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에게 주신 표 (창4:1-15)
본문
창세기에는 인류 최초의 범죄인 아담의 범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류 두 번째의 범죄, 가인의 범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범죄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짓고 있는 모든 죄의 대표적 두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듯이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소홀히 넘겨 버려서 그 담겨 있는 깊은 뜻을 헤아려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이 두 가지 범죄의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깊이 있는 메시지를 새롭게 발견하시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담의 범죄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아담의 범죄와 관련된 이상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실 때에 그들은 숨었습니다.
그런데 왜 숨었는가 그 이유가 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명령을 어기면 바로 그것 때문에 볼 면목이 없고 두려워서 숨고 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3장 10절에 보면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에 보면 “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나이다.” 이렇게 써 있습니다. 자기들이 명령을 어긴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벗은 몸인 것이 부끄러워서 숨었다고 하는 부분이 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로써 과연 선악과의 효능을 우리가 확인하게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더니 과연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발가벗고 있는 모습이 부끄러운 것임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정말로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벗은 것이 선이 아니고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사단의 말이 과연 맞았습니다. 사단이 뭐라고 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 선악을 알게 된다.” 정말로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맞았는데 그 다음이 완전히 틀려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보일까봐 숨어 버리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었다면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서야 하는데 숨기는 왜 숨습니까 하나님처럼 되지 못했기에 두렵고 부끄러워서 숨은 것이 아닙니까 인간들은 알고 보면 누구나가 다 부끄러운 것입니다. 발가벗고 떳떳하게 거리에 다니는 사람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벗겨 놓으면 부끄러워서 못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런답니다. 자기의 천황을 신처럼 모시는데 자기들도 이런 고백을 한답니다. “일본 천황이 참신이 못되는 이유가 단 한가지 있다. 그도 화장실을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황이라고 하더라도 벗겨 놓으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안 이상 부끄러운 것을 알게 된 이상 절대로 하나님처럼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도 오히려 숨어 버립니다. 동물들은 옷을 입지 않아도 부끄러운 것을 모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부끄러운 것을 알고 오늘까지도 모든 인간들은 옷을 입고 다니지 않습니까 가식의 옷을 입습니다. 부지런히 옷을 해 입습니다. 아담도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어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러나 둘이서 치마를 분명히 해 입은 후에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치마를 입고서도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어 버렸습니다. 자기 손으로 지은 치마를 입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 치마가 어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겠습니까 미흡합니다.
히브리서 4장 13절에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는 그 미흡한 나뭇잎 치마로 안됩니다. 드러나 버리고 맙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벗은 몸, 죄악된 부끄러운 것을 보게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 하신 분이시므로 미래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필경 따먹을 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일부러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놓으셨습니까 이것은 아담에게 한 번 따먹어 보고 너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가릴 수 있는가 해 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실 선악과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율법은 바로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나의 죄를 가려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교육을 하며 선과 악을 가르칩니다. 언론에서도 또한 다른 종교에서도 선과 악을 가르칩니다. 그 가르치는 선과 악은 사실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악의 가르침으로 해서 내 자신의 부끄러운 죄된 악한 모습이 발견되었을 때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틀립니다. 기독교와 세상 다른 사회와 종교가 여기에서 다릅니다. 선악은 다 똑같습니다. 율법 없는 사람은 양심으로도 비춰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죄가 드러나면 공양미 삼백석을 드리거나 천번 절을 하거나 한달 간 좌선을 하고 물고기를 방생하며 선행과 고행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손으로, 내 자신의 손으로 나뭇잎 치마를 해서 입으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인류의 시조 아담도 자기 손으로 나뭇잎 치마를 해 입었으나 그것 가지고 어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나설 수 있었습니까 치마를 해 입고서도 두려워서 숨어 버리지 않습니까 나뭇잎 치마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벌거벗은 것을 본 이상 내 손으로 나뭇잎 치마를 해서 가리워도 온전한 가리움이 하나님 앞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후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담의 나뭇잎 치마를 벗기셨습니다. 그리고는 동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아마 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불쌍한 어린양이었을 것입니다. 이 양은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갔습니다.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기 위해서 희생된 것입니다. 반드시 죄를 씻으려면 누군가가 피를 흘려야 하기 때문에 동물을 희생시키고 피 묻은 가죽을 손수 벗기셔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십니다. 