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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시대의 타락 (삿19:1)

본문

사사기 17-18장은 이스라엘 사사시대의 종교적 타락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19장에서 21장까지는 도덕적 타락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모든 신앙상태를 결론적으로 말씀한 것이-(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입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라는 말씀이 네 번 나옵니다. 그래서 ‘각각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다’는 말씀이 두 번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영원하신 왕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신정통치는 왕중의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때입니다. 이 나라가 가장 정의롭고 공평된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왕이 계시지만, 그들의 마음에 두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다들 제 생각에 옳은대로 행했습니다. 이 사사시대에 나타난 사람들에게서 제 멋대로의 신앙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우리 사회의 타락은 언제나 신앙적인 타락이 먼저 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세히 사사기 19-21장의 말씀을 펼칠 때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오늘 오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인간의 악이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복음은 진리 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일간지나 티브이를 통해서 보게되는 세상의 모습이나 그 때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고 제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선민이라하는 이스라엘이나 세상이나 꼭같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이 세상 보다 더 타락될 수도 있습니다. “한 뻔뻔스런 동성연애 갱단들이 호텔에 숙박한 여행자를 급습하여 그 아내를 밤새 윤간한 뒤에 살해하다” “분노한 그녀의 남편은 죽은 아내의 시체를 토막내어 전국 도지사에게 보내다” “전국 조직 폭력배들이 총동원, 패 싸움으로 육만 육천명이 떼죽음을 당하다” 이런 기사가 조간에 나왔다면 그 기사를 읽는 여러분들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는가” 경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오늘 우리들은 너무 심령들이 패괴해져서 매일 보는 티브이의 영향으로 이런 사건들도 예사롭게 여깁니다만, 오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사시대 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때에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은 어떠합니까 나는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압을 만큼 나빠진 것을 보기 위해서 오늘까지 살아왔다는 어떤 수필가의 말과 같이 오늘날의 사회에 대하여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19-21장의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한 레위인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 레위 사람에게 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첩은 음란했습니다. 또 다른 남자와 행음하므로 남편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버지 집에서 넉달을 돌아오지 아니합니다. 그러자 이 레위인은 그 여인을 찾기 위해서 먼길을 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시작서부터 제 멋대로된 레위인의 삶을 보여줍니다. 축첩은 구약에 행했던 관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관행이라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수종드는 레위인이 축첩을 한 행위부터 잘못입니다. 그가 음란을 행하여 자기를 떠난 그여인을 찾으러 에브라임에서 장인의 집이 있는 베들레헴까지 온 것은 호세아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멜을 찾으러간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그는 단지 성적인 만족을 위해서 여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여인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녀를 용서해주고 화해를 합니다. 이는 그 사회의 도덕적 타락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용서가 좋고 화해가 좋은 것이지만, 죄에 대한 회개가 없는 용서는 더 큰 범죄를 낫게됩니다. 이 레위인은 거기서 장인이 대접을 잘 받습니다. 사흘 동안 먹고 마시고 신나게 즐깁니다. 그리고 떠나려고하자 장인이 더 쉬었다가 가라고 만류합니다. 그러자 또 하루를 더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겼는데, 나흘만에 가려고 하니까 또 만류합니다. (삿19:6)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여자의 아비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하라 자, 닷새 동안을 아무 것도 아니하면서 장인과 첩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는 레위인을 생각해 봅니까 앞서 17-18장의 요나단이란 레위인 제사장 된 소년은 나쁜사람이었다면 이 레위인은 참으로 안일하고, 비열하고, 잔인한 악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외식적인 신자였습니다. 그가 닷새째 되는 날에 일어선 것은 아마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적어도 레위인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돌아가야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타락이 이것입니다. 