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 대한 기대 (말2:10-16)
본문
서로에 대한 기대 얼마전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목사님 부부와 저희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에 목사로서 남편으로서 각각 몇 점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저희 집 큰 녀석이 "저희 아빠는 엄마에게는 100점이지만 우리들에게는 0점이에요"하고 말해버리는 바람에 웃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내가 아이들에게 왜 이런 점수를 받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들이 원하는 아빠가 되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지만 아빠로서 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에게 대한 기대치가 있습니다. 부부는 부부끼리, 형제는 형제끼리, 서로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만족할 수 있다면 높은 점수를 주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낮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맺고 있는 여러 관계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상대방이 여러분들에게 과연 몇 점이나 줄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높은 점수입니까 아니면 낮은 점수입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서로 맺고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관계입니까 그렇습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끼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도와 성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관계들 가운데 상대방이 나에게 몇 점이나 줄 수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에서는 몇 점이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저와의 관계에서는 몇 점이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하면 혹 "목사님 하나님께만 잘 보이면 되지 목사님께 잘 보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면 되지요" 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맞지 않는 이야기 같습니다. 절반만 맞으니 틀린 이야기나 다름이 없는 이야기이지요. 물론 우리들은 사람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도 신실하게 드러나야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목사로서 여러분들의 기대를 무시하고 산다면 그것 역시 문제이고 여러분들이 성도로서 목사의 기대를 무시하고 산다면 그것 역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도 여러분들이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힘쓰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제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이를 위해 힘쓰십시오. 그래서 서로를 생각하면 그저 기쁘고 즐거운 우리들이 되십시다. 서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90점 정도는 무난히 줄 수 있는 우리들의 관계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런 기대는 하나님께서도 하시고 계십니다. 그저 우리들을 생각만하면 기쁨이 절로 나오고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하고 하나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우리들이 살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몇 점을 주시리라 생각을 하십니까 흡족해 하시면서 높은 점수를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기대 말라기서는 바로 이런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서의 대 주제는 1:2절에서 나타난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을 까요 그렇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자신의 백성 삼고 자신의 자녀를 삼으신 것은 백성처럼, 자녀처럼 그렇게 살아가기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 했습니까 언제 어떻게 우리들을 사랑했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던 것입니다. 말라기서는 바로 이런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책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향해 사랑을 쏟아 붓고 있는데 왜 너희들은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하느냐 왜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는 메세지가 곳곳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말라기서를 통해서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을 쏟아 부으시면서 안타깝게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도 말라기 시대처럼 한없이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말라기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1:6절에서도 이런 관계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1:6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 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살피기를 원하는 것은 "일진대"라는 말입니다. 아비일진대 주인일진대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저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어떻게 불렀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주님"이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내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이것을 궁리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기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시든 그것과 상관없이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책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온갖 사랑을 다 쏟아 붇고 계시는데 아들은 계속 헛소리만 하면서 아버지하고는 상관없이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보십시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사십니까 여러분들을 향한 아버지의 기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십니까 혹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버지의 뜻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이 그분의 자녀라면 그분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욕을 얻어먹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께 욕을 먹히는 그런 아들은 아닙니까 한 아버지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 10절 상반 절을 읽습니다. "."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한 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이라는 말이지요. 무엇이 하나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라기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처럼 보입니까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를 아버지로 섬기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한 형제, 자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족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을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가족보다 가까운 관계는 없습니다. 가족보다 사랑스런 사이는 없습니다. 가족은 서로의 허물을 덮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은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선지자가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며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계속해서 10절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예, "어찌하여" 라 말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가족 관계를 바르게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읽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무엇이라 말하지요 그렇습니다. 각각 자기 형제들에게 궤사를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 궤사라는 말은 배반이나 반역을 나타날 때 쓰는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형제들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한 하나님으로 모시고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고 서로를 격려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저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가족 된 모든 도리를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형제들끼리 화목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제일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율법의 모든 것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둘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형제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형제사랑을 강하게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살았다고요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제가 자녀들을 기르면서 가장 마음이 상할 때는 형제끼리 싸울때입니다. 형제끼리 서로 다투고 치고 받을 때 울화통이 터집니다. 혹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싸우면서 정이 든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싸우지 않고 정들기를 더 원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느껴지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들께 묻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아버지입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떤 관계입니까 그렇습니다. 한 가족이며 한 형제입니다.
