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씨 (창4:1-26)
본문
창세기 4장의 주요 내용은 생명의 씨가 출생하리라는 약속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여기의 내용을 경건한 아벨의 삶과 죽음 혹은 불경건한 가인의 삶과 생활에 대한 설명이라고만 생각하면 성경을 어떤 인간의 역사책 정도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들 보다는 여기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을 하고 계시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부름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내시면서 생명의 후손에 대한 언약을 아담에게 해 주셨습니다. 아담은 이 약속을 믿는 표로써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약속은 하와가 아들을 낳음으로써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바로 아담과 하와의 믿음은 시험을 받게 됩니다. 즉 가인은 참되고 거룩한 생명의 씨가 되지 못하고 아벨은 살해된 것입니다. 그러나 셋을 낳음으로 희망은 다시 살아 났습니다. 셋으로 부터 그리스도 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보여진 것입니다. 즉 셋의 후손으로 그리스도가 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벨의 죽음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벨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길을 가게 될 것인지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벨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와도 다르기 때문에 죄를 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는 단지 공의와 복수를 요구하며 부르짖는 피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벨의 피는 율법의 역활과 그 뜻이 같습니다. 즉, 율법은 죄에 대해서 고발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하게 아벨의 피도 가인의 죄에 대하여 고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아벨의 피 이상의 어떤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화목시키는 소망을 주는 피 입니다(참조 히 12:24). 그리고 셋의 출생은 새생명을 뜻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승리의 부활을 나타내 보여 줍니다. 분명히 아담과 하와는 자녀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희생제물이 자기의 믿음을 나타내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써 희생제물을 드림으로 헌신하였고 하나님과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에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타락성을 보게 됩니다. 아담의 범죄가 어떻게 가인에게 열매 맺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죄는 죄를 낳는 악순환이 범죄한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가인도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는 모든 예배와 같이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한 뇌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1.두 종류의 씨 낙원에서 쫓겨난 후 아담과 하와는 처음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어린 자녀들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자녀의 출생을 통하여 부모들의 삶은 복을 받으며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총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아들은 특별한 복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출생은 죄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시작된 새로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이 새생명의 탄생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낙원에서 추방 당할 때 하나님으로 부터 받았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아담과 하와는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하와는 그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은 ‘얻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의 출생은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약속을 이루셨다는 표시였습니다. 얼마 후 두번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하와는 좀 색다른 기분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첫번째 아이보다 건강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환경에 대한 하와의 느낌은 변하였습니다. 하와가 그 아이에게 지어준 이름은 하와 자신의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믿는 자로서 끝까지 감당해야만 하는 인생의 고난과 노력에 대한 더욱 깊은 깨달음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습니다.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인생의 짐이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에 하와는
둘째 아이의 이름을 아벨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은 ‘하찮음’, ‘무의미’, ‘한숨’이란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녀들에게 자기들이 낙원에서 하나님께 범한 첫번째 죄에 대하여 말해 주었습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밝힌다는 것은 쓴약을 먹는 것처럼 괴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와 앞으로 올 완전한 구원에 대해서도 말해 주고난 뒤에 자녀들의 반응을 기다렸습니다. 자녀들의 마음이 열려졌는지, 그리고 그들도 부모처럼 구원의 약속에 동참할 것인지,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인지. 이러한 생각으로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대하여 좋은 생각으로 받아 들이기를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믿는 부모들의 주된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벨이 단순한 마음으로 약속을 믿고 그의 모든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가인은 자신의 힘으로 살기 원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가인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였고 구원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 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과 자기를 벌하실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삶은 성경에 나타난 대로 두려움으로 가득찬 인생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녀들에게 번제와 땀흘려 얻은 것으로 희생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희생제사는 순전히 믿음으로 바쳐져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희생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베푸셨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몸과 마음을 함께 드렸습니다. 그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제사를 통하여 그들의 모든 마음을 바치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제사를 드렸을 때 아벨도 함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닝능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고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인 역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이 드린 제사는 마치 자기가 가진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는 제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가인과 아벨 둘 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농업을 하였기 때문에 땅의 소산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목축업을 하였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 중의 한 마리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사는 열납하여 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각자에게 직접 응답하셨을 것입니다. 아마 직접 말씀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벨은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 자기의 제사가 거짓된 제사였다고 고백해야 했을텐데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아벨에 대한 미운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여겼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장남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돌이킬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만일 가인이 그릇된 자기의 길을 돌이키기만 한다면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기 죄를 버리지 않을 경우에는 완전히 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지 모릅니다.
