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말2:17-3:6)
본문
씨에스 루이스씨가 쓴 "하나님 내 마음이 상할 때 어디 계셨습니까"라는 책을 보면 책의 내용 중에 “이 책에서 당신이 너무나 행복해서 하나님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할 때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분을 찬양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도움은 아무 소용이 없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절박한 심정으로 찾고 싶어서 당신이 하나님께로 나간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눈앞에서 문은 꽝하고 닫히고 문을 안으로 잠그는 소리는 거듭하여 울려 퍼질 것이다. 뒤에 남은 것은 고요한 침묵뿐, 당신은 돌아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씨에스 루이스가 여기서 밝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들에게 평안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기도가 응답이 되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찬양을 하면 우리들의 찬양이 하나님께 온전히 열납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우리들에게 곤고함이 있고, 문제가 있고, 그래서 모든 소망이 다 끊어진 나머지 하나님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마치 하나님은 계시지도 않으시는 것처럼 침묵하시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계신다는 이야기이다. 정말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 무관심하셔서 아무런 반응도 하시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모른 척하고 계시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관심도 모른 척도 하시지도 않는다. 단지 내가 하나님이 무관심하다고 느낄 뿐이다. 사실 하나님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살피시고 계신다. 우리들이 무엇을 하는지 또 어떤 어려움을 당하는지 다 알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당하는 어려움 뒤에는 어떤 축복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다 아시면서 오직 그 때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잠잠히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하나님 왜! 나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습니까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던져 본 적이 없는가 우리들 중에 시련이라는 어려움의 긴 터널을 지나갈 때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 수록 이런 생각들이 나를 더 사로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금식 기도를 하고, 작정 기도를 하고, 철야 기도를 하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이유가 대부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제사정 좀 알아주세요. 왜 내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십니까" 하면서 부르짖는 것이다.
첫째. 누가 하나님을 괴롭히는가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번 하려고 한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져 보셨는가(여러 사람들에게 물어 본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 하나님도 고통을 당하십니까 그러나 본문 2:17절 말씀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을 괴롭게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누가 괴롭게 하였는가 17절에 "너희"라는 말이 나오는데 “너희”란 이스라엘 백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바로 자신이 지으시고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자신의 백성들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들도 저들처럼 하나님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고통이 되는 존재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당하시는 고통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직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 나로 인해 고통을 당하시고 괴로워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혹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어지지는 않았는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한 번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고통들을 하나님의 품에 안겨 드렸는가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감사이다. 기쁨이다.
그런데 어떤가 진정으로 이런 것들을 드렸는가 혹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통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은 회개해야 한다. 우리들의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이제 다시는 하나님께 괴로움을 드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을 무엇으로 괴롭게 하였는가 말로 괴롭게 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한 말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였다고 하는데 그 말이 어떤 말일까 "하나님은 행악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선히 보신다“고 말했다. 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들은 하나님을 원망을 하고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하고도 어떻게 했다고 말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변하고 있다. 말라기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수없이 항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말라기서의 별명을 말한다면 "항변서” “오리발서” 라고 말할 만큼 그렇게 자주 항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1:2절에서도, 1:6절에서도, 2:14절에서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곳곳에 저들이 "언제 그랬습니까언제 그랬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 할 수 있었던 백성들의 유일한 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을 하기보다 내밀고 자신을 은폐하고 숨기기에 더 급급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같다. 우리들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언제 우리들이 하나님을 괴롭게 했습니까" 이것은 우리들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괴롭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들이 이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짊어지고 있었던 고민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민이 두 가지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성전을 짖다 보니 성전의 초라함에 실망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이 성전의 지금 모습은 이렇게 초라하고 보잘것 없지만 앞으로 얼마 못가서 이 성전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 고 하였다.
그런데 100년이 되도록 성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성전은 점점 더 퇴락해 갔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실망케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실 학개 선지자가 말하기를 "성전의 앞으로의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크리라"고 말씀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의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전의 이전 영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법괘를 성전에 모셨을 때 왕상 8:10,11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구름이 성전을 가득 덮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사실 출애굽 시절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주 나타나셨다. 그러나 솔로몬이 살던 이 시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타나지 않으신지 제법 오래된 후였다. 따라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던 솔로몬 시대의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학개 선지자가 이 성전의 이전 영광보다 더 클 것이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듣던 그 시절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말할 수 없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에게 현현하실까 기대함으로 세월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근심하며 고민했던 것이다.
