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서 내 눈이 뜨일 때 (삿16:28-30)
본문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 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집 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 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 보다 더욱 많았더라 명백한 진리 죽음에서 내 눈이 뜨일 때라는 제목으로 삼손의 일생을 통해 증거되는 예언적 의미를 종말적 신앙과 진실의 관계의 측면에서 살 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종말적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소유해야할 종말적 신앙의 필연적 특성 이 바로 신앙의 최고 정점인 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진실 은 한계를 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계속적으로 추 구해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추구하는 신앙 또한 단순 히 말로 정의하거나 논리로 해석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 속에 초현실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몸과, 마음과, 영을 숨쉬게끔 하는 하나의 에너지로서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면서 성경을 성취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섭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몸과, 마음과, 영에서 날마다 살아 쉼쉬고 있다.) 유일하게 성경만이 지구의 역사의 처음과 끝을 명백한 사실로 알리 고 있습니다. 그 명백한 진리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모든 만물에 깃들어 있는 동안 에 성취되어 질 것입니다. 저 푸르른 하늘과, 넓은 대지와, 풀,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이 시대가 마지막 때임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이처럼 모든 만물 가운데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시대를 비취는 꺼지지 않는 등불로서 빛을 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빛을 바라보는 자가 참 으로 적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지구의 역사의 마지막을 증거하 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명백한 진리요, 우리 인간이 처한 절망적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는 절망적 현실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마지막 때임을 고하는 절망적 현실 가운데 우리가 처 해 있으나, 이 절망적 현실 가운데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 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구와 함께 사 라지지 아니할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유일한 희망인 것입니다.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희망 을 바라보고(취하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함으 로써 수용할 수 있는 자세의 확립을 이루기 원하고 계십니다. 그 이 유는 가치가 양극화된 상황에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생명의 가치만 이 홀로 높이 들리워지게 하시기 위함에서입니다. 마지막 때 멸망당할 두 가지 부류의 사람 마지막 때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절망을 직시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과, 희망을 직시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 멸망을 당하게끔 됩니다. 즉, 부유하고 편안한 위치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이 처 한 절망적인 현실을 외면한 사람이나,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비관으 로 일관하면서 그 절망 속에 감춰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 하시는 희망을 발견하여 취하지 못한 사람, 그 모두가 멸망을 당하 게끔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자세가바로 이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함으로써 수용할 수 있는 자세인데, 이는 마지막 때에는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함으로써 수용할 수 있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도 다름 아닌 하나님이 주 시는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하고 수용할 수 있는 신성의 교감을 통한 깊은 통찰력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실의 추구를 통해 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함으로써 수용할 수 있는 자리의 확보 를 이루어야 합니다. 진실의 절대구도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죽음, 곧 숙명이요, 하나님 의 위치는 생명, 곧 긍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은 숙명의 자 세를 통해서 인간의 위치로 수용해야 하며, 희망은 긍휼의 틀 안에 서 하나님의 절대적 생명의 위치로 수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이 진실의 절대구도의 확립을 이룬다는 것의 의미는 이 시대의 절망 과 희망을 동시에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진실 안에서 우리가 모든 만물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절망적 현실)와 우리 안에서 구원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희망적 현실)를 동시 에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진실의 차원에 있는 우리의 영과, 마음과, 몸은 요한 계시록의 말씀 이 성취되는 표적이요, 이 시대를 비취는 등불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삼손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 겠습니다. 삼손에게 세 여인을 붙이신 하나님의 섭리 삼손에게 있어서 힘은 그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삼손의 존재 가치가 그 힘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힘 은 그의 머리털(육)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머리털에 힘이 있었던 삼 손은 육적인 삼손으로서, 육에 힘의 근원, 즉 하나님의 실체가 있었 던 삼손을 의미합니다. 삼손은 그의 인생 속에서 세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불행히도 세 여인 모두에게로부터 배신을 당하게끔 됩니다. 여기서 세 여인은 신앙적인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이 마지막 때 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예언적 의미도 깊게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전부를 보여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삼손은 그의 인 생 속에서 세 여인을 만나는데, 첫 번째 여인은 딤나 여인이었고, 두 번째 여인은 가사의 기생이었으며, 마지막 세 번째 여인은 삼손 이 가장 사랑했던 들릴라라는 여인이었습니다.
