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말2:1-9)
본문
오늘 설교를 운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운명에 대한 자료들을 찾기를 시작을 했습니다. 여기저기 운명에 대한 자료들을 찾는 중에 컴퓨터 통신에서 제공을 하고 있는 운세를 점치는 프로그램이 눈에 띠였습니다. 혹 운명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 프로그램에 열자마자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보의 좋고 나쁜 내용보다 근실하고 노력하는 본인의 생활 태도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 글귀를 보고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에서 이미 운세를 점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운세를 점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운세를 점치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다 성실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한다면 훨씬 더 보람차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세에 대한 관심보다는 성실하게 살고자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 성실하게 삶을 살아감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한 사람이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1985년 5월 15일,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학위 수여식에 낯선 동양인 한 사람이 감격적인 눈물을 흘리며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전재경, 나이는 50세. 특별히 눈길은 끈 것은 그가 여느 사람과 달리 맹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전박사는 충남 부여에서 목수였던 아버지의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나 다른 아이들처럼 정상으로 자랐으나, 7살 되던 해 당시의 유행병인 안질을 앓다가 실명하게 되고 그때부터 고통과 불행의 나날을 보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 맹아학교에 입학한 그는 좌절과 고통을 견뎌내며 열심히 공부를 해서 건국대 역사지리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4년의 과정을 무사히 마친 그는 여러 가지 장애 요소가 많았지만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1년 예정의 유학 생활을 하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뉴욕의 복잡한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하는 맹인 전용 도서관을 20년이나 왕복하면서 공부를 했고 50세가 되는 해인 1985년 드디어 철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근실하게 노력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후일 그는 "자기 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였다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상 승리의 월계관을 쓴 인물들은 모두가 자기의 운명을 저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평정으로 대처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운명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에 따라서 아니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하며 사는가에 따라서 행복한 사람으로, 불행한 사람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의 삶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제사장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제사장들이란 어떤 사람들이었을 까요 이스라엘에는 저들을 이끌어 가는 삼대 직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왕직이요 다른 하나는 선지자직 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제사장직입니다. 왕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며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제사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이 삼대 직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추앙을 받는 직분으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삼대 직분 중에 하나를 갖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 소개되고 있는 제사장직 역시 이러한 영광스러움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 중에 하나 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들이 이처럼 영광스러운 직분을 얻을만한 사람들은 아니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 어느 지파가 소유하고 있는가를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어느 지파입니까 그렇습니다. 레위지파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열 두 지파가 있습니다. 이 열 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의 후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야곱이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의 열두 아들들을 모아 놓고 저들의 장래에 대해서 예언을 합니다. 이 예언을 살펴보면 시므온과 레위의 후손들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열 두 아들 중에 가장 비참한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창 49:5-7'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 하는 기계로다 내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 말씀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저주를 받아 흩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즉, 저들의 후손은 저주받은 인생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후손이 이렇게 저주를 받게 된 것은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잔인하게 복수를 한 까닭이었습니다. 이일 이후로 저들은 아버지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은 이렇게 저주를 받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저주를 받았던 시므온의 후손들은 모세의 임종시 각 지파를 축복하는 자리에서 그 이름이 빠지게 되었으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저들의 이름이 언급이 되지 않는 것을 볼 때 이 야곱의 저주대로 흩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이들은 저주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레위지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시므온의 후손과는 달리 다시 축복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즉, 저주의 자리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렇게 이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일까요 하나님 편에 선 레위지파 출 32장에 이에 대한 배경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출 32장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후 더디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숭배를 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돌아와 이 모습을 보고는 저들을 징계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누가 하나님 편에 서겠는가" 묻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레위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이들을 이렇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날에 백성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된 지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레위 지파가 하나님 편에 섰던 것은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복을 내리 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들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저주받은 인생에서 복 받은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손가락질을 받고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추앙의 대상이 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이들은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의 귀감으로 성경에 언급될 정도로 이들은 인정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이들의 인생을 이처럼 바꾸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께 바로 헌신될 수 있다면 나를 하나님께 바로 드리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인생을 바꾸십니다. 