2) 아직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처음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저들은 이제 얼마 있지 않아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지배를 받고 사는 민족이었다. 주변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악인들과 나라들은 잘되고 번성하는데 선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셨다는 선민이라고 하는 자기들은 지독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선히 여기시며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넷째.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처리해 나가시는가 3:1절 이하에 보면 그래도 하나님은 인내하시면서 저들을 설득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수없이 오리발을 내밀고 항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인내하시며 설득하시는 이 놀라운 사랑. 사실 이것이 있기에 우리들도 하나님앞에 설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향해 수 없이 항변하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참으신다. 그리고 설득하시고 기다리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설득하시는가 3:1절에 보면 “보내고” “임한다”는 말이 나온다. 보내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사자가 보내어 진다. 보냄을 받은 사자가 할 일이 무엇인가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이 길이 예비되어 지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주가 임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악인을 기뻐하시고 저들을 선히 보신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왜 갑자기 주님께서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민하는 문제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민이 무엇인가
1) 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기다려 왔다. 얼마동안 기다렸는가 100여년을 기다리다 지쳤던 것이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인내하시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약속을 확인하시고 계시는 것이다.(그 약속은 자신이 오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얼마 뒤에 일어날 일인가 말라기서가
B.C 430년경에 기록되었으니까 앞으로도 약 400년을 기다려야 이루어 질 일인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100년을 기다리다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래도 기다리라 말씀하셨다. 훗날에 이 말씀이 신실하게 이루어 졌다. 400년이 지나자 어김없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신 것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조급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면 이렇게 조급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좀더 인내 할 수 있어야 한다. 100년을 기다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0년 뒤의 일들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들이 간구하는 문제들도 조급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것이다. 조금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을 보면서 깨달은 점은 우리들은 이렇게 반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2) 이 땅에 임하신 주님이 하실 일이 무엇인가 2절을 보면 하나는 연단하는 불에 비교하고 있고 또 하나는 표백하는 잿물에 비교 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1) 먼저 연단 하는 불에 대해서 살펴 보자. 재련사가 금을 연단 하기 위해서 불을 가열합니다. 왜 금의 순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금의 순도를 높인다고 하는 것은 불순물을 제거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불순물 제거를 통하여 금의 순도를 높이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의 생활에도 적용된다. 주님은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연단 하는 불을 주신다. 때로는 재물이라는 불을, 건강에 불을, 가정 환경에 불을, 인간관계에 불을 붙이신다. 왜! 순도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우리들의 어떻게 값진 보석이 될 수 있겠는가 주님은 이 땅에 성령님의 불을 보내어 모든 불순물들을 다 타게 하신다는 것이다.(성령님의 불이 타오르면 마음속에 있는 불순물이 다 탈 것이다.) 그래서 정결케 하실 것이다. 순도를 높이실 것이다. 그렇다. 불을 통과해야 한다. 모든 것이 녹아 내려서 우리들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불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래야 변한다. 순도가 높아진다. 값이 나간다. 이 불을 통과하지 않고 값진 신앙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그러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체질이 녹아 내리는 불을 통과했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불을 통과해야 한다. 불을 겁내서는 안된다. 3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연단 하는 재련사가 앉아서 재련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짐작해 보는 것은 이 재련은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법 시간이 걸리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기간 동안 참으로 견디기가 어렵다. 그러나 견디고 나면 우리들은 값진 보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참아야 한다. 견뎌야 한다. 재련사 되신 주님이 우리들을 재련하시면서 바라보면서 참고 인내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심판하는 불에 대하여 살펴 보자. 주님께서 오시면 저들을 심판하시는 불을 던지실 것이라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은 악인을 묵인하시지 않는다. 저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는 것이다. 5절 말씀을 보면 주님이 임하셔서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누구를 심판하시는가 술수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꾼의 삯을 억울케 하는 자,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는 자, 나그네를 억울케 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죄악들은 당시 대표적인 죄악들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주님은 죄가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임하심을 통하여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는 백성들에게 악인들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분명히 살아있음을 보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공의는 살아있다. 지금은 우리들이 보기에 악인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 저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2) 표백하는 잿물에 대하여 살펴보자. 옛날에는 잿물과 함께 옷을 빨면 옷이 하얗게 되었다. 바로 이 역할을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계 7:13,14절에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어린양의 피는 희게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백하는 잿물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피 흘림으로 깨끗케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들을 깨끗케 하셔서 흠도 없고 점도 없게 하신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정결하게 하실까 하나님께 의로운 재물을 드리기 위해서이다. 레위인(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린 이 재물이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이것은 주님을 통하여 깨끗케된 우리들이 하나님께 의로운 재물을 드린 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지니라" 로마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하고 드려지는 제물은 바로 내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들을 단련하시고 우리들을 표백하셔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아름다운 재물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끗케 하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하며, 우리를 단련하는 불에 대해 감사하는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잠잠히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하나님 왜! 나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습니까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던져 본 적이 없는가 우리들 중에 시련이라는 어려움의 긴 터널을 지나갈 때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 수록 이런 생각들이 나를 더 사로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금식 기도를 하고, 작정 기도를 하고, 철야 기도를 하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이유가 대부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제사정 좀 알아주세요. 왜 내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십니까" 하면서 부르짖는 것이다.