그렇다면 옆에 계신 분들을 보십시오. 아니 앞뒤를 보시면서 서로의 얼굴들을 보십시다. 어떻습니까 한 가족으로 느껴지십니까 혹 여러분들 중에 오늘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돌아앉으십시오. 우리들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지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살아간다면 우리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러고도 아버지의 뜻대로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언약을 욕되게 함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등을 돌리는 일이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이렇게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히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면서 기대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물론 이 일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의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배반하고 다툰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었던 언약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욕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의 결과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 옆에 매일 형제끼리 싸우는 집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누구를 욕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집의 가장을 욕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자녀입니까 혹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자녀는 아닙니까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자녀들입니까 성결함을 원하심 다음으로 아버지가 자녀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11절을 읽습니다. "" 자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결을 욕되게 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구절을 미루어 볼 때 자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결한 삶을 기대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결을 유지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아니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저들은 궤사를 행하고 가증한 일을 행하고 이방신의 딸들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11절을 가만히 보면 유다는 혹은 이스라엘은 이라고 말해도 옳은 것은 유다라고 불렀다가 이스라엘로 불렀다가 예루살렘으로 부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올 때 대부분이 유다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여러 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여기 이스라엘이란 말은 언약 백성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저들이 언약 백성이므로 언약 백성처럼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언약 백성들이 무엇을 저질렀다고요 그렇습니다. 가증한 일을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여기 가증한 일은 더러운 일을 말합니다. 언약 백성들은 더럽게 살아서는 안돼는 백성들입니다. 다른 그 누구보다 더 성결하게 살아야 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러움에 자신들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계속해서 저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에루살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루살렘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전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역시 무엇이 유지되어야 합니까 그렇지요. 성결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런 성결이 유지되어야 할 예루살렘에 무엇이 있었다고요 예, 가증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더러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더러움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11절 하반절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에 들어갈 때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저들과 혼인을 하면 저들의 삶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으로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신을 섬기는 여인과 혼인함으로 저들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 가운데는 가증한 것이 자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성결하게 살아야 하는 언약 백성이 성결을 잃어버리고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 예루살렘이 오히려 가증한 장소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자녀로서의 모든 특성을 잃어버리고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저는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공부를 잘했느냐 못했느냐 보다는 최선을 요구합니다. 즉, 최선을 다했느냐 아니냐 이것으로 문책을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얼마나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느냐 입니다. 이것이 제가 제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아이들이 진실이라는 울타리를 넘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얼마나 화가 나는지요. 때로는 얄밉기까지 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결이라는 담을 훌쩍 뛰어 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언약 백성으로서 모든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과연 성결함이 있습니까 여기 성결함이라는 거룩을 말합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되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말이 달라야 하고 행동이 달라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삶의 방향이 달라야 합니다. 구별되어야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과연 다릅니까 다른 것이 있다면 뭐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주일날 놀러 가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 교회 오는 것이 다른 점입니까 물론 그것도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삶의 모든 것들이 다 달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욕지거리를 할 때 우리는 겸손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기를 칠 때 우리들은 내 것을 나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불의를 저지를 때 우리들은 진실을 말하며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뭔가 구별된 것이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구별되어 사십니까 왜 구별됨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신랑을 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라는 신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는 세상이라는 신랑을 두고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습니다. 둘을 섬겼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두 사람의 신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신랑은 점잖고 어진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신랑에게 갈 때는 언제나 점잖고 어질게 하고 갑니다. 그러나 또한 신랑은 야하고 쾌활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신랑에게 갈 때는 그렇게 하고 갑니다. 언젠가는 이런 이중 생활이 들통이 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도 혹 이렇게 두 신랑을 두고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은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에서는 세상의 가증함이 있고 교회에 오면 성결한척 하지는 않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그런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깨우는 자나 응답하는 자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12절을 보십니다. "." 먼저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 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녘이 되면 이곳 저곳에서 양들을 깨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소리에 맞추어서 양들만 깨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일꾼들도 일어날 것이며 다른 목동들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일어났다는 신호로 또 감사하다는 신호로 소리를 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깨우는 자도 또, 응답하는 자도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황량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이 있음을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수고의 땀을 흘리면서 살아가실 것입니다. 서로를 깨우며 아침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결을 욕되게 하는 자들은 이런 일들이 끊어지리라 말씀하십니다. 끊어질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끊어질 것이라 말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사에 참석을 하는 것 같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저가 두 신랑을 섬기고 있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저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아버님 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들이 성결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자녀가 되십니까 성결하게 살아가는 자녀들입니까 아니면 성결을 욕되게 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입니까 가정을 지키기를 바라심 다음으로 아버지가 자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3절을 읽습니다. "." 13절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린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14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함께 14절을 읽습니다. "" 14절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는"이라고 말함으로서 13절의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자 그러면 이는 이후에 기록된 말에 대해서 살펴보십시다. 아내에게 궤사를 행하였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13절에서 눈물로 탄식으로 단을 가린다는 말은 이 부분과 연결이 됩니다. 즉, 자신의 처를 배반하고 학대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이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가서 자신들의 원통함을 아뢸 것입니다. 13절의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다시 한 번 13절을 읽습니다. ""