저주받은 레위지파의 운명을 바꾸신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운명도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들입니까 진정으로 헌신된 자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에게 헌신한 레위 지파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직분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들을 이처럼 선대해 주셨을까요 언약을 맺으신 이유 5절 이하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저주받은 인생을 변케 하셔서 복주신 이유는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의도와도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저주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처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레위 지파들 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난 뒤 우리들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저주받은 인생에서 복 받은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의 인생을 이렇게 바꾸어 놓으신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시며 사십니까 여러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들의 인생이 바뀌었다면 이제는 삶을 살아가는 목적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저주받은 인생을 살아갈 때 바로 그 때의 인생의 목적을 그대로 지니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고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기보다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아직도 자신의 재물을 쌓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들의 인생을 바꾸신 것은 우리들이 그것을 위해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만을 경외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이름을 두려워하며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레위 지파는 어떻게 살았을 까요 계속해서 5절 하반절을 읽습니다.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어떻게 살았다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말합니다. 이것이 누구의 평가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만큼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잘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한 것과 무엇이 연결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했음과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떨며 머리를 숙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했으며 그 이름을 위해서 삶을 살아갔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그들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자리를 하고 있어서 저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오늘 이들 처럼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그분의 이름의 위해서 삶을 살아가십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보다 다른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더 기억하고 가족의 이름을 더 기억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달랐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그 이름을 위해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시며 사십니까 진리를 말하며 또, 6절을 보십시다. "." 자 여기서 밝히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의 입에 있는 것과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었습니까 진리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없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불의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늘 진리를 말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를 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고 불의를 말하지 않는 이것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제법 신앙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이 부분이 잘 안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헌신적인 것 같고 신앙의 사람 같은데 입을 열면 진리보다는 불의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입을 열기만 하면 험담과 비방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약 3:9-11에서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 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샘이 한 구멍으로 쓴물과 단물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우리들의 입은 이 불가능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때로는 진리를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의를 말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레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진리를 말하고 불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진리를 말합니다.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선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불의를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더 어려워 보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쉬워도 불의를 말하지 않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불의를 말하면서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둘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계속해서 6절 하반절을 보십시다. "."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은 화평과 정직으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이킴
그런데 보십시오. 이와 같은 삶의 결과가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즉, 저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 하며 진리를 말하고 불의를 말하지 않으며 화평과 정직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이런 삶의 결과가 다른 사람들을 바로 세우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이처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면에 있어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항상 넘어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 옆에 가까이 가기만 하면 항상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넘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세워줍니다. 이 사람 옆에 사람이 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세움을 받습니다. 힘을 얻습니다. 바로 레위지파가 그렇게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가만히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당신으로 인해 상처를 입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왜 나를 넘어지게만 하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쩌면 여러분이 넘어지는 그 이유도 바로 당신 자신에게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은 경건한 삶의 영향력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의 영향력은 늘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고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십니까 레위 지파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운명을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꾼 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들도 하나님으로 인해 운명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정도에서 떠나는 제사장들