1. 딤나 여인을 삼손에게 붙이신 하나님의 섭리 딤나 여인을 보고 그녀를 아내로 취하려 하는 삼손을 향해 그의 가 족들이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라는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삼손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 여 인을 아내로 취합니다. 원래 율법상으로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 게 되어 있지 않은데도 성경은 삼손이 딤나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 이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성경말씀 사사기 14장 4절 말씀 참조) 우리가 딤나 여인을 통해 일어난 사건의 결말을 보게 되면 왜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는가에 대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잠시 사사기14장 10-19절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배설 하였으니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삼손 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 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 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고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그들이 이르되 너는 수수께끼를 하여 우리로 듣게 하라 삼 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 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 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제 칠 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 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 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 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 도다 삼손이 그에게 대답하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으나 칠 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 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 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 제 칠 일 해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 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 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딤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삼손은 잔치가 배설된 자리에서 동무로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 삼십 명의 사람들에게 아주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면서 너희가 이 수수께끼를 7일 안에 풀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 것이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어야 한다.라고 하며 내기를 겁니다. 3일이 지나도록 수수께끼의 답을 풀지 못한 그들은 7일째 되던 날 삼손의 아내인 딤나 여인을 찾아가 수수께끼의 해답을 삼손에게서 알아내지 못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살라 버 리겠다.라고 협박함으로써 삼손의 아내로부터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수수께끼의 답을 말하자, 그 답 이 자기의 아내로부터 나온 것임을 안 삼손은 아내의 배신에 분노 하며 아스글론으로 내려서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노략하여 얻 은 옷을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주고 아비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이 일에 개입하셨는지를 쉽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딤나 여인을 만나기 전까지 삼손은 그저 평범한 삼손으로 지냈습니다. 즉 이 말은, 자신이 나실인인 줄도,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섭 리가운데 특별한 힘을 지녔다는 것도 안 삼손이 딤나 여인을 만나 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삼손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나실인 으로서, 사사로서의 삼손은 본격적인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 있어야 됩니다. 삼손의 사역은 블레셋인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 하는 사사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그 사사의 역할이 어느 시점에서 부턴가는 시작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블레셋 을 향한 삼손의 분노가 이 딤나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폭발하기 시 작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삼손으로 하여금 블 레셋을 향한 분노를 촉발시키기 위해서 딤나 여인을 삼손에게 붙이셨음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딤나 여인을 아내 로 취한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사건을 통해 블레셋을 향한 적대감을 갖게 만듬으로써 삼손으로 하여금 본격적인 사사의 사역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블레셋을 향해 쏘는 화살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면, 화살(삼손)은 방향(블레셋)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바로 이 화살의 방향(블레셋)을 분명히 하는 역사를 하나님 께서 딤나 여인을 통해서 행하셨던 것입니다. 이 딤나 여인은 하나님께서 사역의 섭리의 틀 안으로 삼손을 끌어들이는 역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 가사의 기생을 삼손에게 붙이신 하나님의 섭리 그 후 20년 간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삼손은 아직도 그의 마음 속에 꿈틀대는 죄적 욕망과 영적 갈증으로 인하여 가사의 기생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종으로서 아주 수치스러운 일을 드러 내게끔 됩니다. 여기서 기생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주시는 가치 의 양극화된 상황에서의 방황을 의미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사역의 위치를 확고히 하지 못함으로써 방황하는 모습을, 즉 가치의 양극화 된 상황 속에서의 방황을 가사의 기생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으로 드러냈습니다.
3. 들릴라를 삼손의 손에 붙이신 하나님의 섭리 마지막으로 삼손이 가장 사랑했던 들릴라. 들릴라는 삼손이 미치도 록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힘의 근원) 를 들릴라에게 털어 놓는 삼손의 모습 속에서 삼손이 얼마나 들릴라 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존재 가치(힘의 근 원)를 들릴라에게 털어 놓는 것은 하나님의 가치와 들릴라의 가치를 맞바꾼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아니하셨습니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사사기 16장 20 절)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삼손을 떠난 적 이 없으십니다. 이 말씀은 의미적으로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들릴라를 통해서 삼손은 힘없는 장님이 됩니다. 머리털에 힘이 있 던 육적인 삼손은 머리털이 잘리운 후 힘 없는 장님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에 기록된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났다.라는 표현의 말씀 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실체를 보이시기 위하여 육의 영역에서 장님 이라는 영의 영역으로, 즉 힘이 감추어진 보화로 자신의 실체를 숨 기신 것을 의미하는 표현의 말씀입니다. 머리털이 잘리운 후 삼손이 힘을 잃게 된 것은 이제 그의 힘의 근원이 육에서 영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힘은 그가 진실의 차원에서 눈을 뜰 때에 같이 부활하게끔 영에 감추어지게 됩니다. 마지막에 가서 그 힘의 근원 이 영의 위치 안에서 다시 머리털로 전달되는 역사를 일으키게 됨 을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사사기 16장 22장 말씀 참조) 우리가 성화하면 할수록 우리의 힘은 근원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가 힘없는 장님이 된 삼손을 비극적인 순간의 삼손으로 표현하는데, 실제적으로 그 순간이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져 있는 가장 복된 순 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이 육적인 삼손에서 영적인 삼손으로 거듭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들릴라를 삼손 에게 붙이신 이유는 장님을 만들어서 삼손을 진실케 하기 위함에서 입니다. 즉, 육에서는 죽이고, 영에서는 깨어나게 하시기 위함에서 였다는 것입니다. 머리털이 잘림과 함께 육의 힘이 죽은 삼손의 힘 의 실체는 영에서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머리털이 다시 자라면서 영에서 얻은 삼손의 힘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힘이 아니요, 그가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함으로써 얻은 새로운 힘입니다. 우리는 계속 적으로 새롭게 새롭게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해야 합니다. 