나뭇잎 치마로 안되기 때문에 피흘린 가죽옷을 입히시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부끄러운 선악의 문제는 오직 예수의 피로만이 가려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가죽옷은 예수의 피흘림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러면서 고린도후서 5장 13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죽옷을 내가 입어야 하나님 앞에서 죄 많은 벗은 자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 잔치에서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났습니다. 나뭇잎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예복, 예수를 믿는 피흘림의 이 가죽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제 죄지은 모든 인생은 피흘린 예수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나뭇잎 옷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에도 항상 이러한 성구를 읽지 않습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장 19절 말씀입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서 감히 성소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 하와에게 은혜로 주신 가죽옷은 바로 예수의 피였습니다. 아담과 같은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가인의 경우를 한 번 살펴봅시다.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미워했습니다.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그리고도 “내가 아우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허물었다면 가인은 수평적 관계, 형제지간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멀어진 아담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라고 찾으셨습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수평적 관계, 다시 말하면 인간과 인간끼리의 수평적 관계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죄는 이 두 가지로 전부 요약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죄, 아담의 죄이고둘째는 인간에 대한 죄, 가인의 죄입니다. 십계명도 이 두 가지 아닙니까 제 1계명부터 제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서 말씀을 하셨고, 제 5계명부터 제 10계명까지는 인간끼리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계명을 요약해서 “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둘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두번째 가인의 죄에 있어서 가인은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안색이 변한 것은 마음속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가인의 마음속에는 형제에 대한 시기, 질투, 미움이 가득한 죄의 소원이 있었고 하나님은 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움을 자기가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해결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가인도 아담이 자기 나뭇잎 치마로 해결하지 못한 것처럼 자기 힘으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자기 힘으로도 자기 마음을 어떻게 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힘으로 안된 아담에게도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주셨는데 이번에는 가인에게 나중에 하나님께서 표를 주십니다. 그것은 살인자의 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함을 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는 기가 막힌 표를 은혜로 주십니다. 참 이상합니다. 가인은 죽이지 않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표를 주셨을까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 오늘은 이 가인에게 주신 표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연구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주신 가죽옷이 예수님의 피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면 이 가인에게 주신 표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사람에게 주셔서 죽임을 당하지 않는 표가 구약 성경 에스겔서에 나오고 또 요한계시록에도 나옵니다. 에스겔서 9장 4절입니다.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하나님이 어떤 불쌍한 사람들,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이마에 표를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다른 거민들을 다 심판하는데 특별히 이마에 표있는 자들은 죽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가 막힌 표입니다 가인의 표와 똑같습니다. 또한 요한 계시록에도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계시록 7장 3절 “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여기서는 이마의 인이라고 했는데 인은 도장을 말합니다. 찍어 주는 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마에 인친다는 것과 에스겔서에 이마에 표를 찍는다는 말은 똑같은 말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이마에 인을 쳐서 그들은 절대로 환난의 이 세상에서 죽임 당하지 않고 십사만사천이 인을 맞아 해함을 당하지 않습니다. 기가 막힌 인이요, 기가 막힌 표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9장 4절입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 맞으면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인에게 주신 표와 똑같은 효능이 있는 놀라운 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인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참 해석을 한 번 보십시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바울이 말합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인친다는 것은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는 죽임을 당하지 않고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해석입니다. 이 가인에게 주신 표는 한 번 인침받으면 해를 당하지 않는 표인데 그러면 그것이 과연 성령님의 표를 의미하는지 한 번 대입을 해 보겠습니다. 성령님으로 인침받은 사람은 가인과 같은 경우라도 회복이 되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가인은 마음속에 죄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안색까지 변하게 하는 심한 죄의 소원이 가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인을 가만히 놔두면 또 죄의 소원이 마음에 있으므로 나가서 사람과 싸울 것 아닙니까 탐욕의 생각,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어디가서 싸우고 그러다가 자기도 오래 살지 못하고 사람과 싸우다가 사람에게 맞아서 죽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조선 일보를 보니까 삼풍 사고 1주년을 맞이해서 머릿기사로 크게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탐욕에 앗긴 넋이여, 용서하소서.” 