그런데 13절을 가만히 보면 이 여인들만 이곳에 나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도 나왔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여인들을 버린 남편들도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헌물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으실 것입니다. 욀까요 15절을 읽습니다. "."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예, 하나님의 영이 유여 할지라도 오직 하나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영이 유여 하다는 말은 능력이 크다는 말입니다. 즉, 더 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한 사람의 남자에 한 사람의 여자를 통해 하나의 가정을 갖게 하신 이유는" 하는 의미입니다. 즉, 서로 얽히고 설키게 가정을 만들지 않는 이유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도 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요 예,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경건한 자손이란 적법한 자손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적법한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통해서 자녀를 번식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가정의 질서를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서도 저들은 뻔뻔하게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립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제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그렇습니다. 받지 않으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어찜이니이까" 이 질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들 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바라보지 못한 연고입니다. 자신들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어찜이니까 하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부도덕한 그 행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체 이들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투덜대기만을 일삼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찜이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스운 모습입니까
그렇다면 이들이 여기서 말했어야 했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하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 여러분들도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여러분 자신들을 보기보다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어찜이니까 하고 반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을 하면서 한 가지 놀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형제간에 반목하고 불신하고 성결을 욕되게 하고 가정을 스스로 파괴하는 이런 일들이 일반화되고 보편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몇몇 사람들이 이런 죄를 저질렀다면 말라기 선지자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유행병처럼 형제간에 반목하는 일들이 성결을 욕되게 하는 일들이 아내를 학대하고 버리는 일들이 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전 방화 사건이 유행병처럼 전국을 휩쓸었던 것처럼 그렇게 이런 일들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1:2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히려 죄의 유행병이 번지기 시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에 무감각해 지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6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을 보십시다.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을 보십시다. 과연 이들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대치에 합당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까 혹 여러분들도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버지의 뜻에 무감각한 자녀들은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많은 죄의 유행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만 한눈을 팔면 그 유행이 우리들을 잡아 삼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오늘 본문의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라" 그렇습니다. 죄악들이 만연하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을 지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심령을 지킬 줄 아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맺고 있는 여러 관계들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상대방이 여러분들에게 과연 몇 점이나 줄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높은 점수입니까 아니면 낮은 점수입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서로 맺고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관계입니까 그렇습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끼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도와 성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관계들 가운데 상대방이 나에게 몇 점이나 줄 수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성도와 성도와의 관계에서는 몇 점이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저와의 관계에서는 몇 점이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하면 혹 "목사님 하나님께만 잘 보이면 되지 목사님께 잘 보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면 되지요" 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맞지 않는 이야기 같습니다. 절반만 맞으니 틀린 이야기나 다름이 없는 이야기이지요. 물론 우리들은 사람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도 신실하게 드러나야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목사로서 여러분들의 기대를 무시하고 산다면 그것 역시 문제이고 여러분들이 성도로서 목사의 기대를 무시하고 산다면 그것 역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도 여러분들이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힘쓰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제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이를 위해 힘쓰십시오. 그래서 서로를 생각하면 그저 기쁘고 즐거운 우리들이 되십시다. 서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90점 정도는 무난히 줄 수 있는 우리들의 관계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런 기대는 하나님께서도 하시고 계십니다. 그저 우리들을 생각만하면 기쁨이 절로 나오고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하고 하나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우리들이 살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몇 점을 주시리라 생각을 하십니까 흡족해 하시면서 높은 점수를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기대 말라기서는 바로 이런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서의 대 주제는 1:2절에서 나타난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을 까요 그렇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자신의 백성 삼고 자신의 자녀를 삼으신 것은 백성처럼, 자녀처럼 그렇게 살아가기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 했습니까 언제 어떻게 우리들을 사랑했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던 것입니다. 말라기서는 바로 이런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책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향해 사랑을 쏟아 붓고 있는데 왜 너희들은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하느냐 왜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는 메세지가 곳곳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말라기서를 통해서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을 쏟아 부으시면서 안타깝게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도 말라기 시대처럼 한없이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마음을 느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말라기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1:6절에서도 이런 관계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1:6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 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살피기를 원하는 것은 "일진대"라는 말입니다. 