장님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치스러운 위치에서 진실의 절대구도의 확립인 죽음의 진실을 경험한 삼손은 이제 그 안에서 이때까지 그가 눈을 떴을 때는 보지 못했던 진정한 하나님의 가치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 바로 진실의 절대구도에서 죽음의 진실과 함께 존재하는 생명의 진실을 동시에 이루게 되는 순간이었더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인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 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깊이를 지닌 말씀입니다. 삼손이 마지막 죽으면서 외쳤던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이 말은 3차적 믿음의 완성인 파멸적 사랑을 상징해 주는 말씀으로서, 우리가 걸어가야 될 길에 대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가져야 될 희망의 위치에 대해서 말씀해 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는 몰랐던 진정한 자신의 존재의 가치, 즉 힘의 의미를 장님 이 되어서야 깨달은 후 하나님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 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삼손. 이 말씀의 대목에서 우리는 이제 삼손이 자신의 진정한 적(敵)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까지의 삼손의 적은 바로 삼손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즉, 죄적인 욕망과 영적인 갈증의 시달림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했던 방탕한 삼손 자신이 바로 자신의 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실체인 진실을 온전히 발견할 수 있 었겠습니까 장님이 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 지를 명확하게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적이 진정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삼손이 장님의 상태에서 나 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는 말을 할 수 있 었던 것은 그가 진실 안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의 적을 명확하 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이 떠 있었을 때보다 눈이 잠겼을 때 더 명확하게 자신의 적을 보게 된 삼손의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 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이 외침은 진정한 자유자의 외침입니다. 삼손은 죽음의 순간 눈을 뜨게 됩니다. 즉,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 께 죽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는 그 순간 사명의 눈이 열리기 시작 하면서 진실이 탄생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으로 옮겨진 감추어 진 그 힘의 근원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 삼손의 근육에서 마치 터지는 화산처럼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약하디 약한 힘 없는 장님이던 삼손의 근육에서 다시 옛날과 같은 폭발적인 힘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은 영 안에서 탄생된 진정한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실체가 다시 머리털로 전달되면서 그의 근육을 반응케 했 기 때문입니다.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며 삼손 이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은 무너지고 그 안에 있던 모든 블레셋 사람들은 죽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삼손이 죽 을 때에 죽인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라는 이 마지막 말씀은 예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잠시 이 말씀의 예언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붙이신 세 여인이 뜻하는 예언적 의미 삼손을 우리 자신으로 놓고 볼 때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딤나 여인을 붙이심같이 지금 우리에게도 딤나 여인의 환경을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딤나 여인의 환경은 하나님의 섭리로 몰아넣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육의 가치가 아닌 천국의 가치를 사모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대를 분별함으로 써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을 사모하는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가지 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이 세상 의 인생 속에서 승승장구했다면, 이 세상의 풍족하고 안전한 위치에 눈이 가리워졌다면, 우리는 아마도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殿)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위치를 정하시고, 그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계시다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위치에 있었지만, 포인트는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전 안으로 나올 수 있는 위치를 정하시고 그 속으로 몰아넣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 금 이 시대의 가치인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이루게 하시기 위함에 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나온 것 이 시대적 섭리의 시작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삼손이 딤나 여인 을 통해서 블레셋을 향한 복수심이 촉발되어 그로 인하여 사역의 시 작을 이루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 을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주시는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작게는 교회, 넓게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지구 모든 민족들을 일치시켜서 바 라볼 수 있게끔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경제위기라는 악조 건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로 몰아넣기 위한 딤나 여인의 환경입니다. 우리는 물론 세상 사람들도 경제위기 시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지 만,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깨우시기 위한 시대적 섭리의 역사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마지막 때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화살의 위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환경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녀의 환경을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창녀는 예언적으로 가치를 양극화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미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가치적으로 이 시대를 양극 화시키고 계십니다. 즉,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 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요한 계시록 22장 11절)라는 말씀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손이 두 번째로 만 난 가사의 기생이 상징하는 예언적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이 안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즉, 딤나 여인의 손길도 받고 있지 만, 가치를 양극화시키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계속적으로 이리저 리 쏠려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깨워 주시고자 하시는 가치는 들 릴라의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들릴라의 가치를 우리에게 붙이셨 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가장 사랑했던 가치입니다. 가장 사랑했 던 가치를 통한 배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마지막 때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가장 사랑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죽음을 경험케 하고 계십니다. 이 들릴라의 가 치는 재림 신앙의 모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例)입니다. 