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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를 축복으로 바꿔놓은 여인 (창38:26-30)

본문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창세기 38장을 연구하면서 성경의 원저자가 되시는 성령님께서 어찌하여 이런 수치스러운 기사를 성경에 기록되도록 하셨을까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기사는 싸구려 포르노 영화나 어떤 음란물에 기록이나 될 이야기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에 어떻게 이러한 이야기가 수록이 될 수 있는가 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죄를 감추거나 미화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실대로 말하며,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들을 통해서 오늘도 그의 구원의 역사를 펼쳐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다는 아버지 야곱과 자기 11형제들을 떠나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홀로가, 그곳에서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여 살게됩니다. 유다는 이방인 아내를 통하여 세 아들을 가지게 되는데,첫째 아들의 이름을 엘,둘째 아들의 이름은 오난,셋째 아들의 이름은 세라 라고 지었습니다. 유다는 장남 엘을 다말이란 여자와 결혼시켰습니다. 유다의 맏며느리 다말의 이름은 '종려나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종려나무가 상기시키듯 다말은 키가 크고 늘씬하며 몹시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이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장남 엘의 삶이 하나님보기시게 악하였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거두어가셨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무슨 악한 행동을 했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게되었습니다.
신명기 25장 5-10절에 보면 유대인들 형제가 같이 살다가, 형이 아들이 없이 일찍 죽게되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주고, 낳은 아들은 죽은 형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만일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주기를 거부하면, 과부된 형수는 장로들에게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시동생을 불러 권면하게 됩니다. 시동생이 장로들의 권면도 듣지 않으면, 과부된 형수는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시동생에게 나아가,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뱃으면서 말하기를 "제 형제의 가문 세우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 다음부터 시동생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로부터 수치스러운 낙인이 찍힌 자, "신발 벗긴 자의 집안"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형이 자식이 없이 죽게되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하셨고,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하늘을 쳐다보고 별을 세어 보아라. 네 후손도 저 별처럼 많은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세우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이스라엘백성들 가운데 형이 자식이 없이 죽을 경우,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말씀을 주신것입니다. 또한 고대 이스라엘에서 남편이 죽으면 모든 재산은 자식들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러하기에 자식이 없이 홀로된 여자는 남편의 유산을 한푼도 받지못하고, 설자리가 없게됩니다. 자식이 없는 과부는 non-person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자식없이 홀로된 여자들에게 설자리를 주시기 위해 동생이 홀로된 형수와 결혼하도록 제도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유다는 말씀에 순종하여 맏아들 엘이 죽게되자
둘째 아들 오난으로 하여금 그의 형수와 결혼하여 형을 위하여 자식을 낳아주는 시동생의 의무를 다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형수를 통하여 아들을 낳더라도, 그 아들은 내 아들이 되지 않고 형의 아들이 될 것이며, 형의 유산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하나도 없고, 다 그 아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형수에게 아들을 낳게 해줄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오난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을 한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난은 형수와 관계를 가질 때 마다 정액을 잠자리에 쏟았버렸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보시기에 악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난의 생명도 거두어가셨습니다. 두 아들이 죽게되자, 유다는 며느리되는 다말이 자기집안에 재앙을 가져온 것으로 생각을 했을것입니다. 두 아들이 하나님앞에 악한 행동을 하여 징계받아 죽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집안에 며느리가 잘못 들어왔기에 우리집안에 재앙이 내린 것으로 유다는 생각을 하게된것입니다.
