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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의 실패-기드온 (삿8: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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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화요일에는 서울에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목회자들의 비젼과 리더십에 대한 세미나였습니다. 대개의 강의가 다 그러하듯이 이 세미나에 강사로 나오신 분들도 그래도 교계에서 성공적으로 목회하신 분들입니다. 그들이 비젼에 대해서 말씀했는데, 그 스케일 부처 대단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온누리 교회에서 세미나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도 경배와 찬양팀, 두란노 서원, 한동대사역, 선교사역등이 한 교회가 감당하기에 너무도 벅찰 만한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교회를 보는 것만으로도 비젼이 무엇이며, 목회자의 리더십은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곳에 참석한 많은 전국의 목회자들, 작고 큰 교회들을 맡은 분들입니다. 그 분들에게 이번 세미나가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저 자신이 하고 있는 목회에 대하여 다시 돌아보면서 “나 자신은 무엇하고 있었는가”하는데 대해서 반성도 하면서 한 펀으로는 “
그렇다면 무엇이 성공인가, 성공적인 목회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심리학자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강박 관념은 성공에 대한 강박 관념이라고 했습니다.현대인들은 끊임없이 성공해야 한다는 주문에 매달려 있습니다.그 정도면 성공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그 자리를 지키려 안간힘을 씁니다.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좌절감에 빠집니다. 이런 모든 강박 관념의 근본 원인은 성공과 실패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잘못된 성공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성공한 분들의 목회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들이 성공이라고 하는 그 관점은 과연 수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참된 성공의 의미를 배우기 위해서 사사 기드온이 쟁취한 성공을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실패의 측면도 점검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성공과 실패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드온의 삶의 절정이 어느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까 흔히 기드온이 군사 삼백 명을 이끌고 메뚜기 떼 처럼 많은 미디안 사람들과 대결해서 보기 좋게 승리를 거둔 때를 기드온의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말씀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아직은 그의 삶의 정점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기드온을 찾아와 그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2절입니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이 얼마나 대단한 성공의 결과입니까 기드온은 미디안을 쳐 부수어 이스라엘에서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그에게 대대 손손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아마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성공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이제 그는 왕좌에 앉기만하면 됩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정복한 승리는 스스로도 생각하기를 왕이 될만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반응을 보시면 그는 예상 밖의 대답을 합니다.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다 여기에서 떨어지고 마는데, 일차적으로 기드온은 여기에서 실수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난 다음에 조심해야하는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 기드온이 이 고백을 하는 순간이 기드온의 성공의 정점입니다. 기드온은 전쟁에서 승리한 궁극적인 원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그 백성들은당신이 우리들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라고 말하였는데,기드온은 그들의 말이 틀렸음을 지적한 것입니다.“내가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기드온은 자신이 자신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이전에 보잘 것없는 농부였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므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나가서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진정한 승리자,백성의 구원자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기드온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자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하나님이 도우셔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음을 아는 기드온은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기드온은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자신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자였으며,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도움인가를 알 때에 교만할 수 없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왕이 되어 달라는 백성들의 부탁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만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는 참된 왕이요,우리 삶의 주권자요,주인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셔야 마땅합니다. 이 말을 한 기드온은 오늘날 이 시대의 영웅들과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성공을 거둔 기드온의 태도를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로,기드온은 쓰임 받은 것만으로 감사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내세워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자신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쓰임받았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자신이 주님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족하다고 여겼습니다.기드온은 백성들이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데 유혹을 받아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기드온은 자신의 영광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성공을 이유로 세상 권세를 탐하는, 자기를 영화롭게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못난 우리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도 곧 버림을 받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나 교회사를 통하여 보게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 자체가 은혜인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성공을 주신 것이고 자신은 여기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음을 깨닫고 하나님께만 감사하며 영광을 돌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겸손하여 하나님께 끝까지 쓰임 받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높이시고, 부하게 하시고, 형통케하셔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복됩니다. 조금 높아지고 조금 형통이 있으면 그만 자신을 높이는 것으로 떨어집니다. 이번 세미나의 성공한 목회자들은 과연 이 면에서도 성공을 했다고 봅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렇게 계속 귀하게 사용하실까 했는데, 그들은 겸손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다 바쳐 충성하고 그것으로 기뻐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둘째로,기드온은 성공의 무대에서 미련 없이 떠날 줄 알았습니다. 이 모습은 세례 요한이 보여 준 감동적인 장면을 연상시켜 줍니다. 요한은 오실 메시아를 증거했습니다.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 앞에 등장하시자 자신은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던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자신의 임무가 그리스도의 길을 평탄케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깨끗하게 물러설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만날 수 있는 바나바의 모습도 기드온이나 세례요한과 비슷합니다. 바나바는 어느 날 일꾼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그의 삶에 역사를 뒤흔들 위대한 가능성이 숨쉬고 있음을 보았습니다.이 청년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바나바는 아직도 사울의 회심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신원을 보증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사도행전 전반부에서는 바나바와 사울(11:30)로 바나바가 앞에 나옵니다.