삼손에게 있어서 들릴라의 가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손에게 있어서 들릴라의 가치는 장님이 되게 함으로써 죽음을 경험케 하여 진실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음의 진실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진실을 발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날마다 새로운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절대진리는 진실 안에 숨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게 들릴라의 가치를 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가장 사랑했던 가 치의 배신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파멸적 사랑, 즉 죽음을 경험케 하시기 위함에서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위해서 삼손을 장님 으로 만드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역시 들릴라라는 가치 를 보내셔서 우리 모두를 모두에게서 배신(배척)을 당하는 힘없는 장님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들릴라의 가치는 예언적으로 너무나도 우리의 상황과 일치된 상황입니다. 우리는 지금 힘없는 장님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실체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는 번데기 와도 같은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번데기의 상태는 생명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인 듯하나, 그 안에는 생명이 살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유충에서 성충으로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번데기의 상태는 죽음의 시간입니다. 번데기의 과정이 잠시 후에 있을 부활을 위 해서 예비된 죽음의 시간이듯이, 삼손에게 허락된 장님의 시간 역 시 잠시 후에 있을 위대한 사역과 위대한 가치를 위해 예비된 죽음 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장님으로 만든 이 시간, 이 시간은 예언적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하고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요구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안에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취하고 있습니다. 파멸적 사랑의 가치 파멸적 사랑의 가치라는 말은 말 그대로 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과연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예비될 수 있는 위치는 어느 위치일까요 우리 모두는 왜 마리아의 향유옥합이 그리스도의 장사를 예비케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잘 깨달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향유옥합을 깬 이 차원은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드리는 실로 위대한 차원입니다. 삼손이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하며 자신의 진정한 적 (敵)을 바라보는 것이 가져다 주는 예언적인 의미는 사단을 멸하는 비젼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사단을 멸하는 비젼은 우리가 죽고자 할 때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단을 멸하는 비젼의 위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죽음의 가치를 원하고 계십니다. 즉, 내 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그 말을 우리로 하 여금 듣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이 사역 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 노라.라는 삼손의 말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에게서도 삼손이 죽 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던 것과 같은 사역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내가 이 사역의 가치 안에서 진정으로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드리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이 복음의 가치에 내가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드리기를 원하노라.라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 올리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할 때 우리에게서 어떤 일이 발생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진정한 힘의 근원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각자의 사역 의 위치에서 우리가 내가 불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 라.라는 고백과 함께 진정한 파멸적 사랑의 가치로 복음을 위해 뛰어들기 원할 때 사명 안에서 그 힘의 부활과 함께 그 힘의 잠재력 은 정점을 나타내게 됩니다. 우리에게서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고백의 말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서 죽음의 가치가 생성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 에서 삼손이 하나님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 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 의 이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는 말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진정한 적(敵)이 누구 인가를 명확하게 보고 있기 때문에 올릴 수 있었던 말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 눈으로 지금 이 시대에 추구해야 될 가치가 무엇인지 를 명확하게 보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지금 이 시대에 추구해야 될 가치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보시는 그리스도인 들의 입에서 주님, 내가 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나의 모든 가치를 쏟 아 붓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고백의 말이 나와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죽고자 할 때에 우리는 부활합니다.
부활절을 즈음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사모하나, 이 시대의 부활은 흔히 널려 있는 가치 속에 있는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부활은 가치를 발견해야 하는 감추인 보화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될 부활은 이때까지 사람들이 가치 같지도 않는 것에 가 치를 추구했던 그러한 가치의 위치에서 사모할 수 있는 부활이 아 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부활의 가치는 아주 극적인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내 눈이 뜨일 때 그 순간은 가치의 빛이 비치는 순간입니다. 죽음의 순간 눈을 여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고자 할 때에 우리의 눈은 영 안에서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적나라하게 보 여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딤나 여인의 가치를 모든 인류에게 붙이심은 모든 사람 들을 하나님의 섭리의 장(章)으로 몰아넣으시기 위함이며, 창녀의 가치를 붙이심은 가치를 양극화시키기 위함이며, 들릴라의 가치를 붙이심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보화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가치는 힘없는 장님의 위 치인 들릴라의 위치인데, 이 위치야말로 진정으로 보화를 발견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파멸적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 가 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외침의 말씀은 진실의 정점, 곧 이 시대 적 복음에 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잔인하고도 가장 날카롭고 무서 운 검의 진실을 보여 준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최후의 순간에 자신을 버려야만 이 생명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을 버려야만이 생명을 얻을 수밖에 없는 이 비극적인 현실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 나이까)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압축시키셨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죽음으로 던지지 않고서는 생명의 부활을 이룰 수 없기에 십자가 상에서 이 비극적인 현실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로 명백히 알릴 수밖에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을 위해서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께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가치였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펼치고자 하시는 계획의 역사가 요한 계시록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잔인하고 무서운 검의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내 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장 3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착점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비극적인 현실 속에 처해 있으면서도 잠시 후에 펼쳐질 영화로운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한 그 순간이 바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바라보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마지막 때의 가치를 예비하기 위해서는 엘리 엘리 라 마 사박다니라는 말을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즉,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바라봐야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지금 이 죽음(복음을 위한 희생)을 향해 달게 뛰어든 목적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건설을 이루기 위함에서입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가치는 그리스도의 왕국 의 건설, 즉 사단의 멸망과 악의 종식을 위해서 예비된 가치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여기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은 삼손의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외침의 말과 의미를 같이 하는 말씀입니다. 