셋째아들 셀라를 신명기 말씀대로 그의 형수와 결혼을 시키면,
셋째 아들 셀라마저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다말에게, "나의 아들 셀라가 다 클 때까지, 너는 네 친정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과부로 살고 있거라." 고 말하며 다말을 친정집으로 보내었습니다. 그 당시에 여자가 결혼을 하면 시댁에 속한 사람이 되었으며, 더 이상 친정집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셀라의 나이가 어렸다면, 유다는 다말을 자기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셀라가 성장하면 셀라로 하여금 형수와 결혼케하면 되는 것인데, 유다는
셋째 아들을 다말에게 줄 마음이 없었기에, 그 당시 관습을 무시하고 다말을 친정집으로 보낸 것입니다. 유다는 두 아들이 하나님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죽게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아들들이 죽게된 책임을 다말에게 전가 시키고 있는것입니다. 그후 세월이 흘러 유다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유다는 아내를 위하여 상복을 입고 애도하는 기간을 가졌습니다. 봄이 되자 유다는 그의 며느리가 머물고 있는 친정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딤나'라는 마을로 친구 히라와 함께 양털을 깎기위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다말은 이소식을 간접적으로 듣게되었습니다. 유다는 막내아들 셀라가 장성하였지만 그를 다말에게 절대로 주지않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저 죽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막내아들을 주지않을 것이기에 자식을 가질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다말은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에 빠져있지만 않았습니다. 유다 집안에 시집온 그녀는 유다 집안의 아들을 가지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과부들이 입는 옷을 벗어버리고 창녀들이 입는 요염한 옷으로 갈아입고, 근동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우는 면사포를 쓰고 목자들이 양털을 깎는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옆에 앉아 유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가리운 다말이 길가에 요염한 자세로 앉아있을 때, 유다가 길을 가다가 그녀를 창녀로 생각을 하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하였습니다. "너와 쉬었다 가겠다.얼마나 주시겠습니까염소 새끼 한 마리를 보내 주겠다.좋습니다. 그 새끼 염소를 보낼 때까지 담보물을 잡히시겠습니까담보물로 무엇을 주면 되겠느냐가지고 계신 도장과 허리끈과 들고 있는 지팡이를 나에게 주십시오." 유다는 그 물건들을 담보물로 그녀에게 주고, 그녀와 잠자리에 들었으며, 다말은 유다를 통해서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다말은 곧 창녀들이 입는 옷을 벗어버리고, 과부들이 입는 옷을 입고 친정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유다는 친구 히라에게 염소새끼 한 마리를 주고, 그 여인에게서 담보물을 찾아오게 했으나, 다말이 거기 있을리 없었습니다. 히라는 그 곳 사람들에게 길가에 않아있던 창녀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으나, 거기에는 창녀라곤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로부터 창녀를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들은 유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질 테면 가지라지. 잘못하다가는 창피만 당하겠네. 어찌하였든지, 나는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보냈는데, 다만 자네가 그 여인들 찾지 못한 것뿐일쎄." 석달쯤 지나서 유다는 놀라운 소문을 들었습니다. 과부 며느리 다말이 창녀 노릇하여 임신하게 되었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분노하여 그녀를 친정집에서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명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간음한 자의 죄가 들어 났을때 통상적으로 돌로 쳐서 죽였는데 유다는 더 과격한 방법인 화형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행음을 한 처지에 유다는 다말을 화형에 처하도록 명하고 있는데, 다말을 죽임으로 막내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어야 하는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도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모든 과정에서 다말은 과묵하고, 침착하고 지혜로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형장에 끌려가면서 자기 시아버지에게 이런 전갈을 보냈습니다. "나는 이 물건 임자 때문에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도장과 이 허리끈과 이 지팡이가 누구의 것인지 한번 보십시오." 유다가 그 물건들을 못 알아볼 리 없었습니다. 그 물건들은 자기가 길에서 창녀에게 담보물로 주었던것임을 유다는 알았습니다. 26절에 보면,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창세기 38장에 실려있는 이야기입니다. 매우 불경건한 이야기처럼 우리귀에 들리는데,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겠습니다. 창세기 38장은 우리에게 몇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앞에 아무도 자기의 의를 자랑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못하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나의 선함이나, 나의 의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에베소2장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함이라(엡 2:8-9)."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될것입니다. 유다는 과부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그녀를 당장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말했지만, 실은 다말을 임신 시킨 것은 그녀를 창녀로 알고 관계를 가졌던 유다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죄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던 유다가 다말이 제시한 도장과, 허리띠, 그리고 지팡이를 바라보았던 때, 그는 막내아들 셀라를 다말과 결혼시키지 않은 자신의 죄를 알게된 것입니다. 유다는 자기의 죄를 알게되었을 때, "그녀가 나보다 옳다."고 말했습니다. 즉 다말이 나보다 더 의롭다고 말한것입니다. 다말이 창녀로 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와 성적인 관계를 가진 것은 물론 하나님앞에 죄짓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더 큰 죄는 유다의 죄였습니다. 