2.최초의 살인 죄의 영향력은 약해지기는 커녕 가인의 생활 속에서 더욱 강해졌습니다. 가인은 그의 아우를 미워하였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살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에 대해서도 더욱 적개심을 품었습니다. 가인은 스스로 은혜를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열납되는 제사를 드린 아우에 대해서 질투 하였습니다.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생기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함께 들에 있을 때, 가인은 자기의 모든 분노와 미움을 나타냈습니다. 아벨은 놀라움과 슬픔을 나타내며 가인에게 자기가 믿음으로 얻은 은혜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말은 오히려 가인의 화를 자극하였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최초로 인간이 흘린 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벨은 최초로 인간의 손에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자기 형제를 살인 했습니다. 이 살인이 가장 유감스로운 일은 아닙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사실은 가인이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싫어했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아벨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아벨은 신앙 때문에 억압받고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고 고통 당한 모든 신자들을 대표합니다. 또한 아벨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하여 대신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두 죽음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아벨의 피는 가인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성질은 못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핏소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향해서 흘린 피 값을 갚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믿는 자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대속물이 되었습니다(히12:24).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더 타락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우 아벨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가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보다 적대시하는 태도로 변하였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아담은 자기의 범죄에 대하여 핑게하는 정도였지만 가인은 핑게조차 하지 않는 죄의 과격한 발전 양상을 보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일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가인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땅이 더이상 가인에게 열매를 주지 않으며 가인이 어디로 가든지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에 대해서 가인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삶에 대한 욕구를 위하여 구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가인에게 있어서 은혜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나이다.” 가인의 유일한 간구는 잠시 만이라도 자기의 목숨을 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느껴왔던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 가인은 “나는 저주아래 있구나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구나 누구든지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일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가인을 불쌍히 여기고 심판을 보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인 자는 칠 배의 벌을 당할 것이라고 선언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표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을 만나는 모든 자가 혐오감을 느끼고 도망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과 가인 사이의 대화는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로 부터 완전히 단절 되었습니다. 가인은 언약의 테두리 즉,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는 백성으로 부터 벗어나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정착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신앙은 가혹할 정도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아벨은 죽었고 가인은 그들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처음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고 즐거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는 이전과 다름 없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모든 환경이 절망적으로 보일 대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믿은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능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승리하신 역사와 같은 것입니다. 이 믿음은 가장 어두웠던 고난의 밤에도 쇠하지 않은 믿음인 것입니다.