아비일진대 주인일진대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저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어떻게 불렀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주님"이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내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이것을 궁리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기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시든 그것과 상관없이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책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온갖 사랑을 다 쏟아 붇고 계시는데 아들은 계속 헛소리만 하면서 아버지하고는 상관없이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보십시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사십니까 여러분들을 향한 아버지의 기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십니까 혹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버지의 뜻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이 그분의 자녀라면 그분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욕을 얻어먹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께 욕을 먹히는 그런 아들은 아닙니까 한 아버지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 10절 상반 절을 읽습니다. "."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한 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이라는 말이지요. 무엇이 하나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라기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처럼 보입니까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를 아버지로 섬기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한 형제, 자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족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을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가족보다 가까운 관계는 없습니다. 가족보다 사랑스런 사이는 없습니다. 가족은 서로의 허물을 덮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은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선지자가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며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계속해서 10절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예, "어찌하여" 라 말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가족 관계를 바르게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읽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무엇이라 말하지요 그렇습니다. 각각 자기 형제들에게 궤사를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 궤사라는 말은 배반이나 반역을 나타날 때 쓰는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형제들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한 하나님으로 모시고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고 서로를 격려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저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가족 된 모든 도리를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형제들끼리 화목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제일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율법의 모든 것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둘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형제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형제사랑을 강하게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살았다고요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제가 자녀들을 기르면서 가장 마음이 상할 때는 형제끼리 싸울때입니다. 형제끼리 서로 다투고 치고 받을 때 울화통이 터집니다. 혹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싸우면서 정이 든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싸우지 않고 정들기를 더 원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느껴지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들께 묻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아버지입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떤 관계입니까 그렇습니다. 한 가족이며 한 형제입니다.
그렇다면 옆에 계신 분들을 보십시오. 아니 앞뒤를 보시면서 서로의 얼굴들을 보십시다. 어떻습니까 한 가족으로 느껴지십니까 혹 여러분들 중에 오늘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돌아앉으십시오. 우리들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지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살아간다면 우리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러고도 아버지의 뜻대로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언약을 욕되게 함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등을 돌리는 일이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이렇게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히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면서 기대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물론 이 일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의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배반하고 다툰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었던 언약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욕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의 결과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 옆에 매일 형제끼리 싸우는 집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누구를 욕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집의 가장을 욕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자녀입니까 혹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자녀는 아닙니까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자녀들입니까 성결함을 원하심 다음으로 아버지가 자녀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11절을 읽습니다. "" 자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결을 욕되게 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구절을 미루어 볼 때 자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결한 삶을 기대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결을 유지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아니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저들은 궤사를 행하고 가증한 일을 행하고 이방신의 딸들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11절을 가만히 보면 유다는 혹은 이스라엘은 이라고 말해도 옳은 것은 유다라고 불렀다가 이스라엘로 불렀다가 예루살렘으로 부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올 때 대부분이 유다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여러 이름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여기 이스라엘이란 말은 언약 백성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저들이 언약 백성이므로 언약 백성처럼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언약 백성들이 무엇을 저질렀다고요 그렇습니다. 가증한 일을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여기 가증한 일은 더러운 일을 말합니다. 언약 백성들은 더럽게 살아서는 안돼는 백성들입니다. 다른 그 누구보다 더 성결하게 살아야 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러움에 자신들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계속해서 저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에루살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루살렘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전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역시 무엇이 유지되어야 합니까 그렇지요. 성결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런 성결이 유지되어야 할 예루살렘에 무엇이 있었다고요 예, 가증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더러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더러움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11절 하반절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에 들어갈 때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저들과 혼인을 하면 저들의 삶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으로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신을 섬기는 여인과 혼인함으로 저들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 가운데는 가증한 것이 자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성결하게 살아야 하는 언약 백성이 성결을 잃어버리고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 예루살렘이 오히려 가증한 장소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자녀로서의 모든 특성을 잃어버리고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저는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공부를 잘했느냐 못했느냐 보다는 최선을 요구합니다. 즉, 최선을 다했느냐 아니냐 이것으로 문책을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얼마나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느냐 입니다. 이것이 제가 제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아이들이 진실이라는 울타리를 넘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얼마나 화가 나는지요. 때로는 얄밉기까지 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결이라는 담을 훌쩍 뛰어 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언약 백성으로서 모든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과연 성결함이 있습니까 여기 성결함이라는 거룩을 말합니다. 