삼손이 죽음 안에서, 즉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의 사역을 이루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 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모든 사역을 다 이루셨 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비극적 상황 속에서 희망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 비극적 상황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희망이 감추 어진 보화로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결국 죽음 의 가치를 예비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마지막 때 파멸적 사랑을 원하시는 이유는 진정으로 극적인 사랑의 가치를 이루지 않고서는 이 마지막 때의 가치를 예비할 수 없기 때 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딤나 여인의 환경, 창녀의 환경, 들릴라의 환경을 붙이심은 그 환경을 통해서, 즉 가장 사랑하는 것 의 배신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가장 파멸적인 사랑인 죽음을 드릴 수 있는 위치에 서게 하시기 위함에서입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섭리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우리 가 장님의 상태에서 영의 눈을 뜨게 될 때에 우리 또한 절망과 희 망을 동시에 직시함으로써 수용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눈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고 죽음의 가치를 던질 수 있는 상태로까 지 가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의 절대구도 안에서 죽음의 진실 을 이룸으로써 각자의 사역의 정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 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소유해야할 종말적 신앙의 필연적 특성 이 바로 신앙의 최고 정점인 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진실 은 한계를 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계속적으로 추 구해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추구하는 신앙 또한 단순 히 말로 정의하거나 논리로 해석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 속에 초현실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몸과, 마음과, 영을 숨쉬게끔 하는 하나의 에너지로서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면서 성경을 성취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섭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몸과, 마음과, 영에서 날마다 살아 쉼쉬고 있다.) 유일하게 성경만이 지구의 역사의 처음과 끝을 명백한 사실로 알리 고 있습니다. 그 명백한 진리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모든 만물에 깃들어 있는 동안 에 성취되어 질 것입니다. 저 푸르른 하늘과, 넓은 대지와, 풀,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이 시대가 마지막 때임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이처럼 모든 만물 가운데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시대를 비취는 꺼지지 않는 등불로서 빛을 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빛을 바라보는 자가 참 으로 적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지구의 역사의 마지막을 증거하 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명백한 진리요, 우리 인간이 처한 절망적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는 절망적 현실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마지막 때임을 고하는 절망적 현실 가운데 우리가 처 해 있으나, 이 절망적 현실 가운데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 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구와 함께 사 라지지 아니할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유일한 희망인 것입니다.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희망 을 바라보고(취하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함으 로써 수용할 수 있는 자세의 확립을 이루기 원하고 계십니다. 그 이 유는 가치가 양극화된 상황에서 절대적인 하나님의 생명의 가치만 이 홀로 높이 들리워지게 하시기 위함에서입니다. 마지막 때 멸망당할 두 가지 부류의 사람 마지막 때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절망을 직시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과, 희망을 직시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 멸망을 당하게끔 됩니다. 즉, 부유하고 편안한 위치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이 처 한 절망적인 현실을 외면한 사람이나,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비관으 로 일관하면서 그 절망 속에 감춰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 하시는 희망을 발견하여 취하지 못한 사람, 그 모두가 멸망을 당하 게끔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자세가바로 이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함으로써 수용할 수 있는 자세인데, 이는 마지막 때에는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함으로써 수용할 수 있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도 다름 아닌 하나님이 주 시는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하고 수용할 수 있는 신성의 교감을 통한 깊은 통찰력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실의 추구를 통해 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함으로써 수용할 수 있는 자리의 확보 를 이루어야 합니다. 진실의 절대구도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죽음, 곧 숙명이요, 하나님 의 위치는 생명, 곧 긍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은 숙명의 자 세를 통해서 인간의 위치로 수용해야 하며, 희망은 긍휼의 틀 안에 서 하나님의 절대적 생명의 위치로 수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이 진실의 절대구도의 확립을 이룬다는 것의 의미는 이 시대의 절망 과 희망을 동시에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진실 안에서 우리가 모든 만물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절망적 현실)와 우리 안에서 구원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희망적 현실)를 동시 에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진실의 차원에 있는 우리의 영과, 마음과, 몸은 요한 계시록의 말씀 이 성취되는 표적이요, 이 시대를 비취는 등불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삼손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 겠습니다. 삼손에게 세 여인을 붙이신 하나님의 섭리 삼손에게 있어서 힘은 그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삼손의 존재 가치가 그 힘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힘 은 그의 머리털(육)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머리털에 힘이 있었던 삼 손은 육적인 삼손으로서, 육에 힘의 근원, 즉 하나님의 실체가 있었 던 삼손을 의미합니다. 삼손은 그의 인생 속에서 세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불행히도 세 여인 모두에게로부터 배신을 당하게끔 됩니다. 여기서 세 여인은 신앙적인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이 마지막 때 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예언적 의미도 깊게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인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의 전부를 보여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삼손은 그의 인 생 속에서 세 여인을 만나는데, 첫 번째 여인은 딤나 여인이었고, 두 번째 여인은 가사의 기생이었으며, 마지막 세 번째 여인은 삼손 이 가장 사랑했던 들릴라라는 여인이었습니다.