3.죄로 오염된 생활 왜 하나님께서 가인을 돌보시고 보호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하나님 편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그들의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적을 위해 그들을 선택하여 사용하시려 한다고 해도 그 목적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가인 역시 다른 불신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인은 결혼 하였습니다. 가인의 아내는 놋 땅에서 에녹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또 가인은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벽으로 둘러 쌓인 성을 건축 하였습니다. 가인의 전 생애는 두려움에 쫓기는 삶이었습니다. 가인의 생애는 인간이 자기 주장을 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하려는 죄된 본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라멕을 포함하여 많은 후손을 낳았는데 이 라멕은 가인의 후손 중에서 아주 두드러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함으로 가증한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행하였습니다. 라멕은 많은 가족과 후손을 가지기를 원하였습니다. 주를 위해 낳은 자녀들은 부모에게도 복이 되지만, 라멕은 하나님 없이 강해지기 위해 많은 가족을 원한 것입니다. 라멕의 후손들은 매우 발전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야발은 장막에서 살며 자기 마음대로 양을 몰고 다니는 목자들의 조상이 되었으며, 유발은 여러가지 악기를 만들어 내고 연주하는 악사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를 다루는 최초의 대장장이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매우 번성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들이 땅을 정복하고 그 속의 보화들을 사용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한 일도 바로 그러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들이 한 일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일반은총 가운데서 사람들은 독특한 문화를 창출해 내며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후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문화적 발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불신자들이 더 많이 이루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하여 자기 주장을 하려는 불신자들의 죄악된 심성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신자들의 노력보다 앞선다는 사실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이 이룩해 놓은 발전 뒤에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발견과 발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 역시 그러한 발명을 합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보화들이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을 살려 주시고 그를 보호한 섭리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기적이고 교만하여 복수를 좋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즐거움은 그들의 소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특별히 라멕의 노래에서 잘 나타납니다. 여기서 라멕은 자기가 복수를 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에 나타난 정신은 오늘날도 타락한 불신 세계의 근본 사상의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4.셋의 탄생으로 인한 새 희망 아벨의 죽음과 가인의 영적 타락으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는 혹독한 시련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와는 다시 하나님의 언약의 씨인 “여인의 후손”을 보기를 소망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소망대로 새 아들을 허락하심으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와는 그 아들이 아벨을 대신한 아들인 것을 깨닫고 새로운 아들이 아벨 처럼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기를 소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의 소망은 다시 살아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후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여야만 참 생명을 얻게 되는 때문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셋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 때로 부터 사람들은 함께 모여 살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계속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예배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예배는 오늘날의 예배와 같은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이 예배 의식을 통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셋의 집안에 계속해서 전해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이 셋의 집안에서 약속된 여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약속을 열심으로 이루시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잃음으로 아담과 하와의 신앙이 혹독하게 시련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셋으로 인해 그들은 새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 생명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듯이 보였지만 셋 안에서 다시 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에도 참 생명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승리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에서 볼 때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사는 삶은 언제나 승리하는 삶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보이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오늘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을 보이시고 그 구원이 확실하게 이루어지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비록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심으로 참 구원의 길을 이루어 내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참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큰 구원에 부름 받은 성도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는 단지 공의와 복수를 요구하며 부르짖는 피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벨의 피는 율법의 역활과 그 뜻이 같습니다. 즉, 율법은 죄에 대해서 고발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하게 아벨의 피도 가인의 죄에 대하여 고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아벨의 피 이상의 어떤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화목시키는 소망을 주는 피 입니다(참조 히 12:24). 그리고 셋의 출생은 새생명을 뜻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승리의 부활을 나타내 보여 줍니다. 분명히 아담과 하와는 자녀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희생제물이 자기의 믿음을 나타내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써 희생제물을 드림으로 헌신하였고 하나님과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에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타락성을 보게 됩니다. 아담의 범죄가 어떻게 가인에게 열매 맺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죄는 죄를 낳는 악순환이 범죄한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가인도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는 모든 예배와 같이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한 뇌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1.두 종류의 씨 낙원에서 쫓겨난 후 아담과 하와는 처음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어린 자녀들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자녀의 출생을 통하여 부모들의 삶은 복을 받으며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총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아들은 특별한 복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출생은 죄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시작된 새로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이 새생명의 탄생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낙원에서 추방 당할 때 하나님으로 부터 받았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아담과 하와는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하와는 그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은 ‘얻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의 출생은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약속을 이루셨다는 표시였습니다. 얼마 후 두번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하와는 좀 색다른 기분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첫번째 아이보다 건강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환경에 대한 하와의 느낌은 변하였습니다. 하와가 그 아이에게 지어준 이름은 하와 자신의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믿는 자로서 끝까지 감당해야만 하는 인생의 고난과 노력에 대한 더욱 깊은 깨달음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습니다.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인생의 짐이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에 하와는