그러나 사도행전 후반부로 가면 바울과 바나바(13:43)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더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제 바나바가 아니라 바울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유감을 표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뜻을 기뻐할 뿐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영광스럽게 사용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무대 저편으로 깨끗하게 사라집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가 빌립보서에서 말씀한대로 옥에 갇혔을 때에 그를 시기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한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지금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명에나, 자존심이나 그런 것들 보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었고 복음의 진보로 인하여 기뻐하고 기뻐하는 바울입니다. 이렇게 성공은 일시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닙니다.적어도 한 사람의 성공여부를 보려면 수 십년 아니 평생을 봐야합니다. 그래도 잘 모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이 대외전에서 미디안과는 승리했더라도 자기와의 싸움인 대내전에서 패전했다면 그를 성경은 성공자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울 왕을 봅시다. 그가 아말렉과 싸워서는 이겼지만, 그는 성공자가 아니요, 하나님 앞에 영원히 버림 받은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성공의 참된 의미는 섬김에 있습니다. 오전에도 우리 예수님의 섬기심의 종의 모습을 살폈습니다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이웃을 섬길 때, 나의 부족하고 연약한 삶이 주님 앞에 쓰임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기독자 인생 성공입니다. 기드온의 성공은 미디안을 정복한 것 보다는 그 하나님의 일을 섬김에서 얻는 보람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능력과 재능의 유무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 일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고 화려한 결과를 맺은 것만 성공이고,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쓰임 받은 것은 실패라면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드온도 끝까지 성공의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이 기드온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들의 실패를 조명해 봐야합니다. 거울로 주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기드온의 생애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씁쓸하게 만듭니다.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은 성경의 진실성을 믿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영웅을 소개하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영웅을 만드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못난 인생으로 알고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항상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 만을 의지하고 겸손하라는 교훈입니다. 에봇 사건이 실패의 시작이었습니다. 24절 이후의 말씀을 보면, 기드온은 왕이 되기를 사양한 뒤에 그러나 백성들에게 한 가지 요청을 합니다.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서 탈취한 귀고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자신들이 빼앗은 금 귀고리를 가져왔습니다.귀고리뿐 아니라 각종 패물을 갖다 바쳤습니다. 기드온은 이 금으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에봇은 제사장이 가슴에 받쳐 입던 옷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에봇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이 에봇을 사용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봇에 들어 있던 두 개의 돌(우림과 둠밈)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어떤 방법을 사용했든 이 에봇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사용되었던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신의 전략이나 지혜나 용맹 때문이 아니라,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 전쟁을 치르면서 여러 번 제사장의 에봇을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그는 삶의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베푸심을 느꼈습니다.자신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임을 믿었습니다.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사실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고향으로 돌아가 기념으로 에봇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에봇을 보고 그의 후손들이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깨닫기 바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인 도구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것까지는 시비거리가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것 자체가 몇 가지 실수였습니다. 기드온을 도운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에봇이나 법궤가 아닙니다. 이후에 엘리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블레셋 전쟁에서 법궤를 전장에 가지고 간것과 같은 성질입니다. 에봇이나 법궤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에봇은 하나의 도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화 하고 싶은 본능이 인생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더 잘 믿을 것 같습니다. 아론이 하나님을 보이는 금송아지로 만들어 놓고 섬기게 했습니다. 이것도 또한 우상이 됩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구원과 인도하심을 기념하고 싶어했던 것까지는 조금도 나무랄 데 없는 일이었습니다.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하나님의 인도대로 살아야한다는 교훈을 남기려 했다면 오히려 칭찬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문제는 에봇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교훈이 전달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에봇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적인 인물과 그들이 남긴 신앙적인 유산, 유물들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믿는 데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기념하기 위해 좋은 뜻으로 만든 에봇이라도 후에는 우상 숭배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놋뱀도 나중에는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시면서 글 한자도 남기지 않고, 옷 한벌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인간화 시키려 할 때에 그 인물이든, 물질이든 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혀지게 되어 우상이 됩니다. 만일에 지금 예수님의 입으셨던 옷이 남아 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옷을 거룩하다하고 구별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목거리도 하는 것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주술적인 힘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상징물을 선물하거나 보면서도 그 상징이 내포하고 있는 교훈을 전달하지 못한다면 때때로 그 상징물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예컨대 어떤 신앙 좋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자녀들에게 정말 예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무언가 남기고 싶었습니다.그래서 금 십자가 목걸이를 기념으로 남겼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이것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십자가 목걸이다. 이것을 볼 때마다 주님을 위해 살아다오.이런 유언을 남긴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그것은 좋은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그러나 문제는 자녀들이 십자가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모르고,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고,주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못하고,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면,금 십자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책에 능력이 있습니까 성경 가운데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주문 외우듯이 주기도문을 외우면 귀신이 쫒겨난다는 미혹을 합니다.