이 거룩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되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말이 달라야 하고 행동이 달라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삶의 방향이 달라야 합니다. 구별되어야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과연 다릅니까 다른 것이 있다면 뭐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주일날 놀러 가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 교회 오는 것이 다른 점입니까 물론 그것도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삶의 모든 것들이 다 달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욕지거리를 할 때 우리는 겸손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기를 칠 때 우리들은 내 것을 나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불의를 저지를 때 우리들은 진실을 말하며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뭔가 구별된 것이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구별되어 사십니까 왜 구별됨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신랑을 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라는 신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는 세상이라는 신랑을 두고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습니다. 둘을 섬겼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두 사람의 신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신랑은 점잖고 어진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신랑에게 갈 때는 언제나 점잖고 어질게 하고 갑니다. 그러나 또한 신랑은 야하고 쾌활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신랑에게 갈 때는 그렇게 하고 갑니다. 언젠가는 이런 이중 생활이 들통이 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도 혹 이렇게 두 신랑을 두고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은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에서는 세상의 가증함이 있고 교회에 오면 성결한척 하지는 않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그런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깨우는 자나 응답하는 자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12절을 보십니다. "." 먼저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 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녘이 되면 이곳 저곳에서 양들을 깨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소리에 맞추어서 양들만 깨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일꾼들도 일어날 것이며 다른 목동들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일어났다는 신호로 또 감사하다는 신호로 소리를 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깨우는 자도 또, 응답하는 자도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황량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이 있음을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수고의 땀을 흘리면서 살아가실 것입니다. 서로를 깨우며 아침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결을 욕되게 하는 자들은 이런 일들이 끊어지리라 말씀하십니다. 끊어질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끊어질 것이라 말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사에 참석을 하는 것 같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저가 두 신랑을 섬기고 있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저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아버님 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들이 성결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자녀가 되십니까 성결하게 살아가는 자녀들입니까 아니면 성결을 욕되게 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입니까 가정을 지키기를 바라심 다음으로 아버지가 자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3절을 읽습니다. "." 13절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린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것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14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함께 14절을 읽습니다. "" 14절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는"이라고 말함으로서 13절의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자 그러면 이는 이후에 기록된 말에 대해서 살펴보십시다. 아내에게 궤사를 행하였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13절에서 눈물로 탄식으로 단을 가린다는 말은 이 부분과 연결이 됩니다. 즉, 자신의 처를 배반하고 학대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이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가서 자신들의 원통함을 아뢸 것입니다. 13절의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다시 한 번 13절을 읽습니다. ""
그런데 13절을 가만히 보면 이 여인들만 이곳에 나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도 나왔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여인들을 버린 남편들도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헌물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으실 것입니다. 욀까요 15절을 읽습니다. "."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예, 하나님의 영이 유여 할지라도 오직 하나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영이 유여 하다는 말은 능력이 크다는 말입니다. 즉, 더 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한 사람의 남자에 한 사람의 여자를 통해 하나의 가정을 갖게 하신 이유는" 하는 의미입니다. 즉, 서로 얽히고 설키게 가정을 만들지 않는 이유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도 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요 예,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경건한 자손이란 적법한 자손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적법한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통해서 자녀를 번식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가정의 질서를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서도 저들은 뻔뻔하게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립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제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그렇습니다. 받지 않으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어찜이니이까" 이 질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들 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바라보지 못한 연고입니다. 자신들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어찜이니까 하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부도덕한 그 행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체 이들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투덜대기만을 일삼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찜이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스운 모습입니까
그렇다면 이들이 여기서 말했어야 했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바라보게 하시옵소서 하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 여러분들도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여러분 자신들을 보기보다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어찜이니까 하고 반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을 하면서 한 가지 놀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형제간에 반목하고 불신하고 성결을 욕되게 하고 가정을 스스로 파괴하는 이런 일들이 일반화되고 보편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몇몇 사람들이 이런 죄를 저질렀다면 말라기 선지자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유행병처럼 형제간에 반목하는 일들이 성결을 욕되게 하는 일들이 아내를 학대하고 버리는 일들이 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전 방화 사건이 유행병처럼 전국을 휩쓸었던 것처럼 그렇게 이런 일들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1:2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히려 죄의 유행병이 번지기 시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에 무감각해 지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6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을 보십시다.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을 보십시다. 과연 이들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대치에 합당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까 혹 여러분들도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버지의 뜻에 무감각한 자녀들은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많은 죄의 유행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만 한눈을 팔면 그 유행이 우리들을 잡아 삼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오늘 본문의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라" 그렇습니다. 죄악들이 만연하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을 지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심령을 지킬 줄 아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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