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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향해 (레25:8-17)

본문

사람이 사흘을 굶어 배가 고플 때에는 코가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하지만 배가 부르면 후각이 둔해집니다. 지금 정상적이지 못 한 상황에 있는 사람은 조그만 평화와 기쁨이 얼마나 절실한지 모릅니다. 도대체 웃을 일이 없는 거지요. 돈에 쪼들리는 사람은 제발 빚 독촉 안 받고 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합니다. 건강이 안 좋아서 늘 골골하는 사람은 그저 건강한 사람만 보면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가정이 평화롭지 못한 분들은 그저 가정만 문제없 으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없겠다는 눈칩니다. 이렇게 인간은 조 그만 억압에도 기쁨을 잃습니다. 그래서 칼론 이란 시인은 이렇 게 말했습니다. "천국의 가치를 알려면 15분 정도 지옥에 있어 보는 것이 좋다" 오늘 본문을 보니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저 살다가 기쁜 날이 오면 그 해를 희년으로 선포하라' 이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분명하게 명령했습니다, 희년을 정해진 기 간에, 정해진 순서에 따라, 법적으로 선포하라고. 그러고 보면 희망과 환희는 거저 되는 게 아닌가 봅니다. 믿고 선포하고 노력 하는 가운데 이뤄지는 것입니다. 희년, 이거 그냥 여호와 하나님이 덜렁 가져다주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목숨 바쳐 일궈내야 할 일 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 희년의 법을 선포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희년을 원칙대로 실행한 기간은 아주 짧았습니다. 원래 희년은(요벨) 수양의 뿔이란 뜻입니다.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로 희년의 시작을 알렸기 때문에 '요벨'이라고 했지요. 안식 년은 칠년 마다 한 번씩 돌아옵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 안식년이 끝나는 다음해가 바로 희년이 되는 겁니다. 희년이 있는 해 수로 부터 50년 째되는 해입니다. 이 해의 대속죄일 부터 희년은 시작 됩니다. 보통 대속죄일은 7월10일 즉 지금 서기력으로는 1월 10 일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희년에는 네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노동의 안식과 토지의 쉼입니다.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11절) 이것은 안식일과 안식년의 정신이 희년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희 년도 우선은 쉬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기쁨의 날은 우선 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거 아주 명심할 일입니다. 사람들 은 고통 속에 빠지면 쉬지를 못합니다. 문제 속에 빠지면 우선 쉬지를 못합니다. 계속 그 문제로 고민을 하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습니다. 일단 그 문제로부터 떨어져 나와 쉬어야 합니다. 문제 로부터 떨어져 나와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쉼은 바로 이런 것 입니다. 그냥 하나님께로 물러 나와서 쉬고 불평하고 토로하고 이러는 거지요. 그 가운데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는 겁니다. 주 님 안에서 안식과 휴경(休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축복입니다. 우리 주님이 명령하신 일입니다. 두 번째는 노예상태로 부터의 해방입니다.(39-55절) 희년에는 우선 몸의 해방입니다. 빚이나 기타 이유로 노예가 되 었을 경우라도 희년이 되면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히 브리 동족을 노예로 삼았을 경우는 희년 전 까지만 부릴 수 있습니다. 희년이 오면 당연히 풀어 주어야 합니다. 동족으로 노예 가 된 사람은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처럼 부리라고 했습니다. 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희년입니다. 세번째는 잃어 버렸던 땅과 기업의 회복입니다(13-34절) 사람과 땅의 회복입니다. 사람과 땅은 원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개념이지요. 그것을 본래 대로 하나님의 것으 로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상회복 운동이라 할 수 있지 요. "각각 기업으로 돌아갈지라"(13절) 자신의 본래 땅으로 돌아 가라는 말입니다. 이 희년을 기준으로 해서 토지의 값은 정해집니다. 희년이 많이 남았으면 비싸고 적게 남았으면 쌉니다. 사실 이것은 토지 매매라기 보다는 토지 임차에 가깝습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의 회복 운동도 일종의 희년운동입니다. 우리는 통일 운동이라고 하지 말고 민족의 희년 운동이라고 해야 합니다. 통일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 로서 희년 운동이니 반드시 선포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네번째는 빚의 탕감입니다. 