그런데 7,8절을 읽다보면 이런 제사장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자 7,8절을 읽습니다. "." 자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은 정도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좀전까지 저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7,8절은 오히려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8절의 너희라는 말입니다. 8절에서 말하는 너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1절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5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는 레위 즉, 그들은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이 아니라 저들의 선조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너희 선조들은 내가 자신들의 운명을 바꾼 줄 알고 나에게 헌신을 하고 나를 경외하는 삶을 살았는데 너희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언급하시고 싶으셨습니다. 내가 운명을 바꾸고 너희들에게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겼는데 왜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운명이 과거에는 어떠했으며 이제는 어떠한가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자신들의 모습이 자신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인양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정도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도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레위지파로서 당연히 걸어가야 할 바로 그 길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제사장으로서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에 들어와서 이들은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그 길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걸어야 할 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걸어가야 할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바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 있고 아내는 아내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레위지파는 제사장으로서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길에서 저들은 벗어나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걸어가야 할 바른길을 걷고 계십니까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성경은 우리들을 향해 이제는 신약 시대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도 제사장으로서의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성결 되고 거룩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길을 걷고 계십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걷고 계시는 그 길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과연 여러분들이 걷고 계시는 그 길이 제사장으로서 가야할 길입니까 아니라면 돌이키십시오. 바른길로 들어오십시오. 하나님의 도를 지키지 않음 계속해서 9절을 보십시다. "."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도를 지키지 아니하였고 율법을 행할 때에 편벽되이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율법을 편벽되이 행하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의 얼굴을 보고 율법을 시행했다는 것입니다. 공평 정대하게 율법을 시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 율법을 시행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행하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이득을 주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율법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이미 저주하였노라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절을 읽습니다. "."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저주하였다는 것입니다. 욉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이 가야 할 그 길로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무엇을 저주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을 복을 저주하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무엇이 저들의 복입니까 그렇습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옮겨진 그것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저주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들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운명을 바꾸시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저주의 자리에서 복의 자리로 저들은 옮겨졌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저들은 은혜를 잊고 삶으로 말미암아 저주의 자리로 옮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 되어지고 있습니까 자신들에게 넝쿨째 굴러온 복을 이렇게 차버리다니요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들은 오늘 본문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들 중에서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삶을 살아가면서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저주의 자리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바뀌어진 자신의 운명을 확신하지 못하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제사장들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 여러분들 중에도 이처럼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하나님의 징계 그러면 이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계는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다. 종자를 견책 할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 종자란 일반적으로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후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종자를 견책하겠다고 하시는 말씀은 더 이상의 후손을 볼 수 없게 하시겠다는 의미이며 더 이상의 소득을 얻을 수 없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또 보십시다. 어떻게 하시겠다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절기의 희생의 똥을 얼굴에 바르겠노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희생의 똥이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잡은 짐승의 내장에서 나온 똥을 말합니다. 이 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똥을 바르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부정한 것을 만진다든지 가까이하면 그 가까이 한 사람도 부정하게 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저들의 얼굴에 똥을 바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을 부정된 사람들로 취급을 하시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똥은 가장 더러운 것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얼굴에 똥을 바르겠노라고 하는 것은 저들이 가장 부패하고 더러워 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당시 제사장들을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한척 성결한척 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더러워진 것이 당시의 제사장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예,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리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희생의 똥은 모아두었다가 짚푸라기와 함께 불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을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린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제사장들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내포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의 바뀌어진 운명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방자한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저들을 저주하십니다. 그래서 9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여기 말씀하시는 나도 너희를 이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렇습니다. 은혜를 저버리고 떠났던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그렇게 하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운명이 바뀐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히 3:12-1
4'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영국의 유명한 과학자 가운데 화라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어렸을 때의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에 신문배달을 하였습니다. 어떤 부자집에 신문을 돌리러 갔는데 큰 철망문이 있어서 신문을 멀리 던져 넣느라고 그 창살 문으로 머리를 쑥 내밀었습니다. 그 때 언뜻 "내가 머리는 문안에 있고 몸은 문밖에 있으니 내가 안에 있는 것인가 밖에 있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대문을 왈칵 열었습니다. 하마터면 목이 부러질 뻔 하였습니다. 그가 후에 한 말이 "내가 문밖에 있었는지 문안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사람이 온전한 곳에 있지 않은 것이 가장 미련하다"라고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운명이 바뀌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운명이 바뀌어진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저들이 과연 운명이 바뀌어진 사람처럼 사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을 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운명이 바뀌어 졌다면 바뀐 사람처럼 사십시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바로 그 정도로 걸어가십시다. 히브리 기자가 우리들에게 권면한 것처럼 피차 권면하여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십시다.