1. 딤나 여인을 삼손에게 붙이신 하나님의 섭리 딤나 여인을 보고 그녀를 아내로 취하려 하는 삼손을 향해 그의 가 족들이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라는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삼손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 여 인을 아내로 취합니다. 원래 율법상으로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 게 되어 있지 않은데도 성경은 삼손이 딤나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 이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성경말씀 사사기 14장 4절 말씀 참조) 우리가 딤나 여인을 통해 일어난 사건의 결말을 보게 되면 왜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는가에 대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잠시 사사기14장 10-19절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배설 하였으니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삼손 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 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 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고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그들이 이르되 너는 수수께끼를 하여 우리로 듣게 하라 삼 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 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 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제 칠 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 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 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 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 도다 삼손이 그에게 대답하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으나 칠 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 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 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 제 칠 일 해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 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 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딤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삼손은 잔치가 배설된 자리에서 동무로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 삼십 명의 사람들에게 아주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내면서 너희가 이 수수께끼를 7일 안에 풀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 것이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주어야 한다.라고 하며 내기를 겁니다. 3일이 지나도록 수수께끼의 답을 풀지 못한 그들은 7일째 되던 날 삼손의 아내인 딤나 여인을 찾아가 수수께끼의 해답을 삼손에게서 알아내지 못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살라 버 리겠다.라고 협박함으로써 삼손의 아내로부터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수수께끼의 답을 말하자, 그 답 이 자기의 아내로부터 나온 것임을 안 삼손은 아내의 배신에 분노 하며 아스글론으로 내려서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노략하여 얻 은 옷을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주고 아비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이 일에 개입하셨는지를 쉽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딤나 여인을 만나기 전까지 삼손은 그저 평범한 삼손으로 지냈습니다. 즉 이 말은, 자신이 나실인인 줄도,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섭 리가운데 특별한 힘을 지녔다는 것도 안 삼손이 딤나 여인을 만나 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삼손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나실인 으로서, 사사로서의 삼손은 본격적인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 있어야 됩니다. 삼손의 사역은 블레셋인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 하는 사사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그 사사의 역할이 어느 시점에서 부턴가는 시작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블레셋 을 향한 삼손의 분노가 이 딤나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폭발하기 시 작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삼손으로 하여금 블 레셋을 향한 분노를 촉발시키기 위해서 딤나 여인을 삼손에게 붙이셨음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딤나 여인을 아내 로 취한 삼손에게 수수께끼의 사건을 통해 블레셋을 향한 적대감을 갖게 만듬으로써 삼손으로 하여금 본격적인 사사의 사역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블레셋을 향해 쏘는 화살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면, 화살(삼손)은 방향(블레셋)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바로 이 화살의 방향(블레셋)을 분명히 하는 역사를 하나님 께서 딤나 여인을 통해서 행하셨던 것입니다. 이 딤나 여인은 하나님께서 사역의 섭리의 틀 안으로 삼손을 끌어들이는 역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 가사의 기생을 삼손에게 붙이신 하나님의 섭리 그 후 20년 간 이스라엘의 사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삼손은 아직도 그의 마음 속에 꿈틀대는 죄적 욕망과 영적 갈증으로 인하여 가사의 기생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종으로서 아주 수치스러운 일을 드러 내게끔 됩니다. 여기서 기생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주시는 가치 의 양극화된 상황에서의 방황을 의미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사역의 위치를 확고히 하지 못함으로써 방황하는 모습을, 즉 가치의 양극화 된 상황 속에서의 방황을 가사의 기생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으로 드러냈습니다.
3. 들릴라를 삼손의 손에 붙이신 하나님의 섭리 마지막으로 삼손이 가장 사랑했던 들릴라. 들릴라는 삼손이 미치도 록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힘의 근원) 를 들릴라에게 털어 놓는 삼손의 모습 속에서 삼손이 얼마나 들릴라 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존재 가치(힘의 근 원)를 들릴라에게 털어 놓는 것은 하나님의 가치와 들릴라의 가치를 맞바꾼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아니하셨습니다. 성경에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사사기 16장 20 절)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삼손을 떠난 적 이 없으십니다. 이 말씀은 의미적으로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들릴라를 통해서 삼손은 힘없는 장님이 됩니다. 머리털에 힘이 있 던 육적인 삼손은 머리털이 잘리운 후 힘 없는 장님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에 기록된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났다.라는 표현의 말씀 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실체를 보이시기 위하여 육의 영역에서 장님 이라는 영의 영역으로, 즉 힘이 감추어진 보화로 자신의 실체를 숨 기신 것을 의미하는 표현의 말씀입니다. 머리털이 잘리운 후 삼손이 힘을 잃게 된 것은 이제 그의 힘의 근원이 육에서 영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힘은 그가 진실의 차원에서 눈을 뜰 때에 같이 부활하게끔 영에 감추어지게 됩니다. 마지막에 가서 그 힘의 근원 이 영의 위치 안에서 다시 머리털로 전달되는 역사를 일으키게 됨 을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사사기 16장 22장 말씀 참조) 우리가 성화하면 할수록 우리의 힘은 근원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가 힘없는 장님이 된 삼손을 비극적인 순간의 삼손으로 표현하는데, 실제적으로 그 순간이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져 있는 가장 복된 순 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이 육적인 삼손에서 영적인 삼손으로 거듭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들릴라를 삼손 에게 붙이신 이유는 장님을 만들어서 삼손을 진실케 하기 위함에서 입니다. 즉, 육에서는 죽이고, 영에서는 깨어나게 하시기 위함에서 였다는 것입니다. 머리털이 잘림과 함께 육의 힘이 죽은 삼손의 힘 의 실체는 영에서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머리털이 다시 자라면서 영에서 얻은 삼손의 힘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힘이 아니요, 그가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함으로써 얻은 새로운 힘입니다. 우리는 계속 적으로 새롭게 새롭게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해야 합니다. 장님이라는 고통스러운, 수치스러운 위치에서 진실의 절대구도의 확립인 죽음의 진실을 경험한 삼손은 이제 그 안에서 이때까지 그가 눈을 떴을 때는 보지 못했던 진정한 하나님의 가치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 바로 진실의 절대구도에서 죽음의 진실과 함께 존재하는 생명의 진실을 동시에 이루게 되는 순간이었더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인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 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깊이를 지닌 말씀입니다. 삼손이 마지막 죽으면서 외쳤던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이 말은 3차적 믿음의 완성인 파멸적 사랑을 상징해 주는 말씀으로서, 우리가 걸어가야 될 길에 대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가져야 될 희망의 위치에 대해서 말씀해 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는 몰랐던 진정한 자신의 존재의 가치, 즉 힘의 의미를 장님 이 되어서야 깨달은 후 하나님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 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삼손. 