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있느냐? (창4:1-15)
본문
오늘 본문은 성서에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형제이야기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스스로 질문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보다 더 좋은 모습의 자신을 그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어디에 지금 서있는가 다른 말로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위치확인을 하면서 살고 있다. 오늘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앞에서 지금 어디에 서있나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어디 있느냐”는 물음이 오늘 창세기 4장이전에 3장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창세기 3장의 “어디있느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신 것이다. 이때의 상황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있을때 부르시면서 찾는 상황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창3:9)” 이는 창조자인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아담과의 관계성안에서의 위치를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앞에 어디에 서있습니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수직적위치라 명한다면 오늘 본문중에 9절에 하나님께서 물으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가인에게 묻는 것은 수평적 위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아우 아벨” 가인과 아벨의 형제관계에서의 위치를 물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합니다. 본문강해 1-2절입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인류 최초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말씀이다. 아담 부부는 첫 아들 가인을 낳고 신앙을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이는 범죄후 에덴에서 추방되어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였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웨슬리는 이를 선행은총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총이다.
첫째 아들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고,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다. 특이한 것은 가인이 장자임에도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라고 기록된 것이다. 동생이 먼저 나오고 형이 나오고 있다. 이는 아마도 후대에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아벨에 대한 선이해를 가지고 서술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5절이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세월이 지나서 형제는 제물을 가지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왠 일인지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고,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다. 왜 일까 우리는 또한 여기서 열납의 대상이 제물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은 “가인과 그 제물” “아벨과 그 제물”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왜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고,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신 것일까 성경에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이래서 나 여호와는 아벨과 그 제물은 받았다. 또 이러해서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 3-5절에서 또 다른 이후의 본문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먼저 왜 가인의 제물은 안 받으셨는가 하나님은 농산물을 제물로 받기를 싫어 하시는 것은 분명아닐 텐데 말이다. 우리는 본문중에서 아벨의 드린 제물이 어떤 제물이었는가를 유의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4절에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화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아벨은 첫 새끼를 드렸다. 첫번째것을 드렸음은 모든 소산물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입니다라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다. 가장 귀한 것이다. 그것을 드린 것이다. 이런 태도는 신앙에서 비롯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의 제물이었다. 물론 가인도 믿음의 제물이다. 그러나 아벨과는 비교도 안되는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3절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가인은 소출하기 전부터 미리 준비하여 ‘땅의 첫 소산은 제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지’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니 했다하더라도 그렇게 까지 하나님을 경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살다가 창고에 쌓아놓은 일부를 가져와서 제사는 드려야 하니까 드린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을 추측해 볼 수있다. 아벨의 제사와 얼마나 비교가 되는가
그런데도 가인은 자신과 자신이 드린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것으로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다. 참으로 꼴물견을 우리는 볼 수있다. 이후의 그의 태도에서 이를 잘 입증해 준다고 하겠다.
다음은 6-8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하나님께서 분하여 하는 가인에게 물으신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된 거냐” 이어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 우리는 이 두가지 하나님의 질문에서 가인의 제물뿐만 아니라 가인을 열납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가인이 분하여 함이 가당치 않다는 것을 질문의 말씀으로 하시고는 가인이 평소에 선을 행하지 못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서만 이리저리 살아갔음을 가인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것을 역시 물음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코 제물뿐만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린 사람도 열납하시기를 바라고 계신다. 우리들 또한 산제물이다. 아벨은 진정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적어도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주의자는 아니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벨은 자신의 잘못을 생각지 않고 아벨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들로 그를 불러서 자신의 죄를 제어하지 못하고 돌로 쳐서 죽임으로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가인은 참으로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있다.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은 가인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신다.