왜냐하면 이 말에서 이미 운세를 점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운세를 점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운세를 점치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다 성실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한다면 훨씬 더 보람차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운세에 대한 관심보다는 성실하게 살고자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 성실하게 삶을 살아감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한 사람이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1985년 5월 15일,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학위 수여식에 낯선 동양인 한 사람이 감격적인 눈물을 흘리며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전재경, 나이는 50세. 특별히 눈길은 끈 것은 그가 여느 사람과 달리 맹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전박사는 충남 부여에서 목수였던 아버지의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나 다른 아이들처럼 정상으로 자랐으나, 7살 되던 해 당시의 유행병인 안질을 앓다가 실명하게 되고 그때부터 고통과 불행의 나날을 보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 맹아학교에 입학한 그는 좌절과 고통을 견뎌내며 열심히 공부를 해서 건국대 역사지리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4년의 과정을 무사히 마친 그는 여러 가지 장애 요소가 많았지만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1년 예정의 유학 생활을 하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뉴욕의 복잡한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하는 맹인 전용 도서관을 20년이나 왕복하면서 공부를 했고 50세가 되는 해인 1985년 드디어 철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근실하게 노력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후일 그는 "자기 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였다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상 승리의 월계관을 쓴 인물들은 모두가 자기의 운명을 저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평정으로 대처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운명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에 따라서 아니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하며 사는가에 따라서 행복한 사람으로, 불행한 사람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의 삶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제사장들아"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제사장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제사장들이란 어떤 사람들이었을 까요 이스라엘에는 저들을 이끌어 가는 삼대 직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왕직이요 다른 하나는 선지자직 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제사장직입니다. 왕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며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제사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이 삼대 직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추앙을 받는 직분으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삼대 직분 중에 하나를 갖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 소개되고 있는 제사장직 역시 이러한 영광스러움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 중에 하나 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이들이 이처럼 영광스러운 직분을 얻을만한 사람들은 아니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 어느 지파가 소유하고 있는가를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어느 지파입니까 그렇습니다. 레위지파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열 두 지파가 있습니다. 이 열 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의 후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야곱이 숨을 거두기 직전 자신의 열두 아들들을 모아 놓고 저들의 장래에 대해서 예언을 합니다. 이 예언을 살펴보면 시므온과 레위의 후손들에 대한 예언이 나오는데 열 두 아들 중에 가장 비참한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창 49:5-7'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 하는 기계로다 내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 말씀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저주를 받아 흩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즉, 저들의 후손은 저주받은 인생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후손이 이렇게 저주를 받게 된 것은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잔인하게 복수를 한 까닭이었습니다. 이일 이후로 저들은 아버지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은 이렇게 저주를 받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저주를 받았던 시므온의 후손들은 모세의 임종시 각 지파를 축복하는 자리에서 그 이름이 빠지게 되었으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저들의 이름이 언급이 되지 않는 것을 볼 때 이 야곱의 저주대로 흩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이들은 저주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레위지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시므온의 후손과는 달리 다시 축복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즉, 저주의 자리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렇게 이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일까요 하나님 편에 선 레위지파 출 32장에 이에 대한 배경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출 32장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후 더디 내려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숭배를 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돌아와 이 모습을 보고는 저들을 징계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누가 하나님 편에 서겠는가" 묻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레위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이들을 이렇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날에 백성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된 지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레위 지파가 하나님 편에 섰던 것은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복을 내리 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들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저주받은 인생에서 복 받은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손가락질을 받고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추앙의 대상이 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이들은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의 귀감으로 성경에 언급될 정도로 이들은 인정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이들의 인생을 이처럼 바꾸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께 바로 헌신될 수 있다면 나를 하나님께 바로 드리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인생을 바꾸십니다. 