둘째 아이의 이름을 아벨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은 ‘하찮음’, ‘무의미’, ‘한숨’이란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녀들에게 자기들이 낙원에서 하나님께 범한 첫번째 죄에 대하여 말해 주었습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밝힌다는 것은 쓴약을 먹는 것처럼 괴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은혜와 앞으로 올 완전한 구원에 대해서도 말해 주고난 뒤에 자녀들의 반응을 기다렸습니다. 자녀들의 마음이 열려졌는지, 그리고 그들도 부모처럼 구원의 약속에 동참할 것인지,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인지. 이러한 생각으로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대하여 좋은 생각으로 받아 들이기를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믿는 부모들의 주된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벨이 단순한 마음으로 약속을 믿고 그의 모든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가인은 자신의 힘으로 살기 원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가인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였고 구원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 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과 자기를 벌하실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삶은 성경에 나타난 대로 두려움으로 가득찬 인생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녀들에게 번제와 땀흘려 얻은 것으로 희생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희생제사는 순전히 믿음으로 바쳐져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희생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베푸셨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몸과 마음을 함께 드렸습니다. 그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제사를 통하여 그들의 모든 마음을 바치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제사를 드렸을 때 아벨도 함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닝능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고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인 역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이 드린 제사는 마치 자기가 가진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는 제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가인과 아벨 둘 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농업을 하였기 때문에 땅의 소산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목축업을 하였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 중의 한 마리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사는 열납하여 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각자에게 직접 응답하셨을 것입니다. 아마 직접 말씀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벨은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 자기의 제사가 거짓된 제사였다고 고백해야 했을텐데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아벨에 대한 미운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여겼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장남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돌이킬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만일 가인이 그릇된 자기의 길을 돌이키기만 한다면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기 죄를 버리지 않을 경우에는 완전히 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지 모릅니다.
2.최초의 살인 죄의 영향력은 약해지기는 커녕 가인의 생활 속에서 더욱 강해졌습니다. 가인은 그의 아우를 미워하였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살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에 대해서도 더욱 적개심을 품었습니다. 가인은 스스로 은혜를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열납되는 제사를 드린 아우에 대해서 질투 하였습니다. 이것이 죄로 말미암아 생기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함께 들에 있을 때, 가인은 자기의 모든 분노와 미움을 나타냈습니다. 아벨은 놀라움과 슬픔을 나타내며 가인에게 자기가 믿음으로 얻은 은혜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말은 오히려 가인의 화를 자극하였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최초로 인간이 흘린 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벨은 최초로 인간의 손에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자기 형제를 살인 했습니다. 이 살인이 가장 유감스로운 일은 아닙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사실은 가인이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싫어했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아벨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아벨은 신앙 때문에 억압받고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고 고통 당한 모든 신자들을 대표합니다. 또한 아벨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하여 대신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두 죽음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아벨의 피는 가인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성질은 못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핏소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향해서 흘린 피 값을 갚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믿는 자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대속물이 되었습니다(히12:24).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더 타락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우 아벨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가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보다 적대시하는 태도로 변하였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아담은 자기의 범죄에 대하여 핑게하는 정도였지만 가인은 핑게조차 하지 않는 죄의 과격한 발전 양상을 보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일에 대하여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가인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땅이 더이상 가인에게 열매를 주지 않으며 가인이 어디로 가든지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에 대해서 가인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삶에 대한 욕구를 위하여 구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가인에게 있어서 은혜의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나이다.” 가인의 유일한 간구는 잠시 만이라도 자기의 목숨을 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느껴왔던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 가인은 “나는 저주아래 있구나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구나 누구든지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일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가인을 불쌍히 여기고 심판을 보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인 자는 칠 배의 벌을 당할 것이라고 선언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표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을 만나는 모든 자가 혐오감을 느끼고 도망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과 가인 사이의 대화는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로 부터 완전히 단절 되었습니다. 가인은 언약의 테두리 즉,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는 백성으로 부터 벗어나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정착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신앙은 가혹할 정도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아벨은 죽었고 가인은 그들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처음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고 즐거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는 이전과 다름 없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모든 환경이 절망적으로 보일 대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믿은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능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승리하신 역사와 같은 것입니다. 이 믿음은 가장 어두웠던 고난의 밤에도 쇠하지 않은 믿음인 것입니다.