이 때는 웃을 때가 아닙니다. 사실은 땅을 치고 울며 애통하여야할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웃고 즐깁니다. 너무 많은 교회에서 그 동안 예배의 거룩한 시간을 “종교적인 웃음”으로 대치해 오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 지역의 어떤 큰 교회라고 할 수 있는 목사님께서는 “나는 강단에서 꼭 두 번 이상을 교인들을 웃기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래야 교인들과 마음이 통하고 은혜를 잘 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강해설교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로이드 존스라는 목사님은 아주 평화로운 분이며,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지만, 강단에서 유모어를 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 있는 자신,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때에 청중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로서 말씀을 선포하는데 진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누구 말이 옳습니까 교회가 많은 프로그램을 연구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경외심을 잃어버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웃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레위인이 기껏 닷새 동안 한 일이라고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 뿐입니다. 돌아갈 때가 되어서 일어서는데 장인이 붙듭니다. 이 밤이 어두우니 먹고 마시고 내일 아침에 떠나지 할 때에 그는 그 만류에 또 주저 앉아버립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레위인이기 때문에 안식일까지는 돌아가야하는 이유로 닷새되는 날에 일어섭니다. 이 레위인의 위선된 모습이 우리들 아닙니까 그래도 자신은 그리스찬이기 때문에 세상 죄악에 젖었던 육신을 끌고 교회로 나가야한다고 오늘 이 자리에 계신 것은 아닙니까 세상에서 살 때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먹고 마시고 희희낙낙 하다가 주일이면 여지없이 교회로 나오는 그리고는 기도도 하고 예배도 보고, 찬송도 하고 가끔은 은혜로 눈물도 흘리기도 하고 그러나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서는 이전의 삶을 그대로 계속하는 이런 외식된 율법주의자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이 레위인이 빛 가운데 거했다면 이런 엄청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 레위인의 안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타락된 삶, 그러면서도 율법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생활이 그와 상관된 한 여인을 수치 당하게 하여, 강간과 죽음에 이르게 하며, 한 지파를 몰살하게 만드는 전쟁까지 이르게 했습니다. 여러분, 죄를 무서워해야합니다. 죄의 값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안일은 범죄입니다. 우리의 외식적인 신앙생활은 우리 가정을 파멸로 이끕니다. 우리 주변을 황폐케하고 망하게 하는 무서운 결과를 맺게합니다. 기브아의 악행 이 레위인과 그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다가 날이 어두워질 때 쯤에 도착한 것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예루살렘은 이방인 여부스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동족 베냐민 지파가 살고 있는 기브아로 가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레위인의 헛된 자만심과 착각을 보여주는데 이는 이 레위인 한 사람 뿐이 아니라 그 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삿19:11)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웠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 (삿19:12)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레위인은 우리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어떻게 이방 사람들과 함께 거할수 있느냐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이방인 들보다 낫지 못하다는 것은 깨닫지 못합니다. 뒤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베냐민 지파의 부패한 모습은 진실로 이방인들에게도 없는 망령된 것입니다. 이를 풍자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레위인의 내 뱉는 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보다 나아서 구원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도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하는 일을 힘써야합니다. 기브아에 들어갔으나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오직 에브라임 노인 한 사람이 그들을 영접하여 대접을 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저문 뒤에 그곳 기브아 사람의 악행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비류들은 레위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겠다고 몸을 문에 부딪히면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이들이 ‘상관한다’는 말은 그들과 성적인 관계, 곧 동성연애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브아 거민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에 타서 멸망 당했던 도성인 소돔과 고모라성의 타락된 모습을 연상케합니다. 