저주받은 레위지파의 운명을 바꾸신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운명도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들입니까 진정으로 헌신된 자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에게 헌신한 레위 지파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직분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들을 이처럼 선대해 주셨을까요 언약을 맺으신 이유 5절 이하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저주받은 인생을 변케 하셔서 복주신 이유는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의도와도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저주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처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레위 지파들 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난 뒤 우리들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저주받은 인생에서 복 받은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의 인생을 이렇게 바꾸어 놓으신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시며 사십니까 여러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들의 인생이 바뀌었다면 이제는 삶을 살아가는 목적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저주받은 인생을 살아갈 때 바로 그 때의 인생의 목적을 그대로 지니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고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기보다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아직도 자신의 재물을 쌓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들의 인생을 바꾸신 것은 우리들이 그것을 위해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만을 경외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이름을 두려워하며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레위 지파는 어떻게 살았을 까요 계속해서 5절 하반절을 읽습니다.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어떻게 살았다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말합니다. 이것이 누구의 평가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평가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만큼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잘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한 것과 무엇이 연결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했음과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떨며 머리를 숙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했으며 그 이름을 위해서 삶을 살아갔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즉, 그들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자리를 하고 있어서 저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오늘 이들 처럼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그분의 이름의 위해서 삶을 살아가십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보다 다른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더 기억하고 가족의 이름을 더 기억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달랐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그 이름을 위해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시며 사십니까 진리를 말하며 또, 6절을 보십시다. "." 자 여기서 밝히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의 입에 있는 것과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었습니까 진리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없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불의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늘 진리를 말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를 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고 불의를 말하지 않는 이것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제법 신앙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이 부분이 잘 안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헌신적인 것 같고 신앙의 사람 같은데 입을 열면 진리보다는 불의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입을 열기만 하면 험담과 비방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약 3:9-11에서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 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샘이 한 구멍으로 쓴물과 단물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우리들의 입은 이 불가능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때로는 진리를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의를 말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레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진리를 말하고 불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진리를 말합니다.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선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불의를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더 어려워 보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쉬워도 불의를 말하지 않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불의를 말하면서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둘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계속해서 6절 하반절을 보십시다. "."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은 화평과 정직으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이킴
그런데 보십시오. 이와 같은 삶의 결과가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즉, 저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 하며 진리를 말하고 불의를 말하지 않으며 화평과 정직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이런 삶의 결과가 다른 사람들을 바로 세우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이처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면에 있어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항상 넘어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 옆에 가까이 가기만 하면 항상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넘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세워줍니다. 이 사람 옆에 사람이 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세움을 받습니다. 힘을 얻습니다. 바로 레위지파가 그렇게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가만히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당신으로 인해 상처를 입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왜 나를 넘어지게만 하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쩌면 여러분이 넘어지는 그 이유도 바로 당신 자신에게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은 경건한 삶의 영향력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의 영향력은 늘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고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십니까 레위 지파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운명을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꾼 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들도 하나님으로 인해 운명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정도에서 떠나는 제사장들
그런데 7,8절을 읽다보면 이런 제사장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자 7,8절을 읽습니다. "." 자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은 정도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좀전까지 저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7,8절은 오히려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8절의 너희라는 말입니다. 8절에서 말하는 너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1절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5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는 레위 즉, 그들은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이 아니라 저들의 선조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너희 선조들은 내가 자신들의 운명을 바꾼 줄 알고 나에게 헌신을 하고 나를 경외하는 삶을 살았는데 너희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언급하시고 싶으셨습니다. 