3.죄로 오염된 생활 왜 하나님께서 가인을 돌보시고 보호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하나님 편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그들의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적을 위해 그들을 선택하여 사용하시려 한다고 해도 그 목적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가인 역시 다른 불신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인은 결혼 하였습니다. 가인의 아내는 놋 땅에서 에녹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또 가인은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벽으로 둘러 쌓인 성을 건축 하였습니다. 가인의 전 생애는 두려움에 쫓기는 삶이었습니다. 가인의 생애는 인간이 자기 주장을 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하려는 죄된 본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라멕을 포함하여 많은 후손을 낳았는데 이 라멕은 가인의 후손 중에서 아주 두드러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함으로 가증한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행하였습니다. 라멕은 많은 가족과 후손을 가지기를 원하였습니다. 주를 위해 낳은 자녀들은 부모에게도 복이 되지만, 라멕은 하나님 없이 강해지기 위해 많은 가족을 원한 것입니다. 라멕의 후손들은 매우 발전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야발은 장막에서 살며 자기 마음대로 양을 몰고 다니는 목자들의 조상이 되었으며, 유발은 여러가지 악기를 만들어 내고 연주하는 악사의 조상이 되었으며,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를 다루는 최초의 대장장이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매우 번성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들이 땅을 정복하고 그 속의 보화들을 사용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한 일도 바로 그러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들이 한 일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일반은총 가운데서 사람들은 독특한 문화를 창출해 내며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후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문화적 발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불신자들이 더 많이 이루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하여 자기 주장을 하려는 불신자들의 죄악된 심성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신자들의 노력보다 앞선다는 사실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이 이룩해 놓은 발전 뒤에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발견과 발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 역시 그러한 발명을 합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보화들이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을 살려 주시고 그를 보호한 섭리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기적이고 교만하여 복수를 좋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즐거움은 그들의 소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특별히 라멕의 노래에서 잘 나타납니다. 여기서 라멕은 자기가 복수를 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에 나타난 정신은 오늘날도 타락한 불신 세계의 근본 사상의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4.셋의 탄생으로 인한 새 희망 아벨의 죽음과 가인의 영적 타락으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는 혹독한 시련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와는 다시 하나님의 언약의 씨인 “여인의 후손”을 보기를 소망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소망대로 새 아들을 허락하심으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와는 그 아들이 아벨을 대신한 아들인 것을 깨닫고 새로운 아들이 아벨 처럼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기를 소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의 소망은 다시 살아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후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여야만 참 생명을 얻게 되는 때문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셋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 때로 부터 사람들은 함께 모여 살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계속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예배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예배는 오늘날의 예배와 같은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이 예배 의식을 통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셋의 집안에 계속해서 전해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이 셋의 집안에서 약속된 여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약속을 열심으로 이루시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잃음으로 아담과 하와의 신앙이 혹독하게 시련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셋으로 인해 그들은 새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 생명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듯이 보였지만 셋 안에서 다시 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에도 참 생명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승리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에서 볼 때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사는 삶은 언제나 승리하는 삶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보이신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오늘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을 보이시고 그 구원이 확실하게 이루어지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비록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심으로 참 구원의 길을 이루어 내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참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큰 구원에 부름 받은 성도들은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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