이 말씀의 대목에서 우리는 이제 삼손이 자신의 진정한 적(敵)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까지의 삼손의 적은 바로 삼손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즉, 죄적인 욕망과 영적인 갈증의 시달림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했던 방탕한 삼손 자신이 바로 자신의 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실체인 진실을 온전히 발견할 수 있 었겠습니까 장님이 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 지를 명확하게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적이 진정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삼손이 장님의 상태에서 나 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는 말을 할 수 있 었던 것은 그가 진실 안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의 적을 명확하 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이 떠 있었을 때보다 눈이 잠겼을 때 더 명확하게 자신의 적을 보게 된 삼손의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 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이 외침은 진정한 자유자의 외침입니다. 삼손은 죽음의 순간 눈을 뜨게 됩니다. 즉,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 께 죽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는 그 순간 사명의 눈이 열리기 시작 하면서 진실이 탄생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으로 옮겨진 감추어 진 그 힘의 근원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 삼손의 근육에서 마치 터지는 화산처럼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약하디 약한 힘 없는 장님이던 삼손의 근육에서 다시 옛날과 같은 폭발적인 힘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은 영 안에서 탄생된 진정한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실체가 다시 머리털로 전달되면서 그의 근육을 반응케 했 기 때문입니다.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며 삼손 이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은 무너지고 그 안에 있던 모든 블레셋 사람들은 죽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삼손이 죽 을 때에 죽인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라는 이 마지막 말씀은 예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잠시 이 말씀의 예언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붙이신 세 여인이 뜻하는 예언적 의미 삼손을 우리 자신으로 놓고 볼 때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딤나 여인을 붙이심같이 지금 우리에게도 딤나 여인의 환경을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딤나 여인의 환경은 하나님의 섭리로 몰아넣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육의 가치가 아닌 천국의 가치를 사모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대를 분별함으로 써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을 사모하는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가지 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이 세상 의 인생 속에서 승승장구했다면, 이 세상의 풍족하고 안전한 위치에 눈이 가리워졌다면, 우리는 아마도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殿)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위치를 정하시고, 그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계시다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위치에 있었지만, 포인트는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전 안으로 나올 수 있는 위치를 정하시고 그 속으로 몰아넣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 금 이 시대의 가치인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이루게 하시기 위함에 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나온 것 이 시대적 섭리의 시작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삼손이 딤나 여인 을 통해서 블레셋을 향한 복수심이 촉발되어 그로 인하여 사역의 시 작을 이루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 을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주시는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작게는 교회, 넓게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지구 모든 민족들을 일치시켜서 바 라볼 수 있게끔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경제위기라는 악조 건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로 몰아넣기 위한 딤나 여인의 환경입니다. 우리는 물론 세상 사람들도 경제위기 시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지 만,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깨우시기 위한 시대적 섭리의 역사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마지막 때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화살의 위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환경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녀의 환경을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창녀는 예언적으로 가치를 양극화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미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가치적으로 이 시대를 양극 화시키고 계십니다. 즉,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 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요한 계시록 22장 11절)라는 말씀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손이 두 번째로 만 난 가사의 기생이 상징하는 예언적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이 안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즉, 딤나 여인의 손길도 받고 있지 만, 가치를 양극화시키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계속적으로 이리저 리 쏠려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깨워 주시고자 하시는 가치는 들 릴라의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들릴라의 가치를 우리에게 붙이셨 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가장 사랑했던 가치입니다. 가장 사랑했 던 가치를 통한 배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마지막 때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가장 사랑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죽음을 경험케 하고 계십니다. 이 들릴라의 가 치는 재림 신앙의 모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例)입니다. 삼손에게 있어서 들릴라의 가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손에게 있어서 들릴라의 가치는 장님이 되게 함으로써 죽음을 경험케 하여 진실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음의 진실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진실을 발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날마다 새로운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절대진리는 진실 안에 숨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게 들릴라의 가치를 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가장 사랑했던 가 치의 배신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파멸적 사랑, 즉 죽음을 경험케 하시기 위함에서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위해서 삼손을 장님 으로 만드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역시 들릴라라는 가치 를 보내셔서 우리 모두를 모두에게서 배신(배척)을 당하는 힘없는 장님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들릴라의 가치는 예언적으로 너무나도 우리의 상황과 일치된 상황입니다. 우리는 지금 힘없는 장님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실체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는 번데기 와도 같은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번데기의 상태는 생명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인 듯하나, 그 안에는 생명이 살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유충에서 성충으로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번데기의 상태는 죽음의 시간입니다. 번데기의 과정이 잠시 후에 있을 부활을 위 해서 예비된 죽음의 시간이듯이, 삼손에게 허락된 장님의 시간 역 시 잠시 후에 있을 위대한 사역과 위대한 가치를 위해 예비된 죽음 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장님으로 만든 이 시간, 이 시간은 예언적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직시하고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요구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안에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취하고 있습니다. 