인간의 탐욕이 사람을 죽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미워함과 시기함이 결국 사람을 죽입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하는데 가인은 자기 힘으로 자기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죄의 소원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가인의 마음에 인쳐서 보증으로 성령님이 감동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탐욕의 마음이 없어지고, 마음속에 죄의 소원이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기쁨이 충만합니다. 남을 보면 다 사랑합니다. 얼굴의 안색이 웃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간의 관계성 속에서 성령님 충만 받아 남을 사랑하게 되고 탐욕이 없어지게 되는데 왜 서로 죽입니까 성령님 충만은 완악한 나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줍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오히려 남의 영혼을 사랑하여서 전도를 하게 됩니다. 내 마음에 근심, 걱정, 시기, 질투를 사라지게 하고 나의 마음의 죄의 소원을 다스려 줍니다. 안색까지도 충만하게 변합니다. 성령님 충만한 스테반의 얼굴을 천사와 같이 빛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 충만 받지 못한 사람은 마음속에 늘 죄의 소원이 있고 부정적 생각과 항상 얼굴이 남을 미워하는 생각으로 찌그러져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소욕, 죄의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은 누가 죽든지 서로 죽습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이 충만하면 생명과 평안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육신의 생각을 영으로 이기라고 했습니다. 내 죄의 소원, 가인과 같은 마음을 성령님의 인침을 받아서 이기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반드시 살리니” 성령님은
그러므로 육신의 소욕, 죄의 소원이 있는 사람을 감화시켜서 변하게 하는 힘이요,
그러므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아담도 자기 힘인 나뭇잎 치마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주신 것입니다. 가인도 자기 힘으로는 죄의 소원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표를 주셔서 그의 심령을 변화시켜 탐욕이 없어져서 죽임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가죽옷은 예수의 피요, 가인에게 주신 표는 예수의 영,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부끄럽게 있는 자들, 가인과 같이 옆사람을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며 살인하고 시기하는 자들에게 “물과 성령님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은 죄를 씻어 주는 예수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가인과 같이 두 가지의 죄를 범하는 인간들에게 물과 성령님으로 날마다 거듭나라고 하십니다. 찬송가 204장에서 우리는 뭐라고 부릅니까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님과 피로써 거듭나니…” 나뭇잎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 바다를 통과하였는데 바울은 그것을 물세례, 죄 용서함의 표며, 그 다음 광야에서 구름 기둥 불기둥은 성령님 세례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가 아담과 가인의 죄, 가죽옷과 가인의 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경은 되는대로 쓴 것이 아닙니다. 성도님 여러분 아담과 가인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나 자신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많이 합니까 또 내 형제를 얼마나 미워하고 싫어하고 탐욕의 마음, 살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죄짓는 나 자신은
그러므로 늘 예수의 피를 힘입어야 합니다. 늘 사람들을 미워하고 육신의 소원이 가득한 가인과 같은 나 자신은 이 죄의 소원이 뒤집어지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충만, 인침을 받아야 합니다. 아담이 가죽옷 입고 가인이 표를 받은 것처럼 날마다 예수로 옷입고 날마다 성령님 충만으로 마음에 인침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는 참 거듭난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왜 숨었는가 그 이유가 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명령을 어기면 바로 그것 때문에 볼 면목이 없고 두려워서 숨고 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3장 10절에 보면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에 보면 “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나이다.” 이렇게 써 있습니다. 자기들이 명령을 어긴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벗은 몸인 것이 부끄러워서 숨었다고 하는 부분이 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로써 과연 선악과의 효능을 우리가 확인하게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더니 과연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발가벗고 있는 모습이 부끄러운 것임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정말로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벗은 것이 선이 아니고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사단의 말이 과연 맞았습니다. 사단이 뭐라고 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 선악을 알게 된다.” 정말로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맞았는데 그 다음이 완전히 틀려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보일까봐 숨어 버리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었다면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서야 하는데 숨기는 왜 숨습니까 하나님처럼 되지 못했기에 두렵고 부끄러워서 숨은 것이 아닙니까 인간들은 알고 보면 누구나가 다 부끄러운 것입니다. 발가벗고 떳떳하게 거리에 다니는 사람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벗겨 놓으면 부끄러워서 못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런답니다. 자기의 천황을 신처럼 모시는데 자기들도 이런 고백을 한답니다. “일본 천황이 참신이 못되는 이유가 단 한가지 있다. 그도 화장실을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황이라고 하더라도 벗겨 놓으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안 이상 부끄러운 것을 알게 된 이상 절대로 하나님처럼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도 오히려 숨어 버립니다. 동물들은 옷을 입지 않아도 부끄러운 것을 모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부끄러운 것을 알고 오늘까지도 모든 인간들은 옷을 입고 다니지 않습니까 가식의 옷을 입습니다. 부지런히 옷을 해 입습니다. 아담도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어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러나 둘이서 치마를 분명히 해 입은 후에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치마를 입고서도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어 버렸습니다. 자기 손으로 지은 치마를 입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 치마가 어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겠습니까 미흡합니다.