어떤 은사주의 이단들은 병고치는 신유의 기도를 한 테이프를 사서 들으면 병이 고쳐진답니다. 이런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귀신이 아니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귀하게 쓰임 받은 인물이라도 그가 하나님 대신합니까 아닙니다. 사람 우상, 물질우상, 성지 순례를 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성경연구를 위해서입니다. 그 것들이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하는 때가 지금입니다. 주님 모신 곳이 다 거룩한 곳입니다. 또 그는 스스로 제사장 같이 되려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는 레위지파가 아님에도 에봇을 만들어서 제사장 흉내를 내었습니다. 이것은 실로에 가서 대 제사장을 만날 필요없이 자기의 처소에서 하나님의 뜻을 편하게 알아보려는 데 있었던 것이고 자기 영광을 구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하므로 정권만이 아니라 교권까지 주장하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것으로 이스라엘은 문란하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고 점차 다른 이방신을 위하는 데로 타락하게 된것입니다. 당신은 자녀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합니까 자녀를 교회 다니게 만드는 것만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진실로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배우고,그 말씀대로 살게 해야 합니다.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고 존귀한 삶을 추구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이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상징은 실체를 상실하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에봇 사건이 바로 이러한 예입니다. 형식은 필요하고 또 중요한 요소지만,형식이 내용을 상실하면 그 형식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기드온은 왕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분은 여호와시라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은 물론 자기 후손도 그 백성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9장에 보면 이 말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9장 6절 말씀입니다. 세겜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 가서 세겜에 있는 기둥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비멜렉으로 왕을 삼으니라.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의 뜻을 전혀 이어받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의 교훈은 자손들에게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실은 그도 왕으로 세움을 입지 않겠다고 장담하기는 했으나 왕 같은 대우를 받고 살았습니다. 8:29-32을 보면 그는 용사중 한 사람이 아니고 군주입니다. 그는 많은 아내를 취하고 아들을 많이 두었는데, 첩이 낳은 아들이 아비멜렉입니다. 그 이름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 라는 뜻입니다. 일시적으로 왕이 되어 온 땅을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기드온은 금을 요청했고, 물론 에봇을 만드는 데 사용했지만, 그에게는 많은 전리품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의 실패는 결국 물질과 향락과 명예추구로 이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 아들들이 기드온의 이 외식된 교훈을 받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가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나, 결국 그도 마귀의 미혹을 받아서 실패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성공하고난 다음에 얼마나 조심했는가를 살펴보면 알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것은 후손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심과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그러나 그 자손들은 자신들이 삶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기드온은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일에는 쓰임을 받았지만 가정 생활에는 실패했습니다. 자녀 교육에는 실패했습니다.세상에서 볼 때 성공한 업적이 잘못 기른 자녀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자신의 신앙적인 나태와 오만함이 자녀들에게 주었던 에봇까지 우상으로 만들게 된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을 본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빗나가고 있는 자녀의 모습을 보십시오. 기드온의 인생이 실패한 것을 본삼아 자녀의 신앙 교육을 위해 더 열심히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부모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의 외식된 신앙은 자녀들로 하여금 세상을 더욱 음란하게 우상과 같이 섬기도록 하는 결과를 맺게되고 그들을 다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끝까지 겸손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확신하고 그대로 살도록 가르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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