이 노인은 이 동네 깡패들의 하고자 하는 일을 망령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딸을 그들에게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도 소돔 성의 비류들에게 롯이 (창19: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하면서도 (창19:8)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손님을 보호하겠다고 어떻게 이런 불량배들에게 자신의 딸을 내어 주겠습니까 이 노인이나 롯을 보면 한 편에서는 악을 행치말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악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방송들이 그러합니다. 한 쪽 프로그램은 음란과 폭력적으로 되어가는 세태에 대한 대책을 찾기 위해서 좋은 강사를 초청하여서 의논하면서 또 어떤 프로그램은 저들이 스스로 폭력적이고, 음란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기 아들 딸들이 세속적인 영화, 티브이, 비디오, 잡지 등에서 보고 듣는 것에서 얼마나 그 마음을 더럽히고 있는지에 대하여 묵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노인은 저들 불량배들의 죄악에 대하여 지적을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어떤 범죄가 된다는 것 보다 자기 집에 들어온 손님에 대하여 대접이 되지 못하는 면으로 동네 사람들을 말렸던 것이지만 그도 역시 그 동네 사람이라 그 문화에 젖어 들었던 것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과 같이 우리가 세속문화의 위험에 대하여 아무리 경계를 해도 어쩔 수 없이 그 속에 있으므로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미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때에 우리 몰래 우리 인식 깊이 들어와 있는 세속적이고, 죄악적인 삶은 없습니까 이 세속 문화라고 하는 것은 이단 보다도 더 조심해야합니다. 이단은 적인 줄 알고 방어자세를 하지만, 이 문화는 우리가 다 거부할 수 없기 때문에 수용하다 보면 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경찰청 사람들, 미스테리 극장, 이런 류의 프로그램들을 계속해서 보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 사화는 어떻게 그려지겠습니까 그들에게 자리 잡은 이그러진 생각은 일평생을 지배합니다. 지존파 일당이 사형되기 전에 다 회개하고 글을 남겼는데, 그 두목이라는 사람이 자기는 인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이런 엄청난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산제물의 삶을 살려고 하는 자에게 제일 먼저 분부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이 때 레위인이 어떻게 이 현실을 대처하는가의 모습을 본문에서 살펴보고 많은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는 (삿19: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지고 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삿19:28)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그 남편은 자기 첩을 그 불량배들에게 내어 줌으로써 자신을 보호했습니다. 그녀는 밤새도록 불량배들에게 윤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한 인간의 감정에 대하여 이렇게 냉담하며, 성의 신성함과 아무리 첩이라도 결혼의 책임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했는데,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레위인은 경건치 못한 불량배들의 정욕을 채워주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내어 주는 일뿐 아니라, 놀라운 것은 그 레위인은 그녀가 수치와 강간을 당하는 동안에도 자리에 누워서 잠을 잘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도 양심에 화인 맞으면 이렇게 뻔뻔하고 냉혈동물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타락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레위인은 그 여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해 하지 마십시오. 아내를 장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무서운 일을 꾸밉니다.
그의 아내의 시신을 열 두 동강을 내어서 열 두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아내의 죽음이 슬퍼서가 아닙니다. 그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들은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레위인의 냉정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이 여인이 이렇게 윤간을 당하고 쓰러져서 죽게 된 것은 기브아 불량배들이 했지만, 그 원인 제공자는 바로 자기 아닙니까 그럼에도 자신의 무책임함과 자신의 무감각으로 일어난 사건임에도 자신에게 먼저 분노하지 않고 그 불량배들을 복수하기 위해서 토막 사건이라는 현대에 일어나도 경악해 마지 않는 죄악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가 자기 아내의 시신을 도막 낼 때에 그 심령 상태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한 인간의 분노가 이렇게 잔인하고 무서운 일도 감행하게 만듭니다. 그의 분노는 불과 몇 명의 불량배를 징계하려는 의도지만, 이로써 한 지파가 쓰러지고 온 이스라엘이 불행해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몰고 왔습니다. 우리는 분노를 다스려야합니다. 복수할 마음이 있어날 때에 먼저 자신을 살펴야합니다. 그 원인이 반드시 자기에게도 있습니다. 원인 제공자가 자신이면서도 결과만 가지고 분노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에게 잘못한 일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잘못한 것을 생각하여 보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사건인지도 모릅니다. 