첫째. 누가 하나님을 괴롭히는가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번 하려고 한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져 보셨는가(여러 사람들에게 물어 본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 하나님도 고통을 당하십니까 그러나 본문 2:17절 말씀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을 괴롭게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누가 괴롭게 하였는가 17절에 "너희"라는 말이 나오는데 “너희”란 이스라엘 백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바로 자신이 지으시고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자신의 백성들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들도 저들처럼 하나님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고통이 되는 존재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당하시는 고통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직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 나로 인해 고통을 당하시고 괴로워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혹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어지지는 않았는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한 번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고통들을 하나님의 품에 안겨 드렸는가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감사이다. 기쁨이다.
그런데 어떤가 진정으로 이런 것들을 드렸는가 혹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통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은 회개해야 한다. 우리들의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이제 다시는 하나님께 괴로움을 드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을 무엇으로 괴롭게 하였는가 말로 괴롭게 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한 말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였다고 하는데 그 말이 어떤 말일까 "하나님은 행악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선히 보신다“고 말했다. 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들은 하나님을 원망을 하고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하고도 어떻게 했다고 말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변하고 있다. 말라기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수없이 항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말라기서의 별명을 말한다면 "항변서” “오리발서” 라고 말할 만큼 그렇게 자주 항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1:2절에서도, 1:6절에서도, 2:14절에서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곳곳에 저들이 "언제 그랬습니까언제 그랬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 할 수 있었던 백성들의 유일한 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을 하기보다 내밀고 자신을 은폐하고 숨기기에 더 급급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같다. 우리들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언제 우리들이 하나님을 괴롭게 했습니까" 이것은 우리들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괴롭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들이 이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짊어지고 있었던 고민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민이 두 가지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성전을 짖다 보니 성전의 초라함에 실망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이 성전의 지금 모습은 이렇게 초라하고 보잘것 없지만 앞으로 얼마 못가서 이 성전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 고 하였다.
그런데 100년이 되도록 성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성전은 점점 더 퇴락해 갔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실망케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실 학개 선지자가 말하기를 "성전의 앞으로의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크리라"고 말씀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의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전의 이전 영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법괘를 성전에 모셨을 때 왕상 8:10,11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가 구름이 성전을 가득 덮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사실 출애굽 시절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주 나타나셨다. 그러나 솔로몬이 살던 이 시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타나지 않으신지 제법 오래된 후였다. 따라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던 솔로몬 시대의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학개 선지자가 이 성전의 이전 영광보다 더 클 것이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듣던 그 시절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말할 수 없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에게 현현하실까 기대함으로 세월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근심하며 고민했던 것이다.