희년에는 지고 있던 부채가 모두 탕감되고 없어집니다. 그래서 캐톨릭에서는 세계의 교회가 함께 새 천년을 맞아 대 희년 운동 을 벌이고 있습니다. 후진국과 개발 도상국에 대한 외채 일정 금 액 탕감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모두 이 희년의 정신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이런 희년의 명령을 받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는 희년을 선포해야 합니다. 어느 유대 상점 주인이 아내에게 엄명을 했습니다. "내 말 알아 듣겠어 매상이 없는 날은 가게를 닫은 뒤 전등을 환하게 켜구 시끌시끌 즐겁게 법석대라구. 그리고 매상이 좋았던 날은 촛불 하나만 딱 켜 놓구 쥐 죽은 듯이 하구 있으란 말이야." 아내가 참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하지만 여보, 그건 반 대가 아니요" 아이구, 요런 맹추야, 하는 듯이 주인이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란 소견머리가 좁다고 할 수밖에. 우리 집 장사가 잘 안된 날은 이웃집도 걱정 없이 지내야할 것 아니 야 전등을 환하게 켜놓으면 옆집은 틀림없이 우리가 매상을 많 이 올린 줄 알구 배가 아플 거란 말야. 하지만 촛불 한 자루만 딱 켜 놓으면 장사 다 망친 줄 알고 시원해 할 게 아닌가. 그러 니 우리가 기쁠 때는 이웃도 함께 기뻐해 주게될 거란 말야. 알 아듣겠어" 이렇게 마지못해 하는 것, 남의 기분 봐 줄려고 하는 것, 이것 선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팔을 들고 드높이 희년을 선 포하는 것은 진정한 기쁨, 정말 너와 내가 참으로 해방되는 기쁜 날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남의 기분 안 상하게 사적으로 조치 취 하는 것, 이거 크게 선포하는 거 아닙니다. 선포는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니, 크게! 공적인 선포를 하 라고 했습니다.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 을 크게 불지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 를 공포하라!"(레25:9-10) 나팔을 크게 불고 공포하라고 했습니다. 공적인 선포를 하는 겁니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나의 환경과 이웃에게. 선포 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라!' 여기서부터 희 년은 시작되고 기적은 싹이 틉니다. 선포가 없는 곳에서는 희년 도 없습니다. 그것도 나팔을 크게 불라고 했습니다. 그냥 되는 둥 마는 둥 부는 게 아닙니다. 마지못해 부는 것도 아닙니다. 기쁨의 확신, 회복의 확신을 가지고 크고 높이 불라고 했습니다. 말의 선포가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여기서부터 희년은 시 작되는 겁니다. 해방을 누려야 합니다. 희년은 기쁜 날입니다. 기쁜 소식이 있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이지요. 이 구약의 희년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최종적 으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 실 일은 이 희년을 매일 선포하고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에 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사역을 준비하시고 나와서 본격적으 로 사역을 시작하기 앞서 첫 일성이 바로 희년의 선포였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님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 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 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6-19)
여기서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말합니다. 희년의 내용은 "포 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멀쩡하던 사람이 남의 노예가 되니 기가막힐 노 릇 아닙니까 간혹 사극에 보면 역적으로 몰려 사대부집 아낙들 이 관노나 공신들의 사노비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경부인 소리를 들으면서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다가 천덕꾸러기 노비 가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기막힌 상 황, 이게 바로 억압입니다. 빚져본 사람은 잘 아실 것입니다. 빚 독촉에 사람꼴이 말이 아닙니다. 자존심이란 자존심은 다 긁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죽을 맛 이 아니겠어요 죽을 맛의 상황은 없습니까 땅을 다 차압당하고 재산과 물건이 다 차압당했다 행각해 보세요 이런 여러 억압으 로 기막힌 생활을 하는 사람들! 여기에 희년이 필요합니다. 사 실 우리 민족의 희년도 필요하구요. 분단상황과 경제위기 상황 전부 그렇습니다. 그러나 희년은 이 모든 억압을 끊어 버리는 날입니다. 그 날을 간절히 열망하고 그날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그 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날이 우리 안에 이루어 지고 있다 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러니까요. 