그 레위인이 이렇게 하지 않고도 그 불량배들을 응징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로 찾아가서 대제사장에게 자문을 구했다면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판단하여 그들을 응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폭력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계속적인 폭력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열 두지파에게 그 시체 도막을 보냈기 때문에 베냐민과 아베스길르앗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파 사람들의 어른들이 다 모였습니다. 이들이 미스바로 모여서 레위인의 말을 다 듣고난 다음에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 레위인의 분노가 그들에게 옮겨져서 베냐민 지파에게 딸들을 주지 않을 것을 맹세부터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뒤에 후회하게 됩니다. 마치 한 사람같이 이들이 합심이 되어서 베냐민 지파에게 통보를 했습니다. 그 불량배들을 넘겨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그 죄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고, 그 악한 일을 한 불량배들을 이스라엘 열한 지파에게 넘겨줄 의사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래서 20장에서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용서 받지 못할 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야단을 치고 내일 네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그 부모가 선생님을 찾아와서 책상을 뒤 엎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왜 남의 아이를 야단치느냐고, 우리 아이가 무엇 잘못했느냐면서도리어 큰 소리 치고, 남의 귀한 아이에게 매를 드는 이 학교 선생님을 고발하겠다고 하면서 아이를 선생님 허락도 없이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도대체 선악을 무엇으로 판단하는지 그 기준이 없어진 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제 소견에 옳은대로 하는 때입니다. 제게 손해가 되든지 이익이 되든지간에 우리들은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부터 따져야합니다. 옳은 길이면 손해되고 있는 것을 다 빼앗겨도 걸어가야합니다. 그른 길이면 생명 내 놓고 벗어나고 대적해야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실행하여야하고, 이렇게 가르쳐야합니다. 그러나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이 되어서 레위인도, 그 첩도, 그 장인도, 노인도, 베들레헴 사람들도, 기브아사람들도,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이스라엘 열 두지파도 다 제 멋대로입니다. 이렇게 부도덕이 합리화되고 정당화되는 때를 살아갑니다. 오히려 도덕이나 신앙이 무시를 당하고 이를 우습게 여기는 때입니다. 오늘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탄핵되어야 마땅한 것은 그가 저질렀던 개인적인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얼마전에 동성연애자들을 옹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신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또 미국은 1973년에 낙태를 합법화 시켰습니다. 몇 년 전에 작고한 기독교 철학자인 쉐퍼박사는 1973년에 미국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성적인 쾌락을 합법화하고 동성연애자들이활개칠 수 있는 사회로 조장한 것은 대통령 자신의 기독교인을 자처하면서도 그 양심이 숨은 범죄로 인하여 무뎌졌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분이 진정 회개하지 않았으면 탄핵될 것입니다. 무서운 것은 이런 사사시대의 타락보다 타락도가 더 심각한 때에 우리들이 살고 있고, 우리 자녀들에게 더 이상 부패할 수 없을 만큼 부패한 세대를 안겨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 심각성을 전쟁으로 한 지파가 다 망해지고난다음에야 깨닫게 된 것 같이 우리들도 다 망한 다음에야 깨달을 것인지 이 제 멋대로의 문화에 대해서 우리들이 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조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가는 때, 진리의 빛이 가리워지는 때에 더욱 더 빛이 필요한 줄 알아서 언제나 절대적인 진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는 일에 힘을 써야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합니다. 정부도, 학교도 우리 자녀들의 영적인 문제 이 정신적인 문제에 대하여 다 두손을 놓았습니다. 이 때에 교회가 깨어 있어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 학생들을 바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은 사사시대 보다 더 악하고 음란한 때를 만날 것입니다. 아무리 잘 먹이고 잘 가르쳐도 신앙적으로 타락되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삶에는 결코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청교도들의 믿음 같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며, 하나님 중심의 가정, 하나님 중심의 교회로 만들어 가야합니다. 사사 시대에도 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그 통치를 받기 싫어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왕이 누구십니까 (시24: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24:10)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시47:7)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시145: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 오늘도 모든 만뮬을 홀로 다스리시는 분이 만왕의 왕이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의 다스림을 받읍시다. 이분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이분은 정의와 공평입니다. 나의 주, 나의 왕께 영광을 돌립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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