2) 아직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처음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저들은 이제 얼마 있지 않아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지배를 받고 사는 민족이었다. 주변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악인들과 나라들은 잘되고 번성하는데 선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셨다는 선민이라고 하는 자기들은 지독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선히 여기시며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넷째.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처리해 나가시는가 3:1절 이하에 보면 그래도 하나님은 인내하시면서 저들을 설득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수없이 오리발을 내밀고 항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인내하시며 설득하시는 이 놀라운 사랑. 사실 이것이 있기에 우리들도 하나님앞에 설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향해 수 없이 항변하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참으신다. 그리고 설득하시고 기다리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설득하시는가 3:1절에 보면 “보내고” “임한다”는 말이 나온다. 보내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사자가 보내어 진다. 보냄을 받은 사자가 할 일이 무엇인가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이 길이 예비되어 지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주가 임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악인을 기뻐하시고 저들을 선히 보신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왜 갑자기 주님께서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민하는 문제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민이 무엇인가
1) 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기다려 왔다. 얼마동안 기다렸는가 100여년을 기다리다 지쳤던 것이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인내하시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약속을 확인하시고 계시는 것이다.(그 약속은 자신이 오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얼마 뒤에 일어날 일인가 말라기서가
B.C 430년경에 기록되었으니까 앞으로도 약 400년을 기다려야 이루어 질 일인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100년을 기다리다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래도 기다리라 말씀하셨다. 훗날에 이 말씀이 신실하게 이루어 졌다. 400년이 지나자 어김없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신 것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조급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면 이렇게 조급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좀더 인내 할 수 있어야 한다. 100년을 기다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0년 뒤의 일들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들이 간구하는 문제들도 조급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것이다. 조금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을 보면서 깨달은 점은 우리들은 이렇게 반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2) 이 땅에 임하신 주님이 하실 일이 무엇인가 2절을 보면 하나는 연단하는 불에 비교하고 있고 또 하나는 표백하는 잿물에 비교 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1) 먼저 연단 하는 불에 대해서 살펴 보자. 재련사가 금을 연단 하기 위해서 불을 가열합니다. 왜 금의 순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금의 순도를 높인다고 하는 것은 불순물을 제거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불순물 제거를 통하여 금의 순도를 높이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의 생활에도 적용된다. 주님은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연단 하는 불을 주신다. 때로는 재물이라는 불을, 건강에 불을, 가정 환경에 불을, 인간관계에 불을 붙이신다. 왜! 순도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우리들의 어떻게 값진 보석이 될 수 있겠는가 주님은 이 땅에 성령님의 불을 보내어 모든 불순물들을 다 타게 하신다는 것이다.(성령님의 불이 타오르면 마음속에 있는 불순물이 다 탈 것이다.) 그래서 정결케 하실 것이다. 순도를 높이실 것이다. 그렇다. 불을 통과해야 한다. 모든 것이 녹아 내려서 우리들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불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래야 변한다. 순도가 높아진다. 값이 나간다. 이 불을 통과하지 않고 값진 신앙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세도, 다윗도, 바울도 그러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체질이 녹아 내리는 불을 통과했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불을 통과해야 한다. 불을 겁내서는 안된다. 3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연단 하는 재련사가 앉아서 재련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짐작해 보는 것은 이 재련은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법 시간이 걸리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기간 동안 참으로 견디기가 어렵다. 그러나 견디고 나면 우리들은 값진 보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참아야 한다. 견뎌야 한다. 재련사 되신 주님이 우리들을 재련하시면서 바라보면서 참고 인내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심판하는 불에 대하여 살펴 보자. 주님께서 오시면 저들을 심판하시는 불을 던지실 것이라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은 악인을 묵인하시지 않는다. 저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는 것이다. 5절 말씀을 보면 주님이 임하셔서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누구를 심판하시는가 술수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꾼의 삯을 억울케 하는 자,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는 자, 나그네를 억울케 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죄악들은 당시 대표적인 죄악들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주님은 죄가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임하심을 통하여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는 백성들에게 악인들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분명히 살아있음을 보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공의는 살아있다. 지금은 우리들이 보기에 악인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 저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2) 표백하는 잿물에 대하여 살펴보자. 옛날에는 잿물과 함께 옷을 빨면 옷이 하얗게 되었다. 바로 이 역할을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계 7:13,14절에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어린양의 피는 희게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백하는 잿물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피 흘림으로 깨끗케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들을 깨끗케 하셔서 흠도 없고 점도 없게 하신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정결하게 하실까 하나님께 의로운 재물을 드리기 위해서이다. 레위인(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린 이 재물이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이것은 주님을 통하여 깨끗케된 우리들이 하나님께 의로운 재물을 드린 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지니라" 로마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하고 드려지는 제물은 바로 내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들을 단련하시고 우리들을 표백하셔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아름다운 재물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끗케 하시는 주님께 감사해야 하며, 우리를 단련하는 불에 대해 감사하는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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