내가 운명을 바꾸고 너희들에게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겼는데 왜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운명이 과거에는 어떠했으며 이제는 어떠한가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자신들의 모습이 자신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인양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정도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도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레위지파로서 당연히 걸어가야 할 바로 그 길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제사장으로서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에 들어와서 이들은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그 길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걸어야 할 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걸어가야 할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바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 있고 아내는 아내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레위지파는 제사장으로서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길에서 저들은 벗어나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걸어가야 할 바른길을 걷고 계십니까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성경은 우리들을 향해 이제는 신약 시대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도 제사장으로서의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성결 되고 거룩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길을 걷고 계십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걷고 계시는 그 길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과연 여러분들이 걷고 계시는 그 길이 제사장으로서 가야할 길입니까 아니라면 돌이키십시오. 바른길로 들어오십시오. 하나님의 도를 지키지 않음 계속해서 9절을 보십시다. "."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도를 지키지 아니하였고 율법을 행할 때에 편벽되이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율법을 편벽되이 행하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의 얼굴을 보고 율법을 시행했다는 것입니다. 공평 정대하게 율법을 시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 율법을 시행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행하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이득을 주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율법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이미 저주하였노라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절을 읽습니다. "."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저주하였다는 것입니다. 욉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이 가야 할 그 길로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무엇을 저주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을 복을 저주하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무엇이 저들의 복입니까 그렇습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옮겨진 그것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저주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들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운명을 바꾸시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저주의 자리에서 복의 자리로 저들은 옮겨졌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저들은 은혜를 잊고 삶으로 말미암아 저주의 자리로 옮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 되어지고 있습니까 자신들에게 넝쿨째 굴러온 복을 이렇게 차버리다니요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들은 오늘 본문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들 중에서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삶을 살아가면서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저주의 자리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바뀌어진 자신의 운명을 확신하지 못하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제사장들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 여러분들 중에도 이처럼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하나님의 징계 그러면 이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계는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다. 종자를 견책 할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 종자란 일반적으로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후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종자를 견책하겠다고 하시는 말씀은 더 이상의 후손을 볼 수 없게 하시겠다는 의미이며 더 이상의 소득을 얻을 수 없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또 보십시다. 어떻게 하시겠다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절기의 희생의 똥을 얼굴에 바르겠노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희생의 똥이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잡은 짐승의 내장에서 나온 똥을 말합니다. 이 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똥을 바르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부정한 것을 만진다든지 가까이하면 그 가까이 한 사람도 부정하게 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저들의 얼굴에 똥을 바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들을 부정된 사람들로 취급을 하시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똥은 가장 더러운 것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얼굴에 똥을 바르겠노라고 하는 것은 저들이 가장 부패하고 더러워 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당시 제사장들을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한척 성결한척 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더러워진 것이 당시의 제사장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예,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리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희생의 똥은 모아두었다가 짚푸라기와 함께 불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을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린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제사장들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내포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의 바뀌어진 운명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방자한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저들을 저주하십니다. 그래서 9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여기 말씀하시는 나도 너희를 이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렇습니다. 은혜를 저버리고 떠났던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그렇게 하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운명이 바뀐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히 3:12-1
4'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영국의 유명한 과학자 가운데 화라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어렸을 때의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에 신문배달을 하였습니다. 어떤 부자집에 신문을 돌리러 갔는데 큰 철망문이 있어서 신문을 멀리 던져 넣느라고 그 창살 문으로 머리를 쑥 내밀었습니다. 그 때 언뜻 "내가 머리는 문안에 있고 몸은 문밖에 있으니 내가 안에 있는 것인가 밖에 있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대문을 왈칵 열었습니다. 하마터면 목이 부러질 뻔 하였습니다. 그가 후에 한 말이 "내가 문밖에 있었는지 문안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사람이 온전한 곳에 있지 않은 것이 가장 미련하다"라고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운명이 바뀌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운명이 바뀌어진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저들이 과연 운명이 바뀌어진 사람처럼 사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을 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운명이 바뀌어 졌다면 바뀐 사람처럼 사십시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바로 그 정도로 걸어가십시다. 히브리 기자가 우리들에게 권면한 것처럼 피차 권면하여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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