9-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내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은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날 뛰었던 가인에게 위치 확인을 시켜 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언뜻 보아서는 아벨의 위치를 묻는 질문같으나 이는 아벨과의 형제관계속에 있는 가인임을 알려 주심으로 가인의 위치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있을 것이다. 자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가인은 아무 잘못을 하지 않은 양 말하였다.“전 모릅니다. 제가 제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어리석게 하나님앞에서 시치미 떼고 있는 가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은 가인에게 호통을 침으로써 가인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신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0-12절).” 가인은 아벨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무책임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임에도 “제가 제 아우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말을 할 정도로 자기만을 아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있다. 그에게 하나님의 형벌이 내려졌다. 유리방황하는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치를 우리가 어디있는가의 위치를 우리의 이웃과의 관련속에서 찾으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수평적인 관계 또한 하나님께서 유심히 보고 계신 것임을 우리는 알 수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네 형제 아무개는 어디 있느냐” “네 이웃 아무개는 어디 있느냐” “네 교우 아무개는 어디 있느냐” “네 조국 대한민국은 어디 있느냐” “네 교회 교회는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시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가인처럼 “제가 이웃을 지키는 자입니까” “제가 뭐 교우 아무개를 지키는 자입니까” “제가 뭐 제 나라 대한민국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대답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가인의 후예’는 아닌가 생각해 보자. 다음은 13-15절이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이제야 가인이 자신의 위치를 알았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하나님은 은총의 표를 주신다. 하나님의 넓고 크신 은총을 다시한번 우리는 알 수있게 된다. 결론. 우리는 “어디 있는가” 그 위치는 하나님 안에서 단독자의 자리에서 발견되고 또 이웃과의 관계속에서의 자리에서 발견된다. 수직적 위치와 수평적 위치. 이 모두를 하나님은 보신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첫째 아들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고,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다. 특이한 것은 가인이 장자임에도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라고 기록된 것이다. 동생이 먼저 나오고 형이 나오고 있다. 이는 아마도 후대에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아벨에 대한 선이해를 가지고 서술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5절이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세월이 지나서 형제는 제물을 가지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왠 일인지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고,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다. 왜 일까 우리는 또한 여기서 열납의 대상이 제물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은 “가인과 그 제물” “아벨과 그 제물”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왜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고,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신 것일까 성경에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이래서 나 여호와는 아벨과 그 제물은 받았다. 또 이러해서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 3-5절에서 또 다른 이후의 본문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먼저 왜 가인의 제물은 안 받으셨는가 하나님은 농산물을 제물로 받기를 싫어 하시는 것은 분명아닐 텐데 말이다. 우리는 본문중에서 아벨의 드린 제물이 어떤 제물이었는가를 유의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4절에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화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아벨은 첫 새끼를 드렸다. 첫번째것을 드렸음은 모든 소산물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입니다라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다. 가장 귀한 것이다. 그것을 드린 것이다. 이런 태도는 신앙에서 비롯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의 제물이었다. 물론 가인도 믿음의 제물이다. 그러나 아벨과는 비교도 안되는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3절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가인은 소출하기 전부터 미리 준비하여 ‘땅의 첫 소산은 제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지’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니 했다하더라도 그렇게 까지 하나님을 경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살다가 창고에 쌓아놓은 일부를 가져와서 제사는 드려야 하니까 드린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을 추측해 볼 수있다. 아벨의 제사와 얼마나 비교가 되는가
그런데도 가인은 자신과 자신이 드린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것으로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다. 참으로 꼴물견을 우리는 볼 수있다. 이후의 그의 태도에서 이를 잘 입증해 준다고 하겠다.
다음은 6-8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하나님께서 분하여 하는 가인에게 물으신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된 거냐” 이어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 우리는 이 두가지 하나님의 질문에서 가인의 제물뿐만 아니라 가인을 열납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가인이 분하여 함이 가당치 않다는 것을 질문의 말씀으로 하시고는 가인이 평소에 선을 행하지 못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서만 이리저리 살아갔음을 가인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것을 역시 물음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코 제물뿐만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린 사람도 열납하시기를 바라고 계신다. 우리들 또한 산제물이다. 아벨은 진정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았음을 알 수가 있다. 적어도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주의자는 아니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벨은 자신의 잘못을 생각지 않고 아벨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들로 그를 불러서 자신의 죄를 제어하지 못하고 돌로 쳐서 죽임으로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가인은 참으로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있다.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은 가인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신다.
9-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내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은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날 뛰었던 가인에게 위치 확인을 시켜 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언뜻 보아서는 아벨의 위치를 묻는 질문같으나 이는 아벨과의 형제관계속에 있는 가인임을 알려 주심으로 가인의 위치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있을 것이다. 자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가인은 아무 잘못을 하지 않은 양 말하였다.“전 모릅니다. 제가 제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어리석게 하나님앞에서 시치미 떼고 있는 가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은 가인에게 호통을 침으로써 가인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신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0-12절).” 가인은 아벨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무책임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임에도 “제가 제 아우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말을 할 정도로 자기만을 아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있다. 그에게 하나님의 형벌이 내려졌다. 유리방황하는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치를 우리가 어디있는가의 위치를 우리의 이웃과의 관련속에서 찾으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수평적인 관계 또한 하나님께서 유심히 보고 계신 것임을 우리는 알 수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네 형제 아무개는 어디 있느냐” “네 이웃 아무개는 어디 있느냐” “네 교우 아무개는 어디 있느냐” “네 조국 대한민국은 어디 있느냐” “네 교회 교회는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시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가인처럼 “제가 이웃을 지키는 자입니까” “제가 뭐 교우 아무개를 지키는 자입니까” “제가 뭐 제 나라 대한민국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대답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가인의 후예’는 아닌가 생각해 보자. 다음은 13-15절이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이제야 가인이 자신의 위치를 알았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하나님은 은총의 표를 주신다. 하나님의 넓고 크신 은총을 다시한번 우리는 알 수있게 된다. 결론. 우리는 “어디 있는가” 그 위치는 하나님 안에서 단독자의 자리에서 발견되고 또 이웃과의 관계속에서의 자리에서 발견된다. 수직적 위치와 수평적 위치. 이 모두를 하나님은 보신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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