파멸적 사랑의 가치 파멸적 사랑의 가치라는 말은 말 그대로 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과연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예비될 수 있는 위치는 어느 위치일까요 우리 모두는 왜 마리아의 향유옥합이 그리스도의 장사를 예비케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잘 깨달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향유옥합을 깬 이 차원은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드리는 실로 위대한 차원입니다. 삼손이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하며 자신의 진정한 적 (敵)을 바라보는 것이 가져다 주는 예언적인 의미는 사단을 멸하는 비젼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사단을 멸하는 비젼은 우리가 죽고자 할 때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단을 멸하는 비젼의 위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죽음의 가치를 원하고 계십니다. 즉, 내 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그 말을 우리로 하 여금 듣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이 사역 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 노라.라는 삼손의 말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에게서도 삼손이 죽 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던 것과 같은 사역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내가 이 사역의 가치 안에서 진정으로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드리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이 복음의 가치에 내가 파멸적 사랑의 가치를 드리기를 원하노라.라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 올리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할 때 우리에게서 어떤 일이 발생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진정한 힘의 근원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각자의 사역 의 위치에서 우리가 내가 불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 라.라는 고백과 함께 진정한 파멸적 사랑의 가치로 복음을 위해 뛰어들기 원할 때 사명 안에서 그 힘의 부활과 함께 그 힘의 잠재력 은 정점을 나타내게 됩니다. 우리에게서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고백의 말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서 죽음의 가치가 생성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 에서 삼손이 하나님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 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 의 이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는 말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진정한 적(敵)이 누구 인가를 명확하게 보고 있기 때문에 올릴 수 있었던 말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 눈으로 지금 이 시대에 추구해야 될 가치가 무엇인지 를 명확하게 보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지금 이 시대에 추구해야 될 가치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보시는 그리스도인 들의 입에서 주님, 내가 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나의 모든 가치를 쏟 아 붓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고백의 말이 나와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죽고자 할 때에 우리는 부활합니다.
부활절을 즈음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사모하나, 이 시대의 부활은 흔히 널려 있는 가치 속에 있는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부활은 가치를 발견해야 하는 감추인 보화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될 부활은 이때까지 사람들이 가치 같지도 않는 것에 가 치를 추구했던 그러한 가치의 위치에서 사모할 수 있는 부활이 아 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부활의 가치는 아주 극적인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내 눈이 뜨일 때 그 순간은 가치의 빛이 비치는 순간입니다. 죽음의 순간 눈을 여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고자 할 때에 우리의 눈은 영 안에서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적나라하게 보 여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딤나 여인의 가치를 모든 인류에게 붙이심은 모든 사람 들을 하나님의 섭리의 장(章)으로 몰아넣으시기 위함이며, 창녀의 가치를 붙이심은 가치를 양극화시키기 위함이며, 들릴라의 가치를 붙이심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보화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가치는 힘없는 장님의 위 치인 들릴라의 위치인데, 이 위치야말로 진정으로 보화를 발견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파멸적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 가 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외침의 말씀은 진실의 정점, 곧 이 시대 적 복음에 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잔인하고도 가장 날카롭고 무서 운 검의 진실을 보여 준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최후의 순간에 자신을 버려야만 이 생명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을 버려야만이 생명을 얻을 수밖에 없는 이 비극적인 현실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 나이까)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압축시키셨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죽음으로 던지지 않고서는 생명의 부활을 이룰 수 없기에 십자가 상에서 이 비극적인 현실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로 명백히 알릴 수밖에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을 위해서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께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가치였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펼치고자 하시는 계획의 역사가 요한 계시록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잔인하고 무서운 검의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내 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장 3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착점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비극적인 현실 속에 처해 있으면서도 잠시 후에 펼쳐질 영화로운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한 그 순간이 바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바라보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마지막 때의 가치를 예비하기 위해서는 엘리 엘리 라 마 사박다니라는 말을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즉,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바라봐야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지금 이 죽음(복음을 위한 희생)을 향해 달게 뛰어든 목적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건설을 이루기 위함에서입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가치는 그리스도의 왕국 의 건설, 즉 사단의 멸망과 악의 종식을 위해서 예비된 가치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여기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은 삼손의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외침의 말과 의미를 같이 하는 말씀입니다. 삼손이 죽음 안에서, 즉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의 사역을 이루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 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모든 사역을 다 이루셨 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비극적 상황 속에서 희망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 비극적 상황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희망이 감추 어진 보화로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결국 죽음 의 가치를 예비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마지막 때 파멸적 사랑을 원하시는 이유는 진정으로 극적인 사랑의 가치를 이루지 않고서는 이 마지막 때의 가치를 예비할 수 없기 때 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딤나 여인의 환경, 창녀의 환경, 들릴라의 환경을 붙이심은 그 환경을 통해서, 즉 가장 사랑하는 것 의 배신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가장 파멸적인 사랑인 죽음을 드릴 수 있는 위치에 서게 하시기 위함에서입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섭리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우리 가 장님의 상태에서 영의 눈을 뜨게 될 때에 우리 또한 절망과 희 망을 동시에 직시함으로써 수용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눈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고 죽음의 가치를 던질 수 있는 상태로까 지 가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의 절대구도 안에서 죽음의 진실 을 이룸으로써 각자의 사역의 정점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 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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