스스로 설수 없는 연약한 과부가 된 며느리 다말에게 막내아들을 주어 아들을 낳게하여, 그녀로 하여금 사회적인 존경을 받으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수 있도록 해주지 못한 죄가 하나님앞에는 더 큰 죄였습니다. 다말은 유다에게 그가 담보로 주었던 도장과 허리띠, 그리고 지팡이를 보여줌으로, 유다로 하여금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듯,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대들보같은 내 죄는 바라보지 못하고, 티끌같은 다른 사람의 죄는 금방찾아 낼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보다는 내 마음속에 있는 위선, 거짓, 이기심, 탐심, 불신앙의 죄를 먼저 바라볼수 있어야하겠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어야겠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7절에서 "그것은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증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할아버지 이삭 그리고 아버지 야곱과 맺으신 언약에 관하여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땅의 먼지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는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세 아들중 두 아들이 죽고, 막내만 남았는데, 그를 며느리 다말과 결혼시켰다가는 그마저 죽으리라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막내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다말은 가나안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다말이 이방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을 수 없는 상황속에서도 소망중에 믿었기에 하나님은 그녀를 축복하셔서 그녀의 후손을 통하여 다윗의 아버지 이세가 나오게 되었고, 이세를 통하여 다윗왕이 나왔으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말의 가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 창세기 38장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불행한 삶의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주변환경에 전가시킵니다. 나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는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 결혼을 잘못했다. 친구를 잘못 만났다. 선진국에 태어나지 못했다.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어진 상황속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고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마다 다르게 은사와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어느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셨고,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아니면 한 달란트만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몇 달란트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받은 달란트와 은사를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며 사느냐입니다. 우리가 나에게는 왜 한 달란트밖에 주시지 않았는가 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나 보다 많은 은사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부러워하며 질투하며 산다면, 우리의 삶은 불행하고 비참하게 될것입니다. 비록 내가 한 달란트만을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한 달란트를 사용하며, 날마다 감사하며 살 때, 우리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될것입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던 작가 엘리 위젤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마지막날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게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왜 누구처럼 되지 못하였느냐 너는 왜 누구처럼 이러이러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느냐라고 묻지 아니하시고, 너는 왜 너처럼 되지 못하였느냐너는 왜 네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질문하실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가 되어야할것입니다. 다말은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저주받은 인생이었습니다. 두 번이나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 죽었고, 자식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불행과 재앙을 가져오는 여인으로 인정되어 기피인물이 되었습니다. 시아버지 유다도 막내 아들을 그녀와 결혼케하여 대를 잇게끔해야 하는데, 막내가 그녀와 결혼하면 그 마저 죽게 될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녀를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누구 한사람 그녀를 돕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녀는 자기의 삶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그녀가 창녀로 가장하여 시아버지와 성관계를 가진일은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말은 운명에 무릎꿇지 않고, 자기의 삶과 운명을 개척하여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일을 행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실패인생으로 생각합니다. 자포자기하며, 술이나 도박이나 다른 타락한 행동으로 소일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다말은 눈물로만 세월을 보내지 않았고, 자기의 불행한 운명을 탓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일어서서 자기의 삶을 용기를 가지고 개척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녀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불운한 시대를 살어가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를 원망한 할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못할 일이 없으리라는 믿음으로 미래를 개척하여 나이가시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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