히브리서 4장 13절에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는 그 미흡한 나뭇잎 치마로 안됩니다. 드러나 버리고 맙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벗은 몸, 죄악된 부끄러운 것을 보게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 하신 분이시므로 미래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필경 따먹을 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일부러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놓으셨습니까 이것은 아담에게 한 번 따먹어 보고 너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가릴 수 있는가 해 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실 선악과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율법은 바로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나의 죄를 가려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교육을 하며 선과 악을 가르칩니다. 언론에서도 또한 다른 종교에서도 선과 악을 가르칩니다. 그 가르치는 선과 악은 사실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악의 가르침으로 해서 내 자신의 부끄러운 죄된 악한 모습이 발견되었을 때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틀립니다. 기독교와 세상 다른 사회와 종교가 여기에서 다릅니다. 선악은 다 똑같습니다. 율법 없는 사람은 양심으로도 비춰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죄가 드러나면 공양미 삼백석을 드리거나 천번 절을 하거나 한달 간 좌선을 하고 물고기를 방생하며 선행과 고행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손으로, 내 자신의 손으로 나뭇잎 치마를 해서 입으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인류의 시조 아담도 자기 손으로 나뭇잎 치마를 해 입었으나 그것 가지고 어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나설 수 있었습니까 치마를 해 입고서도 두려워서 숨어 버리지 않습니까 나뭇잎 치마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벌거벗은 것을 본 이상 내 손으로 나뭇잎 치마를 해서 가리워도 온전한 가리움이 하나님 앞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후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담의 나뭇잎 치마를 벗기셨습니다. 그리고는 동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아마 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불쌍한 어린양이었을 것입니다. 이 양은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갔습니다. 아담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기 위해서 희생된 것입니다. 반드시 죄를 씻으려면 누군가가 피를 흘려야 하기 때문에 동물을 희생시키고 피 묻은 가죽을 손수 벗기셔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십니다. 나뭇잎 치마로 안되기 때문에 피흘린 가죽옷을 입히시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부끄러운 선악의 문제는 오직 예수의 피로만이 가려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가죽옷은 예수의 피흘림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러면서 고린도후서 5장 13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죽옷을 내가 입어야 하나님 앞에서 죄 많은 벗은 자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 잔치에서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났습니다. 나뭇잎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예복, 예수를 믿는 피흘림의 이 가죽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제 죄지은 모든 인생은 피흘린 예수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나뭇잎 옷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에도 항상 이러한 성구를 읽지 않습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장 19절 말씀입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서 감히 성소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 하와에게 은혜로 주신 가죽옷은 바로 예수의 피였습니다. 아담과 같은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가인의 경우를 한 번 살펴봅시다.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미워했습니다.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그리고도 “내가 아우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허물었다면 가인은 수평적 관계, 형제지간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멀어진 아담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라고 찾으셨습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수평적 관계, 다시 말하면 인간과 인간끼리의 수평적 관계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죄는 이 두 가지로 전부 요약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죄, 아담의 죄이고둘째는 인간에 대한 죄, 가인의 죄입니다. 십계명도 이 두 가지 아닙니까 제 1계명부터 제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서 말씀을 하셨고, 제 5계명부터 제 10계명까지는 인간끼리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계명을 요약해서 “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둘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두번째 가인의 죄에 있어서 가인은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안색이 변한 것은 마음속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가인의 마음속에는 형제에 대한 시기, 질투, 미움이 가득한 죄의 소원이 있었고 하나님은 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움을 자기가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해결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가인도 아담이 자기 나뭇잎 치마로 해결하지 못한 것처럼 자기 힘으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자기 힘으로도 자기 마음을 어떻게 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힘으로 안된 아담에게도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주셨는데 이번에는 가인에게 나중에 하나님께서 표를 주십니다. 그것은 살인자의 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함을 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는 기가 막힌 표를 은혜로 주십니다. 참 이상합니다. 가인은 죽이지 않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표를 주셨을까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 오늘은 이 가인에게 주신 표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연구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주신 가죽옷이 예수님의 피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면 이 가인에게 주신 표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사람에게 주셔서 죽임을 당하지 않는 표가 구약 성경 에스겔서에 나오고 또 요한계시록에도 나옵니다. 