안식일 안식년은 단지 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희 년은 해방에 초점이 맞춰 있습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으로 이 어지는 안식일의 정신 확대입니다. 안식일의 규정은 거룩히 쉬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쉼은 두 가 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측면이고, 하나는 인간측면 입니다. 하나님 측면은 안식일을 통해 마음껏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측면은 안식일을 통해서 노동의 쉼입니다. 노 동의 쉼은 특별히 육체적 노동을 하는 자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너와 네 집의 손님, 종, 짐승까지 철저하게 쉬라는 것입니다. 이 것이 안식년의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안식년은 땅의 쉼입니다. '땅의 쉼'이 안식년의 주개념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고 묵혀 두 었는데도 자연적으로 자란 곡식의 소출은 가난한 자들의 몫으로 돌리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출23:10-11) 이런 안식일 안식년의 개념이 이제 희년에는 '해방'으로 까지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방은 무조건 풀려나는 것, 이렇게 정의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해방에는 자유, 생명, 섬김 의 세 가지 의미가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먼저 자유는 억압으로 부터 놓여나는 과정입니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모든 무거운 짐으로부터 놓여 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생명입니다. 이제 살 것 같은 것이지요. 억압은 죽음 이지만 놓임은 생명입니다. 이제 살 것 같은 것이지요. 이 생명 은 '회복과 안식'입니다. 온전한 인간으로의 회복과 그 안에서의 평안한 안식입니다. 이것은 희년을 누리는 일이 됩니다. 주님이 내 마음 가운데 찾아 오셔서 억압을 제거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 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가 복음의 능력으로 지금도 여러분 속에서 희년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고 선포하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면 인간은 이기적이 되거나 부패하기 시작 합니다. 바로 섬김의 과정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희년의 진정한 종착점입니다. 포로에서 놓인 자는, 포로 된 자를 섬겨야 합니다. 눈 먼데서 다시 보게 된 자는, 눈먼 자를 섬겨야 합니다. 눌린 곳에서 자유케 된 자는, 눌린 자를 섬겨야 합니다. 가 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았으면, 가난한 자를 섬겨야 합니다. 물질 의 억압에서 풀려난 자는, 가난한 자를 섬겨야 합니다. 가정 불 화의 고통에서 벗어난 자는, 가정이 어그러진 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구석구석 자기의 억압이 해결된 자들은, 이내 다른 억압된 자들을 섬기는 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 혜의 해, 희년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야 희년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섬김을 통해서 이 땅에 희년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안식일 안식년을 경험한 우리는 이제 희년을 선포해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희년을 선포하자!오라, 우리 우리가 세상을 해 방시키자!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 이런 기쁨의 변 화가 먼저 여러분의 개인에게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은 가정과 일터에 일어나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이 오늘도 만나는 모든 관계와 만남에도 일어나기 바랍니다. 끝으로 지역사회와 민족에도 기쁜 날을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포할뿐더러 "기쁨의 벨트(Karis-Belt)"를 그린벨트처럼 구축해 놓아야 합니다. 그린벨트 때문에 맑은 공기를 얹고 녹색의 생명공간을 마련 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구축해 놓은 "기쁨의 벨트-희년의 트(Karis-Belt)"를 통해서 이 땅의 생명들은 생명과 희망을 얹을 것입니다. 선포할 뿐 아니라 그런 기쁨의 지대로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 목적이 그것이니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고 이런 기쁨의 지대를 만들어 가시 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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