우리들에게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욉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시간 곰곰이 내가 드리는 것은 과연 어떤 것들인가 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 어떻습니까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까 저는 "주일날 교회를 빠지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주일을 지키는 성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바른 자세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또, 어떤 분들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것 역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과연 여러분들은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십니까 또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들이 드리는 땀은 어떤 것들입니까 어떤 분들은 마치 취미 생활을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봅니다. 취미 생활은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자기도취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성가대를 하는 것이 재미있고 교사를 하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에 합니다. 봉사를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할 때 재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것이어서는 곤란합니다. 또 어떤 분은 자신을 과시해 보려고 봉사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 정도의 사람이다.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멋지게 한번 처리해 보리라는 생각으로 봉사를 합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동기가 아닌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들의 드리는 헌금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분은 마치 하나님께 기부를 하는 것처럼 헌금을 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자신의 의를 쌓기 위해서 헌금을 드리는 사람을 볼 수 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바른 헌금이 아닙니다. 이런 헌금은 아무리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형식에 치우친 그런 것들이 아닌 우리들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9절의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렇게 마음이 없는 것을 드리면서도 저들은 무엇을 얻기를 기대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이들을 향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예, 하나도 받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구절이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드리는 것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그것들에 대해서는 번거럽게 생각을 하면서 무엇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받기는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으로 대접을 해 드리지 않으면서 자신들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오늘 여러분들의 모습은 아닌 지요 내가 하나님께 헌신을 하고 드리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고 기대하는 우리들은 아닌 지요 이런 제사장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10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 어떤 의미입니까 여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헛된 제사가 드려지지 않기 위해서 성전의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제사라면 차라리 성전의 문이 닫히고 제사가 중단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그렇게 의미 없이 제사하고 예배할 바에는 차라리 그 모든 것을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오늘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개인적으로는 우리들의 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을바에는 차라리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르지 않는 헌신을 하면서 헌신을 하는체 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 모든 것들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또, 이 메시지를 교회적으로 적용을 해보면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지 못하는 교회라면 차라리 문을 닫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을 하고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르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가 아니라면 차라리 문이 닫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생겼다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이 성남동 일대만 하더라도 벌써 여러 교회가 생기고 사라져 갔습니다. 이런 현상을 볼 때면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해봅니다. 하나님 우리 사랑하는 교회는 그렇게 쉽게 닫히게 하지 마옵소서. 그러나 이런 기도는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면 우리 교회도 문을 닫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바른 예배가 없는 교회가 굳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문이 닫혀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한국에는 문을 닫아야 할 교회들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한국 교회를 바라보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리라 생각을 하십니까 오늘 이 본문처럼 차라리 저 교회의 문을 닫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교회를 향해서는 어떠하리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혹 우리 교회도 닫아야 하는 대상에 올라 있지는 않을 까요 곰곰이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탄식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던 유대인들의 오늘은 어떠합니까 저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까 저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도 하나님도 계시지 않고 형식과 의식만 남아 있는 유대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저들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은 남아 있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1 절을 읽겠습니다. ""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저 이방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제사합니까 그렇습니다. 각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실 구약은 정한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성전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말씀은 어떤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각처에서 하나님의 이름 앞에 분향하며 예배하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이 말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아십니까 '요 4:20' 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요 4:21-2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장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그렇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고 드리는 예배가 아닌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책임이 누구에게 돌려져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돌려져 있습니다. 우리들이 삶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을 할 때 비로소 우리들은 우리들의 책임을 완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삶으로 예배하기 시작할 때 11절의 말씀과 같이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리라 말씀하신 이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로 이 막중한 책임이 우리들에게 부여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해지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들이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우리들의 마음을 드리는 예배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우리들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 예배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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