에스겔서 9장 4절입니다.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하나님이 어떤 불쌍한 사람들,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이마에 표를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다른 거민들을 다 심판하는데 특별히 이마에 표있는 자들은 죽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가 막힌 표입니다 가인의 표와 똑같습니다. 또한 요한 계시록에도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계시록 7장 3절 “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여기서는 이마의 인이라고 했는데 인은 도장을 말합니다. 찍어 주는 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마에 인친다는 것과 에스겔서에 이마에 표를 찍는다는 말은 똑같은 말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이마에 인을 쳐서 그들은 절대로 환난의 이 세상에서 죽임 당하지 않고 십사만사천이 인을 맞아 해함을 당하지 않습니다. 기가 막힌 인이요, 기가 막힌 표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9장 4절입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 맞으면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인에게 주신 표와 똑같은 효능이 있는 놀라운 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인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참 해석을 한 번 보십시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바울이 말합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인친다는 것은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는 죽임을 당하지 않고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해석입니다. 이 가인에게 주신 표는 한 번 인침받으면 해를 당하지 않는 표인데 그러면 그것이 과연 성령님의 표를 의미하는지 한 번 대입을 해 보겠습니다. 성령님으로 인침받은 사람은 가인과 같은 경우라도 회복이 되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가인은 마음속에 죄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안색까지 변하게 하는 심한 죄의 소원이 가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인을 가만히 놔두면 또 죄의 소원이 마음에 있으므로 나가서 사람과 싸울 것 아닙니까 탐욕의 생각,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어디가서 싸우고 그러다가 자기도 오래 살지 못하고 사람과 싸우다가 사람에게 맞아서 죽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조선 일보를 보니까 삼풍 사고 1주년을 맞이해서 머릿기사로 크게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탐욕에 앗긴 넋이여, 용서하소서.” 인간의 탐욕이 사람을 죽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미워함과 시기함이 결국 사람을 죽입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하는데 가인은 자기 힘으로 자기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죄의 소원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가인의 마음에 인쳐서 보증으로 성령님이 감동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탐욕의 마음이 없어지고, 마음속에 죄의 소원이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기쁨이 충만합니다. 남을 보면 다 사랑합니다. 얼굴의 안색이 웃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간의 관계성 속에서 성령님 충만 받아 남을 사랑하게 되고 탐욕이 없어지게 되는데 왜 서로 죽입니까 성령님 충만은 완악한 나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줍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오히려 남의 영혼을 사랑하여서 전도를 하게 됩니다. 내 마음에 근심, 걱정, 시기, 질투를 사라지게 하고 나의 마음의 죄의 소원을 다스려 줍니다. 안색까지도 충만하게 변합니다. 성령님 충만한 스테반의 얼굴을 천사와 같이 빛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 충만 받지 못한 사람은 마음속에 늘 죄의 소원이 있고 부정적 생각과 항상 얼굴이 남을 미워하는 생각으로 찌그러져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소욕, 죄의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은 누가 죽든지 서로 죽습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이 충만하면 생명과 평안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육신의 생각을 영으로 이기라고 했습니다. 내 죄의 소원, 가인과 같은 마음을 성령님의 인침을 받아서 이기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반드시 살리니” 성령님은
그러므로 육신의 소욕, 죄의 소원이 있는 사람을 감화시켜서 변하게 하는 힘이요,
그러므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아담도 자기 힘인 나뭇잎 치마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주신 것입니다. 가인도 자기 힘으로는 죄의 소원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표를 주셔서 그의 심령을 변화시켜 탐욕이 없어져서 죽임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가죽옷은 예수의 피요, 가인에게 주신 표는 예수의 영,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부끄럽게 있는 자들, 가인과 같이 옆사람을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며 살인하고 시기하는 자들에게 “물과 성령님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은 죄를 씻어 주는 예수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가인과 같이 두 가지의 죄를 범하는 인간들에게 물과 성령님으로 날마다 거듭나라고 하십니다. 찬송가 204장에서 우리는 뭐라고 부릅니까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님과 피로써 거듭나니…” 나뭇잎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 바다를 통과하였는데 바울은 그것을 물세례, 죄 용서함의 표며, 그 다음 광야에서 구름 기둥 불기둥은 성령님 세례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가 아담과 가인의 죄, 가죽옷과 가인의 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경은 되는대로 쓴 것이 아닙니다. 성도님 여러분 아담과 가인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나 자신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많이 합니까 또 내 형제를 얼마나 미워하고 싫어하고 탐욕의 마음, 살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죄짓는 나 자신은
그러므로 늘 예수의 피를 힘입어야 합니다. 늘 사람들을 미워하고 육신의 소원이 가득한 가인과 같은 나 자신은 이 죄의 소원이 뒤집어지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충만, 인침을 받아야 합니다. 아담이 가죽옷 입고 가인이 표를 받은 것처럼 날마다 예수로 옷입고 날마다 성령님 충만으로 마음에 인침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는 참 거듭난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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